릴로

# 완벽한 거짓의 시작

오후 3시 47분, 휴대폰이 울렸다.

"안녕, 지은아."

아버지였다. 목소리가 들뜬 음정이었다. 좋지 않은 신호다.

"네, 아버지."

"오늘 저녁 시간 있어? 얘기할 게 있어서."

나는 스케줄을 확인했다. 클라이언트 미팅이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목소리 톤은 무시할 수 없었다. 뭔가 중요한 일이 있다는 신호였다.

"저녁 8시 30분이면 괜찮습니다."

"고마워. 강남역 옆 라이라크에서 만날까?"

"알겠습니다."

저녁 8시 25분, 나는 라이라크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아버지는 5분 늦었다. 아버지는 항상 정확했는데. 늦는 자체가 이미 메시지였다.

"안녕, 지은아."

아버지는 내 맞은편에 앉으며 웃음을 지었다. 낯선 웃음이었다. 뭔가 결정한 웃음.

"안녕하세요, 아버지."

"너무 격식적하지 마. 우리 딸 아니야?"

"네."

나는 메뉴판을 펼쳤다. 감정적인 대화를 연장하지 않기 위한 전술이었다.

"지은아, 아버지가..."

아버지가 말을 시작했다.

"...재혼하기로 했어."

나의 손이 멈췄다. 메뉴판을 넘기는 중이었는데. 1초, 2초. 정보를 처리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군요."

내가 첫 번째로 꺼낸 말이었다. 축하합니다가 아니었다.

"상대방은 어떤 분입니까?"

아버지의 표정이 흔들렸다. 실망한 표정. 하지만 나는 그것을 무시했다.

"이름은 오은희. 나보다 8살 어려. 대기업 디자인 팀에서 일했었어."

"대기업이면 어느 회사입니까?"

"삼성."

나는 정보를 머릿속으로 정렬했다. 나이, 직업, 학력 추정. 상류사회에서의 평판. 아버지가 재혼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그것이 나에게 미칠 영향이었다.

"상류사회에서는 어떻게 평가합니까?"

"평가라고? 지은아,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아버지."

나는 아버지의 말을 끊었다. 조용하지만 단호한 톤으로.

"상류사회에서의 평판은 중요합니다. 특히 루미에르 그룹의 CEO인 제 입장에서는."

아버지가 한숨을 쉬었다. 깊은 한숨이었다.

"너도 행복했으면 좋겠어. 아버지가 너한테 물었던 것처럼. 언제쯤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하냐고."

내가 웃음을 흘렸다. 형식적인 웃음.

"저는 결혼이 필요 없습니다. 루미에르가 제 모든 것입니다."

"그게 진짜 원하는 거야?"

아버지의 눈이 나를 바라봤다. 오랫동안. 마치 낯선 딸을 보는 것처럼.

"네, 그것이 저의 선택입니다."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우리는 침묵 속에서 식사를 마쳤다.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나는 서연에게 전화했다. 밤 10시였지만, 서연은 항상 깼다. 우리는 그런 사이였다.

"뭐 했어?"

"너 때문에 깼어. 뭐야?"

"아버지가 재혼한대."

전화 너머로 서연의 숨이 들렸다.

"그게... 축하할 일 아닌가?"

"문제는 그게 아니라, 상류사회에서 나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는 거야. 아버지의 재혼. 사람들은 '딸인 내가 통제를 못 한 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할 거야. 그러면 루미에르의 CEO로서 내 능력도 의심받을 거고."

"지은아, 그게 정말 중요한 거야?"

"당연하지. 루미에르의 CEO는 완벽해야 해. 사적인 부분까지 포함해서. 완벽한 가정, 완벽한 관계. 그것이 능력의 증명이야."

"그럼 어떻게 할 건데?"

나는 택시 창밖의 서울을 봤다. 밤 10시의 강남은 여전히 밝았다.

"남친이 필요해."

침묵이 전화 너머에서 흘렀다.

"뭐라고?"

"남친이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해. 그럼 사람들이 내가 완벽하다고 생각할 거야. 감정도 있고, 남자도 있는 완벽한 여자. 그리고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건 아무도 모를 거야."

"지은아, 그건..."

"남친 후보 있어?"

"지은아, 이건 위험한 생각이야. 거짓이 들통나면..."

"들통 안 나야 하는 거지. 완벽한 연기. 완벽한 계약."

"계약?"

"3개월, 아니 1개월이면 충분해. 아버지 재혼식까지만. 그 기간 동안 내 남친 역할 해줄 수 있는 남자 있어?"

서연이 한숨을 쉬었다. 나는 그 한숨을 무시했다.

"생각해봐. 내일까지 후보 주면 좋겠어."

전화를 끊고 나는 집에 도착했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강남 아파트. 침대, 소파, 책상. 모두 기능적이고 냉정했다. 가족사진 하나 없었다.

침대에 누웠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서연이었다.

"강북 카페 알아?"

"뭐?"

"서촌 그 카페. 거기 자주 가는 남자 있어. 프리랜서 작가라던데, 인상이 괜찮대."

"이름?"

"준호. 아, 그리고 지은아?"

"뭐?"

"이 남자, 한 번 만나봐. 정말로."

다음 날 오후 3시, 나는 강북 카페에 있었다.

처음 온 동네였다. 강남의 무광 검은색 오피스 빌딩과는 달리, 여기는 벽돌집과 골목이 미로처럼 얽혀 있었다. 시간 낭비였다. 하지만 서연이 '정말로' 만나봐라고 했으니 한 번은 봐야 했다.

카페는 작았다. 테이블 8개, 카운터 1개. 벽면에는 책이 가득했고, 구석에는 노트북을 들고 뭔가 치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그가 준호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나는 커피를 주문했다. 아메리카노.

"아, 손님, 혹시 먹을 것도 원하세요? 오늘 마들렌 막 나왔거든요."

카운터 뒤의 여사장이 물었다.

"괜찮습니다. 커피만."

나는 창가 테이블에 앉았다. 거울을 이용해 뒤의 남자를 봤다. 초록색 셔츠, 헤진 청바지.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것이 한눈에 보였다.

내가 커피를 받고 한 모금 마시던 순간, 일이 터졌다.

"아, 잠깐!"

구석의 남자가 갑자기 일어섰다. 노트북이 테이블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내 방향으로 굴러오고 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발을 내밀었다. 노트북을 멈췄다. 남자는 재빨리 다가왔다.

"아, 정말 죄송해요."

그가 노트북을 집어 들다가 멈췄다. 우리의 눈이 마주쳤다.

초록색 셔츠 남자의 눈은 생각보다 따뜻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다.

"괜찮습니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 남자는 자리로 돌아가지 않았다. 노트북을 들고 있었다. 마치 뭔가 말을 더 하고 싶은 표정으로.

"저, 혹시..."

"뭐요?"

내가 그를 봤다. 차가운 눈으로.

"아니, 그냥. 제 노트북을 발로 막아주신 분을 처음 봐서. 보통 사람들은 그냥 지나가거든요."

그가 웃었다. 진심 어린 웃음이었다.

"저도 그냥 반사작용이었습니다."

"그래도 고마워요. 정말로."

그는 노트북을 안고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다시 커피에 집중했다. 하지만 그의 말이 자꾸만 떠올랐다. '보통 사람들은 그냥 지나가거든요.'

왜? 무엇이 다른가?

15분이 지났다. 나는 여전히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나는 커피를 5분 안에 마신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이상했다.

그 순간 남자가 일어섰다. 노트북을 정리하고 있었다. 카운터로 가서 여사장과 뭔가 말했다. 여사장이 웃음을 흘렸다. 두 사람은 손가락을 엮으며 대화했다.

나는 그 모습을 봤다. 낯선 사람과의 따뜻한 상호작용. 루미에르에서 본 적 없는 그런 것.

그 순간 내 입가가 움직였다.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나는 그것을 멈췄다. 입을 다물고 얼굴을 굳혔다.

그 남자는 카페를 나갔다. 창밖으로 그의 뒷모습이 사라졌다.

나는 커피잔을 들었다. 차갑게 식은 커피를 마셨다. 그런데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 저녁, 나는 준호에게 연락했다. 서연을 통해 얻은 번호로.

"안녕하세요, 혹시 준호님이세요?"

"어, 네. 근데 누세요?"

"오후에 카페에서 만났던 사람입니다. 노트북을 막아줬던."

"아! 그 분! 정말 죄송했어요."

"괜찮습니다. 혹시 지금 시간이 있으신가요? 뭔가 제안이 있습니다."

"제안?"

"네. 어디서 만날까요?"

30분 뒤, 우리는 강남역 근처 식당에 있었다. 준호는 강남에 와본 적이 거의 없는 듯했다. 눈이 자꾸 흔들렸다.

나는 물었다.

"저한테 1개월만 남친 역할을 해주실 수 있을까요?"

준호는 포크를 들었다가 멈췄다.

"뭐, 뭐라고요?"

"1개월. 아버지 재혼식 때까지. 그 기간 동안 제 남친이 되어주면 좋겠습니다. 충분한 수수료를 드리겠습니다."

준호의 얼굴이 굳었다. 음식을 놓았다. 천천히.

"그건... 안 될 것 같습니다."

"왜요?"

준호가 입술을 깨물었다. 오래 깨물었다.

"저, 저는 계약연애 중개소에 가입했던 적이 있거든요."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하지만 계속했다.

"그때 정말 힘들었어요. 결국 그 일로 사람들에게 사기꾼이라고 낙인찍혔거든요. 그 이후로 저는 그런 거 다시 안 하려고 했는데..."

그는 내 눈을 봤다. 정면으로.

"이건 정말 안 될 것 같습니다."

나는 그를 봤다. 떨리는 손, 흔들리는 눈. 하지만 나는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문제였다. 나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건 상관없습니다."

내가 말했다. 감정 없이.

"당신은 완벽한 거짓을 연기해야 합니다. 그것만 가능하면 됩니다."

준호가 나를 봤다. 오래 봤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을 보는 것처럼. 그의 눈빛이 변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네."

"거짓이 그렇게 쉬운 거예요?"

"거래는 항상 쉽습니다. 감정이 없으면."

침묵이 흘렀다. 음식이 식었다. 준호의 손이 테이블 위에서 떨렸다. 나는 그것을 보았지만 외면했다. 그의 흔들리는 손가락, 그의 눈빛의 변화—모두 무시했다.

"얼마를 주실 건데요?"

준호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다. 뭔가 포기한 듯한 톤.

"월 500만 원. 1개월만."

준호의 얼굴이 변했다. 그 돈은 그에게 상당한 것 같았다. 나는 그의 갈등을 읽었다. 자존심과 현실 사이에서 흔들리는 모습.

"그럼... 하겠습니다."

그가 말했다.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나는 노트북을 꺼냈다. 계약서 양식이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조건, 기간, 위반 시 벌금, 모든 것이 명시되어 있었다. 준호는 그것을 받으며 눈을 감았다.

"읽어보세요."

준호가 계약서를 펼쳤다. 천천히. 한 줄씩. 그의 얼굴이 점점 경직되었다. 마지막 항목에 그의 눈이 멈췄다. '관계 종료 후 상대방에 대한 어떤 요구도 하지 않기로 함'

그가 펜을 들었다. 손이 명백히 떨렸다. 오래 떨렸다.

"빨리 서명해주세요."

내가 말했다.

준호가 나를 봤다. 그의 눈에는 뭔가 물어보고 싶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대신 펜을 내려놨다. 종이 위에. 그리고 천천히 글씨를 그었다.

준호라고.

나는 계약서를 받아 내 이름을 썼다. 민지은. 깔끔하게.

"좋습니다. 이제부터 당신은 내 남친입니다."

내가 중얼거렸다. 준호에게라기보다는 자신에게.

그 순간 준호가 나를 봤다.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당신은 정말 이렇게 할 수 있어?"

그가 물었다. 목소리가 낮았다. 하지만 분명했다.

나는 그 질문을 무시했다. 그의 반응은 내 계획에 포함되지 않았다.

"내일 저녁 일정이 있어. 아버지의 재혼 고객들을 소개받는 자리야. 넌 내 남친으로 나타나야 해."

내가 일어섰다. 계약서를 챙기며. 준호의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뭘 어떻게 준비하면..."

준호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뭔가 깨진 것 같은 음정이 있었다.

"그냥 내 남친처럼. 충분히 잘할 수 있을 거야."

나는 돌아섰다. 뒤를 보지 않고.

택시 안에서 나는 거울을 봤다. 내 얼굴이 그대로였다. 냉정하고, 깔끔하고, 완벽했다.

하지만 그 순간, 거울 속 눈에 뭔가 흔들렸다. 아주 미세하게. 마치 물 위의 파문처럼.

준호의 떨리는 손가락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의 목소리가 계속 들렸다. '당신은 정말 이렇게 할 수 있어?'

나는 손가락으로 거울을 닦았다. 파문이 사라졌다. 다시 완벽한 표면이 돌아왔다.

하지만 손가락은 여전히 떨렸다.

내일부터 시작이다. 완벽한 거짓의.

아버지 재혼식 현장. 준호가 나타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아니면 준호의 정체가 들통나면.

처음으로 나는 그것을 두려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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