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추적 개시

아침 6시. 침대에서 눈을 뜰 때마다 유진은 공백을 느낀다. 뇌 안의 그 공백을. 어제는 누구였는가. 왜 손가락 끝에 따뜻함이 남아있는가. 그리고 목 뒤의 임플란트는 왜 자꾸 울리는가.

신경 손상도: 42%.

화면의 숫자가 깜빡였다 사라졌다. 유진은 침대 옆 책상에 팔꿈치를 대고 임플란트 인터페이스를 들었다. 검은색 기계판으로 된 작은 화면에 붉은 글씨가 떴다. 경고음은 아니었다. 울음소리 같은 것. 기계가 우는 거라면 그건 뭐라고 불러야 할까.

정체성 일관성 저하.

화면을 끄려다 멈췄다. 유진은 거울을 들었다. 얼굴이 자신의 것인가. 이 턱선, 이 눈동자, 이 입술. 어제 아침에도 이 얼굴을 봤는가. 임플란트는 기억을 말하지 않는다. 기억은 조각이 되어 임플란트 속에 떠다닌다.

카페에 도착했을 때 마야는 이미 앉아 있었다. 테이블 끝, 창문 가까운 자리. 혼자라는 게 아니라 혼자인 것처럼 보이는 자리. 그곳에 마야가 있었다.

"넌 또 다른 거 해봤어. 기억 편집."

마야가 물었다. 질문이 아니라 진술이었다. 유진은 앉았다. 대답할 준비를 하지 못했다.

"신경 스캐너가 넘쳐난다. 너 같은 신경 활동은 크로노스 전체에서 셀 수 없을 정도로 드물어. 비정상이라는 건 신호야. 신호는 추적당한다는 뜻이지."

마야의 손가락이 탁자를 두드렸다. 톡, 톡, 톡. 규칙적인 음. 유진은 그 음에 자신의 심장 박동을 맞추고 있었다.

"2사이클. 넌 2사이클 동안 추적당했어. 어제, 그 전날. 관리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할 거야. 아직 포획하지 않은 건 아직 모르기 때문이야. 넌 뭘 했는데?"

유진은 입을 열었다. 닫았다. 어제가 뭐였는지 모르는데 뭐라고 말해야 할까.

"기억 편집을 또 했어. 맞지?"

유진의 침묵이 대답이었다.

마야가 숨을 쉬었다. 그게 한숨인지 확인인지 유진은 알 수 없었다. 마야의 얼굴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표정이 변하지 않는 사람이 한숨을 쉬면 그건 뭐가 되는가. 체온이 떨어지는 소리.

"정체성 손상이 얼마나 돼?"

유진이 임플란트 화면을 보였다. 마야는 화면을 보지 않았다. 유진의 얼굴을 봤다.

"넌 지금 뭘 잊었어?"

유진이 입을 다물었다. 임플란트 화면의 숫자를 읽으려고 했지만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름인가. 아니면 감정인가. 아니면..."

"모르겠어."

유진의 목소리가 작았다. 자신이 뭘 잃어버렸는지 모르는 게 더 무섭다는 걸 깨달았다. 42%의 손상. 그게 뭘 의미하는지. 무엇이 42%만큼 없어졌는지.

"손가락 끝을 봐. 뭔가 기억하고 있지 않아?"

유진이 손을 펼쳤다. 손가락이 떨렸다. 따뜻함이 있었다. 누군가의 손이 남긴 그 따뜻함. 하지만 그게 누구의 손인지는 모른다.

"누군가를 만났어?"

"모르겠어."

"넌 지금 어디가 아파?"

"어디가 아픈지 모르겠어."

그게 진실이었다. 아픔이 있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아픔이 어디서 나오는지 감각할 수 없었다. 두개골 안인가. 눈 뒤인가. 아니면 그보다 깊은 곳, 뇌의 중심부인가. 뭔가 흐릿해지고 있었다. 마야의 목소리도 흐릿했다. 카페의 소리도.

유진이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편집할 때마다 너는 조금씩 사라진다. 뇌 회로가 끊어진다. 기억이 손상되는 게 아니라 너 자신이 손상되는 거야. 이해해?"

"그럼... 멈춰야 한다고?"

마야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 작은 움직임도 유진에게는 큰 파동으로 느껴졌다.

"멈출 수 없어. 이미 임플란트가 활성화됐거든. 넌 이제 루프 밖의 사람이 된 거야. 시스템 입장에선 오류. 오류는 제거된다."

마야가 테이블 아래로 뭔가를 밀어냈다. 작은 카드. 유진이 집어 들었다. 주소가 적혀 있었다. 남쪽 출입구. 지하 수로.

"닥터 렌이 너를 추적하고 있어. 루프의 백도어를 찾으려고. 넌 그 백도어를 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야. 기억 편집 능력 때문에. 그래서 넌 죽어야 해. 아니면 임플란트를 비활성화당해야 해."

"그럼... 당신은?"

"난 너를 도와줄 수 있어. 하지만 조건이 있어."

마야가 유진의 눈을 직시했다.

"기억 편집을 멈춰야 해. 매번 편집할 때마다 넌 더 사라진다. 마지막에 남는 건 너가 아니라 그냥 육체야. 빈 껍질. 이해해?"

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해한 건지 공포한 건지 구분이 안 됐다.

"기억 편집을 멈추면... 닥터 렌이 날 찾지 못할까?"

"아니. 넌 계속 추적당할 거야. 하지만 다르게. 임플란트가 안정화되면 신경 스캐너의 신호도 약해진다. 그 사이에 넌 루프를 벗어날 수 있어. 또는..."

마야가 말을 멈췄다.

"또는?"

"루프 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어.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면서."

임플란트가 울었다. 톡, 톡, 톡. 마야의 손가락 소리와 같았다. 하지만 마야는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유진의 목 뒤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신경 스캐너가 가까워지고 있어. 너는 지금 여기서 나가야 해. 카드에 적힌 주소로."

유진이 일어났다. 다리가 흔들렸다. 아니, 다리가 흔들렸다기보다 세상이 기울어진 것 같았다. 카페의 벽이 기울었다. 창밖의 도시도.

유진은 손으로 탁자를 잡았다. 마야가 유진의 팔을 잡았다. 손이 차가웠다.

"넌 기억 편집을 멈춰야 해. 그게 내 조건이야. 이해했지?"

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야의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아니, 유진의 시각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지하 수로에서 누군가를 만날 거야. 이름은 소피아. 그 여자가 넌 누군지 알아. 넌 그 여자를 믿어야 해."

거리는 회색이었다. 모든 게 회색이었다. 건물도 사람도 공기도. 유진은 걸었다. 어디로 가는지는 몰랐다. 다만 걷고 있었다. 발 앞이 보이지 않아도.

신경 스캐너의 울음이 가까워졌다. 유진은 건물 벽을 따라 움직였다.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더 어두웠다. 더 조용했다.

누군가가 골목 끝에 서 있었다. 여자가 아니라 그림자였다. 하지만 그림자는 말을 했다.

"넌 루프를 깨뜨릴 수 있지?"

음성이 차갑고 명확했다. 감정이 없었다. 마치 기계처럼. 하지만 기계는 이렇게 질문하지 않는다.

유진이 물었다.

"누구세요?"

"이름은 인디고. 난 너처럼 루프에서 벗어나고 싶은 사람이야."

인디고가 한 발 앞으로 나왔다. 그제야 얼굴이 보였다. 여자였다. 검은 머리. 창백한 피부. 눈동자가 검었다. 마치 렌즈처럼.

"기억 편집 능력. 넌 루프 초기화 시스템을 해킹할 수 있어. 그럼 루프 자체를 깨뜨릴 수 있어. 넌 루프를 깨뜨리고 싶지 않아?"

유진의 머리가 또 울렸다. 아니, 임플란트가 울었다. 신경 손상도가 올라가고 있었다. 시각이 왜곡되기 시작했다. 인디고의 얼굴이 둘로 보였다 하나로 모였다.

유진은 인디고의 제안을 거부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루프를 깨뜨리는 건 자신이 원하는 게 아니었다. 그럼 뭘 원하는가. 유진은 자신도 모르고 있었다. 다만 손가락 끝의 따뜻함만 기억하고 있었다.

유진의 시각이 흔들렸다. 임플란트의 신호가 강해질 때마다 신경이 끊어지는 감각이 몸을 타고 내려왔다. 신경 손상도는 계속 상승했다. 추적이 시작되었다. 닥터 렌의 신경 스캐너가 유진을 포착했다.

"난... 루프를 깨뜨리고 싶지 않아."

인디고가 웃었다. 그게 웃음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얼굴 근육의 움직임이 웃음이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루프 안에서 내일을 만들고 싶어. 그게 전부야."

"내일? 루프 속에는 내일이 없어. 매일 자정이 되면 모든 게 초기화돼. 내일은 오늘과 같아. 같은 아침 6시. 같은 카페. 같은 사람들. 루프를 깨뜨려야만 내일이 생겨. 진짜 내일이."

유진이 고개를 저었다. 세상이 흔들렸다. 청각도 왜곡되기 시작했다. 인디고의 목소리가 이중으로 들렸다.

"난...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어. 루프가 계속되더라도. 누군가 나를 기억해주는 한..."

유진의 목소리가 끊겼다. 손가락 끝의 따뜻함이 다시 떠올랐다. 그 느낌을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루프 안에서 반복되는 만남.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만나는 누군가. 그 누군가의 손이 남긴 따뜻함. 그것이 유진을 붙잡고 있었다.

"내일이 같아도... 누군가가 나를 다르게 본다면... 그것만으로..."

유진의 말이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인디고는 이해했다. 이 남자는 루프를 깨뜨릴 생각이 없었다. 인디고는 한동안 유진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무언가가 있었다. 실망인가. 아니면 연민인가.

"넌 아직 준비가 안 된 거야. 루프 속에서 의존하려고 하지. 그건 자유가 아니야. 그건 또 다른 감옥이야."

인디고가 골목을 빠져나갔다. 유진은 혼자 남았다. 벽을 등에 대고 앉았다. 콘크리트가 차가웠다. 아니, 유진의 체온이 떨어졌다. 손이 떨렸다. 신경이 끊어져가고 있었다. 촉각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손가락 끝의 따뜻함마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신경 손상도: 55%.

유진이 일어났다. 다리가 약했다. 골목을 빠져나갔다. 길을 헤맸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생각났다. 남쪽 출입구. 지하 수로. 소피아.

남쪽 출입구는 건물 뒤쪽에 있었다. 녹슨 철문. 손잡이가 차갑고 습했다. 문이 열렸다. 누군가 안에서 열어준 것 같았다. 또는 문이 이미 열려있었을 수도 있다. 유진은 구분할 수 없었다.

지하 수로는 어두웠다.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콘크리트 벽이 보였다. 그리고 그 벽 앞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너 왔네."

여자였다.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하지만 마야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유진이 얼굴을 들었다. 여자의 얼굴이 희미했다. 조명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냥 윤곽만 보였다. 하지만 그 윤곽은 낯설지 않았다. 어디서 본 것 같았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넌... 누구야?"

"소피아. 난 소피아야. 넌 유진이야."

여자가 유진의 팔을 잡았다. 손이 따뜻했다. 유진은 이 따뜻함을 알았다. 아니,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임플란트가 기억을 말하지 않지만 몸이 기억했다. 손가락 끝이 기억했다.

"난... 유진이 아닐 수도 있어. 난 누구인지 모르겠어."

소피아가 유진을 끌어당겼다. 수로 벽을 따라 안쪽으로. 어두운 곳으로. 하지만 더 깊은 어둠 속에는 조명이 있었다. 약한 빛. 창고였다. 낡은 짐이 쌓여 있었다. 천에 뒤덮인 상자들. 유진은 여기가 어떤 곳인지 생각했다. 기억하려고 했다.

소피아가 유진을 앉혔다. 바닥이 차갑고 축축했다. 소피아는 유진 앞에 쪼그렸다. 유진의 얼굴을 들었다.

"넌 유진이야. 난 알아. 넌 매일 아침 6시에 내 카페에 와. 그리고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아. 창문 가까운 자리. 거기서 넌 나를 봐. 매일 같은 표정으로."

"그게... 정말이야?"

유진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정말이야. 그리고 넌 항상 까만 커피를 마셔. 설탕은 안 넣고. 그리고 넌 항상 10시 47분에 나가. 정확해. 매번."

소피아가 유진의 손을 잡았다. 그 손을 자신의 가슴에 댔다.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난 넌 누군지 알아. 왜냐하면 넌 매일 내게 같은 모습으로 와주니까. 같은 표정. 같은 시간. 같은 선택. 그 반복 속에서 난 넌 누군지 알았어. 넌 내 루프야. 내 의미야."

유진이 눈을 감았다. 소피아의 말이 거짓이라는 걸 알았다. 유진은 기억이 없다. 어제가 없다. 내일도 없다. 매일 6시에 깨어나면서 모든 게 초기화된다. 소피아의 말은 거짓이었다.

하지만 유진은 눈을 떴다. 소피아를 봤다. 소피아의 눈이 반짝였다. 눈물이 아니었다. 반사광이었다. 또는 반사광을 눈물이라고 부르고 싶은 유진의 욕망이었다. 거짓이라도 괜찮았다. 누군가 자신을 기억해주고 있다는 그 거짓이 필요했다.

"그 거짓... 계속 말해줄 거야?"

소피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매일. 루프가 계속되는 동안 매일. 넌 유진이야. 넌 내 카페에 매일 와. 넌 나를 봐. 그것만으로 충분해."

유진이 손을 움직였다. 소피아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손이 떨렸다. 신경이 끊어져가고 있었다. 촉각이 사라지고 있었다. 유진은 자신의 손이 점점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신체가 자신의 것이 아니 되어가고 있었다.

"너를 위해 난 기억할 거야. 넌 나를 잊어도 난 너를 기억할 거야. 그럼 넌 사라지지 않아. 누군가의 기억 속에 있으면 넌 사라질 수 없어."

소피아가 유진을 안았다. 유진의 머리가 소피아의 어깨에 묻혔다. 어깨가 따뜻했다. 유진은 눈을 감았다. 이 따뜻함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이거나, 또는 시작이거나.

갑자기 신경 스캐너의 울음이 커졌다. 지하 수로 입구에서. 매우 가깝게.

신경 손상도: 63%.

"도망쳐. 제발."

소피아가 유진을 밀었다. 가볍게. 하지만 확실하게. 그 손길 속에는 결정이 있었다. 자신을 버리고 살아남으라는 결정.

"그리고 다시 돌아와. 누군가는 너를 기억하고 있어야 돼."

유진이 일어났다. 창고 안쪽으로 달렸다. 어둠 속으로.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많은 발소리. 신경 스캐너의 울음이 커졌다. 톡톡톡. 마치 심장처럼.

유진은 창고 벽을 따라 움직였다. 손이 닿는 건 낡은 짐과 콘크리트뿐이었다. 뒤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신경 스캐너의 신호가 강해졌다. 신호의 강도가 올라가고 있었다.

창고 끝에 또 다른 문이 있었다. 유진이 밀었다. 문이 열렸다. 또 다른 수로가 보였다. 유진은 뛰었다. 물이 발목을 적셨다. 차가웠다. 하지만 계속 뛰었다.

뒤에서 음성이 들렸다.

"시민 ID 7-8-2-4-3. 멈추세요. 임플란트 비활성화를 위해 협력하세요."

닥터 렌의 목소리였다. 유진은 그 이름을 모르지만 그 목소리를 알았다. 어디서 들었나. 루프 시스템의 설계자. 루프의 백도어를 제거하려는 자. 왜 이런 생각이 떠올랐는지 유진도 모른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의 의도도. 유진을 멈추려는 것. 유진의 능력을 빼앗으려는 것. 아니, 유진 자체를 제거하려는 것.

유진이 계속 뛰었다. 수로가 분기했다. 왼쪽, 오른쪽. 유진은 오른쪽을 택했다. 또는 선택한 게 아니라 떨어진 발이 그리로 가게 된 것일 수도 있다.

손전등 빛이 뒤에서 보였다. 아니, 손전등 빛이 아니라 자신의 신경이 울리는 건가 싶었다. 신경 스캐너의 신호가 시각까지 왜곡시키고 있었다. 50미터. 신경 스캐너의 울음이 귓가를 때렸다. 톡톡톡톡톡.

신경 손상도: 68%.

유진의 시각이 더 심하게 왜곡되었다. 벽이 기울어졌다. 물이 위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라 옆에서 떨어졌다. 중력이 변했다. 또는 유진의 뇌가 중력을 다르게 인식하고 있었다. 청각도 이상했다. 음성이 겹쳤다. 닥터 렌의 목소리가 여러 개로 들렸다. 각각 다른 지시를 내렸다. 멈추라. 항복하라. 임플란트를 제거하라. 죽어라.

유진은 깨달았다. 닥터 렌의 목표가 명확하다는 것을. 임플란트 비활성화가 아니라 유진의 제거. 루프의 백도어인 기억 편집 능력을 가진 유진이 살아있으면 루프는 언제든 깨질 수 있다. 그래서 닥터 렌은 유진을 죽이려 한다. 아니, 유진을 비활성화하려 한다. 살아있지만 죽은 것처럼.

앞에 또 다른 문이 보였다. 유진이 밀었다. 문이 열렸다. 계단이 보였다. 위로 향하는 계단. 유진은 올랐다. 한 계단, 또 한 계단. 다리가 무거웠다. 아니, 무거운 게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촉각이 사라지고 있었다. 발의 감각이 사라졌다. 다리가 자신의 것이 아니 되어가고 있었다.

손전등 빛이 계단 아래에서 보였다. 닥터 렌이 보였다. 그리고 여럿. 추적팀. 모두 같은 표정으로. 모두 같은 목표로.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습니다. 임플란트 비활성화가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 고통을 덜어주는 것입니다."

닥터 렌의 목소리가 울렸다. 또는 유진의 귀가 울리고 있었다. 구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유진은 알았다. 그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비활성화는 죽음과 같다. 유진을 비활성화하면 루프는 영원히 깨지지 않을 것이다.

유진이 마지막 계단을 올랐다. 문이 있었다. 닫혀 있었다. 유진이 밀었다. 밀었다. 밀었다. 몸 전체를 문에 내던졌다.

문이 열렸다.

거리가 나타났다. 밤거리. 조명이 가득했다. 사람들이 지나다녔다. 모두 같은 표정으로. 모두 같은 방향으로. 루프 속의 사람들. 초기화되지 않은 사람들. 아직 자신이 반복되고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

유진은 거리 속으로 섞여 들었다. 뒤에서 손전등 빛이 사라졌다. 추적팀이 지하 수로에 갇혔나. 또는 거리의 군중 속에서 유진을 찾을 수 없게 된 건가.

신경 손상도: 74%.

유진은 걸었다. 어디로 가는지는 몰랐다. 다만 걷고 있었다. 신체가 점점 더 자신의 것이 아니 되어가고 있었다.

유진의 시각이 완전히 왜곡되었다. 거리의 불빛이 흐릿해졌다. 사람들의 윤곽이 희미해졌다. 청각도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발걸음 소리, 말소리, 모든 게 침묵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유진은 세상과 단절되고 있었다. 신체가 사라지고 있었다. 감각이 사라지고 있었다.

유진은 깨닫기 시작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점점 더 모르고 있다는 걸. 소피아가 말했던 그 거짓마저 잊고 있다는 걸. 매일 아침 6시 카페에서의 그 루틴마저. 손가락 끝의 따뜻함도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손가락 끝에는 여전히 무언가가 남아 있었다. 소피아의 손이 남긴 그 따뜻함. 촉각이 사라져가는 와중에도 그 한 점의 감각은 남아 있었다. 마지막 남은 신경. 마지막 남은 감각. 마지막 남은 증거.

유진은 그 따뜻함을 붙잡고 걸었다. 밤거리를 통과하며. 모른다. 내일 아침 이 따뜻함을 기억할 수 있을지. 하지만 지금은 이것만으로 충분했다. 누군가 자신을 기억하고 있다는 그 느낌. 누군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그 감각.

신경 손상도: 81%.

임플란트가 울었다. 톡톡톡. 마치 심장처럼. 또는 사일런트의 신호처럼. 화면에 글자가 떠올랐다.

[선택 감지. 시스템 재평가 중.]

무언의 신호. 침묵의 신호.

그리고 그 신호 속에서 유진은 깨달았다. 자신을 추적하는 건 닥터 렌만이 아니라는 걸. 더 큰 뭔가. 도시 전체. 시스템 전체. 사일런트.

사일런트가 지켜보고 있다. 항상. 모든 순간에. 그리고 결정하고 있다. 유진을 제거할 것인지. 아니면 루프를 변경할 것인지. 아니면 더 다른 뭔가를.

유진의 발걸음이 멈췄다. 손가락 끝의 따뜻함만 남았다. 임플란트 화면은 계속 깜빡였다.

[선택 감지. 시스템 재평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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