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의 둥지로
밤 11시 45분. 게임 접속 화면이 검게 물들었다.
지은이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멈췄다. 커뮤니티 게시판 상단에 올라갈 게시물의 제목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 긴급 폭로 】 크림슨·이그니스의 구조적 약탈 실태 - 증거 영상 10개 첨부
마우스 버튼을 누르는 순간, 세상이 바뀔 거였다.
"지은아, 정말인가?"
길드 홀의 소파에 앉은 소연이 물었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준호는 소연의 옆에 서서 화면을 내려다봤다. 신체 감도 4%. 손가락이 둔했다. 현실의 신체는 이미 망가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모든 감각이 또렷했다.
"네. 지난 3개월간 수집한 모든 것입니다."
지은이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항상 조용했지만, 지금처럼 확고한 적은 없었다.
화면 위에는 14개의 파일이 목록화되어 있었다. 각각은 지옥이었다.
**파일 1: 류준혁 ↔ 현우 음성 대화 기록 (2024.10.15)**
준호는 그 대화를 이미 알고 있었다. 지은이가 크림슨 길드홀의 벽에 몰래 설치한 녹음기로 수집한 것이었다.
*"약한 링크는 제거해야 해. 준호 같은 놈이 계속 있으면 크림슨 전체가 끌려 내려간다."*
현우의 목소리였다.
*"이미 황폐한 광산 공략을 준비 중입니다. 이번이 기회입니다."*
류준혁의 목소리였다.
*"좋아. 그 놈이 죽으면 처리해. 그리고 다시 살아나면..."*
거기서 음성이 끝났다. 현우가 뭘 말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충분했다.
**파일 2~5: 크림슨 길드 내부 메모 - "비효율 플레이어 제거 계획"**
준호의 이름은 3개의 메모에서 반복되었다.
**파일 6~8: 던전 배분 기록 - 이그니스 길드에만 상급 던전 독점**
중급 길드 크림슨은 초급 던전만 반복하도록 강제되어 있었다. 의도적인 성장 억제였다.
**파일 9: 길드 탈퇴자 통계 - 3개월간 124명 탈퇴**
대부분은 크림슨에서 나왔다. 왜냐하면 탈퇴 페널티가 가장 심했기 때문이었다. 모든 장비 몰수, 획득 경험치 50% 삭감, 3개월 다른 길드 가입 불가. 노예 계약이었다.
**파일 10: 게임 운영진의 회의록 - "현우의 뇌물 기록"**
이 파일이 가장 위험했다. 게임 운영진 내부자가 준 것이었다. 현우가 운영진 3명에게 현금을 건넸다는 기록. 게임 커뮤니티 규제, 버그 신고 무시, 길드 간 불공정 처리 은폐 등의 대가로.
"이제 정말 갈 길 없지. 현우도 알 거야. 이 증거들이 나가면..."
소연이 중얼거렸다.
"네. 하지만 나가야 합니다."
지은이가 손을 올렸다.
준호는 말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19회 남은 리셋 기회 중 이미 5회를 썼다. 14회만 남았다. 남은 리셋이 언제 필요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리셋할 수 없었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지은이의 손가락이 마우스 버튼을 눌렀다.
**업로드 완료.**
커뮤니티 게시판의 상단에 글이 올라갔다. 동시에 게임 전체에 브로드캐스트 알림이 울렸다.
**【 긴급 공지 】 커뮤니티 주요 게시물 업로드 - 전체 플레이어에게 알림**
그 순간이었다.
게임 화면이 검게 변했다.
모든 플레이어의 시야가 일순간 암흑으로 물들었다. 길드 홀, 던전, 마을 어디에 있든 같은 검은 화면이 덮쳤다. 준호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게임 에러? 아니면...
검은 화면 중앙에 문자가 떠올랐다.
**진실은 언제나 승리한다.**
그 아래로 라이즈의 로고가 나타났다. 상승하는 화살표의 형태였다. 단순했지만 강력했다.
그리고 지은의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지은이의 목소리가 게임 전체에 울려 퍼졌다.
"저는 크림슨 길드 정보 담당자 지은입니다. 저는 3개월간 게임 내 구조적 부당성을 기록했습니다. 크림슨 길드장 류준혁과 이그니스 길드장 현우는 약한 플레이어를 의도적으로 제거해왔습니다. 이는 게임 약관 위반입니다. 증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영상에는 음성 기록, 메모, 통계가 하나둘 떠올랐다. 게임을 하는 모든 플레이어가 이것을 봤다. 사라 온라인의 전체 인구, 약 850만 명이 동시에 이 진실을 마주했다.
길드 홀에서 소연이 손을 입에 모았다.
"지은이, 이거... 정말 큰일이야."
"알고 있습니다."
지은이는 여전히 차분했다.
"하지만 거짓이 아닙니다."
게임 커뮤니티가 폭발했다.
**【 반응 】 크림슨 길드 최악의 악행 폭로 - 충격** - 스레드 수: 47,284개 - 댓글 수: 1,230,000+
【 나도 크림슨에서 버려졌어. 1년 전이야 】
【 이그니스? 그 길드 정말 악명 높던데... 증거까지 있네? 】
【 게임 운영진은 뭐 하고 있어? 이게 사실이면 사기 행각 아니야? 】
【 내 친구도 크림슨에서 나왔는데, 이래서 PTSD 있대. 이제 알겠다 】
【 류준혁 길드장 계정 강제 차단해야 한다 】
【 현우는? 현우도 같은 놈이잖아 】
준호는 모니터를 내려다봤다. 댓글이 초당 100개씩 쌓이고 있었다. 버려진 플레이어들의 목소리였다. 124명의 탈퇴자, 47명의 낙오자, 그리고 수천 명의 침묵했던 피해자들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길드 홀의 문이 벌컥 열렸다.
류준혁이 들어왔다. 뒤에는 현우가 있었다. 둘 다 얼굴이 창백했다.
"뭐 하는 짓이냐!"
류준혁이 소리쳤다. 게임 내 아바타지만, 목소리는 현실에서 울려 나오는 것 같았다.
"증거가 거짓이라면 말씀해주세요."
지은이가 일어섰다. 키는 작았지만 자세는 곧았다.
"거짓이고 뭐고, 이건 허가 없는 영상 배포다! 게임 약관 위반이야!"
현우가 나섰다.
"게임 약관 3조 2항을 다시 읽어보세요. '게임 내 부당행위 고발은 공익 활동으로 간주하며, 운영진 승인 없이도 배포 가능'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지은이가 차분하게 답했다.
준호는 지은의 얼굴을 봤다. 이미 모든 걸 계산한 얼굴이었다.
"당신들은 이미 끝났어요. 커뮤니티 여론이 돌아섰거든요."
소연이 말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소연, 넌 크림슨 길드원이잖아!"
류준혁이 소연을 노려봤다.
"아니에요. 나는 이미 크림슨을 탈퇴했어요. 그리고..."
소연이 한 걸음 나아갔다.
"이제 라이즈 길드원입니다."
소연이 준호의 옆에 섰다. 그 순간 길드 홀의 다른 문들이 열렸다. 민준, 그리고 황폐한 광산에서 모인 47명의 플레이어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준호를 중심으로 한 줄을 섰다.
류준혁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이...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정의, 아닐까요?"
준호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모두가 들었다.
현우의 눈이 준호를 바라봤다. 그 눈빛은 이상했다. 분노가 아니라, 뭔가 다른 감정이 있었다. 계산하는 눈빛이었다.
"좋아. 너희가 원하는 대로."
현우가 천천히 말했다.
"하지만 기억해. 게임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현우가 손을 들었다. 동시에 게임 공지가 울렸다.
**【 게임 운영진 공식 성명 】**
**크림슨 길드 및 이그니스 길드에 대한 임시 제재**
**- 모든 상급 던전 진입 금지 (7일)** **- 길드 상금 수령 정지 (30일)** **- 길드장 계정 조사 중**
**라이즈 길드에게 최종 보스 레이드 진입 권한 부여** **(라이즈 길드만 용의 둥지 진입 가능)**
준호의 숨이 멈췄다.
최종 보스 레이드. 드래곤 킹이 있는 용의 둥지. 게임의 최종 목표.
"이제... 시작이네."
민준이 중얼거렸다.
길드 홀이 조용해졌다. 류준혁과 현우가 사라졌다. 그들이 나가자, 준호는 팀원들을 불렀다.
"모두 모여."
47명이 원을 이루며 모였다. 준호는 원의 중심에 섰다.
"이제 진짜 시작이야."
준호가 말했다.
"용의 둥지로 가자."
그 순간이었다.
길드 홀의 천장이 부서졌다.
아니, 부서진 게 아니라 뭔가가 내려왔다. 검은 그림자였다. 거대한 날개를 펼친 형태였다.
현우가 나타났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었다. 현우의 뒤로 이그니스 길드 100명이 들어섰다. 준호가 센 것보다 훨씬 많았다. 모두 고급 장비를 갖춘 전투원들이었다.
"내가 먼저 용의 둥지에 들어갈 거야."
현우가 선언했다.
"너희는 들어갈 수 없어."
준호의 시야가 흐려졌다. 신체 감도 4%. 피로도는 거의 한계였다. 남은 리셋 기회는 14회.
하지만 이번엔 리셋할 수 없었다.
이번엔 진짜 싸워야 했다.
길드 홀의 공기가 얼어붕었다.
현우의 뒤로 선 이그니스 길드원 100명. 그들의 장비 레벨이 라이즈 평균보다 3단계 이상 높았다. 준호는 빠르게 계산했다. 47명 vs 100명. 장비 격차 3단계. 현실의 신체 감도 4%.
이건 리셋으로 풀 수 없는 문제였다.
"운영진이 제재를 내렸잖아요."
지은이가 현우를 바라봤다. "상급 던전 진입 금지라고. 그리고 라이즈만 용의 둥지 진입이 가능하다고."
"용의 둥지는 상급 던전이 아니야."
현우가 웃음을 흘렸다. "그건 최종 던전. 별개의 카테고리지. 진입 권한 부여는 너희만 할 수 있다는 뜻일 뿐, 내가 못 간다는 뜻은 아니거든."
준호의 손이 떨렸다. 신체 감도 때문이 아니었다. 계산이 빗나갔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건 전쟁이야."
현우가 한 발 내디뎠다. 그의 발이 땅에 닿는 순간, 이그니스의 길드원들이 일제히 검을 뽑았다.
"무단 길드 전쟁은 운영진 개입 대상이지만, 일단 시작되면 끝날 때까지 중단할 수 없어. 그게 규칙이야."
"그래서?"
준호가 물었다.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가 먼저 진입한다. 너희가 도착할 때쯤이면 우리가 이미 드래곤 킹을 격파했을 거야. 그럼 넌 영구 강제 탈출 당할 거고."
현우의 입가에 미소가 떴다.
"게임에서."
민준이 앞으로 나아갔다.
"넌 뭐 하는 거야?"
준호가 민준의 팔을 잡았다.
"싸워야지. 뭐."
민준의 목소리가 낮았다.
"리셋 없이?"
"리셋 없이."
민준이 준호를 바라봤다. 눈빛이 단호했다.
"우린 이미 황폐한 광산에서 증명했잖아. 리셋 없이도 이길 수 있다고."
준호의 목구멍이 타들어갔다. 민준 말이 맞았다. 그들은 지난 훈련에서 7번의 시도 끝에 황폐한 광산 보스를 격파했다. 리셋 없이.
하지만 이건 다른 문제였다.
"이건 보스가 아니야. 이건 길드 전쟁이야."
"상관없어."
소연이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뒤로 47명이 천천히 일어섰다.
"우리 라이즈는 강함으로 이기는 팀이 아니야. 신뢰로 이기는 팀이잖아."
소연이 준호를 바라봤다.
"넌 이미 우리한테 증명했어. 몇십 번의 리셋을 거쳐서, 넌 우리를 버리지 않았어. 그리고 우리도 너를 버리지 않을 거야."
"소연..."
"우리가 이그니스를 이길 수 있을까?"
지은이가 물었다.
준호는 계산했다. 정보 수집. 장비. 레벨. 인원. 모든 변수가 이그니스 쪽이 우위였다.
하지만 준호가 놓친 게 있었다.
길드 홀의 문이 다시 열렸다.
크림슨의 길드원들이 들어왔다.
류준혁이 앞에 섰다. 하지만 류준혁의 표정은 이전과 달랐다. 결연했다.
"우리도 싸운다."
류준혁이 말했다.
준호가 깜짝 놀랐다.
"왜?"
"왜냐고?"
류준혁이 웃음을 흘렸다. 쓸쓸한 웃음이었다.
"넌 날 버리지 않았거든. 리셋을 거쳐서, 넌 나한테 계속 같은 말을 했어. '함께하자'고."
류준혁이 한 발 내디뎠다. 크림슨의 길드원 30명이 그 뒤를 따랐다.
"나도 알아. 내가 뭘 잘못했는지. 내가 너를 버렸고, 내가 약한 자들을 밟았고, 내가 현우 따라다니며 개처럼 굴었는지."
류준혁이 준호의 옆에 섰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게 하고 싶어."
현우의 얼굴이 굳어졌다.
"넌 뭐 하는 거야, 준혁?"
"내가 선택을 바꾸는 거야."
류준혁이 현우를 바라봤다.
"이번엔 준호를 선택한다."
길드 홀이 조용해졌다.
준호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신체 감도 4%. 현실의 신체는 거의 마비 상태였다. 하지만 마음은 선명했다.
라이즈 47명. 크림슨 30명. 총 77명.
이그니스 100명.
여전히 밀렸다.
하지만 준호는 뭔가를 깨달았다.
이건 숫자의 게임이 아니었다.
현우가 손을 들었다. 이그니스의 길드원들이 검을 들었다.
"그럼 시작하자."
현우가 선언했다.
"라이즈의 종말을."
그 순간, 길드 홀의 벽에 화면이 떴다.
게임의 모든 플레이어에게 중계되는 공식 채널이었다.
**【 긴급 브로드캐스트 】**
**길드 전쟁 발생**
**라이즈 vs 이그니스**
**위치: 게임 길드 홀**
**중계 시작**
준호의 눈이 커졌다.
"뭐?"
현우도 화면을 봤다. 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누가... 이걸..."
게임 커뮤니티가 폭발했다. 준호는 실시간 댓글을 봤다.
**[라이즈 화이팅!!!]** **[이그니스 새끼들 이제 끝이다]** **[크림슨도 라이즈 편이네? ㅋㅋ]** **[현우 그 새끼 이제 본색이 드러났다]**
수천 개의 댓글이 1초마다 올라왔다.
민준이 준호의 어깨를 쳤다.
"봤어? 우린 혼자가 아니야."
"누가 중계를..."
지은이가 미소를 지었다.
"내가."
"뭐?"
"게임 커뮤니티 관리자한테 미리 연락했어. 길드 전쟁이 일어나면 즉시 중계하도록. 그리고..."
지은이가 잠시 말을 멈췄다.
"운영진 내부 분열이 있었어. 현우의 뇌물 증거가 운영진을 둘로 나눴거든. 그래서 일부 운영진이 우리 편이 됐어."
준호는 지은이를 바라봤다. 모든 게 계산된 것이었다.
"우리가 현우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거였어. 숨지 말고, 모든 걸 공개하는 것."
현우가 이를 드러냈다.
"상관없어!"
현우가 손을 내렸다.
"지금 당장 시작하자! 중계든 뭐든 상관없어. 우린 어차피..."
그 순간, 길드 홀의 천장에 또 다른 화면이 떴다.
이번엔 게임 운영진의 공식 로고였다.
**【 게임 운영진 긴급 공지 】**
**이그니스 길드 현우 계정 임시 정지**
**사유: 게임 약관 위반 (무단 길드 전쟁 선포)**
**규정: 길드 전쟁은 운영진 승인 후에만 진행 가능**
**증거: 지은이가 제출한 현우의 뇌물 기록으로 신뢰성 확보**
**현우의 모든 길드 권한 즉시 박탈**
현우의 몸이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뭐... 뭐야?"
현우가 손을 펼쳤다. 하지만 그의 손가락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피부가 흐릿해지고, 윤곽이 흐려졌다. 마치 현실에서 지워지는 것처럼.
"이... 이럴 리가..."
현우의 음성이 게임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운영진이... 나를..."
준호는 현우의 얼굴을 봤다. 그 얼굴에는 분노보다 다른 감정이 있었다. 이해하지 못한다는 절망이었다.
현우가 완전히 투명해졌다.
그리고 사라졌다.
길드 홀에는 라이즈와 크림슨의 팀원들만 남았다. 이그니스의 길드원들은 현우가 사라지자 검을 내렸다. 리더를 잃은 군대처럼, 그들은 준호를 바라봤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그니스의 한 길드원이 물었다.
준호가 입을 열려다 멈췄다. 신체 감도가 3%로 떨어졌다. 손가락이 화면 속 손가락과 동기화되지 않는 공포가 밀려왔다. 마치 현실과 게임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느낌이었다.
"너희도... 선택할 수 있어."
준호가 천천히 말했다.
"현우 따라갈 수도 있고, 아니면... 우리와 함께할 수도 있고."
이그니스의 길드원 중 가장 앞에 선 여전사가 검을 내렸다.
"우리도... 라이즈에 합류하고 싶습니다."
그녀가 무릎을 꿇었다.
한 명이 무릎을 꿇자, 나머지 이그니스 길드원들도 따랐다. 100명 모두.
길드 홀에는 이제 180명 가까운 팀이 모였다.
민준이 준호의 귀에 속삭였다.
"이제 하나가 됐네."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신체 감도가 3%로 떨어졌다. 현실의 신체가 거의 마비 상태였다. 손가락의 감각이 거의 없었다. 키보드를 누르는 손가락이 화면 속 손가락과 동기화되지 않는 공포가 밀려왔다. 마치 현실과 게임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마음은 무거웠다.
왜냐하면 준호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끝이 아니었다.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길드 홀의 한쪽 구석으로 걸어가며 준호가 말했다.
"모두 여기 모여."
180명이 천천히 준호 주변으로 모였다.
준호는 테이블 위에 지도를 펼쳤다. 용의 둥지의 구조였다. 지은이가 미리 준비한 것이었다.
"용의 둥지는 세 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어. 첫 번째는 용의 알을 지키는 소형 드래곤들이 있는 방. 두 번째는 함정과 함께 있는 보물실. 그리고 세 번째가 드래곤 킹이 있는 최종 방."
준호가 지도를 가리켰다.
"우리는 분산되지 않아. 모두 함께 진입하고, 모두 함께 싸우고, 모두 함께 이긴다."
"그럼 드래곤 킹은?"
이그니스의 여전사가 물었다.
"우리가 이긴다."
준호가 대답했다.
"어떻게?"
"함께."
준호가 다시 말했다.
"우리는 180명이야. 드래곤 킹은 하나야. 우리가 함께라면, 그놈도 우리를 이길 수 없어."
민준이 웃음을 흘렸다.
"그게 말이 되냐고?"
"말이 되지 않으면 되게 만들어."
준호가 말했다.
"우리는 이미 불가능을 여러 번 했잖아."
길드 홀에 작은 웃음소리가 났다.
"그래. 우리 할 수 있어."
소연이 말했다.
"우리 함께 이기자."
180명이 준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준호는 시계를 확인했다. 1시간이 남았다.
"모두 준비해. 1시간 뒤에 우리는 용의 둥지로 간다."
---
시간이 흘렀다.
길드 홀의 분위기는 점점 팽팽해졌다. 플레이어들은 장비를 정비했다. 버프를 준비했다. 마지막 점검을 했다.
준호는 창가에 서서 게임의 하늘을 바라봤다. 신체 감도 2%로 떨어졌다. 현실의 신체는 거의 움직일 수 없었다. 손가락도, 발도, 눈도 거의 반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은 명확했다.
"준호."
지은이가 준호의 옆에 섰다.
"뭐?"
"우리가 정말 이길 수 있을까?"
지은이가 물었다.
준호는 창밖을 바라봤다. 게임의 하늘은 여전히 검었다.
"모르겠어."
준호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이겼어."
"뭐?"
"현우를 이겼잖아."
준호가 말했다.
"그놈은 우리를 죽이려고 했고, 우리는 그놈을 폭로했어. 게임에서 추방당했고. 우리는 이미 이겼어."
지은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 이겼다."
"이제 드래곤 킹만 남았어."
준호가 말했다.
"그놈도 우리를 이길 수 없을 거야."
"왜?"
"왜냐면 우리는 함께니까."
준호가 대답했다.
시간이 더 흘렀다.
게임 커뮤니티는 여전히 폭발하고 있었다. 850만 명의 플레이어들이 라이즈를 응원하고 있었다.
**[라이즈 화이팅!!!]** **[드래곤 킹을 이겨라!!!]** **[우리가 너희를 응원한다!!!]**
댓글은 초당 1000개씩 올라오고 있었다.
준호는 모니터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길드 홀을 돌아봤다.
180명의 플레이어들이 준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간이다."
준호가 말했다.
"용의 둥지로 가자."
180명이 일어섰다.
길드 홀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들은 나갔다.
게임의 모든 플레이어들이 그들을 지켜봤다.
라이즈, 크림슨, 이그니스의 180명이 한 줄로 용의 둥지를 향해 걸어갔다.
그들의 발걸음은 느렸지만 단호했다.
그들의 눈빛은 두려웠지만 결연했다.
그들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용의 둥지의 거대한 문이 보였다.
검은 돌로 만든 문이었다. 그 위에는 드래곤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준호는 손을 올렸다.
"모두 준비했어?"
180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준호는 손을 내렸다.
용의 둥지의 문이 천천히 열렸다.
검은 연기가 흘러나왔다.
그 속에서, 거대한 울음소리가 울렸다.
드래곤 킹의 울음이었다.
준호는 한 발 내디뎠다.
180명이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은 용의 둥지로 들어갔다.
검은 연기 속으로.
그리고 그들의 진정한 전투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