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강남역 지하철 2번 출구 인근 모텔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 피해자 이은지, 만 26세 직장인. 목 졸림으로 인한 질식사. 사건 발생 48시간 후 유력한 용의자도 없고, 목격자도 없었다.

"준호, 이은지 사건은 나한테 맡겨. 직감이 말하는데, 이 사건은 너의 능력이 필요해."

박철수 부서장의 목소리가 여전히 귓가에 맴돈다. 나는 경찰청 기억복원 부서의 특수수사관. 정식 명칭은 '초능력자 기억복원 전문가'지만, 동료들은 나를 '신의 손을 가진 명탐정'이라고 부른다.

"피해자 시신이 경찰청 특수의료팀에 있습니다. 뇌사 상태 직전이니까 기억 추출 가능 시간이 최대 6시간입니다."

한지은 팀원의 설명이 정확했다. 나는 피해자 이은지의 병상 옆에 손을 얹었다. 의료팀이 설치한 기억 추출 장치들이 내 손목의 센서와 연결되었다.

눈을 감는다.

세상이 하얀 빛으로 포화되고, 내 의식이 그곳으로 빨려들어간다. 마치 누군가 내 뇌를 거꾸로 뒤집는 듯한 어지러움. 그리고 나타난다. 이은지의 마지막 밤.

모텔 방. 낡은 벽지, 노란 형광등, 싸구려 침대. 그 위로 누군가가 몸을 덮친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손가락들이 목을 조여간다. 이은지의 시각에서 천장이 흔들린다. 호흡이 끊긴다.

그 순간, 방의 모서리. 책상 위의 담배곱 사이에 무언가가 반짝인다. 은색 반지. 독특한 문양. 피해자의 눈이 거기 멈춘다.

그리고 범인의 손목. 검은 장갑. 그 안에서 특이한 향수 냄새가 피어난다. 이은지의 마지막 감각이 그것이다.

기억에서 빠져나온다. 의식이 현재로 돌아온다. 병원 천장이 보인다. 내 손이 떨리고 있다. 의료팀이 내 얼굴에 손전등을 비춘다. 그리고 1시간 뒤, 내 기억에서 지난 1시간이 지워질 것이다. 정의를 위한 필요한 대가.

"범인 특징이 있습니까?"

박철수의 목소리가 귀를 자극한다.

"은색 반지. 독특한 문양. 검은 장갑. 특이한 향수 냄새." 나는 메모를 했다. 손가락이 여전히 떨리고 있지만, 기억은 명확하다. "모텔 책상 위의 담배곱 사이에 반지가 있을 거야. 범인이 남긴 증거다."

박철수의 눈이 반짝였다.

4시간 뒤.

강남역 인근 모텔 방의 책상 위. 경찰 수사대가 담배곱을 치운다. 그리고 정확히 내가 지시한 위치에서 은색 반지가 나타난다. 완벽한 일치. 문양까지도. 김민준 수사관이 반지를 증거봉투에 담는다. 그의 표정은 불편해 보인다.

"이 반지 문양으로 용의자를 특정할 수 있을 겁니다." 나는 박철수에게 보고했다.

"완벽해. 준호, 완벽해." 박철수가 내 어깨를 쳤다. 그의 얼굴에는 승리의 미소가 떠 있었다. "이제 디비 대조만 하면 용의자가 나올 거야."

한지은이 나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에는 항상 따뜻함이 있지만, 이번엔 뭔가 다른 감정이 섞여 있었다. 의심.

"준호, 괜찮아? 얼굴이 창백해 보여."

"기억 추출 후 항상 그래. 1시간이 지워지니까." 나는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말을 이었다. "정의의 대가치고는 싼 거지."

그녀는 뭔가 더 말하려고 했지만, 입을 다물었다.

밤 10시. 강남역 모텔 외부에 경찰 차량들이 집결했다. 용의자는 한 시간 뒤 도착할 것이었다. 반지의 소유자, 전과 5범의 성폭행 범죄자 조준환, 만 34세.

박철수는 내게 말했다. "오늘 밤 체포될 거야. 그리고 내일 신문 1면은 너로 채워질 거고."

나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웃음 뒤에는 피로가 있었다. 내 뇌가 자꾸 흐릿해지는 느낌. 지난 1시간이 정말 지워졌을까? 나는 오늘 점심이 뭐였는지 생각해봤다. 생각이 안 난다.

박철수가 다시 말했다. "준호, 앉아봐."

회의실로 들어갔다. 김민준이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초능력 관리국에서 보낸 감시 보고서가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박철수가 말했다. "김민준이 제기한 의견이 있어. 기억복원 능력에서 증거 오염이 있을 수 있다는 거야."

"불가능합니다." 나는 즉시 반박했다. "피해자의 기억 영상은 객관적이고 조작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혹시 당신이 그 현장에 있었다면?" 김민준이 조심스레 말했다. "당신의 기억이 피해자의 기억과 겹칠 수 있지 않습니까?"

나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다시 열었다. "나는 모텔에 간 적이 없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저 이론적 가능성을 말하는 거죠."

박철수가 손을 들었다. "충분해. 이제 새로운 사건이 나왔다. 연쇄살인 사건이야.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기회다. 준호, 이 사건을 풀어줄 수 있겠지?"

마지막 기회.

그 말이 내 가슴에 박혔다. 동시에 내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목이 말라왔다. 박철수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초능력 관리국의 감시가 이미 강해져 있다는 것. 김민준의 질시가 이미 극에 달해 있다는 것. 그리고 내 기억이 자꾸만 흐릿해지고 있다는 것.

박철수는 폴더를 나에게 건넸다. "첫 피해자 사건. 서초구 강변 아파트 지하주차장. 여성 피해자 최유라, 만 25세. 목 졸림과 다중 외상. 3일 전 발견됐다. 범인은 자신을 '그림자'라고 부르며 현장에 메시지를 남겼다."

나는 폴더를 열었다. 피해자의 사진이 나타났다. 최유라. 갈색 머리, 맑은 눈.

그 순간 뭔가가 내 뇌를 찌른다. 낯선 기시감. 이 얼굴을 본 것 같은데, 언제? 어디서?

"준호, 괜찮아?" 박철수가 물었다.

"네, 괜찮습니다." 나는 사진을 더 자세히 봤다. 기시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언제 능력 사용을 할 수 있습니까?"

"지금 바로. 피해자의 뇌 활동이 아직 유지되고 있다."

나는 폴더를 들고 의료실로 향했다. 복도에서 한지은이 나를 붙잡았다.

"준호, 이 사건은... 뭔가 다를 거 같아. 조심해."

의료실의 침대 위에 최유라의 몸이 있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센서가 연결되었다.

눈을 감는다.

하얀 빛. 의식이 흐릿해진다. 그리고 나타난다. 최유라의 마지막 밤.

지하주차장. 어두운 콘크리트. 그녀가 자동차에 다가간다. 열쇠를 꺼낸다. 그 순간 누군가가 뒤에서 그녀를 감싼다. 목이 조여진다. 그녀가 비명을 지르려 하지만, 손이 그녀의 입을 막는다.

그리고 그 손의 주인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다.

검은 장갑. 그리고 그 위에...

내 얼굴.

웃고 있는 내 모습이, 최유라의 기억 속에서, 분명히 보인다.

기억에서 빠져나온다. 손가락이 센서에서 떨어지며 끊어지는 음이 울린다. 내 몸이 경련한다. 손가락이 저려오고, 눈이 뒤로 굴러가는 느낌이 든다. 의료팀이 나를 지탱한다. 내 뇌에서 뭔가가 터지는 듯한 통증이 흐른다. 기억 추출 시간 제한 신호. 현재 기억이 역순으로 지워지기 시작한다는 신호다.

"준호? 준호!"

박철수의 목소리가 멀어진다.

최유라의 기억 속에서 웃고 있던 그 얼굴은, 분명히 내 얼굴이었다.

그런데 나는... 거기 있지 않았다.

의료실을 나오는 내 발걸음은 불안정했다. 박철수가 나를 붙잡았다.

"준호, 뭐가 나왔어? 범인을 특정했어?"

나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다시 열었다가 닫았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기억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박철수의 얼굴이 굳었다. "뭐라고?"

"피해자의 기억이 손상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영상이 왜곡되고 있어요."

거짓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반쯤의 거짓이었다. 기억은 명확했다. 너무나 명확했다. 내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검은 장갑을 낀 손이 최유라의 목을 조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건 말이 되지 않는다.

박철수가 내 앞에 섰다. 30초 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의 눈빛이 변했다. 신뢰에서 의심으로.

"손상? 정확하게 뭐가 손상됐다는 거야?"

"얼굴 부분입니다. 범인의 얼굴이 계속 흐릿하게 변합니다."

"다시 한 번 시도하겠습니다."

"아니다. 일단 쉬어. 의료팀이 말했어? 당신 기억 소실 수치가 얼마냐?"

"3시간입니다."

"3시간? 어제 사건 때는 1시간이었잖아. 능력 사용 횟수가 늘어나니까 대가도 커지는 건가?"

나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박철수가 다시 말했다.

"초능력 관리국에서 전화가 들어왔어. 당신의 능력 효율성에 대해 질문하고 있다고. 기억복원 성공률이 98%라는 건데, 이 사건에서 실패한다면?"

마지막 기회.

그 말이 다시 울렸다. 박철수는 나를 도구로 보고 있었다. 내가 성공하면 그의 성공이고, 실패하면 나의 실패다.

"시간을 주세요. 내일 다시 시도하겠습니다."

"내일? 우리는 내일을 기다릴 수 없어. 범인이 또 다른 피해자를 낼지도 모른다."

박철수는 나를 떠밀듯이 복도로 나갔다. 나는 뒤따랐다. 복도의 창문에 내 모습이 비쳤다. 창백한 얼굴. 흔들리는 눈.

특수수사팀 사무실로 들어갔을 때, 모든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김민준은 이미 사건 파일을 펼쳐놓고 있었다. 한지은은 나를 바라봤다. 그 눈 속에는 뭔가가 있었다.

"준호, 어떻게 됐어?" 한지은이 물었다.

"범인의 얼굴이 명확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박철수가 대답했다. "기억 영상이 손상되어 있다고."

사무실이 순간 조용해졌다.

"손상?" 김민준이 펜을 내려놓았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피해자의 기억에 오류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초능력 관리국의 기록에 따르면, 당신의 기억복원 능력은 89% 정확도를 보여줍니다. 피해자의 기억 손상까지 당신이 감지할 수 있습니까?"

나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대신 자리에 앉았다. 손이 떨렸다. 커피잔을 들었다. 아무것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박철수가 내 옆에 앉았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준호. 우리는 지금 절벽 끝에 서 있어. 초능력 관리국은 당신을 검증하려고 한다. 이 사건이 당신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당신이 이 사건을 풀지 못하면, 다음은 당신이 이전에 해결했던 사건들을 재검증하겠다고 했어. 증거 오염, 기억 왜곡, 모든 것을 다시 살펴본다고."

내 숨이 멎었다.

"당신을 신뢰해. 하지만 신뢰도 한계가 있어. 이 사건을 풀어줄 수 있겠지?"

나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박철수를 바라봤다. 그의 얼굴에는 압박이 있었다. 첫 번째 압박과는 다른 질감의 압박. 이번엔 협박에 가까웠다.

박철수가 일어났다. "내일 아침 8시. 다시 시도해. 그 전까지 충분히 쉬어."

그는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김민준이 나에게 다가왔다. "준호, 괜찮아?"

"괜찮습니다."

"정말? 너 지난주에도 같은 질문을 받았던 것 같은데."

"제가 괜찮다고 했으니까, 괜찮은 겁니다."

김민준이 물러섰다. 나는 사건 파일을 들었다. 최유라의 사진을 다시 봤다.

한지은이 다가왔다. "준호. 정말 괜찮아?"

나는 그녀를 바라봤다. 한지은의 눈에는 진심이 있었다. 나를 진정으로 걱정하는 눈. 그런데 지금 그 눈을 마주치기가 두려웠다.

"네, 괜찮습니다."

"당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어."

"뭐라고요?"

"프로파일링입니다. 당신의 음성 톤, 눈 움직임, 손가락의 미세한 움직임. 모두 스트레스 신호를 보내고 있어. 뭔가 있는 거야."

나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말할 수 없었다. 만약 내가 대답한다면, 내가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드러날 것 같았다.

"한지은. 지금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한지은은 내 얼굴을 오래 봤다. 그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하지만 준호. 혼자가 아니라는 것만 기억해. 우리는 팀이야."

그녀가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사건 파일을 집어 들었다. 첫 피해자 최유라. 서초구 강변 아파트 지하주차장. 목 졸림과 다중 외상. 범인은 자신을 '그림자'라고 부른다.

내 손이 떨렸다. 파일 속 사진들이 떨렸다. 현장 사진. 피 묻은 콘크리트. 그리고...

검은 장갑.

사진 속에 떨어져 있는 검은 장갑. 나는 그 사진을 자세히 봤다. 손가락 끝이 닳아 있는 장갑. 왼쪽 손가락 관절 부분에 작은 구멍이 있는 장갑. 그 구멍은...

정확히 내가 작년에 입던 장갑과 같은 위치에 있었다.

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사무실의 형광등이 깜박였다. 내 머리가 지끈거렸다. 기억 소실의 신호다. 능력 사용 후 내 기억이 지워지고 있었다.

그런데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내가 지난 3년간 해결했던 20건의 사건들이 갑자기 다시 떠올랐다는 것이다. 모두 다른 사건들. 모두 다른 피해자들.

첫 번째 사건. 강북구 고시원 살인. 그 기억 속에서 나는 자신의 손을 봤다. 피해자의 목을 조이는 손. 자신의 손목에 차 있던 시계.

두 번째 사건. 강서구 원룸 변사. 그 기억 속에서 나는 자신의 목소리를 들었다. "조용히 해"라고 말하는 자신의 목소리. 낮고 차가운 목소리.

세 번째 사건. 서대문구 오피스텔 사건. 그 기억 속에서 나는 자신의 웃음을 봤다. 피해자 위에서 웃고 있는 자신의 얼굴. 그 웃음.

그것들이 모두 사실은...

내 얼굴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무실을 나갔다. 복도로 나갔다. 화장실로 들어갔다. 거울을 봤다.

거울 속의 내 얼굴. 창백하고 떨리고 있는 얼굴. 손가락이 거울 테두리를 움켜잡았다. 손이 떨렸다. 호흡이 빨라졌다. 시야가 흔들렸다.

내 얼굴을 부정하고 싶었다. 그 얼굴이 내 것이 아니기를 바랐다. 하지만 거울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나는 거울을 내려쳤다.

거울이 깨졌다. 유리 조각이 흩어졌다. 나는 손을 비비며 나왔다. 사무실로 돌아갔다. 박철수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준호! 어디 갔어?"

"네, 죄송합니다."

"초능력 관리국에서 전화가 또 들어왔어. 내일 정오까지 범인 특정을 완료하지 못하면, 당신의 능력 사용을 제한할 수도 있다고. 알겠지?"

정오까지. 그 말이 내 귀를 찌른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준호. 너 요즘 이상해. 뭔가 있는 거 아니야?"

"없습니다."

박철수의 말이 끝나기 전에, 내 휴대폰이 울렸다. 정신과 의사 윤태희였다.

"이준호입니까?"

"네."

"당신이 최근에 기억 소실이 심해졌다고 들었습니다. 의료팀에서 보고를 받았거든요. 당신의 상태가 심각해 보입니다. 한 번 만나 뵐 수 있겠습니까?"

나는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전화를 끊었다.

박철수가 나를 바라봤다. "누가?"

"잘못 걸린 겁니다."

"그래. 그럼 내일 아침 8시. 준비해."

나는 사무실을 나갔다. 건물 밖으로 나갔다. 밤공기가 차가웠다. 서울의 밤하늘이 검게 물들어 있었다.

내 손이 떨렸다. 주머니에서 뭔가 딱딱한 것이 손가락에 닿았다. 주머니를 뒤져 메모지를 꺼냈다. 내 손글씨로 적힌 메모.

"검은 장갑. 향수 냄새. 12월 15일 오후 8시."

12월 15일. 그 날짜가 내 뇌에 박혔다. 최유라. 그 날 밤. 지하주차장.

내가 그 메모를 언제 적었는지, 왜 적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 메모를 쓴 내가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한 가지만 확실하다.

나는 거기 있었다.

그리고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 사실은 모든 기억 속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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