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황금의 기억을 파는 자

죽음은 생각보다 빠르다.

불이 목을 태울 때, 나는 자신이 죽어가는 중이라는 걸 알았다. 검은 연기가 폐를 채웠고, 황제의 손이 내 목을 조이는 감각이 마지막으로 남았다. 그의 눈빛—죄책감도 미안함도 없는, 순수한 결단의 빛. 그것만이 선명했다.

그리고 지금.

눈을 떴다.

심장이 정말로 뛰고 있었다. 손을 펼쳤을 때 손가락이 떨렸다. 숨을 쉬었을 때 공기가 폐를 채웠다. 불타는 저택의 잔해 사이에서 깨어난 나는,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3초가 필요했다.

아니다.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일어섰을 때 다리가 휘청거렸다. 옷은 그을음으로 검고, 손에는 화상이 있었지만 통증이 없었다. 마치 다른 사람의 몸을 움직이는 것 같은 그 감각이 더 두려웠다. 죽음을 경험한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얼마나 부자연스러운지를 몸이 먼저 알고 있었다.

저택을 빠져나가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화염 속에서도 나는 조용했고, 냉정했다. 아마도 죽음 이후로는 무엇도 나를 흔들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생각은 틀렸다. 거리로 나왔을 때 처음으로 흔들렸다.

사람들이 있었다.

밤거리를 헤매는 거지들, 야경꾼들, 술 취한 상인들. 누구도 나를 보지 않았다. 누구도 내가 방금 죽음에서 돌아왔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세상은 변하지 않았고, 나만 돌아왔다.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그 깨달음이 죽음보다 더 차가웠다.

골목길을 헤매다가, 나는 어떤 여인을 마주쳤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거지였다. 곱슬거리는 머리, 허름한 옷, 손에는 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다. 여인은 나를 보고 한 발 물러섰다. 나의 모습이 얼마나 처참했는지,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

"길을 잃으셨나요?"

여인이 물었다. 내가 대답할 생각을 하기도 전에, 나는 이미 그 여인의 손을 잡고 있었다.

손가락이 닿는 순간, 세상이 반전되었다.

기억이 흘러나왔다. 아니, 흘러들어왔다. 마치 물이 고이는 것처럼, 그 여인의 모든 기억이 내 몸을 통해 통과해갔다. 밤새 병든 아이를 돌본 손, 굶주림으로 빈 배, 내일을 위해 주운 동전 몇 개, 아이의 웃음이 자신보다 더 따뜻하다는 희망. 모든 것이 내 피부를 타고 흘러나왔다.

나는 손을 놓았다.

여인이 비명을 질렀다. 그것은 깨달음의 비명이었다.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 알 수 없다는 그 절망의 목소리. 그녀는 자신의 팔을 허공에 내밀었다. 아이의 손을 찾으려는 듯. 하지만 그 손은 여전히 자기 손 안에 있었다. 문제는 그것이 누구의 손인지, 왜 자신이 그것을 잡고 있는지 더 이상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이... 아이가..."

여인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는 자신의 품 안의 아이를 바라봤지만, 그 눈에는 인식이 없었다. 마치 낯선 사람을 보는 것처럼. 아이는 울음을 터뜨렸고, 여인은 그 울음을 듣고도 반응하지 못했다. 온기를 잃은 손가락들이 아이의 옷자락을 무의식적으로 잡고 있을 뿐이었다.

"제발... 누구세요?"

여인이 나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것은 나에게 묻는 게 아니었다. 자신에게 묻는 것이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왜 이 아이를 안고 있는지, 그 모든 것을 잃어버린 자신이 누구인지.

나는 뒷걸음질쳤다.

내 손가락에만 황금색 빛이 남아 있었다. 마치 그 여인의 모든 기억을 담은 빛이 내 손에 묻어난 것처럼. 손을 움직였을 때, 그 빛은 사라졌다. 하지만 감각은 남아 있었다. 그 여인이 가진 것들—사랑, 두려움, 희망, 절망—이 모두 내 안에 각인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나는 죽었어야 했다. 그것이 운명이었고, 그것이 맞는 것이었다. 황제는 나를 죽여야 했고, 나는 죽어야 했다. 그것이 제국의 안정이었고, 그것이 모두의 바람이었다. 나 혼자만 살아남는 것이 얼마나 부당한지, 얼마나 원죄 같은 것인지를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살아있는가?

그 물음이 내 가슴을 찌르고 있을 때, 거리 모퉁이에서 또 다른 흐름이 나타났다.

황제의 초상화였다. 거리의 모든 모퉁이, 모든 벽에 붙어 있었다. 검은 얼굴, 차가운 눈빛, 그리고 그 아래 '카이젤 제국의 영원한 황제'라는 글귀. 나는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몸이 경직되었다.

그 눈. 나를 죽인 그 눈.

손가락이 저절로 움켜쥐어졌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거지 여인의 기억을 뽑아낼 때는 없던 감정이 이제 밀려왔다. 분노도 아니고, 슬픔도 아닌, 그것도 아닌 무언가. 마치 내 가슴이 다시 불타고 있는 것 같은 그 감각.

나는 결국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를 봐야 한다.

골목길을 더 깊이 들어갔다. 거리의 불빛도 닿지 않는 어두운 곳에서, 나는 자신의 손을 들었다. 황금빛은 이미 사라졌지만, 그 감각은 여전했다. 거지 여인의 기억들이 내 안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뭔가가 내 안에서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 여인이 밤새 아이를 안고 있던 온기가 먼저 사라졌다. 그 다음은 아이를 보며 느꼈던 희망이었다. 마치 물이 모래 위에 스며드는 것처럼, 그 감정들이 차례로 흩어져갔다. 내 안에 남은 것은 배고픔과 추위, 그리고 끝없는 절망뿐이었다. 그것도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나는 누구인가?

그 질문을 반복하는 것이 이제 버릇이 될 것 같았다.

호위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규칙적이고, 무거운, 황제의 것. 나는 골목의 입구로 나갔다. 거리 모퉁이에 서서, 나는 그들을 마주했다.

황제 호위대. 검은 갑옷에 황금 문장을 새긴 기사들이 일렬로 서 있었고, 그들의 중앙에는 화려한 마차가 있었다. 마차의 창문은 반투명한 비단으로 덮여 있었지만, 그 안의 인영은 분명했다. 한 명의 남자. 나를 죽인 그 남자.

카이젤.

마차가 내 앞을 지나갔다. 그 순간, 창문이 열렸다. 아니, 정확히는 누군가가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눈이 나와의 만남을 찾는 듯한 표정으로 밖을 보았다.

우리의 눈이 마주쳤다.

카이젤의 표정이 변했다. 처음엔 의아함이었고, 그 다음은 깊은 어떤 것이 그의 눈을 흐렸다. 그는 나를 보는 동안, 내가 죽어가던 그 순간의 얼굴을 했다. 죄책감 같은 것이 아니라, 순수한 충격. 마치 죽은 것이 다시 살아난 것을 보는 자의 표정.

그런데 그것도 1초였다.

마차는 계속 움직였다. 호위대는 나를 무시하고 지나갔다. 카이젤의 눈은 다시 앞을 향했다. 내가 본 충격도, 내가 느낀 분노도, 모두가 그저 순간일 뿐이었다. 마치 무언가를 본 것 같지만, 본 게 아닌 것 같은 그런 느낌으로.

나는 제자리에 서 있었다.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거지 여인의 기억들이 내 안에서 맴돌고 있었고, 동시에 내 무언가가 계속 빠져나가고 있었다.

마차는 멀어졌다. 거리 끝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혼자 남았다.

다시 한 번, 나를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내가 그를 기억했다. 그의 눈을 다시 봤다. 그 눈 속에서 내가 죽던 그 순간의 모든 것을 다시 느꼈다. 분노도, 두려움도, 그리고 이해도.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거지 여인의 기억을 빼앗은 후, 내 안에 남은 것은 그녀의 절망뿐이었다. 하지만 그 절망 속에서 나는 한 가지를 깨달았다. 기억을 빼앗는 것은 단순한 거래가 아니었다. 그것은 누군가의 존재를 지우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할 수 있었다.

나는 천천히 걸었다. 거리의 더 깊은 곳으로. 황제 초상화들이 계속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초상화들 사이에서 나는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나의 능력을 이해할 누군가. 나의 기억을 팔 누군가.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나를 죽인 그 남자를 다시 만날 수 있는 길.

골목의 깊숙한 곳에서, 나는 낡은 간판을 발견했다.

'기억 치료소'

글자가 벗겨져 있었고, 문은 닫혀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서는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나는 문 앞에 섰다. 손을 올렸다. 문을 두드리기 전에, 나는 한 번 더 자신의 손을 들어 봤다.

황금빛은 없었다. 하지만 여인의 기억들은 여전히 내 안에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나를 변화시키고 있었다. 차라리 거지 여인의 절망이 더 생생해지고, 내 자신의 감정은 점점 옅어지고 있었다.

나는 누구인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나는 문을 두드렸다.

# 기억의 손가락

문이 열렸을 때, 나를 맞이한 것은 향이었다. 라벤더와 오래된 종이의 냄새가 뒤섞인, 마치 시간이 정체된 공간에서만 날 수 있는 그런 향. 나는 한 발 안으로 들어섰다.

기억 치료소의 내부는 생각보다 정갈했다. 벽에는 수천 개의 유리병이 진열되어 있었고, 각각의 병에는 은색 라벨이 붙어 있었다. 라벨 위의 글씨는 너무 작아서 읽을 수 없었지만, 그것들이 무엇을 담고 있는지는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기억. 누군가의 기억들.

"손님이 이 시간에 오신 건 처음이네요."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여인이 카운터 뒤에서 나타났다. 검은 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나이는 정확히 가늠하기 어려웠다. 서른대 중반일 수도, 사십대일 수도 있었다. 그녀의 눈은 날카롭고, 동시에 깊은 슬픔을 담고 있었다.

"저는 헬렌이에요. 이곳의 주인입니다."

나는 대답했다. 내 목소리가 낯설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았던 걸까.

"저는... 기억을 팔고 싶습니다."

헬렌의 눈이 반짝였다. 그것은 호기심의 빛이 아니라, 뭔가를 확인하는 듯한 빛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나에게 다가왔다. 카운터를 나와서, 한 걸음 한 걸음 신중하게.

"손님은 판매자가 되고 싶으신 건가요? 아니면 구매자가 되고 싶으신 건가요?"

"판매자입니다."

"그렇다면, 손님이 팔 기억을 보여주셔야 합니다."

헬렌이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바라봤다. 그녀의 손가락은 길고, 마디마디가 선명했다. 그리고 손목에는 보라색 자국이 있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잡혔던 흔적처럼.

나는 내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헬렌의 손을 잡았다.

순간, 세상이 뒤바뀌었다.

거지 여인의 기억이 다시 흘러나왔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그 기억이 내 몸을 통해 헬렌에게로 흐르고 있었고, 나는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나의 피가 그녀의 손을 통해 빠져나가는 것처럼.

그리고 동시에, 내 안에서 뭔가가 사라지고 있었다.

손가락이 먼저 마비되었다. 거지 여인이 밤새 아이를 안고 있던 온기가 손끝에서 빠져나갔다. 손가락 하나씩이 차가워졌다. 마치 내 손이 더 이상 나의 손이 아닌 것처럼, 그 온기를 담았던 기억이 내 것이 아니라는 확신과 함께.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했다. 누군가 내 가슴을 움켜쥐는 것 같은 그 감각. 숨을 깊이 들이마셔도 폐가 채워지지 않는 느낌. 시야의 가장자리가 희미해졌다. 마치 나라는 존재 자체가 희석되고 있는 것처럼.

헬렌이 손을 놓았다.

"훌륭한 기억입니다."

그녀의 음성은 차분했지만, 그 눈에는 뭔가가 흔들리고 있었다. 눈동자가 확대되어 있었고, 입술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마치 처음 뭔가를 깨달은 아이처럼.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손님의 기억이 필요합니다. 손님 자신의."

"제 기억을 팔려고 왔는데요."

"그렇다면 보여주세요."

나는 다시 손을 내밀었다. 이번엔 더 깊게. 헬렌이 내 손목을 잡았을 때, 나는 내 자신의 기억이 흘러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고통스러웠다.

죽음 직전의 순간이 흘러나갔다. 불타는 저택. 카이젤의 얼굴. 그의 손에 들린 칼. 그리고 내 가슴을 관통하는 그 감각. 모든 것이 헬렌에게로 흘러갔다.

하지만 나는 놓지 않았다. 계속 손을 내밀었다.

카이젤을 사랑했던 모든 순간이 흘러나갔다. 그의 웃음. 그의 손. 그의 눈빛. 모든 것이. 그리고 죽음 직전, 내가 느꼈던 이해도. 그 순간의 모든 감정이.

그러면서 동시에, 내 안에서 뭔가가 흡수되고 있었다. 마치 헬렌의 손이 내 정체성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던 그 감각이 희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내 이름도, 내 얼굴도, 내가 사랑했던 것도—모두가 헬렌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내 안에는 텅 빈 공간만 남아가고 있었다.

헬렌이 손을 놓았다. 이번엔 급하게.

"멈추세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경고가 담겨 있었다. 손이 떨리고 있었고, 얼굴이 창백해져 있었다.

"더 이상 팔면, 손님은 아무것도 아니 될 겁니다."

나는 자신의 손을 내려봤다.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내 안에서는 지금까지 느껴본 적 없는 공허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거지 여인의 기억도 이제 희미했다. 그것이 내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 순간, 그것도 빠져나가고 있었다. 내 것도 아니고, 거지 여인의 것도 아닌, 그저 떠도는 기억들처럼.

"제 기억은 어떤 가격인가요?"

"손님의 기억은 값을 매길 수 없습니다."

헬렌이 카운터로 돌아갔다. 그녀의 손가락이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손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왜냐하면 손님은 단순한 판매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손님은... 뭔가 다르다. 나는 이런 기억을 본 적이 없어요. 이런 강도의 감정을."

그녀가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 속에는 두려움과 연민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뭔가 더—마치 자신을 거울에 비춰 보는 것 같은 그런 표정.

"손님은 어디서 오셨어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죽음에서? 전생에서? 그런 말을 누가 믿을까.

"제가 돈이 필요합니다."

"돈을 원하는 게 아니라, 다른 걸 찾고 있는 것 같은데요."

헬렌이 서랍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것은 작은 열쇠였다. 금색이었고, 손가락 하나 길이 정도였다.

"이 열쇠를 가져가세요. 이것은 지하의 거래소로 가는 열쇠입니다. 거기서는 더 큰 거래가 일어나요. 더 비싼 기억들. 더 비싼 가격들. 하지만..."

헬렌이 한 발 다가왔다. 그녀의 눈이 나와 만났다.

"거기서 주의하세요. 손님이 지나치게 팔다가는, 손님이 누구인지도 잊게 될 겁니다. 나처럼."

그 말이 끝나기 전에, 나는 이미 진실을 알고 있었다. 헬렌도 거래자였다. 그리고 그녀도 자신을 팔아서 자신을 잃었다. 그 보라색 자국도, 그 깊은 눈빛도, 모두 그것의 증거였다.

나는 열쇠를 받아들였다.

"감사합니다."

"감사할 필요 없어요. 대신, 한 가지만 기억하세요."

헬렌의 목소리가 아주 작아졌다.

"기억을 파는 것은 자신을 파는 거라는 걸요. 그리고 자신을 다 팔고 나면, 돈도 의미가 없다는 걸요."

나는 그 말을 듣고 있었지만, 동시에 그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왜냐하면 내 마음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카이젤을 만나야 했다. 그를 이해해야 했다. 그의 모든 기억을 알아야 했다. 그리고 그를 변화시켜야 했다.

그 모든 것을 위해서라면, 나를 파는 것쯤은 작은 대가였다.

나는 기억 치료소를 나갔다. 거리는 이제 어두워지고 있었다. 황제 초상화들은 가로등의 불빛 아래에서 더욱 선명하게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초상화 위의 얼굴. 카이젤.

내 몸이 또 떨렸다. 하지만 이번엔 그것이 공포가 아니었다. 그것은 다른 무언가였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지 나는 몰랐다. 내 안에서 점점 희미해지고 있는 감정들 속에서, 유일하게 선명하게 남아 있는 그것.

나는 거리 모퉁이에 섰다. 그곳에서 나는 이미 한 번 카이젤을 봤다. 마차 안에서, 나를 보는 그의 표정. 그 표정 속에 있던 무언가.

나는 그것을 다시 보고 싶었다.

밤은 깊어지고 있었다. 거리의 인파는 줄어들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서 있었다. 손가락들이 계속 떨리고 있었고, 내 안에서는 거지 여인의 기억의 마지막 조각들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 순간, 거리 끝에서 다시 호위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마차가 돌아오고 있었다.

나는 숨을 참았다. 손에 들린 열쇠가 따뜻했다. 그것이 내 다음 거래처로 이끌어줄 것이었다. 지하의 거래소. 더 큰 기억들. 더 비싼 가격들.

그리고 궁극적으로, 카이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길.

마차가 내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이번엔 창문이 처음부터 열려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카이젤이 나를 보고 있었다. 이번엔 그의 눈에 의아함만 있지 않았다.

그 안에는 뭔가 더 있었다. 뭔가 깊고, 어두운, 그리고 나를 부르는 듯한 무언가. 그의 손이 창문의 가장자리를 움켜쥐고 있었다.

마차는 멈췄다.

"누구신가요?"

카이젤의 목소리는 낮고, 무거웠다.

"저는 당신이 죽인 사람입니다."

그 말이 나가는 순간, 호위대가 말을 타고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내 안에는 이제 거의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거지 여인의 기억도, 카이젤을 향한 사랑도, 그리고 나 자신도.

하지만 하나만 남아 있었다.

분노. 아니, 그것도 이제 희미했다. 남은 것은 단지 그 말뿐이었다. 내가 죽인 사람이라는 그 말. 그것이 내 정체성의 마지막 조각이었다.

마차 안에서 카이젤의 눈이 흔들렸다. 그의 손이 창문의 가장자리를 더 깊이 움켜쥐었다. 입술이 움직였다. 말을 하려는 듯. 하지만 그 말이 나오기 전에, 호위대의 칼이 뽑혀 나왔다.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마차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천히. 마치 무언가를 뒤로 끌어당기는 것처럼. 카이젤의 눈이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그의 손이 창문에서 놓여졌다. 그의 입이 다시 다물어졌다.

그리고 마차는 거리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나는 제자리에 서 있었다. 호위대의 칼날이 나를 향하고 있었지만, 나는 도망치지 않았다. 도망칠 이유가 없었다. 내 안에는 더 이상 살고 싶은 욕망도, 죽음을 두려워하는 감정도 없었다.

남은 것은 오직 하나.

카이젤의 눈이 흔들렸다는 그 사실.

그 눈 속에 뭔가가 있었다. 인식. 깨달음. 아니면 다른 무언가.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내가 아직 그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증거였다.

나는 천천히 뒷걸음질쳤다. 호위대의 칼이 내 옷자락을 스쳤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골목 속으로 들어갔다. 어둠 속으로. 거리의 불빛이 닿지 않는 곳으로.

내 손에는 여전히 열쇠가 들려 있었다.

지하의 거래소. 거기서 나는 더 큰 거래를 할 수 있을 것이었다. 더 강력한 기억들을 팔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나는 카이젤에게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었다.

내가 죽인 사람이라는 그 말.

그것이 내 정체성의 마지막 조각이라면, 나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팔아야 했다. 내 기억도, 내 감정도, 내 존재 자체도.

골목 깊숙한 곳에서, 나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찾았다. 돌로 만들어진 오래된 계단. 그 아래에서는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나는 한 발 한 발 내려갔다.

어둠 속으로. 기억들의 심연 속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카이젤을 다시 만날 그 날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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