숯 끝이 종이 위를 달렸다.
채유선의 손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밀려드는 형체를 옮겨 담느라 눈이 종이와 심상을 오갔고, 그 사이 붉게 어른거리던 조짐은 잠시 뒤로 물러났다. 둥근 통 하나가 그려졌다. 그 아래로 화덕이, 위로는 뚜껑을 여닫는 밸브가, 옆구리에는 톱니가 물린 축이 이어졌다.
"이게 무쇠 통이오. 여기 물을 넣고, 아래서 불을 때면 김이 찬다." 그는 통 안쪽에 짧은 선을 그었다. "김이 갇히면 힘이 되오. 그 힘이 이 막대를 밀고, 막대가 축을 돌리고, 축이 톱니를 물어 돌을 든다. 영감님이 물으신 대로, 화덕도 달렸고, 물도 들었고, 톱니도 물리오."
홍만춘이 팔짱을 낀 채 종이 위로 상체를 기울였다. 우락부락한 얼굴이 화덕불에 벌겋게 익어 있었다. 그는 한참을 들여다보더니 손가락으로 통을 툭 짚었다.
"이 통, 무쇠로 뜨면 이만한 게요?" 그가 두 손을 벌려 항아리만 한 크기를 그렸다. "안에 김을 가둔다고 했소? 김이 얼마나 세게 미느냐가 문제 아니오. 무쇠 통이 그걸 견디겠소?"
채유선은 대답 대신 숯을 내려놓았다.
"그걸 알려고, 먼저 작은 걸 하나 떠 봐야 하오. 이 축을 물리는 이음쇠." 그가 톱니 옆에 손톱만 한 부품을 짚었다. "이게 힘을 처음 받는 자리요. 여기가 버티면, 통도 만들 수 있소."
이 말에 홍만춘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림쟁이의 종이 얘기가 아니라, 무쇠를 뜨자는 얘기였다. 그건 그의 언어였다.
"거푸집부터 짜야겠구먼." 그가 모루에서 몸을 일으켰다. 무릎에서 우두둑 소리가 났다. "축 물리는 이음쇠라면 여기 목을 좁혀야 하니, 모래 다지는 게 까다롭겠소. 젊은것들, 고운 모래 체로 쳐 와라."
젊은 장인들이 흩어졌다. 대장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이틀이 걸렸다.
채유선은 그동안 자지 않았다. 홍만춘이 밀랍으로 원형을 깎으면, 그는 그 위에 손톱으로 치수를 새기고 다시 깎게 했다. 반 푼이 어긋나도 넘어가지 못했다. 홍만춘은 처음 두어 번 혀를 찼으나, 세 번째부터는 말없이 다시 깎았다. 그림쟁이의 눈이 자기 손끝의 어긋남을 짚어낼 때마다, 그 정확함이 손끝을 서늘하게 했기 때문이다.
밀랍 원형을 고운 모래에 묻어 거푸집을 짜고, 열을 가해 밀랍을 녹여 흘려보냈다. 빈 자리가 남았다. 그 자리로 녹은 무쇠를 부으면, 이음쇠 하나가 태어날 참이었다.
화덕에서 무쇠가 끓었다. 홍만춘이 긴 국자로 쇳물 표면의 찌끼를 걷어냈다. 붉다 못해 흰 쇳물이 국자 안에서 일렁였다.
"물을 준비가 됐소." 홍만춘이 말했다.
채유선은 거푸집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직 비어 있는, 모래로 다져진 거푸집을. 그런데—
거푸집 위로 붉은 금이 어른거렸다.
쇳물을 붓기도 전이었다. 이음쇠의 목이 좁아지는 자리, 축을 물릴 구멍의 모서리. 그곳에 실핏줄 같은 붉은 선이 떠올라 천천히 진해졌다. 그의 눈은 이미 완성될 이음쇠를 보고 있었고, 그 완성품이 힘을 받는 순간 어디서 갈라질지를 미리 그려 보였다.
"…잠깐." 그가 손을 들었다.
홍만춘의 국자가 멈췄다. "왜 그러오."
"여기가 터지오." 채유선이 거푸집의 한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손가락 끝은 아직 붉은 선에 닿지 못한 채 허공에서 떨렸다. "이 목이 좁아지는 자리. 축이 처음 힘을 받으면, 이 모서리에서 금이 가서 쪼개지오."
홍만춘이 국자를 내려놓지 않은 채 인상을 썼다. "붓지도 않았소. 아직 무쇠가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어디가 터진단 말이오?"
"보이오." 채유선의 목소리가 낮았다. "그냥, 보이오."
젊은 장인들이 서로를 흘긋거렸다. 화덕불만 타닥거렸다.
홍만춘은 채유선의 얼굴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갈고리쇠 때의 일이 떠올랐을 것이다. 부러질 자리를 손톱으로 짚어 보이던, 그리고 정말로 그 자리에서 부러졌던 그 눈. 그러나 그는 장인이었다. 손에 든 쇳물이 식기 전에 부어야 했다.
"그래서 어쩌란 게요." 그가 물었다. "그 모서리를 어떻게 고치면 되오?"
채유선이 입을 열었다. 그러나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붉은 선이 어디 있는지 알았다. 그 선이 무슨 뜻인지도 알았다. 축이 힘을 받으면 응력이 그 좁은 목으로 몰려 모서리를 쪼갠다는 것을. 그러나 그 눈은 거기까지였다. 어떻게 그 모서리를 살릴지, 목을 얼마나 넓혀야 할지, 무쇠에 무엇을 섞어야 할지는—단 한 조각도 알려주지 않았다.
"…모르겠소." 그가 뇌까렸다.
"모른다?" 홍만춘의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터질 자리는 보이는데, 어떻게 안 터지게 하는지는 안 보이오." 채유선의 손이 주먹으로 쥐어졌다. "그건 내 눈이 알려주지 않소."
홍만춘이 헛웃음을 뱉었다. "그럼 그 눈이 무슨 소용이오. 갈라진다는 걸 알면 뭐하오, 안 갈라지게 못 만드는데."
말이 비수처럼 박혔다. 채유선은 대꾸하지 못했다. 그 말이 옳았기 때문이다.
*
결국 부었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무쇠는 부어봐야 결을 알고, 결을 알아야 다음을 고친다. 홍만춘이 그렇게 말했고, 채유선은 자기 눈이 준 경고 앞에서 아무 대안도 내놓지 못한 채 그 말을 받아들였다.
쇳물이 거푸집 구멍으로 흘러들었다. 흰 빛이 모래 속으로 사라지고, 김과 유황 냄새가 확 피어올랐다. 모래가 지글거렸다.
식기를 기다리는 반나절 동안, 채유선은 거푸집 옆에 앉아 있었다. 눈을 감아도 그 붉은 모서리가 어른거렸다. 홍만춘은 다른 일을 하러 갔다가, 이따금 돌아와 그를 흘긋 보고는 아무 말 없이 다시 갔다.
해가 기울 무렵 거푸집을 헐었다. 모래를 털어내자 검회색 이음쇠가 모습을 드러냈다. 손톱만 한 부품이 아니라 주먹만 했고, 목이 잘록하게 좁아진 모양이 채유선의 도면 그대로였다.
젊은 장인 하나가 탄성을 뱉었다. "떴다! 통째로 떴어요!"
홍만춘이 다가와 이음쇠를 집어들었다. 손바닥에 올려놓고 이리저리 돌려 보더니, 고개를 주억거렸다. "제법이오. 모래가 잘 물렸구먼. 첫 판에 이만하면—"
그가 말을 마치기 전에, 채유선이 이음쇠를 건네받았다.
붉은 선이 아직 거기 있었다. 목이 좁아지는 모서리. 완성된 무쇠 위에, 그 선은 이제 실핏줄이 아니라 칼자국처럼 또렷했다.
"축을 물려 보시오." 채유선이 말했다.
"뭐라고?"
"힘을 줘 보라는 말이오. 이 이음쇠에 쇠막대를 끼우고, 지렛대로 눌러 보시오. 살살."
홍만춘은 미심쩍은 얼굴로 쇠막대를 이음쇠 구멍에 끼웠다. 젊은 장인이 막대 끝에 몸을 실었다. 처음엔 조금, 다음엔 조금 더.
딱—
무쇠가 갈라지는 소리는 짧고 메말랐다. 이음쇠가 두 조각으로 튀었다. 하나는 모루에, 하나는 흙바닥에 떨어졌다.
대장간이 조용해졌다.
홍만춘이 흙바닥에서 조각을 주웠다. 갈라진 단면을 눈앞으로 가져갔다. 잘록한 목의 모서리—채유선이 붓기도 전에 손가락으로 짚었던 바로 그 자리에서, 쇠는 깨끗하게 쪼개져 있었다.
노장인의 손끝이 미세하게 굳었다. 그는 조각을 든 채 채유선을 돌아보았다. 조금 전 헛웃음을 뱉던 얼굴이 아니었다.
"…여기." 그가 갈라진 단면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목소리가 낮게 잠겼다. "당신이 짚은 자리요. 붓기 전에. 무쇠가 들어가지도 않았을 때." 그가 침을 삼켰다. "서른 해를 쇠를 만졌소. 이런 눈은 처음 보오."
젊은 장인들이 저마다 조각 쪽으로 목을 뺐다. 누군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귀신이네, 저건."
채유선은 두 조각을 받아 맞대 보았다. 딱 들어맞았다. 그의 눈이 그린 그대로였다.
그러나 그 정확함이 그를 위로하지 못했다. 그는 갈라질 자리를 알았고, 그것을 알아맞혔고, 그리고—막지 못했다. 아는 것이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
*
사흘을 더 매달렸다.
목을 넓혀 다시 떴다. 이번엔 붉은 선이 목이 아니라 밑동으로 옮겨갔다. 밑동을 두툼하게 했더니 이번엔 모서리에 기포가 붉게 어렸다. 무쇠에 다른 화덕의 쇠를 섞어 보았다. 거푸집 모래를 더 곱게 쳤다. 밀랍 원형을 세 번 다시 깎았다.
일곱 번째 이음쇠가 나왔을 때, 채유선의 눈에서 붉은 선이 거의 사라졌다. 목에도, 밑동에도, 모서리에도. 손바닥에 올린 이음쇠는 매끈했고, 결이 곱게 잡혀 있었다.
거의, 사라졌다.
목이 좁아지는 안쪽 모서리 한 점에, 바늘 끝만 한 붉은 티가 남아 있었다. 다른 이들은 보지 못했다. 홍만춘조차 만족스러운 얼굴로 이음쇠를 두드려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하면 통을 떠도 되겠소. 이제 큰 놈으로—"
채유선이 이음쇠를 모루 위에 놓았다. 그리고 옆에 세워둔 쇠메를 집어들었다.
"뭐 하는 게요."
"아직 안 됐소." 채유선이 쇠메를 들어올렸다. "여기 한 점, 아직 붉소."
"붉다니, 어디가—"
메가 떨어졌다. 무쇠 이음쇠가 산산이 부서졌다. 사흘의 땀과 일곱 번의 실패 끝에 나온, 거의 완벽했던 그 부품이.
정적이 흘렀다. 부서진 조각들이 모루 위에서 떨었다.
홍만춘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화덕불 때문이 아니었다.
"이 미친 사람아!" 그가 소리쳤다. 대장간이 쩌렁 울렸다. "그게 사흘이오! 젊은것들이 잠 안 자고 모래 친 게 사흘이란 말이오! 바늘 끝만 한 걸 봤다고, 멀쩡한 물건을 부숴?"
"멀쩡하지 않소." 채유선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것이 홍만춘을 더 격분케 했다. "그 한 점에서 언젠가 갈라지오. 통에 김을 가두고, 힘을 받으면—"
"언젠가! 언젠가라니!" 홍만춘이 부서진 조각을 움켜쥐고 흔들었다. "그럼 세상에 안 갈라지는 쇠가 어디 있소? 만년을 버티는 무쇠가 어디 있냐고! 완벽한 걸 만들 때까지 부수면, 우리는 백 년을 부숴야 하오! 사람도 잃고, 시간도 잃고, 자네 목숨 걸린 그 일도—"
말이 거기서 끊겼다. 홍만춘도 알았던 것이다. 이 일이 얼마나 급한지, 이 서얼의 목에 무엇이 걸려 있는지.
그는 조각을 흙바닥에 내던졌다.
"자네, 완벽만 좇다 사람도 시간도 다 잃소." 그가 낮게, 그러나 뼈아프게 말했다. "그 눈이 대단한 건 알겠소. 하지만 세상은 자네 눈만큼 정밀하지 않소. 무쇠도, 사람도."
채유선은 쇠메를 쥔 채 서 있었다. 손등에 힘줄이 도드라졌다. 그는 홍만춘의 말이 옳다는 걸 머리로는 알았다. 그러나 그 붉은 티를 그냥 두는 것은, 그에게는 어미의 무덤에 침을 뱉는 일과 같았다. 어긋난 것을 알면서 눈감는 것. 그것이 세상이 어미를 죽인 방식이었다.
그가 입을 열었으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바로 그때, 대장간 문가에서 소리가 들렸다.
"흥미롭군."
*
낯선 목소리였다. 두 사람이 동시에 돌아보았다.
문가에 젊은 관원이 서 있었다. 도포 자락에 흙먼지가 앉았고, 소매에는 먹물이 배어 있었다. 현장을 둘러보다 대장간 앞을 지나던 참인 듯했다. 그가 흙바닥에 흩어진 무쇠 조각으로 다가와, 허리를 굽혀 하나를 집어들었다.
"이게 방금 부순 것인가?" 그가 조각의 단면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부서진 결을 눈에 바짝 대고 살폈다. "결이 곱군. 첫 주물치고는 놀랍도록. 이 정도 물건을 왜 부쉈나?"
홍만춘이 미간을 찌푸렸다. "뉘시오?"
관원이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답했다. "규장각 검서관, 유득경이오. 자재 실태를 살피러 내려왔소." 그러다 채유선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대가 채유선인가. 어전에서 자명종 잇니를 짚었다는."
채유선의 어깨가 굳었다. 그 이야기가 여기까지 와 있었다.
유득경이 조각을 들어 보였다. 목이 좁아진 안쪽 모서리를 가리켰다. "여기 한 점, 색이 다르오. 다른 데는 검푸른데 여기만 유독 회색이 돌아. 기포가 몰린 자린가."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걸 봤소? 그래서 부순 게요?"
채유선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가 봤다는 것을 이자가 봤다.
유득경의 입가에 옅은 웃음이 걸렸다. 감탄과 안타까움이 뒤섞인 웃음이었다. "재주가 무섭고, 결벽이 더 무섭군." 그가 조각을 손바닥에 굴렸다. "이 티 하나를 못 견뎌 사흘을 버렸겠지. 나는 자네 편이 되어줄 사람이오, 채유선. 이론이라면 나도 좀 아오. 청국서 들어온 서책이 규장각에 잔뜩 쌓여 있으니."
그가 다가와, 채유선 곁에 섰다. 홍만춘이 물러설 만큼 자연스럽게.
그리고 목소리를 낮췄다. 홍만춘도, 젊은 장인들도 듣지 못할 만큼.
"한데 하나 묻겠네." 그의 웃음기가 스르르 사라졌다. "자네, 이 일이 누구의 이권을 무너뜨리는지는 알고 시작한 겐가?"
채유선이 눈을 들었다.
유득경의 시선이 그의 어깨 너머, 대장간 문 밖을 향해 있었다. 채유선이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문 밖, 저물어가는 햇빛 속에 한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비단 두루마기를 걸친 몸집 좋은 사내가, 팔짱을 낀 채 대장간 안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흙바닥에 부서진 무쇠 조각들을, 그리고 그것을 부순 채유선을.
자재 조달을 쥔 현장 감독, 김치복이었다.
그가 언제부터 거기 서 있었는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었는지—채유선은 알 수 없었다.
김치복의 입가에도, 유득경의 것과는 전혀 다른 웃음이 걸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