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조당 문턱을 넘는 순간, 유선의 혀가 입천장에 붙었다.

전날 밤 잡물고에서 홍만춘이 짊어지고 온 놋쇠 이음새 시제를 손에 쥐었던 게 화근이었다. 완성된 물건을 보면 눈은 저 혼자 움직였다. 접쇠 다섯 겹 사이에 물린 놋쇠 판, 그 판이 김의 압을 받아 어떻게 틈으로 파고들어 스스로 메우는지—공정이 거꾸로 뇌리에 펼쳐졌고, 그 도면이 지금 이 순간까지 머릿속을 짓눌러 말을 삼켜버렸다. 하필 오늘이었다. 하필 이 자리였다.

"채유선."

심환지의 목소리는 화 한 점 없이 부드러웠다. 그것이 더 서늘했다.

"묻는 말에 답하라. 네가 그린 오랑캐 기물의 도면이 부역꾼을 상하게 하고, 서얼의 몸으로 강상을 어지럽혔다. 인정하느냐."

유선은 입을 열었다. 목울대가 움직였으나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혀뿌리가 마른 가죽처럼 굳어 위아래 이가 맞부딪는 소리만 났다. 딱, 딱, 딱.

대전 좌우에 늘어선 벽파 대신들 사이로 웃음기 섞인 숨소리가 번졌다. 누군가 소맷자락으로 입을 가렸다.

"어허, 죄인이 임금 앞에서 벙어리 흉내를 내는가."

"제 죄를 알기에 입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지요."

심환지는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유선이 입을 열지 못하는 매 순간이 자신의 논거가 되도록, 침묵을 천천히 쌓아 올렸다. 예법을 쥔 자는 시간을 쥔 자였다.

용상 아래, 정조의 눈이 유선에게 닿았다. 아무 말도 없었다. 다만 손가락 하나가 어좌 팔걸이를 가볍게 두드렸다. 시작하라는 신호도, 물러나라는 신호도 아니었다. 왕은 이 판을 열어놓고, 이기든 지든 제 손을 대지 않을 셈이었다.

유선은 소맷자락 안에서 붓과 종이를 꺼냈다. 손등의 터진 물집이 붓대에 쓸려 쓰라렸다. 떨리는 손끝으로 글자를 눌러 썼다.

—臣不能言. 願以筆代口.

신이 말을 못하니, 붓으로 입을 대신하기를 청합니다.

내관이 그 종이를 받아 어전에 올렸다. 심환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조당은 붓으로 다투는 곳이 아니라 목소리로 다투는 곳입니다. 죄인이 제 입으로 소명치 못한다면 죄를 승복한 것이니, 형을 논함이 마땅합니다."

"멈추라."

정조의 음성이 처음으로 대전을 갈랐다.

"자기변호는 죄인 본인의 격식이다. 입이든 붓이든 그 몸에서 나온 것이면 격식이 선다. 붓을 허하라. 다만—"

왕의 눈이 유득경 쪽으로 흘렀다.

"저 자가 쓰는 글의 뜻을 아는 자가 대신 읽어 조당에 아뢰는 것은 무방하다. 붓은 죄인의 것이요, 읽는 입은 신하의 것이니 강상에 어긋남이 없다."

유득경이 반보 앞으로 나섰다. 규장각 검서관의 청삼이 조명 아래 낡아 보였다. 그는 유선이 밤새 벼려 손톱 자국까지 새겨둔 조문들을, 이 자리에서 대신 소리 내어야 할 사람이었다.

유선은 붓을 놀렸다. 첫 장을 다 채우기도 전에 종이가 넘어갔다.

—大同事目. 諸物之納, 監官檢驗其品其量.

유득경이 받아 읽었다. 목소리가 처음엔 떨렸으나 조문의 무게가 그를 붙들었다.

"대동사목이라. 관에 들이는 모든 물종은 감관이 그 질과 양을 검험하도록 한다—이것은 노론 선대가 세운 법도올시다. 좌상 대감께서 누구보다 잘 아시는."

"그것이 이 옥사와 무슨 상관인가."

심환지의 웃음이 처음으로 얇아졌다.

유선의 붓이 다음 장을 짚었다. 그는 자재 장부의 사본을—조작되기 전 원본 대조표를—펼쳐 무릎 위에 놓고, 붉은 인장이 찍힌 위조 회신을 그 옆에 나란히 두었다. 손가락이 두 장부의 어긋난 숫자를 번갈아 짚었다. 삼 할. 열흘 주기. 겉만 상등품인 썩은 무쇠.

유득경이 그 손끝을 좇아 읽었다.

"화성에 든 무쇠, 겉은 상등품이나 속이 삼 할 썩었습니다. 이는 감관의 검험을 속이고 상등품 값을 궁방에 청구한 것—대동사목이 없애고자 한 방납(防納)의 죄, 바로 그것입니다. 죄인의 도면이 부역꾼을 상하게 한 것이 아니라, 도면이 부른 다섯 겹 이음새를 세 겹으로 줄여 들인 썩은 무쇠가 통을 터뜨린 것이올시다."

대전이 술렁였다.

심환지의 손이 홀(笏)을 고쳐 쥐었다. 그는 자세를 무너뜨리지 않았다.

"장부의 결손은 자재를 맡은 자의 죄일 뿐, 서얼이 오랑캐 기물을 만든 죄와는 별개다. 강상은 강상이요, 재물은 재물이다. 하나로 얽지 말라."

바로 그 지점을 유선은 기다렸다.

그의 붓이 세 번째 장을 찢을 듯 눌러 내려갔다. 이번엔 손목이 성치 않아 획이 비뚤어졌으나, 글자는 분명했다.

—物之利民者, 雖出於工匠之手, 不問其身.

유득경의 목소리가 이번엔 떨리지 않았다. 그는 유선을 한 번 돌아보고, 다시 어전을 향했다.

"백성을 이롭게 하는 물건은 장인의 손에서 나왔어도 그 신분을 묻지 않는다—이 또한 대동법을 반포할 적, 선대 노론이 명분으로 삼아 상소에 올린 문구입니다. 좌상 대감. 대감께서 '강상은 강상이요 재물은 재물'이라 나누셨습니다. 그렇다면 여쭙겠습니다. 방납의 죄를 물을 때는 물건과 신분을 나누시고, 죄인을 물을 때는 물건과 신분을 하나로 묶으십니까. 대동사목이 그렇게 두 얼굴로 쓰이는 법이었습니까."

심환지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규례를 완벽히 장악한 자는 그 규례의 원문에 갇힌다. 그가 평생 방패로 삼아온 법도가, 지금 그의 논리를 안에서부터 쪼개고 있었다. 물건과 신분을 나누면 서얼의 재주에 죄를 물을 수 없고, 하나로 묶으면 노론 선대의 상소가 강상을 어지럽힌 셈이 된다. 어느 쪽으로 발을 디뎌도 제 조상이 세운 법이 제 발목을 물었다.

"좌상."

이조판서가 낮게 불렀다. 벽파 안에서도 술렁임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유선은 숨을 몰아쉬었다. 이마에 식은땀이 맺혀 눈으로 흘러들었다. 눈앞의 조문 글자가 두 겹 세 겹으로 번졌다. 손이 떨려 붓끝에서 먹이 뚝뚝 떨어졌다. 그래도 그는 손톱 자국을 새겨둔 자리를 더듬어 다음 조문을 짚었다. 말을 잃은 몸뚱이 안에서, 오직 손끝만이 살아 움직였다.

어미 생각이 스쳤다. 손끝 하나로 비단을 짜던 관비. 그 솜씨로 만든 것은 모두 마님의 것으로 돌아갔고, 어미는 이름 한 자 남기지 못한 채 열병으로 죽었다. 지금 이 손이 짚는 조문 하나하나가, 이름 없이 죽은 자들의 목소리였다. 혀가 굳어도 손은 굳지 않았다. 유선은 그 사실 하나에 매달렸다.

홍당 뒤편, 죄인을 압송해 온 자격으로 뜰 아래 무릎 꿇은 홍만춘이 고개를 들었다. 그 무뚝뚝한 얼굴이 종잇조각을 비웃던 첫날과 달랐다. 그는 유선의 떨리는 손끝을 지켜보며 주먹을 그러쥐었다. 이 서얼은 말을 잃고도 물러서지 않았다. 상놈의 손재주가 종이쪼가리로 양반을 이렇게 몰아붙이는 광경을, 그는 처음 보았다.

유득경 또한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유선의 필담을 한 자도 놓치지 않고 받아, 노론이 스스로 판 함정 속으로 심환지를 끌고 들어갔다.

"하물며—"

유득경이 마지막 장을 읽으려는 찰나였다.

심환지가 홀을 내려놓았다. 그가 웃었다. 이번엔 화도, 여유도 아니었다. 궁지에 몰린 자가 마지막 문을 여는 웃음이었다.

"검서관. 말 잘하는구나. 규례로 규례를 치는 재주, 필시 저 벙어리 서얼이 밤새 가르친 것이렷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려 용상을 향해 읍했다.

"전하. 신이 예법으로 다투었으나, 저들이 법의 문구로 신을 얽으니 신도 법의 근본으로 돌아가겠나이다. 법이 물건을 이롭다 하면 신분을 묻지 않는다 했지요. 그 말, 신이 오늘 받겠습니다."

대전이 조용해졌다.

"허나 이롭다 함은 말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보이는 것. 대동법이 백성을 이롭게 했음은 곳간의 쌀이 증명했고, 방납의 죄가 백성을 해쳤음은 썩은 무쇠가 증명했소이다. 그렇다면—"

심환지의 눈이 유선을 정면으로 꿰뚫었다.

"저 오랑캐 기물이 정녕 백성을 이롭게 하는지, 이 자리에서 증명하시오. 물을 끓여 힘을 낸다는 그 기관, 화성의 뜰에 들여 이 조당 앞에서 돌려 보이시오. 돌아가면 서얼의 죄를 묻지 않겠고, 돌지 않으면—강상을 어지럽힌 요망한 잔재주로 다스리겠소. 붓으로도, 규례로도 그 쇳덩이가 물을 퍼 올리진 못할 터이니."

유선의 손에서 붓이 굴러떨어졌다.

정조의 손가락이 팔걸이 위에서 멈췄다.

굳은 혀 안쪽에서, 유선은 홍만춘의 놋쇠 이음새를 떠올렸다. 아직 몸통도, 밀폐도 완성되지 않은 시제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증기에 삭아버리는 조선의 가죽—그 문제는 여태 풀리지 않았다.

내관이 유선의 손에서 굴러떨어진 붓을 주워 올리려다, 심환지의 눈짓에 손을 멈췄다.

"어찌 답이 없소. 붓은 아직 죄인의 것이거늘."

유선은 붓을 다시 쥐었다. 손가락이 붓대를 잡는 데만 세 번을 미끄러졌다. 눈앞의 종이가 흐려졌다 또렷해지기를 반복했고, 뇌리에 눌러앉은 놋쇠 판의 도면이 조문 위로 겹쳐 떠올랐다. 다섯 겹 접쇠, 그 사이에 물린 놋쇠 한 장. 그러나 그 이음새를 아무리 완벽히 떠올려도, 통 몸통은 아직 무쇠 판 몇 조각에 불과했고, 김을 가두는 마지막 문—가죽 밀폐는 여전히 삭아 내리는 물건이었다.

그는 종이에 눌러 썼다.

—期日.

날짜를 청합니다.

유득경이 읽었다. 목소리 끝이 잠겼다.

"기일을 청하나이다. 기관을 완성해 조당 앞에 돌려 보이겠으나, 무쇠를 벼리고 통을 잇는 데 날이 필요하니—"

"닷새."

심환지가 말을 잘랐다. 그는 소맷자락에서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내 펼쳤다. 낡은 활자로 찍힌 법전의 한 장이었다.

"《속대전》 공전(工典). 관에서 벌이는 역사(役事)에 기한을 정해 아뢰고, 기한을 넘기면 그 일을 폐하고 맡은 자를 죄로 다스린다. 신이 넉넉히 잡아 닷새를 드리리다. 닷새 안에 저 쇳덩이가 화성 뜰에서 물을 퍼 올리면, 신은 예법을 접겠소. 넘기면—법대로."

정조의 손가락이 다시 팔걸이를 두드렸다. 왕은 이 최후 조건을 물리지 않았다. 물릴 수 없었다. 심환지가 꺼낸 것은 노론의 예법이 아니라 나라의 법전이었고, 왕이 법전을 꺾으면 왕법 전체가 흔들렸다. 심환지는 규례에 갇힌 자였으나, 궁지에서 스스로 규례의 담을 쌓아 그 안에 유선을 함께 가둔 것이다.

"윤허한다."

정조의 한마디가 대전 바닥에 떨어졌다.

"닷새 뒤, 화성 뜰에서 기관을 시연하라. 예송은 그날 시연의 결과로 판한다."

유선은 고개를 숙였다. 목덜미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가 붓을 놓자, 유득경이 재빨리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그의 팔을 부축했다. 검서관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물러나는 조당 문턱에서, 홍만춘이 뜰 아래에 무릎 꿇은 채 유선을 올려다보았다. 유선은 그와 눈을 마주쳤다. 말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굳은 손을 들어, 허공에 다섯 손가락을 폈다가 셋을 접었다. 다섯 겹, 세 겹. 홍만춘의 눈이 커졌다. 통 몸통을 닷새 안에 다섯 겹으로 잇자는 뜻이었다. 상놈 대장장이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한 번, 깊이 끄덕였다.

궐문을 나서자 겨울 바람이 유선의 젖은 목덜미를 할퀴었다. 유득경이 그를 담벼락 그늘로 끌어당겼다.

"유선이. 이겼네. 조당에서 좌상을 저리 몰아붙인 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자네 손끝이—"

유선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유득경의 소맷자락을 잡아, 언 땅바닥에 손가락으로 글자를 그었다.

—皮.

가죽.

유득경의 얼굴에서 웃음이 걷혔다.

닷새. 무쇠 통 몸통은 홍만춘의 손이 있으니 벼릴 수 있었다. 놋쇠 이음새도 시제가 있었다. 그러나 김을 가두는 마지막 관문, 피스톤과 통 사이를 메우는 밀폐 가죽은 여전히 증기의 열에 삭아 문드러졌다. 물시계를 재현하던 첫날부터 유선을 괴롭힌 그 문제. 통이 아무리 튼튼해도 가죽이 삭으면 김이 새고, 김이 새면 힘이 나지 않으며, 물은 한 방울도 오르지 않는다. 닷새 안에 물을 퍼 올리지 못하면, 요망한 잔재주로 다스린다는 심환지의 말이 그대로 집행될 것이었다.

유선은 다시 글자를 그었다. 획이 떨려 지렁이처럼 굽었다.

—無皮則不成. 五日內, 何以代皮.

가죽이 없으면 이루지 못한다. 닷새 안에, 무엇으로 가죽을 대신하는가.

유득경이 답하지 못했다. 그도 알았다. 서양의 물시계에도, 청국서 들여온 어떤 기물의 그림에도, 삭지 않는 밀폐재를 쓴 물건은 없었다. 유선의 역산은 눈앞에 있는 완성품을 거꾸로 읽을 뿐, 세상에 없는 것을 지어내지는 못한다. 삭지 않는 가죽은—아직 이 세상 어디에도 완성된 형태로 존재하지 않았다.

그때, 담장 모퉁이에서 인기척이 스쳤다. 유득경이 고개를 돌렸으나 이미 그림자는 사라진 뒤였다. 궐 담을 따라 종종걸음으로 멀어지는 자의 뒷모습만이 눈에 걸렸다. 낯익은 걸음걸이. 김치복의 겸인이었다.

유선의 손끝이 언 땅 위에서 굳었다. 조당의 판이 시연으로 넘어갔다는 것, 그리고 그 시연이 삭는 가죽 하나에 목이 걸렸다는 것—그 두 가지가 지금 자재를 쥔 김치복의 귀로 곧장 흘러들고 있었다.

닷새 안에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가죽을, 하필 그 자재의 문을 쥔 자가 먼저 알아버린 것이다.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