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뒷유리의 김이 안쪽에서부터 번졌다. 손가락이 지나간 듯, 서리 위에 획 하나가 그어졌다. 도윤은 그 획을 끝까지 보지 않았다. 대신 시동을 걸었다.

"여덟 시까지 기다릴 이유가 없어."

"도윤아." 소라가 손목을 놓지 않았다. "여긴 걔가 사라진 집이야. 걔 번호에서 사진이 왔어. 그게 정상적인 상황으로 보여?"

"정상이었으면 안 갔지." 그가 기어를 넣었다. "정상이 아니니까 가는 거야. 지안이 저기서 '와, 빨리'라고 하잖아."

승합차가 재개발 3동 앞에 섰을 때, 하늘은 아직 어두웠다. 새벽 세 시. 여덟 시까지 다섯 시간이 남아 있었고, 그 다섯 시간을 도윤은 한명진에게 주지 않기로 했다. 미루지 않는다. 이번엔 미루지 않는다.

501호 현관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손잡이를 돌리자 안에서 밀어내듯 문이 열렸다.

*

집 안은 도면과 방 수가 맞지 않았다. 거실 하나에 방 둘이어야 할 구조인데, 문이 셋 있었다. 소라가 자외선 램프를 켜자 벽마다 이름들이 젖은 채 떠올랐다. 강준. 태오. 그리고 여러 번 겹쳐 쓴 '서지안'. 지안의 이름만 유독 진했다. 이 집이 지안을 오래 붙들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거실 한가운데, 낡은 화장대가 놓여 있었다. 사진 속 그 거울이었다.

도윤은 거울을 등지지 않고, 옆걸음으로 화장대에 다가갔다. 서랍이 반쯤 열려 있었다. 그 안이 아니라, 화장대 아래 —바닥에 매트리스처럼 깔린 마룻장 하나가 들떠 있었다. 소라가 먼저 알아챘다.

"여기 뜯긴 자국 있어."

마룻장을 들어냈다. 아래에 검은 상자가 있었다. 사무용 문서함 크기의, 손때 묻은 검은 플라스틱. 도윤은 그것을 알았다. 5화 때, 한명진이 컨테이너에서 무언가를 넣던 상자. 통화하며 '완성'이라는 단어를 쓰던, 그 상자였다.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물건들이 칸칸이 정리돼 있었다. 손목시계 하나. 반지 하나. 아이 신발 한 짝. 라이터. 그리고 노란 별 모양 열쇠고리 — 지안의 것. 각 물건 밑에 라벨이 붙어 있었다. 손글씨 라

벨. 날짜와 이니셜. '18.03 K.J', '19.11 P.T'—강준. 정태오. 그리고 지안의 열쇠고리 밑에는 '19.06 S.J'.

"이거…" 소라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물건마다 날짜가 있어. 완성된 날짜."

도윤은 상자 밑바닥을 손으로 쓸었다. 종이 한 뭉치가 접혀 있었다. 펼치자 표였다. 열과 행으로 나뉜, 회계 장부처럼 반듯한 표. 왼쪽 열에는 주소. 그 옆에 조항 번호와 날짜. 오른쪽 끝에는 금액. 그리고 금액 옆, '예약'이라 적힌 칸에 사람 이름 같은 이니셜들이 줄줄이 적혀 있었다.

"수거 장부야." 도윤이 낮게 말했다. "완성될 때마다 나온 물건을, 여기 적힌 사람들한테 팔았어. 한명진은 우연히 생기는 죽음을 정리한 게 아니야. 죽음이 나올 현장을 골라서, 순서대로 완성시켜서, 물건을 뽑아내서, 예약자한테 넘긴 거야."

숫자가 그것을 증명했다. 서른일곱 건. 소라의 서류철과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급성 심정지 스물아홉 건. 각 건마다 완성 날짜와 물건과 금액이 붙어 있었다. 연쇄는 저절로 굴러간 게 아니었다. 한명진이 신입을 하나씩 조항에 밀어넣어, 손으로 굴린 것이었다.

도윤은 가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6개월 동안 지니고 다닌 종이. 지안이 실종되기 전, 도윤의 책상 위에 남겨둔 미완성 메모. 처음 봤을 때는 문장이 끊겨 있어 무슨 뜻인지 몰랐다. *오빠, 이 일 그만—*. 거기서 끊긴 줄 알았다.

그런데 장부의 필체와 지안의 메모를 나란히 놓자, 끊긴 게 아니었다. 지안은 이 장부를 봤던 거다. 그래서 메모의 뒷말이 없었던 게 아니라, 뒷말을 쓸 시간이 없었던 거다.

"*오빠, 이 일 그만*—" 도윤이 소리 내어 읽었다. 손이 떨렸다. "그만두라는 게 아니었어. 지안이는 이걸 알아챈 거야. 물건 빼돌리는 걸. 그래서 날 여기서 떼어놓으려고 했어. 내가 다음 제물이 되기 전에."

지안은 오빠가 왜 위험한지 설명하지 못했다. 설명할 틈도 없이 사라졌으니까. 6개월 동안 도윤은 그 끊긴 문장을 붙들고, 동생이 자길 원망하며 떠난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지안은 마지막까지 오빠를 밀어내려 했던 거다. 이 자리에서.

"고인의 뜻이라니." 도윤의 목에서 쉰 소리가 났다. "저 인간은 사람을 죽여서 만든 물건에 그딴 이름을 붙였어."

"착실하시네요, 서도윤 씨."

문 하나가 열렸다. 도면에 없던 세 번째 문. 그 안에서 한명진이 걸어 나왔다. 다림질한 셔츠. 여전히 웃는 얼굴. 손에는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 집 자체가 그의 무기였으니까.

"여덟 시까지 못 참으셨네. 뭐, 저도 예상했어요. 형제분들이 다 성질이 급하시더라고요." 한명진은 검은 상자를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반가운 듯 눈을 접었다. "찾으셨구나. 그거, 서지안 씨가 참 오래 뒤졌던 물건이에요."

"닥쳐."

"진짜예요. 이 방에서, 딱 지금 서도윤 씨가 선 그 자리에서." 한명진이 화장대 거울 쪽으로 턱을 까딱였다. "동생분이 마지막에 뭘 했는지 아세요? 우리한테 잡히지도 않았어요. 도망친 것도 아니고. 스스로 들어갔어요. 거울로. 여섯 번째 조항이 완성되기 직전에, 자기가 먼저 거울 안으로 발을 넣었죠."

소라가 도윤 앞을 막아섰다. 도윤은 그녀의 어깨를 잡아 옆으로 밀었다. 시야를 가리지 말라는 뜻이었다.

"왜인지 아세요?" 한명진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즐거워졌다. "연쇄를 멈추려고요. 마지막 조항을 자기가 삼켜버리면, 이 집이 다음 제물을 못 부른다고 생각한 거예요. 미련하죠. 자기 하나 갇힌다고 연쇄가 끊길 리가 없는데. 물건은 어차피 나왔고—" 그가 상자를 가리켰다. "저는 그걸 팔았고. 서지안 씨는 그냥, 거울 안에서 아직도 오빠를 기다리는 미끼가 됐을 뿐이에요."

거울 속에서 지안이 손바닥을 유리에 붙였다. 사진 그대로. 입이 벌어졌다. *와. 빨리.*

도윤의 시야가 좁아졌다. 온몸이 저 거울로 끌려가려 했다. 한 번 남은 능력. 지안을 위해 아껴둔 단 한 번. 지금 쓰면, 시차가 역전된 그의 상은 완전히 그를 앞질러 유리 안으로 나올 것이다. 그러면 밖에 남는 건 그림자고, 갇히는 건 도윤이다.

"쓰지 마." 소라가 그의 손목을 붙들었다. "그거 쓰면 네가 갇혀."

도윤은 거울을 봤다. 지안을 봤다. 그리고 6개월 동안 자신을 갉아먹은 질문을 마주했다. 지안이 정말 스스로 들어갔는지. 저 안의 것이 지안인지, 지안을 흉내 내는 무언가인지. 물증 없이는 알 수 없었다. 언제나처럼, 설명 가능한 원인부터 찾고 싶었다. 조금만 더 생각하면, 조금만 더 자료를 모으면—

그 습관이 지안을 등 뒤에서 잃게 했다. 태오를 잃게 했다.

"미루지 않아." 도윤이 말했다.

한명진의 웃음이 굳었다. 그의 눈이 도윤의 손끝을 따라, 마룻장 아래에서 끌어올린 검은 상자로 옮겨갔다. 도윤은 상자 뚜껑을 발끝으로 밀어 열었다. 안쪽 라벨이 드러났다. 날짜, 이니셜, 그리고 서른일곱 줄의 수거 기록.

"이게 사업이었네요." 도윤의 목소리가 낮게 갈렸다. "우연한 죽음을 정리한 게 아니라. 쪽지 있는 집만 골라서, 신입을 마지막 조항에 밀어넣고, 완성되면 나오는 물건을 뽑아서 예약자한테 팔았어. 태오도. 강준도. 여기 이니셜 하나하나가 사람이잖아."

한명진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얇아졌다. 하지만 대꾸는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대답이었다.

도윤은 가슴 주머니에서 지안의 미완성 메모를 꺼냈다. 젖은 채 끊긴 획. *오빠, 이 일 그만—.* 6개월 동안 원망으로 읽었던 문장. 이제야 뒷말이 보였다. 지안은 이 장부를 먼저 봤다. 오빠가 이 사업의 다음 제물이 되리란 걸 알아챘다. 그래서 떼어놓으려 했다. 시간이 없어서 문장을 끝내지 못한 채, 자기가 먼저 조항을 밟은 것이다.

"미련하다고요." 도윤이 장부를 상자 위에 던졌다. "지안은 당신 장사를 끊으려고 자기를 걸었어요. 그게 미련한 거면, 당신 서른일곱 줄은 뭔데."

한명진의 얼굴에서 부드러움이 완전히 벗겨졌다.

그는 소라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손을 자기 손목에 그대로 둔 채, 다른 손을 들었다. 거울 속 상이 이미 손을 들고 있었다—그보다 반박자 먼저. 상이 그를 향해 웃었다. 도윤이 웃기 전에.

"한 번은 지안을 위해 아꼈어." 그가 거울에 손을 뻗었다. "그게 지금이야."

"도윤아!"

손바닥이 유리에 닿았다.

차가움이 팔을 타고 올라왔다. 세상이 뒤집혔다. 도윤의 시야가 그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 지안의 마지막 30초. 지안이 이 방에서 마지막으로 본 것. 화장대 거울. 그 앞에 선 자기 손. 여섯 번째 조항이 완성되던 순간, 지안이 거울 안으로 발을 들이던 그 순간의 시야.

그리고 지안의 옆에, 누군가 서 있었다.

지안의 시야가 옆으로 돌아갔다. 그 사람의 얼굴을 담았다. 지안이 거울로 들어가는 걸 말리지 않고, 지켜보던 사람.

도윤의 숨이 멎었다.

거울 앞, 6개월 전 그 자리에 서 있던 사람은—

소라였다.

지안의 시야 속 소라는 지금보다 젊었다. 머리가 길었고, 표정이 없었다. 아니, 표정이 없는 게 아니었다. 울고 있었다. 소리 없이. 손을 뻗었다가, 거두었다가, 다시 뻗지 못한 채.

지안의 입이 움직였다. 소라를 향해. 도윤은 지안의 시야 안에서 그 말을 읽지 못했다—소리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안이 마지막으로 본 것은 분명했다. 소라의 얼굴. 소라의 눈물. 그리고 소라가 지안의 손을 잡지 않고 놓아버린, 그 벌어진 손가락.

30초가 끝났다.

세상이 다시 뒤집혔다. 도윤은 자기 시야로 돌아왔다. 유리에서 손을 떼려 했다. 떼어지지 않았다.

거울 속 상이 먼저 손을 뗐다. 도윤의 손은 아직 유리에 붙어 있는데, 거울 안의 도윤은 이미 손을 내리고, 한 발을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 유리 밖으로.

"떼!" 소라가 그의 손목을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 "도윤아, 손 떼라고!"

도윤의 손바닥이 유리에서 뜯겨 나왔다. 뒤로 넘어졌다. 소라가 그를 받쳤다. 그의 코에서 피가 흘러 입술을 적셨다. 시야가 반쯤 흐렸다. 하지만 그는 소라를 봤다. 자기를 받친, 눈물 젖은 얼굴을.

6개월 전과 똑같은 얼굴이었다.

"너였어." 도윤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지안이가 거울로 들어갈 때. 네가 거기 있었어. 옆에서. 손을 놓았어."

소라의 얼굴이 굳었다. 그를 받친 팔이 미세하게 떨렸다.

한명진이 소리 내어 웃었다. 손뼉까지 쳤다. 그 소리가 텅 빈 방에서 여러 겹으로 울렸다.

"이제야 재밌어지네." 그가 손가락으로 소라를 가리켰다. "말 안 했어요, 윤소라 씨? 서도윤 씨한테. 3년 전 강준 씨. 6개월 전 서지안 씨. 그 두 사람이 완성될 때, 옆에 누가 있었는지."

소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도윤에게서 손을 떼지도 않았다. 그저 이를 악문 채, 도윤의 눈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받았다. 그것이 그녀의 대답이었다.

"이 사람 조건, 서도윤 씨도 알잖아요." 한명진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이어졌다. "4시 14분에 거울 보면 죽는다. 강준 씨한테서 옮겨붙은 거. 근데 그거, 왜 옮겨붙었을까요? 조건이 그냥 저절로 걷지는 않아요. 넘겨받으려면, 넘긴 사람의 완성 순간에 같이 있어야 하거든요. 아주 가까이. 손이 닿는 거리에서."

도윤은 소라를 봤다. 소라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강준 씨 완성될 때 옆에 있어서 조건을 물려받았고, 그걸 넘기려고 서지안 씨한테 접근했어요. 근데 서지안 씨는 안 죽었죠. 스스로 거울로 들어가버렸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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