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이 회차는 아직 그래픽 노블 장면이 제작되지 않아 일반 노블로 보여드려요.

그의 이름 석 자가 종이 위에서 마르지 않은 채 번지고 있었다.

도현우 승객은 다음 정거장에서 반드시 자리에서 일어나 앞문 앞에 서 있으십시오.

현우는 그 문장을 오래 노려봤다. 붉었다. 분명 붉었다. 그런데 그 아래로, 젖은 잉크가 한 줄 더 스며 내려오기 시작했다. 이번엔 색이 이상했다. 검지도 붉지도 않았다. 마른 핏자국 같은 갈색과, 물에 씻긴 회색 사이 어딘가. 현우가 지금껏 본 적 없는 색이었다.

가장 의심스러운 자를 앞좌석에서 격리하십시오.

"뭐가 떴냐고." 지안이 다시 물었다. 목소리가 낮았다. "얼굴이 안 좋아요."

현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눈을 깜빡였다. 색을 다시 읽으려 했다. 붉게 타오르면 함정, 검게 가라앉으면 진짜. 두 개의 답 중 하나여야 했다. 그런데 그 문장은 응시할수록 붉어졌다가, 다시 검게 내려앉았다가, 결국 어느 쪽으로도 정하지 않은 채 흐려졌다. 판독안이 미끄러졌다. 초점을 잡으려 할수록 글자가 젖은 유리 너머처럼 뭉개졌다.

"…색이 안 잡혀요." 현우가 겨우 내뱉었다. "지금까지는 붉으면 붉고, 검으면 검었어요. 이건… 둘 다예요. 아니, 둘 다 아니에요."

지안이 종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녀 눈엔 색이 보이지 않는다. 문체만 보인다. 그녀는 입술을 달싹이며 문장을 소리 없이 읽었다. 한 번, 두 번.

"'가장 의심스러운 자를.'" 그녀가 중얼거렸다. "누가 가장 의심스러운데요? 주어가 없어요. 판단은 당신한테 맡겼어요. 이건… 규칙이 아니라 질문이에요."

버스가 흔들렸다. 히터가 낮게 그르렁댔다. 현우의 시선이 저절로 통로 건너편으로 넘어갔다.

윤재혁.

세 번째 줄, 창가. 재혁은 팔짱을 끼고 눈을 반쯤 감고 있었지만, 자는 척이라는 걸 현우는 알았다. 아까 3번 좌석 유인 때, 제일 먼저 몸을 일으켰던 게 저 남자였다. 남을 미끼로 보내는 걸 주저하지 않는 눈. 위기 때 가장 먼저 계산을 끝내는 얼굴. 현우와 닮았다. 그래서 싫었다.

머릿속이 저절로 움직였다. 재혁을 앞좌석으로 몰면, 통로가 확보된다. 비상 망치는 두 번째 줄 오른쪽. 앞문은 격리된 재혁 등 뒤. 만약 격리한 쪽이 지워진다면, 나는 두 번째 줄 왼쪽에 붙어 있으면—

거기서 현우는 숨을 들이켰다.

계산이 끝나 있었다. 이미. 조항을 읽은 지 몇 초 만에. 누굴 격리하고, 어디에 서고, 어느 방향으로 몸을 빼야 나만 사는지, 전부. 손이 떨렸다. 이건 3년 전과 똑같은 손이었다. 동생을 태워 보내던 그 손. 나는 안 탔던 그 손.

"현우 씨." 지안이 그의 팔을 잡았다. "지금 누구 봤어요."

"…안 봤어요."

"봤어요. 저기, 저 사람." 지안이 턱짓으로 재혁 쪽을 가리켰다. 목소리를 더 낮췄다. "당신, 방금 저 사람이 제일 의심스럽다고 생각했죠. 표정에 다 나왔어요."

현우는 입을 다물었다.

지안이 종이와 현우의 얼굴을 번갈아 봤다. 그녀의 눈이 좁아졌다. 서류를 검토할 때의 눈. 어긋난 항목을 찾아내는 눈.

"이상해요." 그녀가 말했다. "이 조항은… 당신이 누굴 의심할지 이미 알고 쓴 것 같아요."

버스 안이 조용해졌다. 히터 소리만 남았다.

"무슨 말이에요." 현우가 물었다.

"들어봐요." 지안은 봉투를 무릎에 놓고 두 손을 종이 쪽으로 폈다. 강의하듯이. "규칙이란 건, 모두한테 똑같이 적용돼야 규칙이에요. '통로로 나가지 마라.' 이건 모두한테 같은 명령이에요. '추우면 3번 좌석으로 가라.' 이것도 조건만 맞으면 누구든. 그런데 이 문장은요."

그녀가 손끝으로 허공을 짚었다. 보이지 않는 글자를.

"'가장 의심스러운 자.' 이건 사람마다 답이 달라요. 나한텐 저 남자가 안 의심스러워요. 도경 씨한텐 당신이 제일 의심스러울 수도 있고. 그런데 이 문장은 정확히 한 사람—당신을 겨냥해서 떴어요. 당신 이름 바로 아래. 당신만 색이 보이는 조항으로."

현우의 등이 서늘해졌다. 히터 때문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지안이 마지막 항목에 도장을 찍듯 말했다. "이건 당신용으로 만든 문장이에요. 당신이 위기에 몰리면 제일 먼저 누굴 의심하는지, 어떻게 움직이는지—그걸 알고 있는 누군가가."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현우는 알았다. 지안이 옳았다.

목도리 남자가 사라졌을 때, 현우는 제일 먼저 문 옆으로 몸을 뺐다. 3번 좌석 유인 때도, 재혁을 막아선 건 논리였지만 그 순간 몸은 이미 통로 반대편으로 기울어 있었다. 매번 그랬다. 위기가 오면 먼저 남을 재고, 자기 살 자리를 찾고. 그리고 매번 후회하고. 3년 동안.

누군가 그 패턴을 보고 있었다.

"확인해야 돼요." 현우가 말했다. "이 색이 붉은지 검은지. 격리를 하라는 건지, 하면 안 된다는 건지. 이 조항이 진짜인지 함정인지 알아야 다음 정거장에서—"

"현우 씨." 지안이 그의 소매를 붙들었다. "그거 읽을 때마다 당신 뭔가 잃죠. 아까부터 봤어요. 눈을 세게 뜨고 나면 잠깐 멍해져요. 뭘 잃는 거예요."

"…괜찮아요."

거짓말이었다. 어제는 노래 제목을 잃었다. 오늘은 후렴 두 마디. 뭐였는지 이제 떠오르지도 않는다. 그저 잃었다는 사실만 남았다.

하지만 이 색을 못 읽으면 다음 정거장에서 앞문 앞에 서야 한다. 명령대로. 그게 진짜 규칙이면 서야 산다. 함정이면 서면 죽는다. 판별해야 했다. 지금.

현우는 종이를 정면으로 마주 봤다. 숨을 멈추고, 초점을 조항 한가운데로 밀어 넣었다. 회색과 갈색 사이를 억지로 벌려 색을 끄집어내려고.

글자가 저항했다.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색은 그냥 배어 나왔다. 그런데 이번엔 손에 힘을 줘 물속의 것을 건지듯, 응시를 밀어붙여야 했다. 관자놀이가 조여왔다. 눈 안쪽에서 뜨거운 것이 번졌다.

색이 벌어졌다. 아주 잠깐. 조항 위로 붉은 기가 스치는가 싶더니—

머릿속에서 뭔가가 뜯겨 나갔다.

현우는 헉, 하고 좌석 등받이를 붙잡았다. 무엇을 잃었는지 확인하려고 본능적으로 손을 얼굴로 올렸다. 콧대. 눈썹. 턱선. 손가락으로 자기 얼굴을 더듬었다. 이상했다. 손끝에 닿는 건 그대로인데, 머릿속에 그려지는 자기 얼굴이 뿌옜다. 거울 없이 떠올려보려 해도, 자기 얼굴의 왼쪽 절반이—어떻게 생겼더라. 눈 밑에 점이 있었나. 눈꼬리가 처졌던가.

"현우 씨!" 지안이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내 얼굴이." 현우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내 얼굴이… 안 떠올라요. 반쪽이."

지안의 시선이 안내문으로 튀었다. 그녀가 숨을 들이켰다. 종이 왼쪽 여백—지금껏 아무것도 없던, 그저 얼룩 몇 점만 흐릿하던 그 자리에, 잉크가 짙어지고 있었다. 무의미한 번짐 같았던 그 얼룩이, 지금은 무언가의 윤곽처럼 뭉쳐 갔다. 선이. 곡선이. 사람 옆모습 같은.

"저기." 지안이 손끝을 떨며 가리켰다. "저 얼룩, 아까보다 진해졌어요."

현우는 그것을 봤다. 그리고 확신이 왔다. 저건 내 얼굴이다. 내가 잃은 반쪽이 저기로 옮겨 갔다. 읽을 때마다 나는 저 여백에 조금씩 적히고 있었다. 노래도, 얼굴도, 언젠가는 이름도.

읽을수록 나는 지워진다. 그리고 저쪽은—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앞쪽에서 도경의 목소리가 터졌다.

"안 돼. 이건 지켜야 돼."

현우가 고개를 들었다. 도경이 운전석에서 몸을 절반 일으켜 안내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검은 조항—현우와 지안이 진짜라고 판별한 조항 중 하나에 그의 시선이 박혀 있었다.

"기사님, 지금 뭐 하려는 거예요." 현우가 물었다.

"여기 적혀 있잖아." 도경이 손가락으로 종이를 짚었다. "'운행 중 안전벨트를 착용하지 않은 승객은 즉시 착용하십시오.' 근데 저 뒤에… 저 사람." 그가 재혁 쪽을 가리켰다. "벨트 안 맸어. 아까부터. 저러다 지워지면—내 승객이야. 한 명도 안 잃어. 내가 가서 매줘야—"

도경이 벨트를 풀고 운전석에서 일어섰다.

버스가 운행 중이었다. 운전석을 비운다는 것 자체가 무엇을 어기는 건지, 아무도 확신할 수 없었다. 안내문에 '운전 중 기사는 자리를 이탈하지 마시오'라는 조항이 있었던가. 없었던가. 진짜였던가. 도경은 규칙을 전부 지키려다, 어느 규칙끼리 부딪히는지 보지 못했다. 벨트 조항을 지키러 가면서, 자리 이탈이라는 또 다른 선을 밟으려 하고 있었다.

세계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아까 목도리 남자가 사라지기 직전, 공기가 깜빡였던 그 진동.

그리고 그 순간, 현우의 머리가 저절로 움직였다.

도경이 통로로 나서면, 만약 지워지는 게 이탈한 사람이라면, 나는 그가 나선 반대쪽으로—두 번째 줄 왼쪽으로 붙어 있으면 세계가 깜빡여도 그의 삭제에 휩쓸리지 않는다. 도경을 앞세우면 그가 먼저 시험된다. 그가 사라지지 않으면 안전한 거고, 사라지면 나는—

현우는 자기 몸이 이미 좌석 왼쪽으로 기울어 있는 걸 느꼈다. 손잡이를 왼손으로 잡고 있었다. 도경을 방패로 세우는 자세로.

또였다.

또 이러고 있었다.

"기사님, 앉아요!" 현우가 소리쳤다. 목소리가 자기 계산을 찢고 나왔다. "지금 자리 이탈이 벨트 조항보다 위험할 수 있어요. 재혁 씨! 벨트! 스스로 매요, 지금 당장!"

재혁이 눈을 번쩍 떴다. 상황을 파악하는 데 반 초. 그가 욕설을 뱉으며 벨트를 낚아채 채웠다. 딸깍.

세계의 진동이 멎었다. 공기가 다시 무거워졌다. 아무도 사라지지 않았다.

도경이 통로 한복판에 어정쩡하게 선 채 현우를 봤다. "…자네가 왜 소리를 질러."

현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손이 아직 왼쪽 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놓았다. 손바닥에 손잡이 자국이 붉게 남아 있었다.

방패로 세우려 했다. 저 사람을. 또.

"현우 씨." 지안이 그를 봤다. 다 봤다는 눈이었다. 하지만 나무라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물었다. "방금, 도경 씨가 나설 때. 당신 어디로 몸 뺐어요."

"…왼쪽으로요."

"두 번째 줄 왼쪽."

"네."

지안이 안내문을 다시 봤다. 오래. 그리고 그녀가 무언가를 깨달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현우 씨. 우리 계속 이 조항을 붉냐 검냐로 풀려고 했잖아요. 함정이냐 진짜냐. 그런데 그게 아니에요." 그녀가 봉투를 꼭 쥐었다. "이 조항은 우리한테 뭘 하라고 명령하는 게 아니에요. 당신이 뭘 할지 맞히는 거예요. 당신이 의심하고, 계산하고, 몸을 빼는 그 순서를. 이건 규칙이 아니라—당신 사용 설명서예요. 누군가 당신을 몇 번이나 지켜보고 쓴."

현우는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온몸에서 힘이 빠졌다. 동시에, 처음으로, 무언가가 또렷해졌다.

저쪽은 나를 습격하지 않는다. 문으로 뛰어들지도, 목을 조르지도 않는다. 저쪽은 그냥 나를 읽는다. 3년 전 그날부터, 위기 앞에서 반드시 남을 먼저 의심하고 자기만 살 길을 찾는 나를. 그리고 그 습관을 미끼로, 내가 스스로 누군가를 밀어내 지워지게 만든다.

그러면 답은 하나였다. 저쪽의 예측을 벗어나면 된다. 내가 하지 않을 행동을 하면.

"지안 씨." 현우가 일어섰다. "이번엔 안 밀어낼게요. 다음 정거장에서 앞문 앞에 서라는 거, 나 안 서요. 격리하라는 거, 아무도 안 격리해요. 저쪽이 내가 그렇게 할 걸 아니까—안 할래요."

지안의 입가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그거예요. 예측을 깨는 거."

현우가 다시 안내문을 봤다. 이번엔 색을 읽으려 하지 않았다. 그냥 봤다. 결심을 확인하듯이.

그런데 종이가, 또 움직였다.

여백에서, 현우의 짙어진 얼룩 옆에서, 새 잉크가 배어 나왔다. 갱신 주기도 아니었다. 정거장도 아니었다. 방금 현우가 결심을 입 밖에 낸 그 순간, 종이가 응답하듯 젖어들었다.

한 글자, 한 글자. 회색도 갈색도 붉은색도 아닌, 그 애매한 색으로.

현우의 눈이 문장을 따라갔다. 그리고 심장이 멎었다.

도현우 승객은 방패를 세우지 않기로 결심할 것입니다. 그때 두 번째 줄 왼쪽 손잡이에서 손을 뗄 것입니다.

방금 그가 한 행동이었다. 손잡이 자국이 아직 손바닥에 남아 있는, 조금 전 그 동작.

문장이 한 줄 더 내려왔다.

그리고 예측을 깨겠다고 말할 것입니다. 앞문 앞에 서지 않겠다고. 그 결심마저, 우리는 이미 적어두었습니다.

현우는 종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지안이 그의 얼굴을 봤지만, 그녀 눈엔 색이 보이지 않았다. 문체만 보였다. 미래형이라는 것만.

"뭐라고 적혔어요." 지안이 물었다.

현우의 입술이 벌어졌다. 그러나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내가 안 밀어내겠다고 결심한 것까지, 예측을 깨겠다고 마음먹은 것까지, 저쪽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면 누가—대체 언제부터, 어디서, 나를 이렇게까지 읽고 있는가.

종이 아래, 그의 얼굴 반쪽이 옮겨 간 얼룩이, 천천히, 눈을 뜨듯 짙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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