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이 문장, 행정 서식이 아니에요."

지안은 그 말을 뱉고도 자리로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몸을 틀어 좌석 위에 놓아둔 흰 봉투를 집었다. 손때에 모서리가 닳은 봉투였다. 그녀는 봉투에서 접힌 A4 한 장을 꺼내 안내문 옆 유리에 나란히 갖다 댔다.

"입원 확인서예요. 우리 엄마."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지방 병원 원무과에서 뗀 거. 이런 거 하루에 수백 장 봤어요. 저 이런 문서 만드는 일 했거든요."

현우는 두 종이를 번갈아 봤다. 왼쪽 병원 서식, 오른쪽 심야 운행 안내문. 그의 눈에는 오른쪽 종이의 첫 두 줄이 검게, 아래 두 줄이 붉게 번져 있었다. 지안에게는 검은 것만 보인다고 했다. 그런데 지안은 지금 그가 붉게 보는 문장은 건드리지도 않고 검은 문장 하나만 손끝으로 짚고 있었다.

"봐요. 병원 서식은 이래요." 지안이 자기 종이를 톡톡 쳤다. "'환자 김순자는 2024년 1월 3일부터 신경외과에 입원하였음을 확인함.' 주어가 누군지 딱 박혀 있어요. 언제부터인지, 어디에인지. 예외 조항도 밑에 깨알같이 붙어 있고요. '단, 퇴원 시 본 확인서는 효력을 상실함.' 행정 문서는 이렇게 써요. 빠져나갈 구멍을 자기가 먼저 막아놔요. 감정이 없어요."

그녀의 손끝이 안내문으로 옮겨갔다.

"근데 이건요. '정차 중 하차를 금합니다.' 주어가 없어요. 누가 금하는데요? 언제까지요? 예외는요? 없어요. '금합니다' 딱 한마디. 이건 규정이 아니에요. 규정인 척 흉내 낸 거예요." 지안이 고개를 돌려 현우를 봤다. "누가 사람 겁주려고 공문 문체 베껴 쓴 거."

현우의 등줄기로 소름이 지나갔다. 이 여자는 붉은 잉크를 보지 못한다. 색이라는 무기가 없다. 그런데도 오직 문장의 골격만으로, 그가 판독안으로 갈라낸 것과 똑같은 경계선을 그어내고 있었다.

"그럼." 현우가 목소리를 골랐다. "당신이 보기에, 이 넷 중에 진짜는 뭡니까."

"넷?" 지안의 눈썹이 미세하게 올라갔다. "저한텐 둘이라니까요. '하차 금지'랑 '통로 이동 금지'. 이 두 개는 문장이 짧고 건조해요. 나머지는—" 그녀가 손끝을 허공에서 멈췄다. 그녀 눈에 보이지 않는 자리를. "안 보여요. 근데 방금 그쪽 표정 보니까, 안 보이는 데 뭔가 있죠?"

현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3번 조항이 머릿속을 긁었다. 사라진 승객을 기억하는 자는 즉시 신고하십시오. 지금 그가 이 여자에게 진실을 말하는 것이 곧 자기 신고였다.

"말 안 해도 돼요." 지안이 앞질렀다. "말하면 그쪽이 위험해지는 문장인 거죠? 그럼 이렇게 해요."

그녀가 봉투를 다시 옆구리에 끼었다.

"제가 보이는 걸 말할게요. 그쪽은 그게 맞으면 고개만 끄덕여요. 틀리면 가만히 있고. 그럼 그쪽은 아무 말도 안 한 거예요. 신고할 게 없잖아요."

현우는 그녀의 눈을 마주 봤다. 서류 뭉치에서 오탈자를 잡아내던 그 서늘함이, 지금은 그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는 이 버스에서 처음으로, 누군가를 밀어낼 동선이 아니라 붙잡을 동선을 계산하는 자신을 느꼈다.

"두 개." 현우가 낮게 말했다. "당신이 짚은 두 문장. 그건 지켜야 살아요."

그리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 한 번.

지안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내려갔다.

"됐네요." 그녀가 말했다. "동맹."

버스가 덜컹했다. 히터 소음 사이로 도경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뭐가 됐다는 거예요, 둘이서만." 룸미러 속 도경의 눈이 두 사람을 오갔다.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나도 좀 압시다. 내 버스, 내 승객이에요."

"기사님." 지안이 봉투를 두드렸다. "저 종이에 붙은 규칙들, 다 지킬 필요 없어요. 지킬수록 위험한 게 섞여 있어요."

"그런 위험한 말을 어떻게 그렇게 쉽게 하나." 도경이 안전벨트를 풀고 몸을 반쯤 돌렸다. "규칙이 붙었으면 지키는 게 맞지. 그 목도리 손님도 규칙을 어겨서—"

말이 뚝 끊겼다. 도경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방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놓친 사람처럼 눈을 깜빡였다. "…무슨 손님?"

현우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도경은 목도리 남자를 기억하지 못했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만이.

"됐어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현우가 급히 잘랐다.

버스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눈보라 속에서 헤드라이트가 뿌옇게 번졌고, 앞유리 위쪽 전광판에 다음 정거장 표시가 떴다. 도경이 브레이크를 밟았다. 버스가 정거장 표지판 앞에 멈췄다.

문이 열렸다. 눈보라만 밀려들어왔다. 나갈 수 없는 문이었다.

바로 그때 안내문이 스르르 갱신됐다. 종이 위 잉크가 물에 번지듯 새로 배어 나왔다. 현우의 눈에 새 문장 두 줄이 떠올랐다. 하나는 검게, 하나는 붉게.

검은 문장: 정차 중 좌석 벨트를 착용하십시오.

붉은 문장: 창밖에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면 대답하십시오.

"새로 떴어요?" 지안이 종이로 다가섰다. 그녀는 잠시 문장을 훑고는 코웃음을 쳤다. "'벨트를 착용하십시오.' 이건 진짜예요. 동사가 명확해요. 대상도 분명하고. 근데—"

그녀가 갑자기 말을 멈췄다. 두 번째 줄, 그녀 눈에는 보이지 않는 자리를 향해 손끝이 허공을 더듬었다.

"여기, 또 뭐 있죠. 뭐라고 써 있어요?"

현우는 붉은 문장을 소리 내지 않고 읽었다. 대답하십시오. 심장이 조여왔다. 이건 명백히 유인이었다. 창밖에서 들리는 이름. 이름을 부르는 소리. 나갈 수 없는 문. 대답하는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기사님, 벨트요." 현우가 도경에게 말했다. "다들 벨트만 매세요. 그거 하나만."

"그건 알아서 매지." 도경이 말했다. "다른 건?"

"다른 건 없어요." 현우가 못 박았다. "벨트만."

그 순간 눈보라 속에서, 아주 희미하게,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우야.

현우의 온몸이 얼어붙었다. 그 목소리를 그는 알았다. 3년 동안 밤마다 들었던 목소리. 그날 버스에 태워 보낸 동생의 목소리였다.

—현우야, 여기야. 나 여기 있어.

그의 손이 저절로 문 쪽으로 반 뼘 뻗어나갔다. 대답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붉은 문장이 눈앞에서 시뻘겋게 타올랐다. 대답하십시오.

"현우 씨."

지안의 목소리가 채찍처럼 그를 때렸다. 그녀는 현우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창밖 소리를 그녀는 듣지 못했다. 하지만 현우가 붉은 문장 앞에서 무너지고 있는 것은 보였다.

"그쪽 눈에 지금 새빨간 거 떠 있죠." 지안이 낮고 빠르게 말했다. "당신이 아까 그랬잖아요. 지킬수록 위험한 거라고. 지금 당신이 지키려는 거, 그거 붉은 거예요. 아니에요?"

현우의 이가 딱딱 부딪혔다. 목소리가 다시 그를 불렀다. 그는 눈을 감았다. 저건 동생이 아니다. 동생은 3년 전에 지워졌다. 저건 내가 방금 잃어버릴 뻔한 이름을, 내 죄책감을 그대로 흉내 낸 미끼다.

"…맞아요." 현우가 이를 악물고 뱉었다. "붉은 거예요. 아무도 대답하지 마요. 창밖에서 뭐가 들려도. 절대."

도경이 눈살을 찌푸렸다. "창밖에서 뭐가 들려?"

"안 들리면 됐어요." 현우가 헐떡였다. "벨트만 매요."

버스 안에 벨트 채우는 소리가 다섯 번 났다. 도경이, 지안이, 하늘이, 재혁이. 그리고 현우가. 창밖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가, 이윽고 눈보라 소리에 묻혔다.

문이 닫혔다. 버스가 정거장을 떠났다.

아무도 사라지지 않았다.

현우는 자기 손바닥이 땀에 젖은 것을 알아챘다. 정거장 하나를 무사히 넘겼다. 겁주는 괴담에 휘둘려서가 아니라, 색과 문장이라는 두 개의 자로 재서. 그와 지안이 각자 다른 방향에서 그은 선이 정확히 같은 자리에서 만났다.

"이게 되네요." 지안이 봉투를 안은 채 낮게 웃었다. 웃음에 물기가 배어 있었다. "겁먹을 필요 없었어. 읽으면 되는 거였어."

"됐어. 뭐가 어떻게 된 건데." 도경이 손바닥으로 핸들을 쳤다. "설명 좀 해봐요. 당신들 지금 뭘 아는 거야. 손님 하나가—" 다시 말이 끊겼다. 그는 자기가 말하려던 게 무엇이었는지 또 놓쳤다. 도경의 눈이 흔들렸다.

현우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도경은 세 번째 승객을, 목도리 남자를 붙잡으려다 자꾸 흘리고 있었다. 존재 자체가 지워진 사람을 붙잡으려는 헛손질이었다.

"기사님." 현우가 조심스레 말했다. "기사님은 아무도 안 잃겠다고 생각하죠."

도경의 어깨가 굳었다. "당연하지. 예전에도 눈길에서 손님 하나 잃었어. 그날 이후로 한 명도, 단 한 명도 안 잃어. 그게 내 원칙이야."

"그래서 위험해요." 현우가 말했다. "규칙이 붙으면 다 지키려고 하시잖아요. 근데 저 종이엔 지키면 죽는 게 섞여 있어요. 다 지키면 다 죽어요."

"헛소리." 도경이 안내문을 노려봤다. "규칙은 지키라고 있는 거야. 하나라도 놓치면 그게 사람을 잡는 거지. 나는 다 지킬 거야. 하나도 안 어길 거야. 그게 다 살리는 길이야."

현우는 등에 소름이 돋았다. 도경의 강박은 진심이었고, 진심이라 위험했다. 여덟 번째 승객이 노리는 건 바로 저런 사람이었다. 규칙을 의심 없이 완벽히 따르는 사람. 붉은 조항까지 성실하게 지킬 사람.

"기사님, 부탁이에요." 현우가 말했다. "다음에 안내문 바뀌면, 매기 전에 저랑 지안 씨한테 먼저 물어봐요. 딱 그거 하나만."

"흥." 도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룸미러 속 그의 눈은 안내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지켜야 한다는 표정으로. 전부.

그때 안내문이 다시 스르르 번지기 시작했다.

정거장을 떠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갱신 주기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잉크가 종이 아래쪽으로, 지금껏 비어 있던 여백으로 스며 내려갔다. 현우의 눈이 그리로 끌려갔다. 그리고 그의 숨이 멎었다.

새로 배어 나온 문장은, 이번엔 규칙의 어투가 아니었다. 조언처럼, 다정하게 씌어 있었다. 붉은색으로.

붉은 문장: 추위에 약한 사람은 두꺼운 옷을 가진 승객 옆에 앉는 것이 안전합니다.

'안전합니다'. 그 단어가 붉게 타올랐다. 지금까지 붉은 조항은 '~하라' '~하십시오'라고 명령했다. 지안이 문체로 잡아냈던 건조하고 어색한 명령형. 그런데 이번엔 규칙이 아니라 생존 조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부드럽고, 그럴듯하고, 도우려는 척.

지안도 종이로 다가섰다. 그녀는 그 문장을 오래 들여다봤다. 그리고 처음으로, 확신이 흔들린 얼굴을 했다.

"이건…"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건 잘 모르겠어요. 문체가 아까랑 달라요. 명령이 아니라 권유예요. 이런 건… 실제 안전 안내문에도 있어요. '~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건 진짜 서식에서도 써요."

현우와 지안의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 다 알았다. 방금까지 통하던 자가, 색과 문체라는 두 개의 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것을.

"점점 어려워지는 거예요." 현우가 중얼거렸다. "저쪽도 우리가 어떻게 골라내는지 보고 있어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종이 맨 아래—여태 한 번도 글자가 채워진 적 없던 마지막 줄에, 잉크가 천천히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한 글자, 한 글자.

이번엔 '승객'이나 '여러분'이 아니었다.

붉은 글씨로, 또박또박, 이름이 적혔다.

**도현우 승객은 다음 정거장에서 반드시 자리에서 일어나 앞문 앞에 서 있으십시오.**

현우의 이름이. 그의 이름이. 안내문에.

지안이 그의 얼굴을 봤다. "왜 그래요. 뭐가 떴어요."

현우는 대답할 수 없었다. 종이 위에서 그의 이름 석 자가, 붉게, 천천히, 젖은 잉크처럼 번지고 있었다.

이제 규칙은 승객 전체가 아니라, 그를 하나만 콕 집어 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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