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이 회차는 아직 그래픽 노블 장면이 제작되지 않아 일반 노블로 보여드려요.

"이건 무슨 색이지."

현우의 목소리가 히터 소음에 묻혔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도 대답을 바라고 물은 게 아니었다.

앞의 두 문장은 검었다. 정차 중 하차 금지. 통로 이동 금지. 그 글자들은 종이에 눌러 찍힌 도장처럼 단단하게 검었다. 그런데 세 번째 조항은— 획을 그을수록 붉었다. 잉크가 마르지 않은 상처처럼 종이 위에서 부풀었다.

**3. 사라진 승객을 기억하는 자는 즉시 신고하십시오.**

그리고 그 아래, 방금까지 없던 네 번째 문장이 다시 배어 올랐다. 이번에도 붉었다.

**4. 추위를 느끼면 즉시 3번 좌석으로 이동하십시오.**

현우는 눈을 부릅떴다. 검은 두 문장과 붉은 두 문장. 종이 한 장에 두 종류의 잉크가 섞여 있었다. 처음에는 조명 탓인 줄 알았다. 눈을 감았다 떴다. 여전했다. 오히려 붉은 획이 더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눈에서 뜨거운 것이 훅 빠져나가는 감각과 함께, 3년간 밤마다 흥얼거리던 멜로디의 한 소절이 머릿속에서 뚝 끊겼다. 제목은 이미 지난밤에 잃었다. 이번엔 후렴의 두 마디였다.

읽을 때마다 뭔가가 빠져나간다. 현우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뭘 자꾸 그렇게 봐요."

윤재혁이었다. 뒷좌석에서 다리를 통로로 뻗은 채, 눈은 반쯤 감고 있으면서도 목소리는 날이 서 있었다.

"안내문. 바뀌었어요." 현우가 말했다.

"바뀌긴 뭐가 바뀌어. 아까부터 두 줄 그대로구먼." 재혁이 코웃음을 쳤다. "혼자 밤새 뭐 보이는 거 아니에요? 이 눈 속에 갇혀서 다들 돌 지경인데."

두 줄. 현우는 숨을 멈췄다. 재혁의 눈에는 검은 두 문장만 보인다는 뜻이었다. 붉은 조항은 자신에게만.

아니. 그건 확신이 아니었다. 현우는 다시 통로 쪽으로 몸을 돌렸다.

"서지안 씨. 지금 저 종이에 문장 몇 개 보여요?"

앞자리 여자가 봉투를 무릎에 얹은 채 고개만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안내문 위를 천천히 훑었다. 위에서 아래로, 다시 아래에서 위로. 서두르지 않는 눈이었다.

"두 개요." 지안이 말했다. "하차 금지, 통로 금지. 왜요?"

두 개. 현우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붉은 글자는 오직 그에게만 보였다. 사라진 승객을 기억하는 유일한 자에게. 그 붉은 조항이 지목하는 대상도, 결국 그였다.

"아저씨, 이 사람 아까부터 좀 이상해." 뒷자리에서 이하늘이 끼어들었다. 스무 살이나 됐을까 싶은 얼굴에 후드를 뒤집어쓰고, 무릎을 세워 안고 있었다. "혼자 안내문 노려보고, 아까는 없는 사람 얘기하고. 목도리 아저씨가 어쩌고 했잖아요. 목도리 아저씨가 누군데요?"

현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남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버스 안에서,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현우 하나뿐이다. 여기서 그 이름을 다시 꺼내는 순간, 안내문 세 번째 조항이 그의 목을 조를 것이다. 사라진 승객을 기억하는 자는 즉시 신고하라. 신고하지 않으면— 그다음은 적혀 있지 않았다. 적혀 있지 않아서 더 무서웠다.

"…착각했어요." 현우가 겨우 밀어냈다. "없어요. 그런 사람."

기사석에서 한도경이 룸미러로 그를 살폈다. 오십 줄의 기사는 핸들에 팔을 걸친 채 목소리를 낮췄다.

"승객 양반. 이런 데 갇히면 사람이 헛것도 봐요. 나도 옛날에 봤어. 근데 지금 우리한테 필요한 건 서로 안심시키는 거지, 겁주는 게 아니야." 그가 잠시 멈췄다. "없는 사람 얘긴 그만합시다. 다들 무섭잖아."

내 버스, 내 승객. 도경의 눈에는 그 원칙이 박혀 있었다. 사람을 안심시키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버스에서 사람을 안심시키는 일은, 규칙을 못 보게 만드는 일이기도 했다.

현우는 입을 다물었다.

그때 서지안이 몸을 돌려 통로 쪽을 향했다. 그녀의 입술이 소리 없이 움직였다. 하나, 둘, 셋. 손가락은 쓰지 않았다. 눈으로만 좌석을 짚어 나갔다.

"이상하네." 그녀가 혼잣말처럼 흘렸다.

"뭐가요." 현우가 반사적으로 물었다.

"아뇨." 지안이 봉투를 고쳐 안았다. 하얀 서류 봉투. 모서리가 손때로 반질거렸다. "타실 때 보니까 저 뒤까지 자리가 꽤 찼던 것 같은데. 지금 세어보면… 기사님 빼고 다섯이에요. 나, 저 학생, 저 아저씨, 그쪽, 그리고 뒤에 조는 분. 다섯." 그녀가 미간을 좁혔다. "출발할 때 제 옆 통로에 서 있던 남자가 있었던 것 같은데. 목도리… 목도리 두른."

현우의 심장이 튀었다.

"기억나요?" 그가 저도 모르게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아뇨." 지안이 이마를 문질렀다. "기억나는 게 아니라… 자리 하나가 비어 있는데 왜 비었는지가 안 떠올라요. 서류를 오래 만지면 이래요. 숫자가 안 맞으면 몸이 먼저 알거든요. 결재 올라온 인원이랑 실제 인원이 하나 어긋나면, 이유는 몰라도 여기가 먼저 근질거려요." 그녀가 자기 관자놀이를 톡톡 쳤다.

숫자가 안 맞으면 몸이 먼저 안다. 현우는 그 말을 삼켰다. 이 여자는 목도리 남자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숫자의 빈자리'는 감지하고 있었다. 삭제는 사람을 지웠지만, 지운 자리의 형태까지는 다 메우지 못했다.

처음으로, 지안의 눈이 현우의 얼굴 위에 머물렀다. 착각을 넘겨보는 눈이 아니었다. 뭔가를 재는 눈이었다.

"그쪽은 아는 거죠? 그 비는 자리." 그녀가 조용히 물었다. "아까부터 혼자만 이 버스를 다르게 보고 있잖아요."

"……"

"대답 안 해도 돼요." 지안이 다시 앞을 향했다. "근데 그 눈, 저 알아요. 뭔가 봤는데 말하면 미친 사람 취급받을까 봐 참는 눈. 저도 자주 지어봤거든요."

뒷자리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하늘이 후드 주머니에서 볼펜을 꺼내고 있었다. 뚜껑을 이로 뽑더니, 자기 왼쪽 손등에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삐뚤빼뚤한 글씨였다.

"뭐 해." 재혁이 흘긋 봤다.

"이름." 하늘이 고개를 안 들고 답했다. "여기 사람들 이름. 무서워서요. 이렇게 갇혀 있으면 나중에 누가 누군지도 헷갈릴 것 같아서. 아저씨 윤재혁, 서지안 언니, 기사 아저씨 한도경." 볼펜이 손등을 눌렀다. "그쪽은요? 이름."

"도현우."

"도현우." 하늘이 또박또박 적었다. 그리고 잠깐 손등을 들여다보다 중얼거렸다. "네 명인가. 다섯 명이었나. 아까 하나 더 있었던 것 같은데."

현우는 그 손등을 봤다. 재혁, 지안, 도경, 현우. 넷. 목도리 남자의 이름은 없었다. 하늘조차 그를 적어두지 못했다. 삭제 전에 이름을 알지 못했으니까.

그리고 이상한 건 현우 자신이었다. 그는 방금까지 이 버스에 몇 명이 있는지 셀 수 있었다. 지금은 헷갈렸다. 원래 일곱이었나. 여섯이었나. 목도리 남자를 넣으면 여섯, 빼면 다섯. 그런데 좌석표 정원은 분명 일곱이라고 어딘가에서 봤다. 기사 포함 일곱. 그럼 지금 버스에 있어야 할 승객은 여섯. 실제로 앉아 있는 건 다섯.

하나가 빈다. 목도리 남자를 지우고도, 여전히 하나가 빈다.

현우의 등줄기가 곤두섰다. 목도리 남자가 여섯 번째였다면, 아직 세지 못한 일곱 번째가 있다. 아니— 명단에 없는 여덟 번째.

그 순간, 통로 왼편 앞쪽에서 찬 기운이 흘러왔다.

히터는 돌아가고 있었다. 버스 안은 답답할 만큼 데워져 있었다. 그런데 3번 좌석 근처만, 발목께에서 냉장고 문을 연 것 같은 냉기가 새어 나왔다. 현우는 그쪽으로 손을 뻗었다. 손바닥에 서리가 앉을 듯한 온도. 좌석 등받이의 천이 축축하게 얼어 있었다. 아무도 앉지 않은 자리. 창밖 눈보라와 상관없이, 그 한 좌석만 얼어 있었다.

붉은 조항이 떠올랐다. 추위를 느끼면 즉시 3번 좌석으로 이동하십시오.

추위. 3번 좌석. 안내문은 사람들을 저 얼어붙은 자리로 부르고 있었다.

"어우, 여기 왜 이렇게 추워." 재혁이 몸을 일으켰다. 그가 통로로 나오더니 앞쪽으로 걸어왔다. 팔뚝을 문지르며. "히터 이쪽만 안 나오나? 아저씨, 앞쪽 자리 좀 옮겨 앉을게요."

그가 향하는 곳은 3번 좌석이었다.

현우의 몸이 먼저 움직였다. 그는 통로로 튀어나와 재혁의 앞을 막았다. 어깨로 벽을 만들듯.

"거기 앉지 마요."

"뭐?" 재혁이 멈췄다. 두 사람의 얼굴이 한 뼘 거리였다. "지금 나한테 명령해요?"

"추워서 옮기는 거잖아요."

"추우니까 옮기지, 안 추운데 옮겨요?"

"그니까 안 돼요." 현우의 입에서 논리가 아니라 직감이 튀어나왔다. "추워서 저기로 가라는 거. 그게 함정이에요."

"함정?" 재혁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 "누가 그래요. 어디 적혀 있어요? 종이에? 나 좀 봅시다." 그가 목을 빼 안내문을 노려봤다. "두 줄이네. 하차 금지, 통로 금지. 지금 통로에 서 있는 건 당신인데? 규칙 어기는 건 당신이잖아."

현우의 목구멍이 막혔다. 재혁의 말이 옳았다. 붉은 조항은 재혁에게 보이지 않는다. 그가 볼 수 있는 규칙에 따르면, 통로에 나와 남을 막고 선 현우 쪽이 위반자였다.

"이유를 대요." 재혁이 밀어붙였다. "왜 못 앉게 하는데. 논리적으로. 나 자리 옮기는 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야."

"……"

"거봐. 대답 못 하잖아." 재혁이 코웃음을 쳤다. "이 양반 아까부터 혼자 헛것 보더니. 비켜요. 나 추워요."

현우는 비키지 못했다. 대신 3번 좌석의 냉기를, 붉게 부풀던 획을, 방금 자기 기억에서 뽑혀 나간 두 소절을 떠올렸다. 검은 규칙은 지키면 안전했다. 목도리 남자는 검은 규칙을 어겨서 사라졌다. 그런데 붉은 규칙은— 색이 달랐다. 진짜 규칙과 다른 색으로 적힌 명령. 그 명령은 사람을 안전한 자리에서 얼어붙은 자리로 부르고 있었다.

지킬수록 위험한 규칙.

"이건." 현우가 낮게 말했다. 자기 확신에 자기가 놀란 목소리였다. "우릴 유인하는 거예요."

"뭐가."

"저 안내문. 우리가 스스로 저 자리로 걸어가게 만들려는 거라고요." 현우가 3번 좌석을 가리켰다. "추우니까 옮겨라. 그럴듯하죠. 근데 진짜 규칙이면 왜 하필 제일 추운 자리로 가라고 해요? 상식이면 히터 잘 나오는 데로 가라고 하지. 이건 도우려는 문장이 아니라, 우리 몸이 알아서 저기로 걸어가게 짜놓은 미끼예요."

재혁의 입이 반쯤 벌어졌다. 반박하려다 멈췄다.

버스 안이 조용해졌다. 히터 소음만 웅웅거렸다. 지안이 봉투를 안은 채 통로 쪽으로 완전히 몸을 틀고 있었다. 하늘은 볼펜을 쥔 손을 멈췄다. 도경은 룸미러로 세 사람을 번갈아 봤다.

"보이지도 않는 문장 가지고 억지 부리네." 재혁이 뒤늦게 중얼거렸지만, 아까의 기세는 빠져 있었다. 그는 3번 좌석을 흘긋 보고, 자기 팔뚝의 소름을 문지르더니, 결국 원래 자리로 물러났다. "…거기 히터 고장 났나 보네. 됐어요. 안 앉아."

현우는 숨을 뱉었다. 손이 떨렸다. 이번엔 아무도 밀어내지 않았다. 재혁을 저 자리로 보내지 않았다. 아주 작은 승리였다. 그러나 그의 몸은 이미 계산하고 있었다. 저 여자 봉투 안에 뭐가 있나. 저 학생은 왜 자꾸 이름을 적나. 도경 아저씨는 왜 자꾸 조용히 시키나. 혹시 이 중에 여덟 번째가—

현우는 그 생각을 이로 물어 끊었다. 또였다. 살리겠다고 막아서 놓고, 다음 순간 누구부터 의심할지 재고 있었다.

그때 서지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봉투를 좌석에 내려놓고, 통로를 걸어 안내문 앞으로 갔다. 두 걸음. 그리고 멈춰서 종이를 한참 들여다봤다. 아까처럼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이번엔 훨씬 오래. 손가락이 봉투를 만지던 습관대로, 허공에서 획을 따라 그렸다.

"현우 씨." 그녀가 종이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그쪽 눈엔 문장이 몇 개 보인댔죠. 넷?"

현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이 곧 신고였다.

지안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얼굴에는 두려움도 흥분도 없었다. 서류 뭉치를 앞에 두고 오탈자를 찾아낸 사람의, 서늘하고 확신에 찬 표정이었다.

"저한텐 두 개만 보여요. 근데 됐어요, 몇 개가 보이든." 그녀가 안내문을 손끝으로 톡, 짚었다. 검은 문장을. "이거요. '금합니다'. 이 문장."

"……"

"이 문장, 행정 서식이 아니에요."

버스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3번 좌석의 냉기가 통로를 타고 현우의 발목을 감았다.

지안이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지, 현우는 아직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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