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각. 사각.
톱질 소리가 사방의 거울에서 한꺼번에 밀려왔다. 렌은 뒷걸음질하려다 멈췄다. 물러날 곳이 없었다. 붉게 물든 거울마다 렌 아닌 윤곽이 하나씩 서 있었다—얼굴 없는 머리, 규칙문을 손처럼 늘어뜨린 팔. 어제 계단통에서 스쳤던 그것이, 지금은 수천 개로 불어나 렌을 에워쌌다.
가슴께가 뜨거워졌다. 시선을 내리자 다섯 파편 중 하나가—맨 왼쪽, 세이렌 옆에 붙어 있던 조용한 실루엣이—붉게 익어가고 있었다. 정지 화면의 픽셀이 하나씩 타는 것처럼.
**[G A R B A G E C O L L E C T O R]** **[집행 대상 : 오류 로그 '렌', 및 딸린 잔해 전부]** **[소거를 개시한다]**
"잔해." 렌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얘들이 잔해라고?"
대답은 없었다. GC는 협상하지 않았다. 팔 끝에서 늘어진 규칙문이 바닥을 훑자, 붉은 실금이 거울 바닥을 격자로 갈라 렌의 발밑까지 뻗어왔다. 파편의 붉은 물이 세이렌 쪽으로 한 칸 번졌다.
렌은 그 파편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온도가 없었다. 데이터에 온도가 있을 리 없는데도, 렌은 그것이 식어가는 걸 느꼈다.
"안 돼."
발을 뗐다. 통로 쪽으로. 반 걸음도 못 갔다.
**[이동 판정 : 거부]**
발바닥이 바닥에 못 박힌 듯 붙었다. 시야 앞에 새 규칙문이 붉은 테두리를 두르고 떠올랐다. GC가 방금 쳐 올린 봉쇄 결계였다.
**[봉쇄 결계 발효]** **[규칙문 : 허가받지 않은 자는 이 영역에서 이동할 수 없다.]**
렌은 그 한 줄을 읽었다. 두 번 읽었다. 세 번째엔 입꼬리가 미미하게 당겨졌다.
"허가받지 않은 자, 라."
GC의 윤곽들이 일제히 렌을 향해 한 걸음씩 좁혀왔다. 발밑 격자가 조여들며 이동 불가 판정이 온몸을 결박했다. 세이렌 옆 파편의 붉은 물이 두 칸째 번지고 있었다. 시간이 없었다.
렌은 규칙문의 '허가'라는 단어를 노려봤다. 이 문장엔 허가하는 주체가 없다. GC는 '허가받지 않은 자'를 막겠다고 했지, '누가 허가하는지'를 정의하지 않았다. 청소부는 데드 로그를 학습했지만—문법의 구멍까지 다 메운 건 아니었다. 정면 좌표만 잠갔지, 권한의 출처는 빈칸으로 뒀다.
"어제 학습한 게 그거였구나. 넌 내가 단어를 뒤집는다는 것만 봤지."
렌은 실행 권한을 떠올렸다. 2층 클리어 보상. 계층 내 일부 시스템 명령을 직접 호출할 수 있는 권한. 그걸 규칙문의 빈칸에 밀어 넣었다.
**[DEAD LOG ─ 저강도 오독 시도]** **[대상 정의 : '허가' 주체 = 미정의]**
"이 방의 허가 주체는—"
렌은 손가락을 제 가슴으로 돌렸다.
"—나야. 실행 권한 보유자. 등록해."
**[오독 처리 : '허가' 주체 ← 실행 권한 보유 개체 '렌']** **[재판정 : 렌 = 허가자. 허가자는 스스로에게 이동을 허가한다]** **[부하 계수 0.3 적용 … 저강도 오독 확정]**
GC의 규칙문이 렌 자신을 향해 뒤집혔다. '허가받지 않은 자는 이동할 수 없다'—렌은 이제 허가받은 자였다. 허가한 것도 렌 자신이었다. 봉쇄 결계는 렌을 가두려고 짠 그물이었는데, 그물의 매듭을 렌이 쥐고 있었다.
발밑 격자가 렌의 발등에서 미끄러져 나갔다.
"그리고." 렌이 세이렌 파편 옆의 붉게 익어가는 조각을 감싼 채 덧붙였다. "얘들도 내 허가 안이야. 딸린 잔해라며. 나한테 딸렸으면, 내 허가받은 거잖아."
**[허가 범위 : 개체 '렌' 및 소속 데이터 → 이동 허가]**
GC의 윤곽 수천 개가 동시에 멈칫했다. 조여들던 격자가 반대로 후퇴했다. 청소부는 자기가 세운 규칙문에 발이 묶였다. 렌을 막는 문장이, 렌만 통과시키는 문장으로 읽혔으니까.
렌은 통로 쪽으로 걸었다. 이번엔 발이 붙지 않았다.
"소거하고 싶으면." 어깨 너머로 던졌다. "허가 안 받은 규칙문부터 다시 써."
**[이동 판정 : 허용]**
붉은 격자가 렌의 등 뒤에서 무너졌다. 거울 속 수천 GC가 렌을 붙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그 손들은 전부 반사의 유리면에 막혔다. 렌은 잠겼던 통로 문 앞에 손을 댔다. 문은 허가자에게 열렸다. 소리 없이.
가슴께에서, 붉게 익던 파편의 물이 딱 거기서 멈췄다. 더 번지지 않았다. 세이렌 옆 실루엣이 반쯤 그은 채로 붙어 있었다. 완전히 꺼지진 않은. 렌은 그 반쯤 탄 조각을 눈에 담고, 통로로 발을 들였다.
문이 등 뒤에서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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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로는 좁고 아래로 꺾였다. 벽은 반 픽셀씩 떨렸고, 렌의 몸도 걸음마다 반 픽셀씩 어긋났다. 톱질 소리는 문 너머로 잦아들었지만 사라지진 않았다. 벽 틈새로 붉은 실금이 렌을 따라 흘렀다. GC는 통로 밖에서 여전히 계산 중이었다.
렌이 계단참에 다다랐을 때, 시야 위쪽에 낯선 창이 떴다. GC의 붉은 문장이 아니었다. 회색. 감정 없는 고딕체.
**[일시 정지]** **[집행 보류 ─ 사유 : 관찰 권한 상위 지시]**
GC의 톱질 소리가 뚝 끊겼다.
렌은 계단 중간에 서서 그 회색 창을 올려다봤다. 벽의 붉은 실금이 서서히 흐려지며 통로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청소부가 물러났다. 스스로가 아니라, 누군가의 명령으로.
**[메모 (내부) : 흥미롭군. 허가 주체 재정의라. 2층 자기지시 역설에 이어 세 번째 유형.]** **[메모 (내부) : 학습 프로세스가 또 한 발 늦었다. 이건 삭제하기 아까운데.]**
관찰자. 1화에서 방을 내려다보던, '흥미롭군'이라던 그 존재였다. 렌은 이 메모가 자기더러 읽으라고 띄운 게 아님을 알았다. 실수로 새어 나온 시스템 로그거나—일부러 흘린 미끼거나.
**[가비지 컬렉터 : 집행 재개 요청. 오류 확산 위험. 소거 우선.]** **[관찰 권한 : 기각. 대상 유지. 관찰 지속.]**
두 창이 위아래로 겹쳐 떴다. GC가 죽이겠다고 했고, 회색 창이 아직은 아니라고 눌렀다. 렌은 그 아래 마지막 줄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어드민 D.K. ─ 대상 '렌' 관찰 유지]**
"…D.K."
이름 이니셜만 스쳤다. 그리고 창은 접혔다. GC는 통로 밖으로 물러났고, 렌은 계단참에 혼자 남았다.
이해가 안 됐다. 청소부는 오류를 삭제하는 데 사정을 두지 않는다. 그런데 그 위에 있는 누군가는, 삭제할 힘을 쥐고도 렌을 살려뒀다. 흥미롭다는 이유로. 아까웠다는 이유로.
렌은 벽에 손을 짚었다. 손끝이 반 픽셀 어긋난 벽을 통과했다가 다시 맞물렸다.
"왜 안 죽여."
혼잣말에 답할 존재는 없었다. 회색 창은 사라졌고, GC의 붉은 실금도 자취를 감췄다. 다만 렌은 알았다. 누군가 자신을 저울에 올려놓고, 아직 어느 쪽으로 기울일지 정하지 않았다는 걸. 삭제와 통제 사이. 렌은 지금 그 저울 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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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참 구석, 렌은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기보다 그냥 앉고 싶었다. 가슴께로 손을 가져갔다. 다섯 파편이 얇게 떨렸다. 세이렌의 실루엣이, 이전보다 조금 더 뚜렷하게 렌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봤어." 세이렌의 목소리가 파편 안에서 새어 나왔다. 여전히 물기 없이 건조했다. "네가 또 혼자 결정하는 거."
렌은 손을 멈췄다.
"이번엔 아무 손상도 안 났어. 부하 계수 0.3이었어. 약하게 비틀었다고. 너한테 물어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그거." 세이렌이 렌의 말을 끊었다. "누구한테 하는 변명이야."
렌은 입을 다물었다.
"저 규칙문에 우리도 묶여 있었어. 붉게 물든 애, 너 아까 감쌌지. 걔 이름 알아? 아니, 걔가 자기 이름 기억은 하는지 물어봤어? 아니면 또 네가 알아서 '내 허가 안이야' 하고 끼워 넣었어? 우리를 살린다면서, 우리한테 살고 싶은지는 안 물어. 그때도 그랬어."
"그때는—"
"마지막 던전." 세이렌의 실루엣이 흔들렸다. "네가 판을 다 짰지. 누가 앞에 서고, 누가 문을 열고, 누가 마지막에 남을지. 우린 네가 그은 선 위에서 하나씩 사라졌어. 넌 한 번도, 우리한테 '어떻게 하고 싶냐'고 안 물었어. 결정은 늘 네가 했으니까. '내가 하면 확실하다'고."
렌의 손이 무릎 위에서 오그라들었다. 반박할 문장이 목 끝까지 올라왔다가 내려갔다. 세게 이기면 세이렌이 갉힌다. 약하게 이기면 손상은 없다. 그러니 이번엔 옳았다—고, 계산부터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세이렌의 말대로였다. 렌은 방금도 물어보지 않았다. 붉게 익던 그 파편에게, 살고 싶냐고.
"…미안." 렌이 겨우 뱉었다. "습관이야. 손이 먼저 나가."
"습관이 사람을 지워, 렌." 세이렌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네가 나쁜 놈이라서가 아니야. 네가 확신이 너무 강해서. 확신하는 만큼, 남을 안 믿어서. 다음엔 물어. 결정하기 전에. 그게 안 되면, 넌 우릴 살려도 또 우릴 잃어."
파편이 다시 얇게 잦아들었다. 세이렌의 실루엣이 다섯 중 하나로 돌아갔다. 렌은 손바닥으로 가슴을 눌렀다. 그 안에 다섯이 있었다. 세이렌, 바토리, 그리고 이름을 물어보지 못한 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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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은 정산창을 열었다. 삭제 카운트가 회색 숫자로 떠 있었다.
**[DELETE COUNT : 17,180]** **[감소율 : 초당 3.9 (누적 가속 +30%)]**
봉쇄 결계 오독은 저강도였다. 손상은 없었고, 카운트도 크게 튀지 않았다. 하지만 오류 지분은 조금씩 쌓였다. 세게 이길수록 빨리 지워진다. 약하게 이겨도, 이기면 남는 건 부채였다.
렌은 손안의 복원 조각을 폈다. 한 개. 동료 하나를 완전히 되살리려면 다섯 개. 던전을 정상 클리어할 때마다 하나씩. 정직하게 규칙을 지키면 카운트도 도로 미소 증가한다. 오독하면 조각은 못 얻고 카운트만 뛴다.
계산은 명확했다. 지나칠 만큼.
"약하게 이겨라." 렌이 조각을 쥐었다. "그리고—혼자 결정하지 마라."
두 줄. 이제 규칙은 두 줄이었다. 하나는 시스템이 가르쳐줬고, 하나는 세이렌이 가르쳐줬다.
렌은 일어섰다. 아래로 꺾인 계단이 어둠 속으로 이어졌다. 3층. 그 아래로 수백 층. 최하층 경계 구역엔 동료 원본이 있다는 소문이 돈다고, 어디선가 들었던가. 확실치 않았다. 확실한 건 지금 손안의 조각 하나뿐이었다.
"다섯 개." 렌이 계단 아래를 내려다봤다. "너희 하나당 다섯 개. 카운트 관리하면서. 던전을 계속 내려가면서. 이번엔—."
말끝을 삼켰다. 이번엔 아무도 안 버린다, 는 다짐이 입 안에서 익숙하게 굴렀다. 세이렌이 방금 들려준 말이 그 위에 겹쳤다. 다짐만으로는 또 지운다. 물어야 한다. 결정하기 전에.
렌이 첫 계단에 발을 얹었다. 몸이 반 픽셀 어긋났다가 맞물렸다.
그때 시야 정중앙에 창이 하나 떠올랐다.
붉지도 회색도 아니었다. 검은 바탕에 흰 글씨. 다른 창들과 결이 달랐다. 시스템 로그가 아니라—누군가 렌 개인에게 직접 보낸, 메시지의 형식이었다.
**[직접 접속 : 어드민 D.K.]** **[렌. 대화가 아니라 통보다.]** **[너를 통제할지, 지울지. 나는 아직 정하지 않았다.]** **[다음 던전이 결정한다. 규칙을 지켜 통과하면 관찰을 유지하고, 또 규칙을 뒤집으면—]**
문장이 거기서 한 박자 멈췄다. 커서가 깜빡였다. 렌은 숨을 삼켰다.
**[그날 우리 길드가 무너진 방식으로, 너를 정리하겠다.]**
렌의 발이 계단 위에서 굳었다.
우리 길드.
그 말을 아는 사람이, 이 세계에 렌 말고 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