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이 회차는 아직 그래픽 노블 장면이 제작되지 않아 일반 노블로 보여드려요.

붙잡힌 소매가 무거웠다. 하연서는 그 무게를 뿌리칠 수 없었다.

"악몽."

목소리가 자기 것 같지 않았다. 하연서는 그 단어를 골랐다. 거짓이 아니라서 골랐다. 거짓이 섞이면 진유하는 알아챈다. 저 순박한 눈은 거짓의 냄새를 이상하게도 잘 맡는다.

"자주 꾼다. 불이 나오는 꿈. 사람이… 죽는 꿈. 검을 잡으면 가끔 그게 되살아난다."

진유하의 손이 소매에서 스르르 풀렸다. 뿌리친 것이 아니라 놓아준 것이었다.

"그럼 왜 밤에 혼자 검을 잡아. 그런 꿈을 꾸면서."

"…멈추면 더 무서워서."

이 말은 계산하지 않았다. 입 밖으로 새어 나온 뒤에야 하연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았다. 진유하는 한참을 아무 말 없었다. 그러다 물통을 하연서 손에 다시 쥐여 주었다.

"나 어릴 때, 무서운 밤엔 아버지가 그냥 옆에 앉아 계셨어. 아무것도 안 하고. 그럼 좀 나았거든."

달빛이 대숲을 가르며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았다. 하연서는 그 빛 속에서 오래 침묵했다. 그리고 계산이 아닌 곳에서, 이용가치를 셈하지 않는 어떤 자리에서 말이 튀어나왔다.

"내일 서고에 가려고 했다. 상급 서고. 정사대전 기록을."

"상급 서고? 거긴 임시 열람증 없으면 못 들어가는데."

"네가 있잖아."

진유하가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웃었다. 그 웃음은 하연서가 삼 년간 본 어떤 미소와도 달랐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웃음. 셋째 사형이 그런 식으로 웃었다.

"같이 가자. 나도 그 대전 얘기 궁금했어. 우리 마을 늙은이들 말이 다 다르거든."

하연서는 그 순간 자기가 무엇을 얻었는지 알았다. 서고의 문. 금서고로 가는 다리. 그런데 이번에는 그 셈이 개운하지 않았다. 저울 접시 위에 진유하의 웃음이 얹혀 있었고, 그것은 도구의 무게가 아니었다.

*

이튿날 정오, 두 사람은 상급 서고에 들어섰다.

먹과 좀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천장까지 닿는 서가 사이로 늙은 사서가 진유하의 열람증을 확인하고 손짓으로 통과시켰다. 하연서는 고개를 숙이고 어눌한 신입의 걸음걸이를 유지했다. 발끝의 무게중심을 일부러 흩뜨렸다. 모용성이 그걸 읽었으니, 이제 발을 감추는 데도 신경을 써야 했다.

"뭘 찾는 거야?"

진유하가 속삭였다.

"정사대전 논공행상 기록. 그리고 패검문 정벌 전말."

"패검문… 그 사파 놈들 말이지. 우리 마을 훈장님이 그러는데 그놈들이 어린애까지 잡아먹었대."

하연서의 손끝이 서가 모서리에서 아주 잠깐 멈췄다.

"…그런 얘기가 많지."

진유하는 눈치채지 못했다. 하연서는 정벌 관련 죽간과 장부를 끌어내렸다. 무림맹 공식 기록. 붉은 인장이 찍힌 관보. 정사대전 공적비 명단의 원본. 손이 익숙하게 움직였다. 이런 문서를 읽는 법은 스승이 가르쳤다. '싸움은 검으로 하되, 이기고 지는 것은 문서로 남는다.' 사파의 문주가 남긴 말이었다.

하연서는 날짜부터 봤다. 언제나 날짜부터 본다.

정사대전 종결 선포—무림맹 관보에 찍힌 날짜는 그해 시월 초닷새. 그리고 패검문 정벌 완료 보고. 시월 열아흐레.

그런데 논공행상 기록. 정벌에 공을 세운 자들에게 상을 내린 날짜.

시월 열이틀.

하연서는 그 죽간을 다시 읽었다. 두 번. 세 번.

"왜 그래? 얼굴이…."

진유하의 물음이 멀게 들렸다.

논공행상은 시월 열이틀. 패검문 정벌 완료 보고는 시월 열아흐레. 상을 먼저 주고, 정벌을 이레 뒤에 끝냈다는 말이다.

말이 되지 않았다.

공을 세워야 상을 준다. 학살이 끝나야 그 학살의 공로를 논한다. 순서가 뒤집힐 수 없다. 그런데 무림맹은 패검문이 멸문하기 이레 전에 이미 그 정벌의 상을 나눠 가졌다.

하연서의 등줄기를 따라 얼음물이 흘렀다.

답은 하나였다. 논공행상 날짜는 진짜고, 정벌 완료 보고 날짜는 나중에 꾸민 것이다. 아니—어느 쪽도 상관없다. 중요한 건 두 문서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였다. 진짜로 일어난 일에는 이런 균열이 없다. 이 균열은 누군가 사건을 '만들어낸' 흔적이었다.

패검문을 언제, 어떻게 벨지 이미 정해 놓고 상까지 나눠 가진 뒤에, 나중에 그럴듯한 날짜를 붙여 기록을 꾸민 것이다. 정벌은 응징이 아니었다. 각본이었다. 처음부터 결과가 정해진.

멸문의 밤은 우발적 정의 실현이 아니라, 그전에 이미 계획표에 적혀 있던 일정이었다.

"임서."

진유하가 소매를 당겼다. 하연서는 그제야 자기 손이 죽간을 부러뜨릴 듯 움켜쥐고 있음을 깨달았다. 손가락을 폈다. 죽간의 붉은 인장이 손바닥에 눌려 자국을 남겼다.

"아무것도 아니다. 글자가 잘 안 보여서."

거짓말은 매끄러웠다. 그러나 심장은 매끄럽지 않았다. 스승이, 사형들이, 어린 사매까지—그 밤 하연서가 잃은 모든 이가, 누군가의 장부 위에서 상을 나눠 갖기 위한 항목으로 먼저 죽어 있었다.

하연서는 죽간을 원래 자리에 꽂았다. 손이 떨렸다. 이 손 떨림만은 봉인이 막지 못했다.

*

서고를 나설 무렵 해가 기울었다.

돌아오는 회랑에서 진유하가 뒷짐을 지고 걸었다. 흥이 오른 걸음이었다. 오늘 무언가 도운 게 뿌듯한 모양이었다.

"근데 있잖아. 아까 그 낙검곡 얘기 하니까 생각났는데."

하연서의 발이 반 박자 늦게 땅을 디뎠다.

"나 어릴 때 낙검곡 근처 살았거든. 하동 임가촌—아니 그 옆 골짜기 마을. 삼 년쯤 전인가. 밤에 온 협곡이 다 타올랐어. 하늘이 벌겋게. 어른들이 사파 소굴을 정파가 정화하는 거라고, 좋은 일이라고 그랬어."

하연서는 앞만 보고 걸었다. 목뒤 근육이 돌처럼 굳었다.

"근데 다음 날 아침에, 나 물 길으러 갔다가 봤어. 골짜기 어귀 개천가에. 애가 하나 있었어. 나보다 조금 큰. 온몸이 재투성이에, 옆구리가 이렇게 갈라져서 피가—막 굳은 채로."

진유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불 속에서 나온 거야. 그 협곡에서. 살아서. 근데 그 눈이… 나 아직도 기억나. 눈이 하나도 안 울고 있었어. 그렇게 다쳤는데. 그냥 나를 한 번 보고, 아무 말도 없이 동쪽으로 걸어가더라. 어른들 부르러 뛰어갔다 오니까 없어졌고."

회랑의 붉은 기둥들이 지나갔다. 하연서는 한 발 한 발을 셌다. 세지 않으면 걸음이 무너질 것 같았다.

"난 그게 귀신인 줄 알았어. 근데 커서 생각하니까, 그냥 애였던 거야. 어떻게든 살아 나온 애. 그 사파 소굴에도 애가 있었단 거잖아. 그게—좋은 일이 맞나. 난 아직도 모르겠어. 협객이 되겠다고 여기 왔는데, 그 눈이 자꾸 걸려."

옆구리의 흉터가 뜨거워졌다. 나선으로 아문 상처. 그날 밤 하연서를 벤 검이 남긴 자국.

그 개천가를 하연서는 기억했다. 재를 뒤집어쓴 채 물에 얼굴을 비춰 본 것을. 물속에서 낯선 아이 하나가 자기를 보고 있던 것을. 그리고 물가 저쪽에서 물동이를 든 또래 하나가 겁먹은 얼굴로 굳어 있던 것을.

그게 이 손이었다.

굳은살 박인 이 손이 그날 아침 물동이를 들고 있었다.

"임서? 너 왜 그래. 얼굴이—"

하연서는 걸음을 멈췄다. 멈추면 안 되는데 멈췄다. 삼 년간 갈고닦은 무표정이 한순간 자리를 잃었다. 턱이 미세하게 떨렸다. 눈가에 무언가 차올랐다. 진유하의 눈이 커졌다.

"…아니."

하연서는 억지로 고개를 돌렸다. 소매로 얼굴을 훔치는 척, 재채기를 삼키는 척. 봉인이 균열 사이로 새어 나오려는 것을 이를 악물어 밀어 넣었다. 온몸의 근육을 써서.

"먼지. 서고 먼지가 눈에 들어갔다."

"의당 갈래? 눈 씻어야—"

"됐다. 괜찮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하연서는 빠르게 걸었다. 진유하가 뒤에서 따라오며 무어라 더 말했지만 들리지 않았다. 저 순박한 아이가 방금 자기 손으로 삼 년 전의 밤을 하연서 앞에 열어젖혔다는 것을, 진유하는 죽어도 모를 것이다.

세상에서 그날 하연서를 본 산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지금 하연서더러 친구가 되자 한다.

*

그날 밤. 넉 달 외출 금지. 낙검곡 접근 금지. 밤에 담을 넘는 자는 축출.

하연서는 담을 넘었다.

셈이 서지 않아서였다. 서고의 날짜 모순을, 진유하의 개천가를, 그 둘을 한꺼번에 안고서는 숙사 짚자리에 누워 있을 수 없었다. 봉인의 균열이 벌어질 대로 벌어져, 산 자 앞에서는 도저히 다스릴 수 없었다.

죽은 자 앞에서만, 하연서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이십 리를 밤새 달렸다. 경공에 검흔을 조금 실었다. 넷째 사형의 신법 한 자락. 다리가 저절로 산길을 삼켰다. 발동할 때마다 서늘한 슬픔이 발끝에서 심장으로 기어 올라왔지만, 하연서는 오늘만은 그걸 밀어내지 않았다.

낙검곡. 무너진 문루. 그을린 대들보. 이름 없는 봉분들.

하연서는 무덤 사이에 무릎을 꿇었다. 스승의 봉분. 대사형의 봉분. 넷째 사형의 봉분. 어린 사매의 작은 흙더미. 손수 쌓았던 돌들이 그대로 있었다.

"…사부님."

여기서만 나오는 목소리. 태산검문에서는 한 번도 낸 적 없는.

"오늘 알아냈습니다. 그날은 사고가 아니었어요. 그놈들은 우리를 벨 날을 미리 정해 놓고, 벤 값으로 상을 나눠 가졌습니다. 우리가 죽기도 전에. 우리는… 처음부터 죽기로 정해진 항목이었습니다."

바람이 협곡을 훑고 지나갔다. 마른 나뭇가지가 울었다. 하연서의 눈에서 참았던 것이 흘렀다. 서고에서도, 회랑에서도, 진유하 앞에서도 삼킨 것이. 여기서는 삼키지 않았다.

"그런데 저는… 그놈들 문파에서 밥을 먹고, 그놈들 서고에서 우리를 죽인 장부를 읽고, 그놈들 제자 하나와 친구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저 스스로가 무엇인지 자꾸 흐려집니다. 검을 잡을 때마다 형들의 목소리가 저를 삼키려 합니다."

넷째 사형의 봉분에 손을 얹었다. 흙이 차가웠다.

"조금만 더 견디십시오. 날짜를 캤으니 이제 그 장부를 짠 손을 찾겠습니다. 그 손이 든 검으로 그 손을 벨 겁니다. 그리고 천하에 우리 이름을 돌려놓겠습니다. 패검문은 죄가 없다고. 상을 나눠 가진 자들이 죄인이라고."

목소리가 다시 벼려졌다. 눈물은 흘러도 결의는 굳었다. 하연서는 오래 그렇게 무릎 꿇은 채로, 죽은 자들만이 듣는 진심을 다 쏟아 냈다. 산 자에게 닫힌 마음이 이 폐허의 흙 위에서만 열렸다.

동이 트기 전에 일어섰다. 옷자락의 흙을 털었다. 얼굴에서 밤의 흔적을 지웠다. 다시 임서가 되어야 했다. 무표정의 껍데기를 손으로 쓸어 얼굴에 붙였다.

봉분들을 향해 한 번 고개를 숙이고, 하연서는 협곡 어귀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발밑에서 등에 감긴 망자검이 울기 시작했다. 얇게, 그러나 점점 굵게. 나선 흉터가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워졌다. 이 울음을 하연서는 안다. 낙검곡의 밤과 얽힌 자가 가까이 있을 때만 검이 이렇게 운다.

협곡 어귀. 새벽안개 속에서 횃불이 줄지어 나타났다. 순찰대. 창검이 안개를 갈랐다. 그 앞에 선 자의 실루엣이 유독 컸다. 어깨가 넓고, 검을 어깨에 걸친 자세가 오만했다.

하연서는 그 얼굴을 안다. 위령비 앞에서 봤다. 공적비에 이름이 새겨진 자. 신원 재조사를 직접 주관하겠다 선언한 자. 멸문의 밤 그 협곡에 함께 있던 자.

장무극이었다.

그가 검을 어깨에서 내려 천천히 뽑았다. 강철이 안개를 베며 울었다. 그리고 등에 감긴 하연서의 망자검이, 그 검의 울음에 화답하듯 미친 듯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 시각에, 이 금지된 땅에."

장무극의 목소리가 협곡 벽에 부딪혀 되돌아왔다.

"패검 잔당을 찾으러 왔더니, 잔당이 제 발로 무덤을 찾아왔군. 거기 선 놈. 이름을 대라. 대지 못하면—"

검끝이 하연서를 향했다.

"이 자리에서 심문한다. 뼈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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