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이 회차는 아직 그래픽 노블 장면이 제작되지 않아 일반 노블로 보여드려요.

설강의 손이 어깨를 짓눌렀다. 하연서는 그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협곡 어귀에서 장무극의 외침이 관문을 향해 번지고 있었다. 임서라는 이름. 패검문 잔당. 두 개의 조각이 저자의 입에서 굴러떨어져 태산검문 전체로 흩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쪽으로."

설강이 잔해 그림자 속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무너진 서각 벽이 만든 좁은 틈. 삼십 년을 이 협곡에 드나든 자만이 아는 길이었다. 하연서는 피 흐르는 왼손을 가슴에 붙인 채 그 틈으로 몸을 밀어넣었다.

"장무극! 어디까지 뒤졌나!"

순찰대장의 목소리가 협곡을 울렸다. 장무극이 이를 갈며 답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잔당이 무덤을 팠다. 흔적을 지운다더니, 도리어 파헤쳐 놓았어. 관문을 봉쇄하고 재조사 명단부터—"

목소리가 멀어졌다. 설강이 하연서의 소맷자락을 끌어당겼다. 찢긴 앞섶 사이로 나선 흉터가 아직 반쯤 드러나 있었다.

"여며라. 저놈이 봤으면 문양까지 봤을 게다."

하연서는 소매를 당겨 상흔을 덮었다. 손끝이 미끄러웠다. 자기 피였다.

두 사람이 협곡을 빠져나온 것은 해가 산등성이 위로 한 뼘 올라온 뒤였다. 설강은 나무꾼이 지나는 뒷길로만 걸었고, 하연서는 그 뒤를 세 걸음 떨어져 따랐다. 어느 갈림에서 순찰대 둘과 마주쳤다.

"화부 어른, 이 새벽에 여긴 어쩐 일이오."

젊은 순찰대원이 창을 비껴 세우며 물었다. 시선이 하연서에게 옮겨왔다. 왼손을 감싼 천에 배어나온 피에 그 시선이 멎었다.

"그 손은—"

"아궁이 불티에 옷섶이 붙었지. 이 녀석은 물 길으러 왔다가 나 도와주느라 데였고."

설강이 술 냄새 나는 목소리로 껄껄 웃었다. 잡역 화부의 게으른 능청이 목소리에 완벽하게 배어 있었다. 하연서는 그 결을 따라, 붙잡힌 소매를 슬쩍 걷어 보였다. 손목 위로 붉게 부풀어 오른 살. 검면에 갈린 상처였으나 화상처럼 보이게 각도를 틀었다.

"옛 화상 자국이 또 터졌습니다. 데인 자리는 자꾸 이럽니다."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았다. 순찰대원이 눈살을 찌푸리며 창을 거뒀다.

"화부 처소로 곧장 가시오. 오늘 관문이 어지럽소."

하연서는 고개를 숙이고 걸음을 옮겼다. 등 뒤에서 순찰대의 발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여민 소매 아래 상흔이 뜨겁게 뛰었다.

*

설강의 화부 처소는 축사 뒤 외진 곳에 있었다. 흙벽에 갈라진 창 하나, 재를 뒤집어쓴 부엌 아궁이 하나. 술독이 벽을 따라 늘어서 있었으나, 설강은 그중 하나도 열지 않았다.

"앉아라."

그가 문을 닫고 빗장을 걸었다. 손이 떨렸다. 그 떨림이 술기운 때문이 아님을 하연서는 알았다. 설강의 오른손이 반대편 손목으로 올라갔다. 오래된 흉터를 문질렀다. 하연서를 볼 때마다 하던 그 버릇. 축사 뒤뜰에서도, 서고 앞에서도 그는 시선을 피하며 그 자리를 눌렀다.

이제야 그 흉터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서열전에서 곽대를 눕히던 네 검로." 설강이 입을 뗐다. "낙영세였지. 떨어지는 꽃잎을 되받아 올리는 하단검. 삼십 년 넘게 아무도 못 쓴 초식이다. 그걸 쓸 수 있는 문파는 천하에 하나뿐이었어."

하연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패검문." 설강이 그 이름을 내뱉었다. 방 안 공기가 얼어붙었다. "그 밤 이후로 세상에서 지워진 이름. 네가 그 검을 쓰는 순간, 나는 내가 지워버린 게 아직 살아 있다는 걸 알았다."

"지워버린 게."

하연서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낮아졌다.

설강이 손목의 흉터를 더 세게 눌렀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다.

"나는 그날 밤, 낙검곡에 있었다."

*

말이 쏟아지기 시작하자 멈추지 않았다.

"삼십 년 전, 나는 태산검문 이대 제자였다. 검 좀 쓴다는 소리를 들었지. 정사대전이 터졌을 때, 우리 조는 낙검곡 정벌대에 편성됐다. 대장이 미리 동선을 외우게 했어. 몇 시진에 어느 전각을 친다, 누구를 벤다, 몇 명을 남긴다. 마치 이미 벌어진 일을 복기하듯이."

설강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전투는 그렇게 짜여지는 게 아니니까. 그런데 정말로 그날 밤 모든 게 외운 대로 흘러갔다. 패검문 무인들이 어디서 반격할지, 언제 무너질지, 대장은 다 알고 있었어. 우리는 각본을 읽는 배우였다."

하연서의 왼손이 저도 모르게 검자루로 향했다. 상흔이 화답하듯 달아올랐다. 그 밤. 다섯째 사매가 이대 제자에게 배후를 찔린 그 각도. 셋째 사형이 세 방향에서 협공당한 그 진형. 우연이 아니었다. 하연서는 이미 그것을 짐작하고 있었으나, 산 자의 입으로 확인받는 것은 처음이었다.

"너는." 하연서가 물었다. "그 밤 몇을 베었나."

설강이 눈을 감았다.

"한 명도 베지 못했다. 그게 내 죄다."

의외의 대답이었다. 하연서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내 앞에 열두어 살 된 아이가 나섰다. 검을 들었지만 자세도 서툰. 나는 벨 수 없었어. 그래서 대오에서 이탈했다. 등을 돌리고 협곡을 빠져나갔다. 뒤에서 비명이 들리는데도." 설강의 손목 흉터가 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때 대장의 부장이 나를 막았다. 그자의 검이 내 손목을 그었어. 이탈자에게 새기는 낙인이었다. 나선 문양. 그 검을 쥔 자가—"

"장무극."

하연서가 그 이름을 대신 말했다. 설강이 흠칫 떨었다.

"…어떻게 아느냐."

"방금 협곡에서 그자의 검을 붙잡았다." 하연서가 여민 왼손을 들어 보였다. "같은 손이다. 셋째 사형과 넷째 사형, 그리고 내 스승을 벤 손. 나를 벤 손도."

설강의 얼굴이 무너졌다. 그가 하연서의 벌어진 앞섶을, 그 나선 각인을 다시 보았다. 자기 손목의 흉터와 겹쳐 보는 눈이었다.

"같은 검이구나. 삼십 년을 사이에 두고, 같은 검이 우릴 그었어."

*

하연서는 품속에서 손수건에 싼 것을 꺼냈다. 반쯤 탄 문서 조각. 낙검곡 서각 잔해에서 찾은 것이었다.

"이게 뭔지 아나."

설강이 조각을 받아 들여다보았다. 그의 손이 다시 떨렸다.

"논공행상 초안이다. …이걸 어디서."

"각본을 짠 자의 필체가 여기 있다. 그런데 부본이라 했지. 원본은 어디 있나."

설강이 조각을 도로 밀어놓았다. 그가 아궁이의 식은 재를 손가락으로 헤집었다. 뭔가를 결심하는 손짓이었다.

"장서각 금서고. 문주와 장로 셋만 열람할 수 있는 봉장이다. 정사대전 정벌 서사의 원본. 죽일 날짜, 남길 자, 뿌릴 소문까지 다 적힌 명령서가 거기 있어. 나 같은 놈은 근처에도 못 간다."

그가 하연서를 똑바로 보았다. 처음으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소각에 실패한 부본 하나가 이 안에, 태산검문 어딘가에 남아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장무극이 태우다 만 것. 그자가 죽자 살자 찾아 헤매는 이유가 그거야."

하나의 그림이 맞춰졌다. 흩어진 조각들이. 서고에서 발견한 이레 앞선 날짜. 명단의 붉은 '패' 자. 낙검곡의 무덤. 우는 검. 장무극의 발도. 그 모든 것이 하나의 명령서로 수렴했다. 그 명령서를 쥔 손. 그 손 위에 검을 쥐여준 흰옷의 손.

가슴이 뜨거워졌다. 상흔이 아니라, 그 안쪽이. 하연서는 이 감각을 알았다. 넷째 사형이 배신당하던 순간, 그 분노가 이렇게 눌어붙었다.

"됐다. 이제 갈 곳이 보인다."

일어서려는 하연서의 소매를 설강이 붙잡았다. 아까 순찰대 앞에서 잡던 손과는 다른 힘이었다.

"앉아라. 아직 안 끝났다."

*

"네 검이 우는 걸 들었다." 설강이 낮게 말했다. "축사 뒤에서. 그건 그냥 검이 아니지. 죽은 자들이 그 안에 있어. 안 그러냐."

하연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삼십 년 전에도 그런 검을 봤다. 패검문 노고수 하나가 죽어가는 사제들의 검을 자기 몸에 새기며 싸웠어. 마지막엔 그가 누구인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검을 휘두르는 게 그 사람인지, 그 안에 들어찬 죽은 자들인지."

설강의 목소리가 떨렸다. 두려움이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은 하연서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하연서를 위한 것이었다.

"넌 지금 그 길을 걷고 있다. 아까 협곡에서, 네가 장무극의 검을 붙잡던 그 순간. 그건 네 검로가 아니었어. 장무극의 것이었지. 넌 그자의 검을 삼켰고, 그자의 손이 네 손을 움직였다. 그렇지 않나."

하연서의 왼손이 굳었다. 부정할 수 없었다.

"검을 새길 때마다." 설강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너는 조금씩 지워진다. 오늘의 임서, 낙검곡의 하연서—그 경계가 흐려지고 있어. 네 눈을 봐라. 방금 명령서 얘기를 할 때, 네 눈에 든 건 네 것이 아닌 분노였다. 죽은 누군가의 것이었어."

넷째 사형. 하연서는 속으로 그 이름을 붙잡았다. 눌어붙은 분노의 주인. 설강은 그것까지 읽어냈다.

"이대로 가면." 설강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복수를 이루기 전에 네가 먼저 사라진다. 검이 널 잡아먹어. 그럼 무덤에 묻힌 아이들의 이름을 되찾을 사람이 아무도 안 남아."

하연서는 설강을 보았다.

여태 이 노인은 도구였다. 진실을 쥔 표적. 이용 가치로 저울질하던 조각. 그런데 지금 그의 눈에는 이용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손해뿐인 걱정.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고백. 그것을 무릅쓰고 이 노인은, 아무 이득 없이, 하연서가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삼십 년 침묵한 죄인의 눈에 든 것은 죄책감이 아니라 두려움이었다. 하연서라는 아이가 그 밤의 아이처럼 사라질까 봐.

"…왜."

목소리가 낮게 갈라져 나왔다. 계산이 아니라 물음이었다.

"왜 나를 살리려 하나. 당신이 등 돌린 그 아이들 중 하나가 나일 수도 있는데."

설강이 눈을 감았다. 눈꺼풀이 젖어 있었다.

"그러니까 살리려는 거다. 그때 못 지킨 아이 하나라도. 이번엔 등을 돌리지 않으려고."

하연서의 가슴 안쪽에서 무언가가 실금을 냈다. 봉인이 아니라, 그 아래 죽어 있던 것이. 이 노인을 어떻게 쓸까 저울질하던 계산이 멈췄다. 처음으로, 설강이 도구가 아니라 사람으로 눈앞에 앉아 있었다. 두려움에 떨면서도 등을 돌리지 않으려는 늙은 검객으로.

"이름이 뭔가." 하연서가 물었다.

"설강. …알잖느냐."

"안다. 그래도 처음 물었다."

설강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하연서를 보았다. 하연서는 그 눈을 피하지 않았다.

*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조심스러운, 익숙한 두드림.

"임서. 안에 있어? 나야, 진유하."

하연서의 몸이 굳었다. 설강이 눈짓으로 뒷문을 가리켰으나, 하연서는 이미 빗장으로 손을 뻗었다. 열지 않으면 이 순박한 사내는 창밖을 기웃대다 순찰대에 걸릴 것이다.

문틈으로 진유하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의 시선이 곧장 하연서의 왼손, 피 밴 천에 가서 박혔다.

"너 또 다쳤어? 어젯밤에 처소에도 안 들어오고—" 진유하가 말을 멈췄다. 하연서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너 왜 그래. 눈이… 지난번 대숲에서 봤을 때랑 똑같아. 무슨 일 있는 거지. 말해. 친구니까—"

"진유하."

하연서가 말을 끊었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딱딱했다.

"오늘부터 나한테 오지 마라."

진유하의 눈이 커졌다.

"그게 무슨—"

"내 근처에 있으면 너도 위험해진다. 서열도, 이름도, 가족한테 돌아갈 길도 다 잃을 수 있어. 나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말하면서 하연서는 자기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으려 애썼다. 이것은 밀어내기였다. 그러나 예전의 밀어내기와 달랐다. 도구에서 제외하려는 게 아니라, 도구가 아니기에 지키려는 밀어내기였다. 그 차이가 목구멍을 조였다.

진유하가 한참 하연서를 보았다. 그러곤 조용히 말했다.

"네가 무슨 짓을 하든, 나는 네 편이라고 했잖아. 그 말 안 무를 거야."

"진유하—"

"근데 지금은 갈게. 네가 이런 얼굴로 가라니까." 그가 뒤로 물러섰다. "대신 밥은 챙겨 먹어. 손 그거 꼭 싸매고."

진유하가 돌아섰다. 하연서는 그 등을 보며, 처음으로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밀어냈다는 사실이 이렇게 아플 수 있음을 알았다. 봉인의 실금이 또 한 뼘 벌어졌다.

*

문을 닫으려는 순간, 설강이 갑자기 일어섰다.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조용."

취기 없는 눈이 문밖을 향했다. 삼십 년을 이 문파에서 숨죽여 산 자의 귀가 무언가를 잡아챘다. 진유하의 발소리가 아니었다. 여러 개의 발이었다. 무겁고 규칙적인. 흙바닥을 밟는 무인의 걸음.

"뒷문으로." 설강이 하연서를 밀었다. "어서—"

늦었다.

빗장이 걸린 문이 안쪽으로 터져 나갔다. 나무 파편이 방 안으로 튀었다. 아침 햇살을 등진 그림자 넷이 문틀을 가득 메웠다. 앞선 자의 검집에 새겨진 나선 문양이 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장무극의 심복들이었다.

품속 손수건 안에서, 그리고 볏짚 아래 감춰둔 망자검에서, 검이 얇게 울기 시작했다. 그 나선 검을 알아본 울음이었다.

앞선 자가 방 안을 훑었다. 설강의 얼굴에서, 하연서의 여민 앞섶으로 시선이 흘렀다.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역시 여기 잔당이 있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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