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밤 8시 42분, 성모병원 지하 1층 개인 의료시설.
서인호의 손가락은 이미 팔꿈치까지 투명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 목 위쪽만 남아 있었다. 심장의 박동이 들렸다. 검은 실이 떨리고 있었다. 한 올, 또 한 올. 마치 끊어지기 직전의 실처럼.
가슴이 철렁했다. 손가락이 사라지는 감각은 이미 익숙했지만,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것은 처음이었다. 투명해지는 속도가 평소보다 빨랐다. 뭔가 잘못됐다.
"기다렸어."
최태성 과장이 수술실 문을 열었다. 의료용 마스크를 내렸고, 눈빛은 반짝였다. 마치 사냥감을 발견한 육식동물처럼.
"정수진 환자의 기록을 조작한 거 알아? 아무도 묻지 않을 거야. 왜냐하면 이 수술이 성공하면, 넌 영웅이 되고, 난 그 영웅의 스폰서가 되거든."
최태성이 수술복을 입으며 말을 이었다.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협박이었다.
"우리는 완벽한 파트너야. 넌 죽음을 보고, 난 그 죽음을 막을 방법을 찾는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조화가 있을까?"
서인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수술실 중앙의 침대 위에 누워 있는 환자를 봤다. 얼굴이 가려져 있었다.
"누구야?"
"서정환의 아들이야. 심근경색이 올 시간이 돼. 넌 그걸 미리 알잖아."
최태성이 라텍스 장갑을 낀다. 손가락을 하나씩 구부리며 끼워 넣는 모습이 마치 덫을 준비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번 수술 성공하면 서정환이 모든 책임을 뒤집어쓸 거야. 그럼 넌 자유야."
서인호의 투명한 손이 떨렸다. 수술복을 집어 들었다. 손가락이 옷감을 통과했다. 더 이상 무언가를 잡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순간.
"서인호."
목소리가 들렸다.
이수현 윤리위원장이 수술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손에는 종이 묶음이 들려 있었다. 의료기록이었다.
"첫 번째 환자의 기록을 다시 봤습니다."
이수현이 의료기록을 펼쳤다. 첫 페이지—이준영, 62세 남성.
"응급실 도착 시간: 오전 2시 47분." 이수현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초기 진단: 심근경색 의심. 의식 수준: 반응 없음. 신경학적 검사: 오전 2시 54분."
이수현이 다음 항목을 짚었다.
"뇌파 검사 결과란이 비어 있습니다. 그리고 오전 3시 1분에 이 환자는 뇌사 판정을 받았어요. 당신은 오전 2시 55분에 응급 수술 승인을 받았습니다."
이수현의 목소리가 차분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확신이 있었다.
"뇌사 판정 이전에 수술 승인을 받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의료기록에는 당신의 접촉 기록이 없어요. 환자를 만지지 않으셨다는 의미죠."
서인호의 호흡이 멈췄다. 부정하려 입을 열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수현이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CT 스캔 영상이 나타났다. 뇌 전체가 회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뇌간 반사가 완전히 소실된 상태. 뇌사의 확실한 증거.
"당신이 본 검은 실은 이 환자의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이수현이 천천히 말했다. "당신이 감지한 신호의 타이밍이 맞지 않거든요. 환자는 이미 뇌사 상태였는데, 당신이 본 것은..."
이수현이 또 다른 영상을 꺼냈다.
심장 초음파였다. 검은 실이 보였다. 한 올씩 흔들리며 끊어질 지경으로 드러나는 형태.
"당신의 심장입니다."
이수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당신이 본 검은 실은 환자의 죽음이 아니라 당신 자신의 죽음이었어요."
서인호가 한 발 뒤로 물러났다. 투명해진 팔이 벽을 짚으려 했다.
"당신은 처음부터 죽어 있었습니다."
이수현의 눈이 서인호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동정이 아닌 확정이 있었다.
최태성이 뒷걸음질을 쳤다.
"뭐하는 거야? 이건 의료윤리 위원회의 권한이 아니—"
"당신이 이 남자를 불렀죠?" 이수현이 최태성을 바라봤다. 목소리는 더 차가워졌다. "밤 12시까지 마지막 수술을 하라고. 그리고 서정환에게도."
이수현의 손에는 통화기록이 있었다.
"서인호가 자살을 시도하도록 유도한 혐의로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당신들 모두 관련자로 신고되었어요. 서정환도 마찬가지고요. 현재 수사가 진행 중입니다."
최태성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입술이 떨렸다.
서인호는 거울을 봤다.
거울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투명해진 몸. 그리고 심장 속의 검은 실. 마지막 한 올이 남아 있었다.
박민준이 수술실 문으로 들어섰다. 눈이 빨갛게 부어 있었다. 펠로우실에서 밤새 울며 준비한 증언을 끝낸 지 1시간도 채 안 됐을 때였다.
"인호."
박민준이 서인호의 이름을 불렀다. 목소리가 떨렸다. 하지만 그 떨림은 동정이 아니었다.
서인호가 천천히 박민준을 봤다. 투명한 눈동자.
박민준은 한 발 더 다가섰다. 그의 목소리는 차갑고 명확했다.
"인호, 넌 뭘 살리지 못했어."
서인호가 입을 열려 했다.
"박경숙은 3년 후에 자살했고, 최영준은 당신이 살린 후 그 환자의 아들이 연쇄 폭행을 저질렀어. 정수진은 수술 후 정신이상을 보였고, 이준호는..."
박민준의 목소리가 떨렸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이준호는 당신이 살린 후 자신의 아들을 죽였어. 당신이 살린 9명의 환자들. 그들이 살린 게 뭐냐고."
서인호의 몸이 흔들렸다. 투명해진 팔이 벽을 짚으려 했지만 벽을 통과했다.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난... 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마치 투명해진 목구멍에서 나오는 소리는 이미 들을 수 없게 된 것처럼.
"당신의 능력을 사용한 횟수는 9번입니다." 이수현이 의료기록을 검토하며 계산했다. "매번 1년씩 수명이 단축됐다면, 당신의 남은 시간은... 초기 기대 수명이 80세라고 가정하면, 당신은 지금 20대 초반의 생물학적 나이입니다."
서인호의 목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래. 그게 뭐 어때서요."
"당신은 의료계에서 영구 제명됩니다." 이수현이 말했다. "윤리위원회의 최종 결정입니다. 법적 조사도 진행될 예정이고요."
"법적?" 서인호가 웃음을 흘렸다. 소리 없는 웃음. "제가 몇 년을 더 산다고 생각하세요?"
이수현이 침묵으로 답했다.
"당신의 남은 시간은 수 개월입니다. 최대 1년." 이수현이 의료기록을 덮었다. "법정에 가기 전에 죽을 겁니다."
서인호의 몸이 더 투명해졌다. 이제 가슴과 머리만 남아 있었다. 투명한 손가락들이 바닥에 닿으려 했지만, 닿지 않았다. 마치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박민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눈물을 흘릴 뿐.
"가도 돼요?"
서인호가 물었다.
"네." 이수현이 답했다. "가도 됩니다."
---
밤 11시 17분, 성모병원 옥상.
서인호는 난간 위에 서 있었다. 발이 난간의 모서리에 닿아 있었다. 아래로는 서울의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수십만 개의 불빛. 각각의 불빛 뒤에 누군가의 삶이 있을 것이다. 누군가의 죽음도.
바람이 불었다. 투명해진 그의 옷이 펄럭였다. 마치 없는 것을 흔드는 바람처럼.
그의 심장에서 마지막 검은 실이 흔들렸다.
한 올.
남은 것은 한 올뿐이었다.
서인호는 그것을 느꼈다. 더 이상 의료기록이나 초음파 같은 도구 없이, 자신의 내장 깊숙한 곳에서 그 신호를 감지했다. 자신의 죽음을 보는 것. 그것이 이 능력의 진정한 의미였다.
"난 죽음을 본다."
그는 중얼거렸다.
"그리고 나는 죽음이다."
검은 실이 한 번 더 흔들렸다.
서인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의 몸이 완전히 투명해졌다.
난간 위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
밤 11시 25분, 성모병원 응급실.
새로운 펠로우가 당직 배정을 받으러 들어왔다. 젊은 의사. 이름은 임준호였다. 나이 28세. 의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고, 레지던트 과정을 마친 지 겨우 3개월. 첫 펠로우 당직이었다.
응급실은 여느 밤과 다르지 않았다. 환자들이 들어오고 나갔다. 의료진들이 뛰어다녔다. 혼란과 절망의 일상.
그러던 중 심근경색 환자가 들어왔다. 60대 남성. 의식 없음. 혈압이 떨어지고 있었다. 산소 포화도가 위험 수준.
임준호는 환자의 가슴을 봤다.
그 순간.
심장이 보였다.
아니, 심장이 아니었다.
그 심장 안에 무언가가 있었다.
검은 실이 보였다.
끊어지려는 신호가.
임준호의 눈이 떨렸다. 손이 떨렸다. 심장이 떨렸다.
그것이 뭐지?
그것을 본다는 게 뭐지?
임준호는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도 그것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의료진들은 여전히 환자의 활력 징후를 확인하고 있었고, 모니터는 경고음을 울리고 있었다. 하지만 임준호만이 그것을 봤다.
그 순간, 임준호의 손가락이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손끝부터. 마치 물에 녹아드는 것처럼.
"뭐... 뭐야?"
임준호가 자신의 손을 들었다. 손가락 끝이 완전히 투명했다. 그리고 그것이 손목 쪽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공포가 밀려왔다. 자신의 몸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는 공포. 하지만 더 큰 공포는 다른 곳에서 왔다.
그것은 자신이 본 것이었다. 검은 실. 그리고 그 검은 실이 의미하는 바.
임준호는 환자를 봤다. 환자의 가슴에서도 검은 실이 보였다. 끊어지려는 신호.
그리고 자신의 손에서도 같은 신호가 나오고 있었다.
"아니야... 아니야..."
임준호가 중얼거렸다.
"나도 서인호가 되는 건가?"
그 순간, 응급실의 모니터들이 울음을 터뜨렸다. 심전도 기계가 경고음을 냈다. 환자의 심장이 멈추고 있었다.
"수술실로!" 누군가가 외쳤다.
하지만 임준호는 움직일 수 없었다. 자신의 몸이 투명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팔뚝까지. 가슴까지. 목까지.
그 과정에서 임준호는 깨달았다.
서인호가 본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것이 왜 죽음이었는지.
자신이 지금 무엇이 되고 있는지.
---
밤 11시 26분, 의료 기록실.
이수현은 새로운 의료기록을 작성하고 있었다.
*임준호, 펠로우 1일차.*
*첫 환자: 심근경색 의심.*
*현재 상태: 미상.*
*의료진 접촉 기록: 없음.*
이수현의 손이 멈췄다.
"또 시작되는 건가?"
그녀가 중얼거렸다.
옥상에서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난간 위에는 누군가의 신발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바닥에는 한 장의 의료기록지가 떨어져 있었다.
그 위에는 손글씨로 쓰인 문구가 있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 문구 아래에는 또 다른 필적이 겹쳐 있었다. 필압이 다르고, 글씨의 기울기도 달랐다. 누가 썼는지 알 수 없는 손글씨였다.
*"죽음을 본 자는 결국 죽음이 된다. 그것이 신의 법칙이다."*
---
*서인호, 의료계 영구 제명.*
*법적 조사 중.*
*현재 상태 미상.*
---
*임준호, 펠로우 1일차.*
*첫 환자 사망.*
*현재 상태 미상.*
---
성모병원은 계속 돌아갔다.
환자들은 계속 들어왔고, 의료진들은 계속 뛰었다.
그 누구도 모르고 있었다.
응급실의 어둠 속에서 또 다른 검은 실이 깜박이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이미 이 병원에 각인된 저주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