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정의

밤 12시 59분, 응급실 침상 1번.

한준혁의 몸이 굽어졌다. 팔이 떨렸다. 입에서 신음이 흘렀다. 280명이었다.

뇌가 분열되는 듯 280개의 시간이 동시에 입력되었다. 폐가 수축하는 소리, 심장이 멈추는 감각, 의식이 사라지는 순간들. 각각의 임종이 신경 말단을 태웠다. 시각이 왜곡되었다.

박서은의 기사가 공개되는 순간, 312개의 폐기 폴더 목록이 한준혁의 뇌에 입력되었다. 그중 280명은 이미 죽었다. 5분 전. 10분 전. 어제. 지난주. 지난달. 모두 다른 시간에, 모두 다른 장소에서, 모두 같은 이유로.

치료 거부.

경련은 멈추지 않았다. 신경이 화상을 입은 듯 타올랐다.

의료진 13명이 그의 몸을 감쌌다. 침상을 둘러싼 의료진들은 경찰관들을 등으로 막았다. 경찰관들은 "의료법 위반 피의자 연행"이라고 외쳤다. 윤태희는 "응급 환자입니다"라고 외쳤다. 누구의 목소리가 더 컸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한준혁의 몸이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280명의 죽음.

그것은 저주가 아니었다.

그것은 증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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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6시 47분, 응급실 대기실.

한준혁의 눈이 떠졌다. 천장이 보였다. 병원 천장의 형광등. 그 불빛은 밤새 꺼지지 않는다. 응급실에서는 밤이 없다. 그곳에는 시간이 있을 뿐, 계절이 없다.

"당신이 깼다."

윤태희의 목소리였다. 간호사는 침상 옆에 앉아 있었다. 얼굴에 피로가 묻어났다. 24시간 근무는 끝났을 것이다. 그런데 떠나지 않았다.

"얼마나 자셨어요?"

한준혁은 입을 열었다. 목이 아팠다. 윤태희가 물을 건넸다.

"3시간 52분."

"경찰은?"

"나갔다. 1시간 전."

윤태희가 스마트폰을 켜 보였다. 화면은 뉴스로 가득했다. 〈의료 거부의 패턴, 312명을 죽음으로 몬 시스템〉. 박서은의 기사였다. 조회수는 312만을 넘었다. 댓글 수는 45만이었다. "의료 정의를 위해서라면 나도 이 의사를 지지한다." "우리 할머니도 거부당했다. 그때 이런 의사가 있었다면..." "보험사를 고소해야 한다." "병원도 공범이다."

정치인들이 나섰다. 야당 대표가 "의료 정의 특별법 제정"을 발표했다. 여당 의원이 "국정감시 대상"이라고 선언했다. 보건복지부 장관은 긴급 기자회견을 소집했다.

한준혁은 침상에서 일어났다. 몸이 흔들렸다. 윤태희가 팔을 잡았다.

"아직 일어나면 안 돼요."

하지만 한준혁은 일어났다. 뇌가 명확해졌다. 280명의 죽음이 단순한 고통이 아니라, 시스템의 증거라는 것을. 그 증거가 혼자의 손으로는 바뀔 수 없지만, 함께라면 가능하다는 것을.

"정하윤은?"

"회복 중이에요. 심장 박동이 안정화됐어요. 심장 이식 대기 목록에 올라갔어요. 드디어."

한준혁의 눈이 떠졌다.

"이식?"

"네. 보험사의 거부가 풀렸어요. 당신의 기사 덕분에 당신이 수술한 환자의 보험 재심사가 이루어졌고, 이수진도 마찬가지예요. 국가 긴급 지원도 결정됐어요."

한준혁은 침상에서 내려갔다. 다리가 떨렸지만, 그것은 약함이 아니었다. 책임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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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9시 12분, 응급실 회의실.

정하윤의 엄마와 이수진의 엄마가 앉아 있었다. 그들 옆에는 박서은이 있었다. 그리고 최민준이 있었다. 최민준은 여전히 회복 중이었지만,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그의 손에는 폐기된 거부 폴더들의 사본이 들려 있었다.

박서은은 메모를 하고 있었다. 손이 멈췄다. 이 증언들을 기사로 만들 것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한 명의 의사를 도구화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떠올랐다. 한준혁을 지키고 싶지만, 동시에 그를 이용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 질문에 답을 찾기 전에 최민준이 입을 열었다.

"당신이 깼다."

건설 현장의 인부였던 그의 목소리는 굵었다.

"저도 거부당했어요. 산재 보험 거부. 3년을 싸웠어요. 3년을 죽음 앞에 놓여 있으면서."

최민준이 한준혁을 봤다.

"당신이 나를 살렸어요. 그리고 나처럼 거부당한 수천 명의 환자가 있다는 걸 보여줬어요. 그들도 죽음 앞에서 싸우고 있어요."

최민준의 손이 떨렸다.

"의료 정의는 의료로 시작되지만, 정의로 완성된다. 당신의 손이 그걸 증명했어요. 당신이 도구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싸워야 한다는 걸."

한준혁은 그 말을 들었다. 280명의 죽음을 목격한 후, 한 아이의 생존 의지가 어떻게 자신을 재구성했는지 깨달았다. 죽음이 그를 부수지 못했다. 오히려 그것이 그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박서은이 한준혁을 봤다. 그녀의 눈이 흔들렸다.

"나도 당신을 도구로 생각했어요. 기사의 주인공으로. 하지만 당신이 말한 것처럼, 이건 혼자의 싸움이 아니군요."

"그렇습니다."

한준혁이 대답했다.

"당신의 기사가 없었으면 이 증거는 세상에 나오지 못했습니다. 당신도 이 싸움의 일원입니다."

정하윤의 엄마가 한준혁의 손을 잡았다.

"우리 아이를 살려주셨어요. 의사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우리 아이는..."

말을 마치지 못했다. 눈물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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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시 34분, 응급실 대기실 기자회견.

정하윤의 엄마가 마이크 앞에 서 있었다.

"저는 8살 아들 정하윤의 엄마입니다. 저희 아들은 심부전 말기 판정을 받았습니다. 보험사는 수술이 불가능하다고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한준혁 의사 선생님은 수술을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아들은 살아있습니다."

정하윤의 엄마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 의사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우리 아들은 죽었을 겁니다. 그런데 제가 알게 된 건, 우리 아들처럼 거부당한 아이들이 312명이라는 거예요. 312명이 죽었어요. 의료 정의 때문에 아니라, 시스템 때문에."

기자들의 카메라가 터져 나갔다.

다른 환자 가족들도 증언했다. 보험사의 거부로 죽어간 가족들, 그리고 한준혁의 손으로 살아난 가족들. 그들의 목소리는 하나였다.

그 순간, 한준혁이 마이크 앞에 섰다.

기자들이 침묵했다.

한준혁의 얼굴은 창백했다. 하지만 눈은 맑았다.

"저는 한 명의 환자를 구했습니다. 그 구함이 312명의 죽음을 증명했습니다. 저는 한 명의 의사입니다. 저 혼자로는 시스템을 바꿀 수 없습니다."

한준혁이 뒤를 돌았다.

윤태희가 서 있었다. 박서은이 서 있었다. 최민준이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의료 정의 네트워크의 변호사들이 서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함께 바꿀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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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 12시 18분, 응급실 침상 3번.

이수진이 깨어 있었다. 아이의 눈은 여전히 고통으로 가득했다. 뇌종양 수술 후 통증은 남아 있었다. 회복은 점진적이었다. 기적이 아니라, 과정이었다.

한준혁이 아이의 침상 옆에 앉았다.

"힘들어?"

이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는?"

"바깥에 있어요. 아빠 오실 때까지."

한준혁이 아이의 손을 잡았다. 이수진의 손은 작았다. 아이의 손.

"당신의 진정한 바람이 무엇인가요?"

이수진이 한준혁을 봤다. 아이의 눈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살고 싶어요. 아파도. 엄마가 원하니까."

"엄마만 원해서?"

이수진이 고개를 흔들었다.

"나도 살고 싶어요. 아파도. 왜냐하면..."

아이가 말을 멈췄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내일이 궁금해요."

한준혁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것은 죄책감의 눈물이 아니었다. 책임감의 눈물이었다. 280명의 죽음을 목격했지만, 이 아이의 생존 의지가 자신을 다시 세웠다. 죽음 앞에서도 내일을 궁금해하는 이 아이의 목소리가, 자신의 손이 무엇을 위해 움직여야 하는지를 명확히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함께 그 고통을 견디겠습니다. 당신이 살기로 선택한 그 고통을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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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 41분, 응급실 침상 1번.

정하윤이 깨어 있었다. ECMO는 여전히 가슴에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심박은 안정화되었다. 심장 이식 대기 목록에 올라갔다. 기적이 아니라, 가능성이었다.

한준혁이 아이의 침상 옆에 앉았다.

정하윤이 한준혁을 봤다. 아이의 눈은 맑았다.

"아파요?"

"조금. 하지만 죽지 않을 것 같아요."

그 말에 한준혁이 웃음을 흘렸다.

"맞아. 죽지 않을 거야."

"의사 선생님은?"

"뭐?"

"의사 선생님도 아파요?"

한준혁이 아이를 봤다. 8살 아이의 눈은 어른이었다. 죽음 앞에 선 아이의 눈은 어른이었다.

"응. 아파."

"그래도 우리를 살려줬어요."

"응."

"그럼 당신도 살아야 해요. 우리를 살린 사람이 죽으면 안 돼요."

한준혁의 손이 떨렸다. 아이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 뭔가가 입력되었다.

생존 시간이 아니었다.

책임이었다. 그리고 그 책임은 혼자가 아니라는 것. 이 아이가 자신을 구했다. 죽음의 무게 속에서 살아갈 이유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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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4시 52분, 응급실 의료진 휴게실.

의료 정의 네트워크의 변호사가 한준혁 앞에 앉아 있었다.

"우리는 집단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312명의 유족을 대리해서요. 그리고 당신의 증언이 필요합니다."

한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국회 청문회도 예정되어 있습니다. 보험사의 의도적 거부, 병원 이사회의 도구화에 대해 증언해야 합니다."

"이사장은?"

"병원을 떠났어요. 이미 사직했어요. 보험사 대리인도 도망쳤어요."

한준혁이 침묵했다. 그 순간 새로운 질문이 떠올랐다. 도망친 그들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법적 책임은 여전히 남아 있다는 생각이.

"도망친다고 해서 사라지는 건 아니죠."

변호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법적 책임은 여전합니다. 그리고 당신의 증언이 그 책임을 증명할 증거가 될 겁니다."

한준혁이 변호사를 봤다.

"저는 한 명의 의료 정의 네트워크의 공식 일원이 되고 싶습니다."

변호사가 미소를 지었다.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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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6시 23분, 응급실 입구.

한준혁이 응급실로 돌아왔다. 의료진들이 그를 맞이했다. 윤태희가 맨 앞에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의료 정의 네트워크의 공식 회원 배지가 들려 있었다. 24시간 근무 후에도 떠나지 않은 이유가 이것이었다. 선택이었다. 동료애를 넘어선, 정의를 위한 선택.

"새 환자가 들어왔어요."

윤태희가 한준혁을 안내했다.

"폐암 말기. 50대 남성. 박민수."

한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험사?"

"거부했어요. 산재 보험. 3년 전부터."

한준혁의 몸이 굳었다. 최민준과 같은 패턴이었다. 산재 거부.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응급실 침상 4번에 환자가 누워 있었다. 50대 남성. 폐가 이미 검게 변해 있었다. 손가락 끝에는 산소 포화도 측정기가 붙어 있었다. 48이었다. 정상은 95 이상이었다.

한준혁이 환자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

"1개월 3주일 2일."

시간이 입력되었다. 하지만 이번엔 저주가 아니었다. 책임이었다. 연대였다. 그리고 새로운 질문이 떠올랐다. 이 환자도 최민준처럼 산재 거부 사건인가. 보험사의 패턴이 반복되는 건 아닐까.

한준혁은 그 시간을 받아들였다.

"수술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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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1시 42분, 응급실 수술실.

칼이 피부를 가르고 있었다. 손이 절개 부위를 벌리고 있었다. 종양이 보였다. 종양의 경계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정상 조직과의 구분이 명확했다. 한준혁의 손이 정확히 움직였다. 절개, 박리, 절제.

280명의 죽음을 목격한 눈이 이제 보았다. 죽음의 증거를 볼 수 있는 눈이. 그리고 그것을 살리기 위해 움직이는 손이.

수술실 밖에서 윤태희가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박서은이 취재 노트를 작성하고 있었다. 최민준이 증거 폴더를 정리하고 있었다. 변호사가 법적 절차를 준비하고 있었다.

밤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응급실의 밤은 계절도 없고 시간도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희망이 있었다.

혼자가 아니라는 희망이.

그리고 그 희망이 시스템을 바꿀 것이라는 희망이.

의료 정의는 아직도 진행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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