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10화

오디션장 입구는 회색 복도였다. 강남의 대형 방송국 3층, 리딩실 앞. 지훈은 대기 번호 표를 쥐고 있었다. 번호 7번. 그 숫자가 손에서 식지 않았다.

옆자리에 앉은 여배우가 입술을 움직였다. 대사를 중얼거리는 중이었다. 지훈도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이유였다. 필름 속 자신의 목소리를 되짚어내는 게 아니었다. 현재의 순간에서 그 말이 어떻게 울려야 할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만 생각했다.

"번호 5번, 입장하세요."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목소리. 옆의 여배우가 일어섰다. 지훈은 다시 앉았다. 손에는 여전히 번호 표가 있었다. 그 위에 대사가 인쇄되어 있었다.

*"날 떠나가지 마. 제발. 난 혼자 남겨질 수가 없어."*

3년 전 박준호 감독 촬영장에서 지훈이 읽었던 대사와 정확히 같은 문장이었다. 아니, 비슷하지만 다른 맥락이었다. 그때는 고통받는 남자의 절망이었다. 지난 밤, 민지의 말을 떠올렸다.

"지훈아, 대본을 외우지 말고 그냥 살아."

그게 전부였다. 그게 전부면 충분했다.

"번호 6번, 입장하세요."

시간이 흘렀다. 지훈은 손가락을 펼쳤다 오무렸다. 신체가 긴장했다. 근육이 기억했다. 하지만 그건 과거의 기억이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의 떨림이었다.

대기 시간 동안 한진수의 연락이 왔었다. 문자 메시지였다.

*"지훈 님, 화이팅입니다. 당신은 할 수 있어요."*

지훈은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 메시지는 주머니에 남아 있었다. 온기처럼.

"번호 7번, 입장하세요."

손이 저절로 올라갔다. 지훈이 일어섰다. 발이 움직였다. 리딩실 문이 열렸다.

심사위원은 세 명이었다. 책상 뒤에 앉아 있었다. 가운데 앉은 중년의 여성이 고개를 들었다. 영화사 프로듀서였다. 왼쪽의 남성은 드라마 작가였고, 오른쪽은 캐스팅 디렉터였다.

"안녕하세요."

지훈이 인사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하지만 그걸 감추지 않았다. 떨림 자체가 감정이었다.

"네, 안녕하세요. 당신이 지훈 배우군요. 자기소개 간단히 해주시겠어요?"

프로듀서가 물었다. 지훈이 입을 열었다.

"저는 지훈입니다. 조연 배우로 활동 중입니다. 이 역할을 위해 현재의 순간 속에서 감정을 살려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작가가 메모를 했다. 지훈은 그걸 봤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럼 시작하세요."

캐스팅 디렉터가 손을 흔들었다. 지훈이 대사 본을 들었다. 손이 떨렸다. 그 떨림은 숨기지 않았다.

첫 번째 대사를 읽기 직전, 지훈의 눈이 감겼다. 1초. 2초. 그리고 뜨였다.

"날 떠나가지 마."

목소리가 나왔다. 박준호 감독의 지도 아래서 나왔던 목소리가 아니었다. 필름 속에서 들었던 그 완벽한 음성도 아니었다. 이 시간, 이 리딩실에서 나오는 목소리였다. 그 안에는 지훈이 지난 3년간 잃어버린 모든 것이 들어 있었다.

"제발. 난 혼자 남겨질 수가 없어."

심사위원들의 표정이 변했다. 프로듀서가 펜을 내려놨다. 작가가 고개를 들었다. 캐스팅 디렉터의 눈이 반짝였다.

지훈은 계속했다.

"날 봐. 제발 나 좀 봐."

목이 메였다. 진짜로. 필름 속의 완벽한 재현이 아니었다. 이 순간의 절실함이었다. 민지의 울음을 생각했다. 한진수의 경고를 생각했다. 이석호의 손을 생각했다. 박준호 감독의 일기장을 생각했다.

*완벽함 없이는 살 수 없다.*

거짓이었다. 거짓말이었다. 완벽함이 없어도 살 수 있었다. 현재가 있으면 살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이 있으면 충분했다.

"제발..."

목소리가 깨졌다. 정말로 깨졌다. 연기가 아니었다. 현재였다.

지훈이 대사를 마쳤다. 침묵이 흘렀다. 3초. 5초. 10초.

심사위원들이 서로를 봤다. 프로듀서가 작가를 봤고, 작가가 캐스팅 디렉터를 봤다. 그들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지훈이 고개를 숙였다. 손이 내려갔다. 대사 본을 내려놨다. 그리고 리딩실을 나갔다.

복도는 여전히 회색이었다. 하지만 다르게 보였다. 밝게. 현재가 밝게 보였다.

리딩실 밖에서 민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지훈을 보는 순간 얼굴이 펴졌다.

"어땠어?"

그게 전부였다. 한 문장.

"모르겠어. 하지만 난 현재에서 연기했어. 그게 전부야."

지훈이 대답했다. 목소리는 이미 정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눈은 여전히 젖어 있었다.

민지가 웃었다.

"그게 전부면 충분해."

그들은 엘리베이터를 탔다. 강남의 밤거리가 보였다. 검은 하늘 위에 수백 개의 불빛이 떠 있었다. 스튜디오, 방송국, 영화사. 모든 것이 현재를 살고 있었다. 지훈도 이제 거기에 있었다.

---

이틀이 지났다.

오전 11시 23분, 지훈의 휴대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하지만 지훈은 받았다.

"안녕하세요, 지훈 배우님입니까?"

여자 목소리였다. 오디션 담당자였다.

"네, 맞습니다."

지훈이 대답했다. 심장이 뛰었다. 하지만 그 떨림을 느끼면서도 현재에 머물렀다.

"합격을 축하합니다. 당신은 이 역할을 맡게 됩니다. 내일 오전 9시에 촬영장에서 뵙겠습니다."

침묵. 지훈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냥 들었다. 그 말이 현재에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감사합니다."

지훈이 대답했다. 목소리는 담백했다.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휴대폰을 내려놨다. 손에서 떨어졌다. 지훈은 창가로 나갔다.

서울의 도시 풍경이 펼쳐졌다. 강남. 강남의 스튜디오들, 방송국 건물들, 영화사 사무실들. 그리고 셀 수 없이 많은 배우들이 현재의 순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지훈도 그들 중 한 명이 되었다.

필름 보관소가 어디에 있는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

같은 시각, 강남의 지하 필름 보관소. 어둠 속의 금속 선반들이 쌓여 있었다. 수백 개의 필름 케이스가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 중 하나. <천사의 날개>라고 적힌 필름 케이스.

그 옆에 한진수가 서 있었다. 손에는 외장 하드드라이브가 들려 있었다. 지훈이 삭제한 마스터 파일이 담긴 것이었다. 한진수가 그것을 작은 금속 상자에 넣었다. 그리고 그 상자를 필름 케이스 뒤에 숨겼다.

한진수는 고개를 들었다. 보관소의 천장을 봤다. 그 위는 강남의 대낮이었다. 그리고 그 위는 무한한 미래였다.

"언젠가는..."

한진수가 중얼거렸다. 목소리는 작았다.

"언젠가는 이 영화가 나올 거야. 누군가는 이 진실을 봐야 해."

그가 손을 내려놨다. 보관소의 불이 꺼졌다. 어둠 속에서 필름들만 남았다. 그들은 기다리고 있었다. 언젠가 올 그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지훈은 더 이상 그들을 기다리지 않았다.

---

새벽 5시 47분, 강남의 촬영장.

드라마 <현재의 순간>의 첫 촬영이 시작되었다. 조명이 켜졌다. 카메라가 회전했다. 감독이 손을 들었다.

"롤 카메라!"

클래퍼가 내려갔다.

"액션!"

지훈이 무릎을 꿇었다. 대사를 읽었다. 그의 목소리는 맑았다. 현재의 것이었다.

카메라는 계속 돌았다. 필름은 계속 흘렀다. 그리고 지훈은 계속 살았다. 이 순간 속에서.

창밖의 하늘이 천천히 밝아오고 있었다. 강남의 새벽이 물러나고 있었다. 그 자리에 새로운 하루가 들어오고 있었다.

지훈은 눈을 들었다. 카메라를 봤다. 아니, 카메라 너머의 누군가를 봤다. 그것은 필름 속의 자신이 아니었다. 현재의 배우였다.

"컷!"

감독이 외쳤다. 조명이 꺼졌다. 카메라가 멈췄다.

"좋아. 한 번 더."

감독이 말했다. 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무릎을 꿇었다. 다시 현재로 돌아갔다.

강남의 스튜디오들은 깨어나고 있었다. 수백 개의 촬영장에서 수천 명의 배우들이 현재를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미완성이었다. 모두 불완전했다. 하지만 모두 살아 있었다.

지훈도 이제 그들 중 한 명이었다.

그의 뒷모습이 점점 작아졌다. 조명 아래서. 카메라 앞에서. 현재의 배우로서.

강남의 도시 풍경이 펼쳐졌다. 밝아오는 하늘 아래. 스튜디오, 방송국, 영화사. 모두가 살아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밑바닥, 지하 필름 보관소.

어둠 속의 필름들. 그들은 여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천사의 날개>도 그 중에 있었다. 폐기 처분될 날을 기다리며. 또는 누군가의 손에 들려질 날을 기다리며.

하지만 지훈은 더 이상 그곳을 보지 않았다.

그는 현재를 살고 있었다.

# 배우로서의 부활

오전 10시 23분, 리딩실의 문이 열렸다.

심사위원 세 명이 앉아 있었다. 영화 캐스팅 담당 PD, 감독, 제작사 대표. 그들의 눈빛은 차가웠다. 수백 명의 배우를 본 사람들의 눈빛이었다.

지훈이 들어갔다. 허리를 굽혔다. 인사를 했다.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3년 전과는 달랐다.

"지훈입니다."

"앉으세요."

PD가 손짓했다. 지훈이 의자에 앉았다. 대본 한 장이 책상 위에 있었다. 주인공의 남편이 암 선고를 받은 날 밤, 아내 앞에서 무너지는 장면. 슬픔이 아니라 절망. 울음이 아니라 침묵. 그 속의 모든 것.

"이 장면을 읽어주시겠어요?"

감독이 물었다.

지훈이 대본을 집어 들었다. 손가락이 글자를 따라갔다. 첫 대사. "당신을 잃을 수는 없어요."

그 순간, 지훈의 눈이 변했다.

필름 속의 자신이 아니었다. 그 완벽한 표정도, 그 정확한 음성도 아니었다. 대신 현재가 있었다. 리딩실의 냉기. 심사위원들의 시선. 그리고 자신의 심장.

"당신을 잃을 수는 없어요."

처음 읽었을 때와는 달랐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진짜 갈라진 것이었다. 연기가 아니라 현재의 순간에서 터져 나온 것이었다.

심사위원들의 표정이 변했다.

PD가 펜을 멈췄다. 감독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제작사 대표는 눈을 깜박이지 않았다.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게 미안해요. 하지만 난 이미 알고 있었어요. 당신이 아플 거라는 걸. 어디서, 언제쯤 시작될 거라는 걸."

지훈의 손이 떨렸다. 대본 위에서. 그것도 연기가 아니었다. 진짜 떨림이었다. 오디션장에서 손이 떨리는 배우는 없었다.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지훈은 떨고 있었다.

"그래도 난 당신이 살아있길 원했어요. 아파도 좋으니까. 절망해도 좋으니까. 그냥... 당신이 있으면 좋았어요."

마지막 대사. 지훈의 목소리가 끊겼다. 진짜 끊긴 것이었다. 성악 기술이 아니라 현재의 감정이 성대를 조여 버린 것이었다.

침묵이 흘렀다.

리딩실 안의 침묵. 심사위원들이 서로를 봤다. 눈짓으로 대화했다. 그 눈짓의 의미는 명확했다.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PD도 끄덕였다. 제작사 대표는 옆 사람 팔뚝을 쳤다.

"고마워요."

PD가 말했다.

지훈이 일어섰다. 대본을 내려놨다. 손가락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리딩실을 나갔다. 문이 닫혔다.

복도가 길었다. 강남 방송국의 복도. 창밖으로 강남의 낮이 펼쳐져 있었다. 수천 개의 오피스, 수천 명의 배우들이 어딘가에서 오디션을 보고 있었다. 떨어지고 있었다. 또는 떨리는 손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앞에 민지가 서 있었다.

"어땠어?"

민지가 물었다.

지훈이 웃음을 흘렸다. 진짜 웃음이었다.

"모르겠어. 하지만 난 현재에서 연기했어. 그게 전부야."

민지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전부면 충분해."

---

이틀 후, 오후 2시 14분.

지훈의 휴대폰이 울렸다. 알 수 없는 번호였다. 지훈이 받았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캐스팅 담당자입니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이 역할을 맡게 됩니다."

지훈이 목이 메었다.

"감사합니다."

"촬영은 내일 오전 6시 강남 스튜디오에서 시작합니다. 미리 대본을 읽어두시고요. 화이팅!"

전화가 끊겼다.

지훈이 창가로 나갔다. 서울의 도시 풍경이 펼쳐졌다. 강남. 강남의 스튜디오들, 방송국 건물들, 영화사 사무실들. 그리고 셀 수 없이 많은 배우들이 현재의 순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지훈도 이제 그들 중 한 명이 되었다.

필름 보관소가 어디에 있는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

같은 시각, 강남의 지하 필름 보관소.

어둠 속의 금속 선반들이 쌓여 있었다. 수백 개의 필름 케이스가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 중 하나. <천사의 날개>라고 적힌 필름 케이스.

그 옆에 한진수가 서 있었다. 손에는 외장 하드드라이브가 들려 있었다. 지훈이 삭제했다고 생각했던 마스터 파일이 담긴 것이었다. 한진수는 백업을 만들어 두었다. 아무도 모르게. 법무팀도, 지훈도, 누구도.

한진수가 그것을 작은 금속 상자에 넣었다. 그리고 그 상자를 필름 케이스 뒤에 숨겼다. 깊숙이. 어둠 속으로.

한진수는 고개를 들었다. 보관소의 천장을 봤다. 그 위는 강남의 낮이었다. 그리고 그 위는 무한한 미래였다.

"언젠가는..."

한진수가 중얼거렸다. 목소리는 작았다. 하지만 확신으로 가득했다.

"언젠가는 이 영화가 나올 거야. 누군가는 이 진실을 봐야 해. 박준호 감독의. 지훈이의. 모두의."

그가 손을 내려놨다. 보관소의 불이 꺼졌다. 어둠 속에서 필름들만 남았다. 그들은 기다리고 있었다. 영원히 기다리고 있었다. 언젠가 올 그날을 위해.

<천사의 날개>도 그 중에 있었다. 폐기 처분될 날을 기다리지 않으면서. 누군가의 손에 들려질 날을 기다리며. 그 날은 오지 않았지만, 오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었다.

---

새벽 5시 47분, 강남의 촬영장.

드라마 <현재의 순간>의 첫 촬영이 시작되었다. 조명이 켜졌다. 카메라가 회전했다. 감독이 손을 들었다.

"롤 카메라!"

클래퍼가 내려갔다.

"액션!"

지훈이 무릎을 꿇었다. 대사를 읽었다. 그의 목소리는 맑았다. 현재의 것이었다. 필름 속의 재현이 아니라, 지금 이 촬영장에서 터져 나오는 감정이었다.

카메라는 계속 돌았다. 필름은 계속 흘렀다. 그리고 지훈은 계속 살았다. 이 순간 속에서.

창밖의 하늘이 천천히 밝아오고 있었다. 강남의 새벽이 물러나고 있었다. 그 자리에 새로운 하루가 들어오고 있었다. 새로운 배우의 날이 들어오고 있었다.

지훈은 눈을 들었다. 카메라를 봤다. 아니, 카메라 너머의 누군가를 봤다. 심사위원들이 아니었다. 관객이 아니었다. 현재의 순간 속에 있는 누군가였다.

그것은 필름 속의 자신이 아니었다. 완벽한 배우가 아니었다. 그것은 현재의 배우였다. 불완전하고, 떨리고, 살아 있는 배우였다.

"컷!"

감독이 외쳤다. 조명이 꺼졌다. 카메라가 멈췄다.

"완벽해. 그 감정이야."

감독이 말했다. 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릎에서 일어섰다. 다시 현재로 돌아갔다. 또 다른 테이크를 위해.

강남의 스튜디오들은 깨어나고 있었다. 수백 개의 촬영장에서 수천 명의 배우들이 현재를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미완성이었다. 모두 불완전했다. 모두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 살아 있었다.

지훈도 이제 그들 중 한 명이었다.

그의 뒷모습이 촬영장 안에서 움직였다. 조명 아래서. 카메라 앞에서. 감독의 지시를 받으며. 현재의 배우로서.

카메라는 뒤로 빠졌다. 촬영장이 작아졌다. 그리고 강남의 도시 풍경이 펼쳐졌다. 밝아오는 하늘 아래. 스튜디오, 방송국, 영화사, 드라마 현장. 모두가 살아 있었다. 모두가 현재 속에서 숨 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밑바닥.

지하 필름 보관소.

어둠 속의 필름들. 수백 개의 필름이 선반에 쌓여 있었다. 그들은 기다리고 있었다. 폐기 처분될 날을 기다리며. 또는 누군가의 손에 들려질 날을 기다리며.

<천사의 날개>도 그 중에 있었다. 케이스에 담긴 채로. 어둠 속에서. 그 뒤에는 한진수가 숨겨 놓은 작은 금속 상자가 있었다. 마스터 파일을 담은 상자.

언젠가는 누군가가 그것을 발견할 것이다.

언젠가는 누군가가 그 영화를 세상에 내보낼 것이다.

언젠가는 박준호 감독의 유작이 다시 빛을 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지훈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지훈은 현재를 살고 있었다.

카메라가 계속 돌고 있었다. 촬영장에서. 감독의 목소리가 계속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액션!"

지훈이 다시 무릎을 꿇었다. 다시 현재로 들어갔다. 다시 살았다.

이 순간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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