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거짓의 반복

밤 4시 47분.

거울 속의 얼굴이 낯설었다.

그 얼굴은 내 얼굴이 아니었다. 아니, 내 얼굴이 맞는데 다른 누군가의 것처럼 보였다. 눈이 다른 눈이었다. 입이 다른 입이었다. 피부 아래 누군가 다른 존재가 살고 있는 것 같았다.

형광등이 깜빡였다. 3초 간격이었다. 지난 밤부터 계속 그 간격이었다. 혹은 더 오래전부터. 기억이 명확하지 않았다.

침대에서 일어났다. 다리가 버틸 리 없었지만 버텼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는 모르겠다.

지난 밤 팔뚝의 글씨는 반쯤 지워져 있었다. '내 이름은 이지현'. 손가락으로 문지르니 더 옅어졌다. 문지르지 말았어야 했다.

병실을 나갔다. 복도는 적막했다. CCTV의 빨간 불빛만 주기적으로 깜빡였다. 아니, 깜빡이는 게 맞나. 멈춰 있는 건가. 다시 구분이 안 됐다.

메모장을 들고 있었다. 언제부터 들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회색 노트의 페이지들을 뒤적였다.

**준호 손가락 밴드** **한석준 기록 위조** **엄마 핸드폰 빼앗음** **유미경이 왔다 / 안 왔다** **검은 차 / 흰 제네시스** **다른 남자의 목소리** **의도적인 핸들 조작** **내 이름은 이지현**

글씨들이 떨리고 있었다. 손이 떨리는 건지, 글씨 자체가 움직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마지막 페이지.

**그녀는 안전합니다. 계획은 계속됩니다.**

이 글씨는 내 것인가, 아니면 한석준의 것인가. 손가락으로 글씨를 따라가며 필압을 느껴보려고 했다. 종이가 찢어졌다.

"기억을 복원할 때마다 현재의 기억이 사라진다."

누가 이렇게 말했나. 내가 말했나. 한석준이 말했나. 아무튼 맞는 말이었다. 어제 먹은 음식을 기억할 수 없었다. 어제 누가 방문했는지도. 방금 전 대화도.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빠져나간 기억들이 있는 게 아니라, 빠져나간 기억이 자리에 다른 기억을 남겨두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내 뇌 속 파일을 덮어씌우고 있는 것처럼.

병실 문 앞에 섰다. 손잡이를 잡으려는 순간,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지현."

준호였다. 밤 5시다. 이 시간에 왜 온 거지. 아니, 매일 오나. 기억이 안 난다.

"당신이 누구세요?"

준호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 표정을 본 건 처음이 아닌 것 같은데, 지금이 처음인 것도 같았다.

"지현, 나야. 준호야."

"준호."

이름을 반복했다. 음절을 씹어서 뱉어냈다. 그 이름이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여전히 불명확했다.

"당신이 내 남편이라고 했어요?"

준호가 한발 물러섰다. 손을 들었다가 내렸다. 들었다가 내렸다. 세 번. 네 번. 그 손가락에 밴드가 붙어 있었다. 오른손 검지.

"우리... 우리 얘기해야 해."

"뭘요?"

"그날 밤 말이야."

그날 밤. 그날 밤이 뭐지. 내 입에서 말이 나왔다.

"교통사고 말이에요?"

준호가 고개를 저었다.

"사고가 아니었어."

"뭐라고요?"

"당신이... 당신이 의도적으로 했어. 차를 건물에 부딪혔어. 당신이."

내 뇌가 그 말을 처리하려고 애썼다. 회로가 맞지 않았다. 준호가 계속 말했다.

"당신이 내게 말했어. '나는 죽고 싶어. 근데 혼자는 못 할 것 같아'라고. 그래서 나는..."

"그래서 당신이 뭐 했다고요?"

"너를 도와주겠다고 했어."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려고 했다. 뇌가 거부했다. 마치 손상된 파일을 읽으려는 컴퓨터처럼.

"당신은 핸들을 잡았고, 나는 브레이크를 밟지 않았어. 그리고..."

"그리고?"

"사고가 나지 않았다. 충돌이 일어났다. 너는 의식을 잃었고, 나는 신고했고, 모두가..."

"모두가 뭐요?"

"너를 보호하기로 했어. 넌 정신질환자가 아니야. 넌 자해 시도자였어.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모두가 거짓을 말했어. 한석준이, 엄마가, 유미경이. 다 같이."

내 손이 떨렸다. 아니, 떨리고 있었나. 떨리는 게 맞나.

"당신이... 당신이 거짓말을 하는 거예요."

"아니야."

"당신이 내 기억을 조작했어요!"

"지현, 들어. 너는 능력이 없어."

목소리가 누군가 다른 사람의 것처럼 들렸다. 누구의 목소리지. 한석준의 목소리인가. 아니면 내 뇌 속 목소리인가.

"기억 복원 능력이 없어. 그건 너의 뇌가 만든 거야. 너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너는 자살을 시도했어.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으니까, 너의 뇌는 다른 이야기를 만들었어. '나는 음모의 피해자다. 모두가 날 속이고 있다. 나는 미친 게 아니라 옳은 거다'라고. 그렇게 너는 정상이 될 수 있었어."

"아니에요."

"그런데 지금은?"

준호의 얼굴이 점점 흐릿해졌다. 아니면 내 눈이 흐릿해지고 있는 건가.

"지금은 뭐예요?"

"지금은 모든 기억이 돌아오고 있어. 넌 이제 진실을 마주하고 있어. 그리고..."

"그리고?"

"이 진실을 기억할 수 없게 될 거야."

복도의 불이 바뀌었다. 흰 불에서 파란 불로. 아니, 불이 바뀐 게 아니라 내 눈이 바뀌고 있는 건가.

"약을 드리겠습니다."

한석준이 나타나 있었다. 언제부터 있었나. 손에 약 한 알을 들고 있었다. 흰색의 작은 알약. 아니, 파란색인가. 색이 자꾸 바뀐다.

"이건 뭐예요?"

"치료제입니다."

"거짓이잖아요!"

"네가 만든 거짓을 치료하는 약이에요."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보고 있었다. 손가락이 다섯 개인가. 세어보려고 했으나 포기했다.

"이 약을 먹으면?"

"당신은 안전해질 거예요."

"기억이 사라져요."

"그래요. 모든 게."

내 입이 벌어졌다. 다시 닫혔다. 약을 집어 들었다. 손이 떨렸다. 아니, 약이 떨렸다. 약 자체가 진동하고 있었다.

"넌 정상이 될 거야."

준호의 목소리였다. 아니, 내 목소리인가.

나는 약을 입에 넣을 수도, 거부할 수도 있었다. 그 순간이 있었다. 선택의 순간이. 손가락 사이에 들린 약. 입 앞에 올려진 손. 한 번 더 생각할 기회. 한 번 더 거부할 기회.

나는 삼켰다.

물을 마셨다. 아니, 물을 마신 건가. 입 안이 쓸어렸다. 혀가 자신의 혀가 아니었다.

---

약이 내려가는 순간, 세상이 변했다.

형광등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1초. 2초. 3초. 아니, 0.5초. 0.1초. 시간이 빨라지고 있었다. 아니, 느려지고 있었다. 시간 자체가 흐릿해졌다.

시각이 먼저 왜곡되었다. 병실의 벽이 물결처럼 흔들렸다. 천장이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 색깔이 변했다. 하얀색에서 회색으로, 회색에서 파란색으로. 세상이 프리즘을 통과하는 빛처럼 분산되었다.

그 다음 청각이 변했다. 준호의 목소리가 음파로 들렸다.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빠져나갔다. 의사의 목소리는 역재생되었다. 내 자신의 숨소리가 우렁차게 들렸다. 모든 소리가 한데 뒤섞여 악음을 이루었다.

그리고 시간감각이 붕괴되었다. 과거와 현재가 구분되지 않았다. 지금이 언제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그날 밤이 돌아왔다.

핸들. 내 손이 핸들을 잡고 있다. 손가락이 차갑다. 떨리고 있다. 내 발이 가속 페달을 밟고 있다. 엔진음이 귀를 찢는다. 건물이 점점 커진다. 유리창이 보인다. 내 얼굴이 유리창에 비친다. 그 얼굴이 웃고 있다. 아니, 울고 있다. 아니, 그냥 있다.

충돌.

세상이 뒤틀린다. 유리가 깨진다. 파편이 공중에서 춤을 춘다. 각 파편이 햇빛에 반사되며 반짝인다. 아름답다. 죽음이 이렇게 아름다울 줄 몰랐다.

통증. 왼쪽 팔에서 시작된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아니, 느껴진다. 신경이 비명을 지른다. 내 가슴이 핸들에 부딪힌다. 숨이 나가간다. 돌아오지 않는다.

준호의 목소리. "지현! 지현!"

그의 손이 내 팔을 잡는다. 그의 손가락이 내 차의 문에 끼인다. 뼈가 부러진다. 그의 비명. 내 비명. 누구의 비명인지 구분이 안 된다.

"미안해. 미안해."

내가 중얼거린다. 아니, 울부짖는다. 내 목소리가 내 귀에 들린다. 낯설다. 이 목소리가 나의 목소리인가.

"내가... 내가 했어."

"알아. 알아. 괜찮아."

준호가 나를 안는다. 그의 팔이 내 몸을 감싼다. 따뜻하다. 그의 피가 내 얼굴에 묻는다. 그의 손가락이 부러졌다. 내 탓이다. 모든 게 내 탓이다.

내 몸이 경련을 일으켰다. 팔이 경직되었다. 다리가 꼬였다. 내 입에서 소리가 나왔다. 울음인지 비명인지 구분할 수 없는 소리. 내 목이 터질 듯 울부짖었다.

"살려줘. 제발 살려줘."

내가 말한다. 누구를 살려달라는 건가. 나를 살려달라는 건가. 준호를 살려달라는 건가. 이 모든 것을 살려달라는 건가.

"넌 살아야 돼."

준호가 말한다.

"넌 살아야 돼. 제발."

---

메모장의 글씨가 사라지고 있었다. 종이 위에서 글씨가 떠올라 공중으로 흩어졌다. 아니, 글씨가 투명해지고 있었다. **준호 손가락 밴드**가 희미해졌다. **한석준 기록 위조**가 옅어졌다. 모든 글씨가 사라졌다.

준호의 얼굴도 흐릿해졌다. 눈이 먼저 사라졌다. 그 다음 코. 그 다음 입. 마지막에 윤곽선.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누군가가 있었다는 사실만 기억났다.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팔뚝의 글씨도 지워지고 있었다. **내 이름은 이지현**. 한 글자씩 사라졌다. '내'. '이'. '름'. '은'. '이'. '지'. '현'. 마지막에 '현'이 남았다. 그것도 사라졌다.

더 이상 글씨는 남지 않았다.

어둠이 덮쳐왔다. 아니, 어둠이 아니라 흰색이었다. 모든 것이 하얀색으로 변했다. 하얀 천장. 하얀 벽. 하얀 침대. 하얀 손. 하얀 생각. 모든 것이 하얀색이 되어 사라졌다.

---

밤이 지났다.

아침이 왔다. 정확히 언제 왔는지는 모르겠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밝았다.

천장을 보고 있었다. 하얀 천장. 익숙한 천장. 처음 본 천장. 둘 다인 천장.

옆에 누군가 있었다.

"좋은 아침, 지현."

남자가 말했다. 목소리가 낯익었다. 아니, 낯설었다. 아니, 둘 다였다.

그 순간이었다. 뇌 한구석에서 무언가가 깨어났다. 마치 물속에 가라앉았던 것이 수면으로 떠오르는 것처럼. 천천히. 고통스럽게.

기억들이 몰려왔다.

하지만 그것들은 파편이 아니었다. 조각도 아니었다. 완전했다. 너무나 명확해서 두려웠다.

그날 밤. 핸들을 잡은 내 손. 가속 페달을 밟은 내 발. 건물을 보는 내 눈. 충돌 직전의 침묵. 그 침묵 속에서 내가 중얼거린 말. '너는 잊어야 돼.'

그리고 나는 핸들을 돌렸다. 의도적으로. 분명한 의지로.

나는 자살을 시도했다.

아니다. 나는 자해를 시도했다. 죽음을 원하지 않았다. 단지 사라지고 싶었다. 내 모든 기억을 지우고 싶었다. 내가 한 일들을. 내가 저질렀던 것들을. 내가 알아버린 진실을.

그리고 모두가 날 보호했다.

준호는 날 안아줬다. 엄마는 날 가슴에 안겼다. 의사는 약을 줬다. 간호사는 내 손을 잡아줬다.

모두가 거짓말을 했다.

'당신의 남편이 운전했어요.' 거짓이었다.

'당신이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거짓이었다.

'당신의 기억이 환각이에요.' 거짓이 아니었다.

내 기억이 환각이었다. 내 기억 복원 능력이 환각이었다. 내가 본 음모가 환각이었다. 내 뇌가 만든 거짓이었다. 내가 저질렀던 일로부터 날 보호하기 위해, 내 뇌는 더 큰 거짓을 만들어냈다. 그것이 나의 능력이었다.

"누세요?"

나는 물었다.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나왔다.

"나야. 준호야."

준호. 이 남자의 이름이 준호인가. 그렇군.

하지만 나는 알았다. 이 남자가 누구인지 알았다. 이 남자가 그날 밤 병실에 와서 무엇이라고 말했는지 알았다. '그날 밤은 사고가 아니었다.'

아니다. 그것도 거짓이었다. 아니, 절반의 진실이었다. 사고가 아니었다. 하지만 준호의 탓이 아니었다.

내 탓이었다.

그의 손가락을 부러뜨린 것도 나였다. 그를 거짓으로 감싸게 만든 것도 나였다. 모두에게 거짓을 말하게 만든 것도 나였다.

"기분이 어때?"

기분이 어떤가. 내 몸 안을 살펴봤다. 약물이 내 신경을 누르고 있었다. 손가락의 감각이 사라지고 있었다. 발가락부터 시작해서 천천히 올라오는 마비. 목소리가 타성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시간이 왜곡되고 있었다.

절망을 감싸는 무언가가 있었다. 약물이었다. 약물이 절망을 덮고 있었다. 마치 흙이 무덤을 덮는 것처럼.

하지만 그 아래서 뭔가 꿈틀거렸다. 절망이 아닌 다른 것. 안도감인가. 아니면 죽음의 감각인가. 기억이 사라지는 것이 해방인가, 아니면 또 다른 죽음인가.

"괜찮아요."

거짓이었다. 내 입에서 나온 거짓이었다.

거울이 벽에 붙어 있었다. 거울 속의 얼굴을 봤다. 여자 얼굴이었다. 누구의 얼굴인가. 내 얼굴인가. 맞다. 내 얼굴이다. 하지만 그 얼굴이 내 얼굴인지 누군가 다른 사람의 얼굴인지 더 이상 구분할 수 없었다. 약물이 모든 것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목표였다.

나는 이제 기억하지 못해야 했다. 이 진실을 기억하지 못해야 했다. 내가 자신을 부딪혔다는 것을. 내가 자살을 시도했다는 것을. 내가 모두에게 거짓을 말하게 했다는 것을.

약물이 나를 보호하고 있었다. 내 자신으로부터.

팔뚝을 들었다. 글씨가 지워져 있었다. 남아 있는 것은 희미한 자국뿐이었다. '내 이름은 이지현'이라는 글씨. 하지만 그것도 사라질 것이었다. 약물이 모든 것을 지울 것이었다. 내 이름도, 내 기억도, 내 정체성도.

팔뚝의 글씨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손가락으로 글자를 더듬었다.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 자국을 간직하려는 듯 손가락을 더 천천히 움직였다. 이것도 곧 사라질 것이었다.

"뭘 보고 있어?"

"아무것도 아니에요."

준호가 손을 내밀었다. 검지에 밴드가 붙어 있었다. 아니, 밴드가 없었다. 깨끗했다. 너무 깨끗해서 이상했다. 하지만 그것도 거짓이었다. 나는 알았다. 그 손가락이 어디서 다쳤는지. 그날 밤, 내가 핸들을 돌렸을 때, 그 손가락이 어디 끼었는지.

내 차의 문에.

내 차의 문이 준호의 손가락을 부러뜨렸다. 그가 나를 끌어내려고 할 때.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말할 수 없었다. 약물이 내 입을 닫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무언가도.

의심이었다.

준호가 말한 것이 모두 진실인가. 그가 정말로 나를 보호하려고 했는가. 아니면 그것도 거짓인가. 그가 나를 도와줬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나를 가두고 있는 건 아닌가. 약물로 나를 조종하고 있는 건 아닌가.

"우린 이제 집에 갈 수 있어."

"네."

집에 간다. 그곳에서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약물이 모든 것을 지울 것이기 때문이다.

"너는 안전해."

안전하다. 맞다. 나는 안전하다. 더 이상 추적할 기억도 없고, 더 이상 밝혀낼 진실도 없고, 더 이상 의심할 사람도 없다.

그런데 정말로 안전한 건가. 이것이 안전인가. 아니면 또 다른 감옥인가.

"모두가 너를 사랑해."

"네."

사랑한다. 거짓인지 진실인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거짓도 충분히 따뜻하다. 거짓도 충분히 안전하다.

내가 그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따뜻한 손. 나를 보호하려고 했던 손. 나를 거짓으로 감싸려고 했던 손.

또는 나를 가두려고 했던 손.

벽에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몇 번 본 것 같은데 처음 본 것도 같은 포스터.

**당신은 안전합니다. 모든 것이 괜찮을 것입니다.**

글씨가 반복되고 있었다. 줄 아래 줄로. 같은 글귀가 계속.

나는 웃었다. 그것이 진정한 웃음인지, 약물에 의한 웃음인지 더 이상 구분할 필요가 없었다. 웃음은 웃음이었다. 그게 전부였다.

준호가 손을 놓지 않았다. 나도 손을 놓지 않았다. 손을 놓을 이유가 없었다.

우리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봤다.

형광등이 깜빡였다. 1초. 2초. 3초. 정확한 간격이었다. 내가 세던 간격과 같았다. 밤마다 세던 그 간격. 하지만 이제 그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간격도, 숫자도, 시간도.

"지현?"

"네?"

"기억해?"

기억해. 뭘 기억하는가. 내 뇌를 살펴봤다. 거기는 빈 공간이었다. 아니, 공간도 없었다. 단지 흐릿함만 있었다. 약물의 흐릿함. 거짓의 흐릿함. 내가 만든 거짓의 흐릿함.

"아니요."

"좋아. 그게 좋아."

그렇군. 그럼 괜찮다.

준호의 얼굴을 봤다. 누구의 얼굴인가. 나의 남편의 얼굴인가. 맞다. 남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건 행복한 상태인가. 아니면 또 다른 거짓인가.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모든 것이 안전해 보였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병실의 문이 열렸다. 누군가 들어왔다. 의사였다. 한석준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이름을 모르고 있을 것이었다. 약물이 곧 그것도 지울 것이기 때문이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지현."

의사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무언가가 있었다. 안도감이었다. 또는 승리감이었다. 또는 그냥 의료진의 목소리였다. 더 이상 구분할 수 없었다.

"어제 밤은 어땠습니까?"

어제 밤. 어제 밤이 언제였는가. 1분 전인가. 1시간 전인가. 1년 전인가. 모든 시간이 섞여 있었다. 약물이 시간을 녹여버렸다.

"괜찮았어요."

또 다른 거짓이었다. 또 다른 거짓을 말했다.

의사가 약을 내밀었다. 흰 알약이었다. 또 다른 하얀 알약이었다. 내가 이미 몇 개를 삼켰는가. 세어본 적이 없었다. 세는 것도 의미가 없었다.

나는 약을 받아 입에 넣었다. 삼켰다. 목을 통해 내려갔다. 내 뱃속에 도착했다. 내 혈액 속으로 흡수되었다. 내 뇌에 도달했다.

모든 것이 더 흐릿해졌다.

"이제 당신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의사가 말했다. 도와준다. 도움이란 무엇인가. 기억을 지우는 것이 도움인가. 진실을 감추는 것이 도움인가. 내 자신을 없애는 것이 도움인가.

아마도 그것이 도움이었다. 지금 내 상태에서는 그것이 도움이었다.

"감사합니다."

내가 말했다. 거짓으로 감사했다. 또 다른 거짓이었다.

의사가 나가갔다. 문이 닫혔다.

벽의 포스터가 반복되고 있었다. **당신은 안전합니다. 모든 것이 괜찮을 것입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서도 글씨는 들렸다.

당신은 안전합니다.

모든 것이 괜찮을 것입니다.

당신은 안전합니다.

모든 것이 괜찮을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은.

당신은.

그리고 그 순간, 마지막 의문이 떠올랐다.

내 이름은 이지현이었다. 내 이름은. 내 이름은.

손가락으로 팔뚝의 자국을 더듬었다.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글씨. 내 이름. 내 이름. 내 이름.

그 이름이 사라지기 전에 한 번 더 중얼거렸다.

"이지현."

입술이 움직였다. 음절이 나왔다. 그리고 그것도 사라졌다. 약물 속으로. 기억 속으로.

내가 누구였는가.

그 질문이 약물 속으로 가라앉았다. 천천히. 확실하게.

그런데 정말로 내 이름이 이지현인가.

약물이 진짜 치료인가, 아니면 또 다른 거짓인가.

이전화목차마지막 화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