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눈을 뜨는 순간, 천장이 흰색이었다.

형광등의 빛이 직접 눈에 들어왔다.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팔이 무거웠다. 점액질 같은 것이 팔뚝에 붙어있었다. 링거줄이었다.

어디지?

침대 위였다. 병실이었다. 침대 옆 모니터에서 규칙적인 비프음이 울렸다. 초록색 선이 내 심박수를 따라 출렁였다.

기억이 없었다. 어쩌다 여기 있게 됐는지. 왜 링거를 맞고 있는지. 어디가 아픈지도 모르겠는데, 몸은 전체적으로 무겁고 둔했다.

문이 열렸다. 간호사였다. 이름표에는 '유미경'이라고 적혀있었다.

"잠 잘 주무셨어요? 의식이 돌아오셨네요."

의식이 돌아왔다고? 의식이 어디 갔던 건가?

"어디... 여기가?"

목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내 목소리가 아닌 것처럼 들렸다. 더 낮았고, 더 약했다.

"신경정신재활센터예요. 당신은 교통사고로 입원하셨어요. 뇌손상 치료를 받고 계세요."

교통사고. 뇌손상.

그 말들이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의 이야기인 것처럼 들렸다.

"간단한 검사를 해볼게요." 유미경이 손전등을 꺼냈다. "이름이 뭐예요?"

"이지현."

"나이?"

"서른다섯."

"직업?"

"웹 디자이너."

질문들이 계속됐다. 내 기억은 명확했다. 이름, 나이, 직업—모두 맞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뭔가 빠져있다는 느낌이 지워지지 않았다. 마치 그림 퍼즐에서 한 조각이 없는 것처럼.

"좋아요. 인지 기능은 정상이네요." 유미경이 손전등을 치웠다. "남편분이 계속 당신을 돌보시고 계세요. 이따 뵐 거예요."

남편.

그 말을 들었을 때, 뭔가 내 가슴 한쪽이 철렁 내려앉았다. 남편이라는 개념은 존재하는데, 그 남편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떠오르기는 했다. 하지만 그 얼굴이 내 남편이라는 확신이 없었다.

"편히 쉬세요."

유미경이 나갔다.

나는 천장을 바라봤다. 흰 천장이 계속됐다. 병실이라는 공간 자체가 낯설었다. 벽의 색, 창문의 크기, 문의 손잡이 모양—모든 것이 나와 무관한 것 같았다. 마치 내가 여기 속하지 않는 사람처럼.

한 시간쯤 지났을 때 문이 다시 열렸다.

검은색 셔츠를 입은 남자가 들어왔다. 내 침대 옆으로 다가와 웃었다. 부드러운 웃음이었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얘, 깨어났네. 얼마나 기다렸는데."

그 남자가 내 손을 잡았다. 손이 따뜻했다. 그런데 내 손이 경직되었다. 자동으로 움직이지 않은 것이다.

이 남자가 누구지?

"당신이... 누구세요?"

침묵이 흘렀다. 그 남자의 얼굴이 조금씩 굳어갔다. 웃음이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웃음이 돌아왔는데, 이번 웃음은 다른 종류였다.

"내가... 누구게? 지현, 농담하는 거야?"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이 남자의 얼굴을 본 기억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했다. 마치 흐릿한 사진처럼.

"당신이 남편이라고 했는데..."

그 남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손가락에 밴드가 붙어있었다. 흰 밴드가. 혈흔이 보였다.

그 손가락을 봤을 때, 내 안의 뭔가가 울렸다.

"지현, 농담 그만해. 나 준호야. 당신 남편이야."

목소리가 강해졌다. 거의 명령에 가까웠다.

"손가락은... 뭐예요?"

그 남자의 눈빛이 변했다.

"뭐? 아, 이거? 아무것도 아니야. 어제 문에 끼웠어."

거짓이었다. 나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내 뱃속에서 뭔가가 울렸다. 경고음처럼.

"당신은... 나를 알고 있나요?"

"뭐라고?"

"당신이 정말 내 남편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나요?"

그 남자는 한 발 물러섰다. 문을 열었다. 복도에서 누군가를 불렀다. 곧 의사가 들어왔다. 흰 가운을 입은 남자. 이름표에는 '한석준'이라고 적혀있었다.

"환자분, 진정하세요. 당신은 교통사고로 뇌손상을 입었습니다. 기억이 불완전한 것은 정상입니다."

한석준이 내 눈을 보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매우 확실했다.

"이분이 당신의 남편입니다. 당신의 뇌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에 잘못된 인식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를 믿으세요. 당신은 안전합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내 저항심이 사라졌다. 의료 권위 앞에서 나는 작아졌다. 그의 목소리가 너무 확실했고, 그의 눈빛이 너무 진지했다.

"약을 복용하셔야 합니다. 뇌의 회복을 돕기 위해."

한석준이 종이컵에 담긴 약을 건넸다. 알약 두 개가 있었다. 하나는 흰색, 하나는 파란색.

나는 약을 삼켰다.

오후가 지나고 저녁이 왔을 때, 친모가 들어왔다. 박영희. 내 어머니. 그 여자가 내 침대에 앉았다.

"우리 딸, 깨어났네."

어머니가 내 손을 잡았다. 손이 따뜻했다. 그 온기가 진실처럼 느껴졌다. 나는 울음이 나올 뻔했다.

"엄마... 내가 뭔가 이상한데."

"뭐가 이상해?"

"내 기억이... 이상해. 남편이... 내 남편이 아닌 것 같은데."

어머니의 얼굴이 굳어졌다.

"지현, 그건 당신의 뇌가 만드는 환각이야. 의사 선생님도 말씀했잖아. 당신은 뇌손상을 입었고, 지금은 회복 중이야. 준호는 당신의 남편이 맞아. 이 며칠 동안 당신 옆에서 밤을 새우며 당신을 돌봤어."

어머니의 목소리가 떨렸다. 진심이 담겨있었다. 하지만 그 진심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왜 모두 같은 말을 해?"

"뭐?"

"남편도 같은 말 하고, 의사도 같은 말 하고, 엄마도..."

"당신은 치료에 집중해야 해. 의료진 말을 들어야 돼. 약을 잘 먹어야 돼."

어머니가 내 어깨를 잡았다. 손가락이 내 살을 파고들었다.

"당신이 정상이 되려면 우리 말을 믿어야 해. 당신의 기억을 믿지 말고, 우리 말을 믿어야 해. 알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내 안의 뭔가가 저항했다.

밤이 깊어갔다. 약의 영향이 점점 사라지면서, 파편적 기억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검은 차. 누군가의 손이 핸들을 잡고 있다. 그 손은 준호의 손이 아니다. 더 크고 거친 손이다.

그리고 목소리. 다정하면서도 위협적인 목소리.

"잊어, 지현. 넌 잊어야 돼."

뇌가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나는 침대에서 몸을 날렸다.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파편들이 떠올랐다. 더 명확하게. 더 구체적으로.

그 남자의 얼굴이 보인다. 아직도 흐릿하지만, 뭔가가 보인다. 그 눈빛. 그 입가의 미소.

통증이 끊어진다. 갑자기.

나는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땀에 흠뻑 젖어있었다. 가슴이 철렁철렁 내려앉았다.

그 이미지들. 그 목소리. 뭔가 중요한 것이었다. 나는 알았다.

그 파편들을 다시 생각했다. 검은 차. 큰 손. 비명. 그리고 그 목소리.

"잊어, 지현. 넌 잊어야 돼."

누가 날 그렇게 말했을까?

다음날 아침이었다. 나는 그 파편들을 다시 떠올리려 했다. 더 자세하게. 더 명확하게.

그러자 뭔가가 사라졌다.

생각해보려 했다. 어제 밤에 뭘 했더라. 어머니와 뭘 말했더라. 하지만 기억이 나오지 않았다. 마치 흐릿한 안개 속으로 사라진 것처럼.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내가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을 추적하면, 다른 기억이 사라진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깨달았다. 이것이 규칙이라는 것을. 이것이 나의 능력이라는 것을.

나는 그 파편들을 더 깊게 파고들고 싶었다. 그 검은 차의 정체를 알고 싶었다.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뭔가가 사라질 것이었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을. 과거의 진실을 얻으려면, 현재의 나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손가락이 떨렸다. 침대 모서리를 움켜잡았다.

간호사 유미경이 아침 약을 가져왔다. 하얀 알약 두 개. 작은 종이컵에 담긴 물. 그녀의 표정은 늘 그랬다—회의적이면서도 동정적인.

"약 드세요."

"이게 뭐예요?"

"의사 처방약입니다."

"어떤 약이죠?"

유미경이 잠시 침묵했다. 그녀의 눈이 흔들렸다. 뭔가 말하고 싶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신경 안정제예요. 당신을 도와줄 거예요."

나는 약을 들었다. 알약의 무게가 내 손 위에서 이상하게 무거웠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입에 집어넣었다. 물과 함께.

유미경이 나를 바라봤다. 확인하듯이.

"잘했어요."

한 시간쯤 지났을 때, 내 몸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뇌가 솜으로 채워지는 느낌. 생각이 흐릿해졌다. 그 파편적인 기억들도 희미해져갔다.

나는 저항했다. 생각을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약의 영향력이 더 강했다.

정오쯤 한석준 주치의가 들어왔다. 그의 흰 가운. 그의 자신감 있는 태도. 그는 나를 보고 미소 지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이지현 씨. 어떤 기분이신가요?"

"약을 먹었어요."

"네, 알고 있습니다. 좋은 선택입니다. 약물 치료는 당신의 회복에 매우 중요합니다."

그는 의자를 끌어앉았다.

"어제 밤은 어떠셨습니까?"

나는 거짓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약의 영향으로 내 입이 움직였다.

"꿈을 꿨어요."

"어떤 꿈입니까?"

"검은 차... 누군가의 목소리..."

한석준의 표정이 변했다. 아주 순간적으로. 하지만 그는 곧 표정을 되찾았다.

"그것은 당신의 뇌가 만든 이미지입니다. 뇌손상으로 인해 신경 회로가 손상되면, 뇌는 존재하지 않는 기억을 만들어냅니다. 우리는 그것을 '거짓 기억'이라고 부릅니다. 당신이 경험한 것은 거짓입니다."

"아니요."

"아니요?"

"제 기억이 거짓이라면... 당신의 말도 거짓일 수 있잖아요."

한석준이 침묵했다. 3초. 5초.

그는 일어섰다.

"당신은 아직 회복 중입니다. 약물을 계속 복용하시고, 우리를 신뢰하세요. 그것이 당신을 낫게 할 유일한 방법입니다. 약을 거르지 마세요. 약이 당신을 보호합니다."

그가 나가고 난 후, 나는 침대에 누워있었다. 약의 영향으로 생각이 흐릿했다. 하지만 그 흐릿함 속에서도 뭔가가 명확해지고 있었다.

그들이 모두 같은 거짓말을 한다는 것. 그들이 나를 보호하려는 게 아니라 뭔가를 숨기려는 것이라는 것.

오후 중반, 준호가 들어왔다. 그는 꽃을 들고 있었다. 빨간 장미. 그것은 남편의 전형적인 제스처였다. 하지만 이 남자는 내 남편이 아니었다.

"기분 어때? 더 좋아졌어?"

"손가락이 왜 밴드로 감싸져있어요?"

준호가 손을 보았다. 마치 자신이 밴드를 차고 있다는 것을 잊었던 것처럼.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아, 이건 그냥... 일로 인한 상처야. 별것 아니야."

"무슨 일이요?"

"지현아, 당신은 지금 회복에 집중해야 해. 내 일 같은 건 신경 쓰지 말고."

그의 목소리가 부드러웠지만, 그 부드러움 속에 뭔가 단단한 것이 숨어있었다. 명령이었다.

나는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하지만 내 눈은 그의 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 반창고. 그 혈흔.

저녁이 되었다. 준호가 나가고, 어머니가 들어왔다. 어머니는 항상 불안해 보였다. 그녀는 내 손을 잡았다.

"당신이 약을 잘 먹고 있다니 다행이야."

"엄마가 왜 그렇게 약을 강조하세요?"

"뭐?"

"모두가 약, 약을 말해요. 약이 뭔가를 숨기는 건 아닐까요?"

어머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리고 그 창백함은 곧 결연함으로 변했다.

"당신의 그런 생각이 바로 정신질환의 증상이야. 의료진 말을 들어야 돼. 약을 먹어야 돼. 그것만이 당신을 정상으로 만들 거야."

"정상이 뭐예요? 모두가 같은 거짓말을 하는 게 정상이에요?"

어머니가 내 어깨를 움켜잡았다. 손가락이 내 살을 파고들었다.

"당신이 알아서는 안 될 것들이 있어. 당신을 위해서. 우리는 모두 당신을 위해 이러는 거야. 당신이 정상이 되기를 바라면서."

"정상이 뭐예요?"

어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내 손을 더 세게 잡았을 뿐.

밤이 깊어갔다. 약의 영향이 점점 사라지면서, 그 파편적 기억들이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다. 검은 차. 누군가의 손. 그리고 그 목소리.

"잊어, 지현. 넌 잊어야 돼."

이 목소리가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고 싶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이 목소리가 왜 그렇게 익숙한지 알고 싶었다.

나는 그 파편을 더 깊게 파고들기로 결정했다.

내가 알아야 할 것이 있었다.

그 검은 차가 뭔지. 그 목소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날 밤 정말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는 눈을 감았다. 그 파편들로 돌아가려고 했다. 기억을 역으로 추적하려고 했다. 마치 실타래를 풀어가듯이.

그러자 뭔가가 떠올랐다.

차 안. 앞좌석. 준호인 줄 알았던 사람이 운전석에 앉아있다. 하지만 그건 준호가 아니다. 더 크고, 더 거친 남자다. 그의 손가락에는 반창고가 감싸져 있다. 피가 묻어있다.

그리고 나는 조수석에 앉아있다. 손이 떨리고 있다. 입가에서 피가 흐른다.

그 남자가 말한다. "잊어, 지현. 넌 잊어야 돼."

그 목소리는 왜 그렇게 익숙할까?

내 뇌가 찢어지는 듯한 통증. 파편이 더 깊어진다. 더 명확해진다.

그 남자의 얼굴이 보인다. 아직도 흐릿하지만, 뭔가가 보인다.

그리고 또 다른 기억이 겹친다.

병원 복도. 그 남자가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다. 목소리가 들린다.

"네, 알겠습니다. 그녀를 계속 약으로 관리하겠습니다. 그녀가 기억하면 안 되니까요."

통증이 끊어진다. 갑자기.

나는 깨어났다. 침대 위에서.

그리고 깨달았다.

무언가가 사라졌다는 것을.

어머니의 얼굴. 어머니의 목소리. 어머니와 나눈 모든 대화들. 그것들이 모두 흐릿해졌다. 마치 물 속으로 가라앉은 것처럼. 어머니라는 개념만 남고, 그 안에 담긴 구체적인 것들은 모두 사라졌다.

하지만 다른 것들은 더 명확해졌다.

그 남자의 얼굴. 그의 목소리. 그의 손가락의 반창고. 그리고 병원 복도에서 들은 그 말.

"그녀가 기억하면 안 되니까요."

나는 깨달았다.

이것이 대가라는 것을. 이것이 나의 능력의 규칙이라는 것을.

과거를 얻으려면 현재를 포기해야 한다. 기억을 복원하려면 다른 기억이 사라져야 한다. 그것도 임의로 선택할 수 없다. 내가 파고드는 진실이 클수록, 내가 잃는 것도 커진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계속 파고들어야 할까? 아니면 멈춰야 할까?

나는 알고 있었다. 멈출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시작된 것이다. 이미 각성된 것이다.

그 검은 차의 정체. 그 목소리의 주인. 그날 밤의 진실. 나는 그것을 알아야 한다.

비록 그것이 나를 완전히 파괴하더라도.

창밖의 야경이 여전히 밝았다. 그 불들이 마치 나를 감시하는 눈처럼. 마치 나를 가두는 벽처럼.

나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링거를 뽑으려 손을 들었다. 바늘이 팔뚝에서 빠져나왔다. 따뜻한 것이 흘러내렸다. 피였다.

나는 병실 문으로 향했다.

복도는 조용했다. 밤 11시. 간호사 스테이션에는 아무도 없었다. 모니터들이 초록빛을 내고 있었다.

나는 복도를 따라 내려갔다. 계단을 찾았다. 1층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 옆 비상계단. 나는 그곳으로 들어갔다. 한 발 한 발 내려갔다. 계단의 끝에서 문이 보였다. 지하 1층으로 가는 문.

나는 그곳을 통해 나갔다.

지하 주차장이었다. 어둠 속에서 차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형광등의 불빛이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나는 걸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는 몰랐지만, 내 발은 자동으로 움직였다. 파편적 기억들이 나를 이끌었다.

그곳에 있었다.

검은색 세단. 번호판이 보인다. 그 차.

나는 차 옆에 섰다. 손이 떨렸다. 운전석 창문을 통해 안을 들여다봤다. 시트에 뭔가 묻어있었다. 어둠 속에서는 정확하게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알았다.

그것이 무엇인지.

그 순간,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뭐 하는 거야?"

간호사 유미경이 서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다. 그녀의 손에는 주사기가 들려있었다.

"당신이 여기 있으면 안 돼."

나는 뒤로 물러섰다.

"당신도 알고 있었어요? 모두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유미경이 한 발 물러섰다.

"나는... 나는 직업이 필요했어. 그들이 나를 고용했어. 그들이..."

"누구?"

"당신이 알면 안 돼. 정말로."

유미경이 주사기를 들었다. 나는 돌아섰다.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계단을 올라갔다. 1층 로비로 나갔다.

출입구가 보였다. 유리문. 그 너머로 밤의 거리가 펼쳐져있었다.

나는 문을 밀었다.

밖으로 나왔다. 강남의 야경. 밝은 불들. 차들의 헤드라이트. 사람들의 목소리.

나는 걸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어디로 가야 할지는 몰랐지만, 나는 걸었다.

밤이 깊어갈수록, 내 안의 뭔가가 더 명확해지고 있었다.

그 검은 차. 그 목소리. 그 반창고를 감싼 손가락.

그리고 그 말.

"그녀가 기억하면 안 되니까요."

나는 누구를 기억해야 할까? 누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거리를 따라 걸었다. 강남역. 신논현역. 압구정. 가로수길.

사람들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 아무도 나를 보지 않았다. 병원 환자복을 입은 한 여자가 밤거리를 헤매고 있다는 것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계속 걸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익숙한 건물이 보였다.

낡은 오피스텔. 회색 외벽. 깨진 창문. 그 건물.

나는 멈췄다.

그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지만, 내 몸이 반응했다. 파편적 기억들이 소용돌이쳤다.

나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계단을 올라갔다. 3층. 304호.

문이 열려있었다.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어둠 속에서 뭔가가 보였다. 가구. 책상. 침대.

그리고 벽에 붙은 사진들.

나는 가까이 다가갔다.

사진 속에는 내가 있었다. 웃고 있는 내 모습. 그리고 그 옆에는...

그 남자가 있었다.

그 검은 차의 운전자. 그 목소리의 주인. 그 반창고를 감싼 손가락의 주인.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그 남자가 누구인지.

그 순간,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지현."

나는 돌아섰다.

그 남자가 서 있었다. 검은색 셔츠. 그 얼굴. 그 눈빛.

"당신은... 누구예요?"

"나 준호야. 당신의 남편이야."

"거짓이에요."

"거짓?"

"당신은 내 남편이 아니에요. 당신은..."

나는 멈췄다. 기억이 끊겼다. 마치 누군가 내 뇌에서 그 부분을 도려낸 것처럼.

그 남자의 정체. 그 남자와 나의 관계. 그 모든 것이 사라졌다.

하지만 내 몸은 알고 있었다. 내 본능은 알고 있었다.

"당신이 나를 여기로 데려왔어요. 그 밤에."

"그 밤?"

"당신이 나를 때렸어요. 당신이 나를 차에 태웠어요. 당신이 나를 병원에 데려다줬어요. 그리고 의사에게 돈을 줬어요. 나를 잊게 하라고."

그 남자의 얼굴이 굳어졌다.

"지현, 당신은 뭘 말하는 거야?"

"내 능력이 뭔지 알아요. 내가 기억을 복원하면, 다른 기억이 사라져요. 하지만 내 몸은 기억해요. 내 본능은 기억해요. 당신이 누구인지."

나는 한 발 물러섰다.

"당신이 누구든, 나는 당신을 기억할 거예요."

"지현..."

그 남자가 한 발 다가섰다.

나는 뛰었다.

계단을 내려갔다. 거리로 나갔다. 밤의 서울. 불빛들. 사람들.

나는 계속 뛰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밤이 깊어갈수록, 내 안의 뭔가가 점점 명확해지고 있었다.

그것은 기억이 아니었다. 그것은 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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