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간의 손잡이
지하철 7호선 강남역 승강장. 오후 6시 47분.
김준호는 맨 뒤 손잡이를 붙잡고 있었다. 승객들이 몸을 밀어붙이는 와중에도 그의 시선은 창밖을 향했다. 터널 속 자신의 흐릿한 반사상. 47세의 얼굴에서 10년의 실패가 그대로 읽혔다.
아침에 받은 사직 통보장은 여전히 주머니 속에 있었다. '스카우팅 성공률 3.2%. 구단 재정 악화에 따른 인원 감축.' 정해진 문구였다. 10년간 그가 발굴한 선수는 단 한 명. 그 선수마저 2군에서 썩었다.
'준호는 숫자만 본다'는 말을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모른다. '야구는 느낌이야.' '경험이 없어서 그런 거야.' 대형 구단 스카우터들의 웃음이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신체 규격주의자들이었다. 키 180 이상, 체지방률 15% 이하, 구속 150 이상. 그 틀에서 벗어나면 '미달'이었다.
2년 전, 김준호는 한 소년을 봤다. 173cm의 유격수. 하체 폭발력만 비정상이었던 그 아이. 그를 상급 팀에 추천했지만 웃음만 돌아왔다. 그 소년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지난해, 미국 뉴스에서 그 이름을 다시 봤다. 메이저리그 신인 드래프트 1순위. 그 소년이 성공했다.
지하철이 강남역을 떠나며 속도를 높였다.
그 순간이었다.
세상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터널의 벽이 거꾸로 흘러갔다. 승객들의 움직임이 프레임 단위로 끊겼다. 김준호의 손가락이 손잡이를 놓쳤다. 몸이 떨어지는 것 같았지만 중력이 작동하지 않았다. 귀에서는 음파가 역주행하는 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점점 빨라지는 그 소리.
그리고.
검은색.
깨어났을 때 천장은 낡은 스티로폼이었다. 모텔 천장. 악취는 담배와 곰팡이 냄새였다. 김준호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숨이 가쁜 상태로 자신의 손을 들었다.
손등에는 주름이 없었다.
피부가 팽팽했다. 청년의 손이었다. 47세의 손이 아니라 22세의 손이었다.
그는 거울로 달려갔다. 낡은 모텔 거울. 흐릿한 유리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뭐, 뭐야."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낮고 곧았다. 20대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눈은 그렇지 않았다. 눈에는 47년의 피로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코 옆에는 미세한 주름이 있었다. 이마 모서리에도. 신체는 되돌아갔지만 시간의 흔적은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책상 위의 달력을 집었다. 2000년 3월 15일. 수요일.
손가락이 떨렸다.
침대 밑에 있던 낡은 여행가방을 꺼냈다. 그 안에는 노트북이 있었다. 2025년식 노트북. 회귀와 함께 온 유일한 물건이었다.
전원을 켰다.
화면에는 2024~2025 시즌의 한국 야구 데이터가 떠올랐다. OPS, WAR, 스핀 레이트, 출루율, 장타율. 그 모든 것이 뇌에 각인되어 있었다. 미래의 선수들 성장 곡선. 그들이 어디서 성공하고 어디서 실패했는지. 누가 메이저리거가 되었고 누가 사라졌는지.
25년 후의 미래가 전부 기억났다.
모텔 방 한구석의 낡은 신문가판대에서 신문을 집었다. 손가락이 떨린 채로 스포츠 면을 펼쳤다.
'한강 라이온스, 신임 감독 박태수 선임… 저예산 우승 프로젝트 시작'
기사는 구체적이었다. 경영이사 이민준이 신규 스카우팅팀을 모집 중이라는 내용. 라이온스는 대기업 스폰서십이 끝난 상황에서 기적을 노려야 한다는 절박함이 묻어났다.
김준호는 신문을 내팽개쳤다가 다시 집었다.
이 구단이다. 이곳이 마지막 기회다.
***
라이온스 사무실은 강남 한 오피스텔의 3층에 있었다. 낡은 엘리베이터, 형광등 하나가 깜박이는 복도, 칙칙한 회색 벽. 대형 구단과는 차원이 달랐다.
박태수는 담배를 물고 있었다. 60대 초반의 얼굴에는 수십 년의 야구가 새겨져 있었다. 우승이라는 단 하나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늙어가는 남자의 얼굴이었다.
"데이터로 선수를 본다고?"
이민준이 웃음을 흘렸다. 35세 정도의 젊은 경영인. 실리주의자의 눈빛이 있었다.
"네. 신체 규격이 아닌 통계적 수치로 평가합니다."
김준호는 테이블 위에 노트북을 펼쳤다. 화면에는 여러 선수들의 데이터가 떠올랐다. 스핀 레이트, 출루율, 하체 폭발력 지수, 반응시간, 수비 범위.
박태수가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몸을 앞으로 숙였다. 그의 눈이 화면에 고정되었다.
"이게 뭐야? 구속도 안 나오는데 이 투수?"
"2025년 기준 통계로는 이 투수가 현역 메이저리거입니다. 구속은 평균 이하지만, 회전력이 메이저리거 평균을 상회합니다."
"2025년?"
이민준이 눈을 좁혔다.
"제가 수집한 미래 데이터입니다. 정확도는 99% 이상입니다."
거짓이었다. 정확도는 100%였다. 그것은 기억이었으니까.
박태수는 다시 담배를 빨았다. 연기 속에서 그의 표정이 흔들렸다. 회의와 호기심이 섞여 있었다.
"구속이 150 안 되는 투수가 메이저리거? 그건 말도 안 돼. 한국 야구계에서 그런 투수가 성공한 적이 있나?"
"아직 없습니다. 하지만 미국 메이저리그에서는 이미 증명된 방식입니다."
김준호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감정이 없었다. 데이터 분석가의 목소리였다.
이민준이 노트북을 더 들여다봤다. 여러 선수들의 프로필이 스크롤 되었다. 173cm 유격수. 168cm 포수. 모두 기존 스카우팅 시스템에서는 '미달'로 분류되는 선수들이었다.
"이 유격수는?"
"하체 폭발력이 상위 0.5%입니다. 주루 능력으로 출루율을 높일 수 있습니다."
"키가 173?"
"신체 규격이 아닌 신체 효율입니다."
박태수가 담배를 으깬다. 재떨이에 비비는 동작이 거칠었다.
"이 미친 스카우터를 써보자."
이민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감독님이?"
"우리는 이미 졌어. 대형 팀들처럼 신체 규격 좋은 놈들을 못 데려온다. 그럼 다른 방식을 시도하는 수밖에 없지 않나?"
박태수는 김준호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절박함이 있었다.
"넌 정말 이 수치가 맞다고 생각하냐?"
"숫자는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그럼 이 173cm 유격수를 직접 보자. 내일 서울 외곽 공장 지역 야구장에서 훈련한다고 했나?"
이민준이 노트북의 메모를 가리켰다.
"예. 이준영. 내일 오후 2시."
박태수가 담배를 으깬다. 그의 눈빛이 결정적으로 변했다.
"계약서는 1주일 뒤에 준비하자. 그 전에 저 아이가 실제로 뭘 할 수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우리가 미달 선수를 데려갔다는 게 알려지면 구단이 터진다."
이민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1주일 테스트 기간을 거치고 최종 계약하겠습니다."
박태수는 이민준을 바라봤다. 그의 눈빛이 불안으로 흔들렸다.
"이 방식이 정말 먹혀들까?"
"기존 방식은 우리에게 없는 것들입니다. 신체 규격, 자본, 네트워크. 모두 대형 구단의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각도로 접근해야 합니다."
이민준이 김준호를 바라봤다. 그의 표정은 신중했다.
"그런데 1주일 안에 뭘 확인할 수 있겠어?"
"선수의 기본기와 의지입니다. 나머지는 시간이 증명할 것입니다."
***
모텔 거울 앞에서 김준호는 자신의 얼굴을 다시 들었다. 미세한 주름이 여전히 있었다. 이마, 눈가, 코 옆. 신체는 되돌아갔지만 피부는 그렇지 않았다.
손가락이 떨렸다. 가늘게 떨리는 손가락을 움켜쥐었다가 펼쳤다. 떨림이 심해졌다. 신체 회귀 직후 나타나는 신경 불안정. 머리도 지끈거렸다. 회귀 과정에서 뇌에 가해지는 부하. 이것이 대가다.
"여전히 늙어 있다."
중얼거림이 거울에 반사되었다. 청년의 입에서 나온 노인의 목소리.
노트북을 다시 켰다. 이준영의 성장 곡선이 떠올랐다. 2000년 3월의 이준영. 173cm, 체중 72kg, 하체 폭발력 지수 97.3. 그리고 2025년의 이준영. 180cm, 메이저리거. 홈런 231개. 타율 .298.
그 시간의 간격이 25년이었다. 그 간격 속에서 일어나야 할 모든 일들이 뇌에 각인되어 있었다.
4차의 회귀가 남았다.
매번 회귀할 때마다 신체 수명이 1년씩 소모된다. 5회 회귀 가능하다는 것은 5년의 기회를 의미했다. 아니, 더 정확히는 기억의 선명도가 회귀할 때마다 10%씩 감소한다는 뜻이었다.
1회차: 기억 선명도 100%, 시간폭 5년 2회차: 기억 선명도 90%, 시간폭 3년 3회차: 기억 선명도 80%, 시간폭 2년 4회차: 기억 선명도 70%, 시간폭 1년 5회차: 기억 선명도 60%, 시간폭 3개월
5회차가 마지막이었다. 그 이후는 없었다.
김준호는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냈다. 손가락이 떨린 채로 이름들을 적기 시작했다.
이준영 최민재 박민성 이태호 김영수
과거 10년간 자신이 놓친 선수들의 명단. 2년 전 그 173cm 소년, 이준영. 그가 미국에서 성공했다는 뉴스를 봤을 때의 절망감. 그리고 지난해 최민재가 메이저리그 신인 드래프트 2순위로 지명되었다는 기사. 자신이 평가했던 모든 선수들이 다른 누군가의 손에서 피어났다.
이번에는 놓치지 않겠다. 이번에는 모든 것을 기억하고 모든 것을 얻겠다.
***
다음날 오후 1시 50분. 서울 외곽 공장 지역의 야구장.
햇빛이 강했다. 회색 철재 담장, 낡은 스탠드, 붉은 흙의 그라운드. 1990년대 지방 고등학교 야구장의 모습 그대로였다.
김준호가 스탠드에 앉자, 그라운드에서 누군가가 배팅 연습 중이었다.
180cm대의 체격 좋은 선수. 깔끔한 자세, 정확한 스윙. 모든 것이 교과서적이었다. 그것은 강수민이었다. 전국 최고의 유격수. 강수민의 스윙에서 공이 떠났다. 날카로운 타구. 좌측 담장을 향한 직선.
그의 옆에는 한 명의 스카우터가 서 있었다. 정해진. 대형 구단의 스카우터였다. 그는 노트북을 들고 강수민의 스윙을 기록하고 있었다.
김준호의 심장이 철렁했다. 이미 여기 있다. 강수민을 이미 보고 있다.
그 순간, 강수민이 배트를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스탠드를 향해.
그의 시선이 김준호를 정면으로 향했다.
아래에서 위로, 정면으로 맞닿은 그 시선. 강수민의 눈에는 의문이 있었다. 낯선 사람. 자신을 보고 있는 낯선 사람. 그 사람이 누구인가.
강수민의 눈이 변했다. 의문에서 경계로. 경계에서 무언의 대항심으로.
정해진이 강수민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의 눈도 스탠드에 고정되었다.
그 순간, 세 사람 사이에 무언의 선이 그어졌다. 경쟁의 구도가 형성되었다.
강수민 대 김준호. 전국 최고의 신체 규격 대 통계적 이상치. 기존 스카우팅 시스템 대 새로운 분석법.
김준호는 일어서지 않았다. 스탠드에 앉은 채로 그들을 바라봤다.
그때 그라운드의 다른 쪽에서 누군가 나타났다. 173cm의 소년. 야윈 체형. 초라한 자세로 배팅 박스에 들어섰다.
이준영이었다.
그는 투수의 공을 받으며 배팅을 시작했다. 스윙 자체는 어색했다. 신체 비율이 맞지 않아서였다. 하체는 강했지만 상체는 가늘었다. 그 불균형 속에서 그는 스윙했다.
공이 떠났다.
강수민의 타구와는 다른 궤적이었다. 강수민의 공은 직선이고 거리였다. 이준영의 공은 회전이 있었다. 각도가 있었다. 2루 쪽으로 향하는 타구.
정해진이 고개를 저었다. 그의 입이 움직였다. 아마 '저 정도면 안 되지'라는 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김준호의 눈에는 다르게 보였다.
이준영의 스윙 각도. 하체 회전 속도. 발 위치의 안정성.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눈빛.
타구를 보며 이준영의 눈이 반짝였다. 그 눈빛에는 의지가 있었다. '나도 할 수 있다'는 의지.
김준호는 노트북을 꺼냈다. 2000년 3월 15일의 이준영 데이터를 다시 확인했다. 하체 폭발력 97.3. 반응시간 0.142초. 주루 감각 상위 0.3%.
그리고 2025년 12월 31일의 이준영 데이터. 메이저리거. 통산 홈런 231개. 타율 .298. MVP 후보.
그 25년 간의 시간이 지금부터 시작된다.
이준영이 다시 배팅박스에 들어섰다. 이번에는 더 집중된 표정이었다.
공이 날아왔다.
이준영의 스윙이 시작되었다. 하체가 회전했다. 발이 떨어졌다. 손목이 꺾였다. 모든 움직임이 데이터와 정확히 일치했다.
타구음이 울렸다.
강렬한 음. 공이 우측 담장을 향해 날아갔다. 강수민의 타구보다 거리는 짧지만, 정확성이 있었다.
정해진이 다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김준호는 알고 있었다. 저 소년의 진정한 힘이 언제 발현되는지. 그것은 숫자로는 표현되지 않는 것. 의지, 끈기, 그리고 누군가가 자신을 믿어주는 그 순간.
강수민이 다시 배팅박스에 들어섰다. 정해진이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강수민의 스윙. 강수민의 타구. 강수민의 거리.
모든 것이 규격에 맞았다.
하지만 이준영도 다시 배팅박스에 들어섰다. 그의 눈빛이 변했다. 처음의 불안함이 사라졌다. 대신 무언가가 생겼다. 결연함.
김준호는 스탠드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천천히 그라운드로 내려갔다.
정해진이 처음으로 김준호를 정면으로 봤다. 그 눈빛에는 적대심이 있었다. 그의 손이 노트북을 더 꼭 움켜쥐었다.
"뭐 하는 거야?"
"선수를 보고 있습니다."
"저기 173짜리? 그 아이는 미달이야."
"아직 미달입니다. 하지만 2년 뒤에는 그렇지 않을 겁니다."
정해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은 조소였다. 동시에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는 통화를 받으며 김준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네, 알겠습니다. 강수민은 우리가 데려갑니다."
통화를 끝낸 정해진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그의 눈빛이 더 차가워졌다. 김준호를 향한 시선에 불안감이 섞여 들어갔다. 자신이 놓친 무언가가 있다는 불안감.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2년 뒤? 그 아이가 프로에 올라와도 2군에서 썩을 걸?"
말투는 조소였지만, 그의 손은 휴대폰을 다시 집었다가 놨다. 그의 눈은 여전히 이준영을 향해 있었다. 무언가를 재평가하려는 듯한 눈빛이었다.
정해진이 휴대폰을 다시 들었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거는 손가락이 떨렸다.
"네, 정해진입니다. 라이온스에서 173cm 유격수를 테스트 중이라고 들었는데요. 네, 이준영이라고... 그 아이 정보 있습니까?"
전화 상대의 말을 듣던 정해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휴대폰을 내려놨다. 김준호를 다시 봤다. 이번에는 단순한 불안이 아닌 다른 감정이 담겨 있었다. 위협감. 그리고 그 뒤에 숨겨진 무언가.
김준호는 이준영을 돌아봤다.
"안녕. 나는 한강 라이온스의 스카우터 김준호야."
이준영의 눈이 커졌다. 라이온스. 프로 구단. 그의 얼굴에 희망이 떠올랐다.
"저... 저요?"
"그래. 너를 봤어. 숫자로 말하면, 너는 상위 0.5%야. 네 하체 폭발력은 비정상이야."
이준영의 입이 열렸다. 지금까지 들었던 말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체형 미달. 신체 조건 부족. 그런 말들 대신, 처음으로 누군가가 자신을 '비정상'이라고 했다.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눈물이 맺혔다.
"정말요?"
"숫자는 거짓말하지 않아."
이준영의 손이 떨렸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저는... 계속 떨어졌어요. 키가 작다고, 체형이 안 된다고..."
"그들은 숫자를 못 읽었어. 그게 다야."
김준호의 말이 이준영에게 미치는 영향은 즉각적이었다. 그 순간, 이준영의 눈 속에서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인정해 주었다. 자신의 능력을 숫자로 증명해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준영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정말 저를? 저 같은 아이를?"
강수민이 배팅박스에서 배트를 내려놓고 이쪽을 바라봤다. 그의 눈이 좁혀졌다. 무언가가 자신의 것에서 벗어나가는 것을 감지한 듯한 표정이었다.
정해진이 다가왔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라이온스가 저런 아이를 데려가? 미친 짓 하지 말고 저리 가."
"우리는 이미 데려갔습니다."
"뭐?"
"1주일 테스트 기간을 거친 후 계약합니다. 조건부 계약입니다."
정해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의 손이 휴대폰을 집었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려는 듯 화면을 켰다가 멈췄다. 그의 눈이 김준호를 다시 봤다. 불안이 아닌 다른 감정. 그것은 위협감이었다. 자신이 놓친 무언가가 있다는 위협감.
정해진은 휴대폰을 다시 들었다.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 누군가에게 긴급 보고를 하려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멈췄다. 말할 말이 없었다. 자신이 무엇을 놓쳤는지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정해진이 휴대폰을 내려놨다. 그리고 강수민을 봤다. 강수민도 이준영을 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이 만났다. 강수민의 눈에는 의외라는 감정이 있었다. 자신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흔들리는 순간.
정해진이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그의 손에는 여전히 노트북이 들려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이준영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김준호는 이준영을 돌아봤다.
"내일 라이온스 사무실로 와. 계약을 시작하자."
이준영의 입이 떨렸다. 눈빛이 흔들렸다. 희망과 불안이 섞여 있었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정말... 저를? 키가 작은데도?"
"숫자가 틀린 적이 없어."
***
버스를 타며 김준호는 창밖을 봤다. 2000년 3월의 서울. 낡은 건물들, 좁은 골목, 초라한 야구장.
이곳이 시작점이다.
손가락이 떨렸다. 버스가 급정거하면서 몸이 앞으로 쏠렸다. 무릎이 좌석 모서리에 닿았다. 순간적인 통증이 흘러갔다. 47세 신체의 반응. 회귀 직후 나타나는 신경계 불안정이 신체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었다.
주머니 속 수첩에는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이준영 - 확보 최민재 - 확보 예정 박민성 - 3개월 뒤 이태호 - 6개월 뒤 김영수 - 1년 뒤
4차의 회귀가 남았다.
매번 회귀할 때마다 신체가 쇠해간다. 첫 회귀 후에는 흰머리가 늘 것이다. 두 번째 회귀 후에는 무릎이 더 아플 것이다. 세 번째 회귀 후에는 심장이 불규칙해질 것이다. 네 번째 회귀 후에는 눈이 흐릿해질 것이다.
그리고 다섯 번째 회귀는.
김준호는 손을 들었다. 여전히 늙어 있는 손. 신체는 22세지만 피부는 47세인 손. 코 옆의 미세한 주름이 더 깊어진 것 같았다. 손가락의 떨림도 심해졌다. 회귀의 대가가 계속 누적되고 있었다.
버스가 강남역을 지나갔다. 정확히 25년 전, 그가 시간을 거슬렀던 그 역.
창밖으로 강남역이 지나가자, 김준호의 눈빛이 변했다. 절박함이 가득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기억이 흐릿해질 것이다. 그리고 신체는 계속 쇠해갈 것이다.
라이온스 내부에서도 저항이 시작될 것이다. 정해진 같은 기존 스카우터들. 그들은 자신들의 방식을 지키려고 할 것이다. 이준영을 데려간 것이 시작일 뿐이다.
박태수와 이민준 사이에도 균열이 생길 것이다. 감독의 확신과 경영진의 불안. 그 사이에서 김준호는 결과를 내야 한다. 1주일 안에.
최민재도 확보해야 한다. 그는 현재 다른 구단의 마크 대상이다. 정해진처럼 유능한 스카우터들이 이미 그를 보고 있을 것이다. 최민재와의 조우는 이준영보다 훨씬 복잡할 것이다. 강수민의 존재도 변수가 될 것이다.
모든 것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다.
창 밖의 도시가 점점 어두워졌다. 해가 질 무렵, 김준호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봤다. 여전히 청년의 얼굴이었지만, 이마의 주름은 더 깊어져 있었다. 손가락은 더 떨리고 있었다.
수첩을 다시 펼쳤다.
다섯 개의 이름. 다섯 개의 회귀. 다섯 개의 기회.
그것이 전부였다.
4차가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