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혈연사의 기록

산등성이를 넘어 혈연사의 돌담이 보이는 순간, 서운의 발걸음이 멈췄다.

빛바랜 벽돌로 지어진 사찰은 천년을 견뎌낸 자의 모습이었다.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소리가 마당 한구석의 고인 물로 흘러들었고, 그 물에 비친 하늘은 누군가의 눈동자처럼 검었다.

"여기가 혈연사입니다."

여해의 목소리가 조용했다. 그녀의 얼굴은 빗에 젖어 있었고, 빗방울이 그녀의 눈빛을 타고 흘러내렸다. 서운은 그것이 빗물인지 다른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12번째 검객의 기록이 여기 있습니다."

여해가 한 발 앞서 걸었다. 그녀의 발뒤꿈치가 돌바닥을 딛을 때마다 물이 튀었다. 서운은 그 흔적을 따라가며 생각했다. 저주받은 검객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는 것을. 자신처럼 죽음으로 향하는 여정을 시작하며 이 마당을 걸었다는 것을.

돌계단을 내려가면서 공기가 변했다.

지하로 내려갈수록 습기가 짙어졌고, 벽에서는 이끼의 냄새가 났다. 서운의 호흡이 깊어졌다. 하강할 때마다 가슴이 누군가의 손으로 움켜잡히는 느낌이었다.

"서운이여."

목소리가 먼저였다.

기록실의 입구에 한 노인이 서 있었다. 머리는 흰 눈처럼 소복했고, 얼굴의 주름은 고대 지도 위의 산맥처럼 깊고 복잡했다. 그의 눈동자는 서운을 보는 순간 반짝였다. 반가움이 아니었다. 확인이었다.

"13번째구나."

원정 고승이 말했다.

그 두 글자가 서운의 몸을 관통했다. 13번째. 단순한 순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저주받은 자들의 목록 끝에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다는 뜻이었다.

기록실로 들어서자 벽이 나타났다.

천년을 견뎌낸 돌벽에는 이름들이 새겨져 있었다. 고대 문자와 근대 글씨가 뒤섞여 있었고, 각 이름 아래에는 짧은 설명이 적혀 있었다.

서운이 천천히 걸으며 읽기 시작했다.

초대 체득자 혈연대사. 기록: 3년 3개월.

두 번째 검객 화환. 기록: 2년 11개월.

세 번째 검객 적월. 기록: 3년 2개월.

...

열 번째 검객 무진. 기록: 2년 8개월.

열한 번째 검객 수련. 기록: 3년 정확히.

그리고 열두 번째 검객 청산.

그 이름 앞에서 서운의 발걸음이 멈췄다.

청산의 기록은 다른 검객들과 달랐다. 이름 옆에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문구가 적혀 있었다.

'깨달음을 얻고 죽음을 맞이하다.'

서운의 호흡이 가빠졌다.

다른 기록들을 보니 패턴이 드러났다. 초대부터 열한 번째까지, 각 검객은 모두 정확히 3년 내외에 죽었다. 하나의 예외도 없었다. 마치 정해진 수식처럼, 저주는 모든 체득자들을 동일한 시간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런데 청산만 달랐다.

'광기 속에 죽음', '절망 속에 죽음', '도주 중 죽음'—다른 검객들의 기록들은 그들의 최후를 비극으로 기록했다. 하지만 청산은 '깨달음을 얻고 죽음을 맞이하다'고 적혀 있었다.

"그가 마지막이었습니다."

원정 고승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건조했지만, 그 건조함 속에 무언가가 묻혀 있었다. 서운은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봤다.

"30년 전 그는 여기에 왔습니다. 너처럼. 죽음을 안고, 그것을 풀려는 집착을 안고."

원정 고승이 벽을 따라 걸었다. 그의 손가락이 각 이름을 스쳐 지나갔다.

"12명 모두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어떻게 풀 것인가?' 그들은 저주를 풀기 위해 강호를 누볐고, 기연을 모았고, 도를 닦았습니다."

그는 청산의 이름 앞에서 멈췄다.

"하지만 청산은 다른 질문을 했습니다."

"뭔가요?"

서운의 목소리가 떨렸다.

"'어떻게 살 것인가?'"

그 말이 기록실의 공기를 가르고 지나갔다. 서운의 가슴이 철렁했다. 저주를 푸는 것이 아니라, 저주 속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찾는 것. 그것이 청산이 발견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평온했습니다."

원정 고승이 돌아섰다. 그의 눈이 서운을 마주했다.

"죽음 앞에서 평온할 수 있는 자만이 저주를 초월합니다."

"그렇다면... 저주를 풀 수 없다는 건가요?"

서운이 물었다. 그 질문은 절망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청산의 기록을 읽으며 서운의 마음속에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저주를 풀려던 집착이 조금씩 모양을 바꾸고 있었다.

"풀 수도, 풀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너에게 달렸습니다."

원정 고승이 기록실 깊숙한 곳으로 걸어갔다. 그가 가리킨 곳에는 낡은 책장이 있었다. 천년의 습기와 시간이 그것을 검게 변색시켰다.

"여기 청산의 기록이 있습니다."

그의 손이 한 권의 책을 집어들었다. 표지는 낡았지만, 그 위의 글씨는 또렷했다.

'청산 일기장'

"이것을 읽으면 너는 청산의 최후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원정 고승이 책을 서운에게 건넸다.

"너는 그보다 나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서운이 책을 받아들었다. 그것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30년 된 종이의 무게, 그리고 그 속에 담긴 한 검객의 마지막 기록의 무게가.

"아니요."

여해의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서운이 고개를 들었다. 여해의 표정이 변해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처음 본 것처럼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무언가를 간청하는 듯했다.

"그것을 읽으면 돌아올 수 없습니다."

여해가 한 발 나아섰다.

"청산의 기록은... 단순한 기록이 아닙니다. 그것은 저주의 영역입니다."

"뜻이 무엇인가?"

서운이 물었다.

여해가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그녀의 입술이 움직였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 침묵 속에서 서운은 여해가 자신과 같은 길을 걸어본 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단순히 길을 걸어본 것이 아니라 저주받은 자들을 지켜본 자라는 것을.

"그것을 읽는 순간, 너는 더 이상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여해가 말했다.

"청산은 그 기록을 쓰며 자신의 남은 수명을 모두 소진했습니다. 마지막 페이지를 완성하는 순간, 그는..."

그녀가 말을 멈췄다.

"죽었습니다."

원정 고승이 말을 이었다.

"평온 속에."

기록실의 공기가 고요했다. 천년 동안 누적된 침묵이 서운을 감쌌다. 그 침묵 속에서 서운은 선택을 마주했다.

책을 펼칠 것인가, 아니면 펼치지 않을 것인가.

펼치면 돌아올 수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펼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저주는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다. 3년의 시간이 계속 흘러갈 것이다. 하지만 희망이라는 착각도 남아 있을 것이다.

서운의 손가락이 책의 표지를 스쳤다.

"서운."

여해가 이름을 불렀다. 처음으로 그녀가 그를 이름으로 불렀다.

"청산의 마지막 페이지는 미완성입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낮았다.

"그는 마지막 말을 남기려 했지만, 그것을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펜이 떨어졌을 때 그의 수명도 함께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럼... 마지막 페이지에는?"

서운이 물었다.

"'그리고—'라는 글자만 있습니다."

여해가 답했다.

"완성되지 않은 문장. 그것이 청산이 남긴 마지막 메시지입니다."

서운이 책을 펼쳤다.

첫 페이지에는 날짜가 적혀 있었다. 30년 전의 어느 날. 그 아래로 펜글씨가 흐르고 있었다.

'오늘 나는 죽음의 나이를 알았다. 3년이다. 그렇다면 남은 시간은 정해진 것이다. 그 정해진 시간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 그것만이 내 선택이다.'

서운의 눈이 글씨를 따라갔다. 한 페이지, 또 한 페이지. 청산의 기록은 저주 속에서 천천히 변해가는 한 검객의 마음을 담고 있었다.

초반부는 저항과 절망으로 가득했다. 검을 휘를 때마다 떨어져 나가는 생명의 감각. 하루, 또 하루가 지워지는 경험. 그 속에서 청산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무언가가 변했다.

중반부에서 청산은 자신의 저주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항복이 아니었다. 오히려 가장 깊은 깨달음의 시작이었다.

'저주는 저주가 아니다. 그것은 시간의 선물이다. 무한한 시간 속에서 나는 절대 알 수 없었던 것들을 이제 알 수 있다. 매 순간이 마지막일 수 있다는 것. 따라서 매 순간이 유일하다는 것. 매 검이 최후의 검일 수 있다는 것. 따라서 매 검이 신성하다는 것.'

서운의 손가락이 그 문장에서 멈췄다.

매 검이 신성하다.

그 말이 서운의 가슴을 울렸다.

지금까지 서운은 자신의 검을 어떻게 생각했는가? 최강의 검술이라고 생각했다. 천하를 제압하는 검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저주 앞에서 무너졌다.

그렇다면 이제는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서운이 계속 읽었다. 청산의 기록은 점차 고요해졌다. 절망은 사라지고, 광기도 사라졌다. 그 자리에 남은 것은 평온이었다. 아니, 평온만이 아니라 무언가 밝은 것이었다.

마지막 페이지에 가까워질수록, 청산의 글씨는 더욱 단정해졌다. 마치 그가 죽음을 앞두고도 흔들리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듯이.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

페이지의 대부분이 비어 있었다. 그 빈 공간 한구석에만 글씨가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은 무엇인가? 서운의 눈이 그 빈 공간을 헤맸다. 완성되지 않은 문장. 청산이 남기려 했던 마지막 말씀.

그 순간 서운의 손이 떨렸다.

그것이 문장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은 자신이 써야 한다는 것을. 청산이 남긴 불완성의 문장을 완성하는 것은, 다음 검객의 몫이라는 것을.

기록실이 흔들렸다.

처음에는 미세한 진동이었다. 하지만 점점 커졌다. 돌벽이 울렸고, 책장이 부딪혔다.

"비술단입니다."

원정 고승이 말했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차분했지만, 그의 눈에는 무언가가 결정되어 있었다.

"그들이 혈연사를 포위했습니다."

"산을 떠나야 합니다."

여해가 서운의 팔을 잡았다.

하지만 서운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손에는 여전히 청산의 일기장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의 눈은 마지막 페이지의 불완성한 문장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을 쓰기 위해, 자신은 먼저 살아야 한다.

"가겠습니다."

서운이 말했다.

기록실의 벽이 다시 흔들렸다. 그 벽에 새겨진 12명의 이름들이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13번째 이름을 위한 자리가 여전히 비어 있었다.

서운은 청산의 일기장을 품에 안았다.

기록실의 진동이 멈추지 않았다. 돌벽 틈새로 먼지가 떨어져 내렸고, 책장의 낡은 나무들이 비명을 지르며 부서지기 시작했다. 서운은 청산의 일기장을 품에 안은 채 천천히 일어섰다. 손가락 끝이 마지막 페이지의 불완성한 문장을 한 번 더 스쳤다.

'그리고—'

여해의 손이 그의 팔을 더 강하게 잡아당겼다.

"서운. 지금은 생각할 시간이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서운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 차분함이 오히려 두려웠다. 여해는 그를 재촉했지만, 서운의 발걸음은 오직 한 곳을 향했다. 벽면이었다.

12명의 이름들이 새겨진 돌벽. 초대 혈연대사부터 12번째 청산까지. 각각의 이름 옆에는 짧은 기록이 있었다.

'광기 속에 사라짐.' '의문 속에 죽음.' '고통 속에 마침.' '평온 속에 깨달음.'

그리고 청산의 이름 옆에는 다른 기록이 있었다.

'깨달음을 얻고 죽음을 맞이함. 그리고 다음을 위해 남겼다.'

서운의 눈이 그 문장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청산은 죽으면서도 다음 검객을 생각했다. 자신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 누군가를 위한 시작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서운!"

여해의 목소리가 더 높아졌다. 기록실의 천장 일부가 내려앉으며 돌가루를 흩뿌렸다. 그 먼지 속에서 검은 인영들이 나타났다.

비술단.

"나가세요!"

원정 고승이 움직였다. 노인의 몸이 빛을 내며 기록실의 입구를 막았다. 그 빛이 검은 인영들의 진입을 지연시켰다.

"저는 여기서 막겠습니다. 당신들은 가십시오."

"고승님!"

"이것이 도선종의 선택입니다."

원정 고승의 얼굴에는 평온함이 있었다. 마치 자신의 역할이 이 순간을 위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이. 그의 손 위에서 빛이 더 강해졌다. 돌벽이 울렸다. 천장이 흔들렸다. 그 빛은 비술단의 인영들을 밀어냈고, 입구의 틈새가 점점 좁혀갔다.

"기록을 지키는 것이 우리의 임무입니다."

고승의 목소리가 붕괴하는 기록실을 가르고 울렸다. 그의 몸이 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더 이상 인간의 형상이 아니라, 순수한 도력의 화신으로. 비술단의 인영들이 그 빛에 밀려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고승의 몸도 함께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천년을 견뎌낸 돌벽이 그의 몸 위로 무너져 내렸다.

"가세요!"

마지막 외침이 기록실 전체를 울렸다.

서운이 마지막으로 벽을 바라봤다. 13번째 이름을 위한 빈 자리. 그 자리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이었다. 그 자리에 이름을 새기기 전에, 자신은 청산의 불완성한 문장을 이어야 했다.

"가겠습니다."

서운이 여해의 손을 잡았다. 이번에는 자신이 먼저였다. 여해를 끌어당기며 기록실의 뒷문으로 향했다.

"청산님의 말씀을 이어가겠습니다."

서운의 목소리가 기록실 전체를 울렸다. 그 말이 원정 고승에게 전해졌고, 고승의 빛이 한 순간 더 강해졌다. 마치 그 말이 자신의 기다림을 완성하는 것처럼.

기록실을 나온 서운과 여해는 혈연사의 좁은 복도를 달렸다. 뒤에서는 비술단의 발소리가 들렸다. 검은 칼날들이 벽을 그으며 불꽃을 튀겼다. 하지만 그들은 따라잡을 수 없었다. 여해의 손이 빛을 내며 복도의 기둥들을 흔들었고, 그 기둥들은 통로를 막았다.

"이 길이 아닙니다."

여해가 옆의 벽을 향했다. 그 벽은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들의 몸을 통과시켰다.

밤하늘이 펼쳐졌다.

혈월산의 능선이 검은 그림자로 드러났다. 바람이 서운의 얼굴을 스쳤다. 그 바람은 차갑고, 신선했다.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앞입니다."

여해가 산 아래를 가리켰다. 산길이 보였다. 그 길은 혈월산의 외곽으로 이어져 있었다. 강호로 내려가는 길.

하지만 그 길 위에는 인영들이 있었다. 비술단의 다른 분대였다. 그들은 이미 서운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섯 명입니다."

여해가 말했다.

"검객 수준은?"

"상급. 하지만 당신의 적은 아닙니다."

서운의 손이 검의 자루를 향했다. 그 순간, 여해가 그의 손목을 잡았다.

"한 번 검을 쓸 때마다 하루가 사라집니다. 1088일이 남았습니다."

여해의 목소리가 낮았다.

"다섯 명을 상대하면?"

"하루 이상. 그들이 강할수록 더 많이 사라질 것입니다."

서운이 여해를 바라봤다. 여해는 서운을 놓지 않고 있었다. 그 손에는 떨림이 없었지만, 눈에는 무언가가 있었다. 자신도 이것을 수백 번 봤다는 눈빛. 이전의 검객들이 이 선택 앞에서 어떻게 했는지 알고 있다는 눈빛.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여해가 산 옆을 가리켰다. 절벽이었다. 수백 길의 낙차가 있는 절벽. 그 아래는 안개로 뒤덮여 있었다.

"저를 따라오세요. 우리는 떨어질 것입니다."

"죽습니다."

"아닙니다."

여해의 눈이 붉은 빛으로 물들었다. 도교의 술법. 그 빛이 서운을 감쌌다. 따뜻했다.

"저는 당신이 죽기 전에 잡을 것입니다."

서운의 가슴이 철렁했다. 그 말 속에 얼마나 많은 것이 담겨 있는지, 여해가 알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선택이었다.

검을 쓰고 하루를 잃을 것인가. 여해와 함께 절벽으로 뛸 것인가.

산길 위의 인영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더 이상의 시간이 없었다.

서운은 청산의 일기장을 더 깊숙이 품에 안았다. 그리고 여해의 손을 잡았다.

"뛰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둘은 절벽으로 달렸다. 산길의 인영들이 소리를 질렀다. 검을 휘르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서운과 여해는 혈월산의 절벽에서 몸을 날렸다.

바람이 그들을 감쌌다. 떨어지는 감각. 죽음이 가까워지는 감각. 하지만 여해의 손은 놓지 않았다. 그 손 위의 붉은 빛이 점점 강해졌다.

"당신은 이미 깨닫고 있습니다."

여해의 목소리가 하강하는 바람 속에서 들렸다.

"깨닫고 있습니다."

"무엇을?"

"당신이 13번째가 아니라는 것을."

서운의 눈이 흔들렸다.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것은 자신이 이미 죽어야 할 검객이라는 뜻인가. 아니면 자신이 특별하다는 뜻인가.

"여해."

서운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여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 붉은 빛이 더 강해졌다. 그리고 그 빛이 절벽 아래의 안개를 밀어냈다.

안개 속에서 뭔가가 나타났다.

호수였다. 거울처럼 평평한 호수. 그 위에 붉은 색의 물이 반사되고 있었다.

서운과 여해는 그 호수 위로 떨어졌다.

충격이 없었다. 마치 수면 위에 내려앉는 것처럼. 서운의 몸이 물에 젖지 않았다. 여해의 술법이었다.

호수 가의 바위 위에서, 한 인영이 나타났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 얼굴은 가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 인영에서 나오는 기운은 강력했다. 서운이 지금까지 느껴본 어떤 검객보다도.

"비술단주 묵연입니다."

그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하지만 그 속에는 광기가 있었다.

"13번째 검객이시군요."

묵연이 한 발을 내디뎠다.

"당신의 적혈검. 제 것이 될 것입니다."

서운의 손이 검의 자루를 향했다. 하지만 여해가 다시 그를 막았다.

"아직입니다."

여해의 목소리에는 긴장이 가득했다. 그녀의 입술이 움직였고, 손가락이 부르르 떨렸다. 눈빛이 흔들렸다.

"당신이 그를 상대하면 안 됩니다."

"왜?"

"당신이 아직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호수의 물이 피처럼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물 속에서 또 다른 인영들이 떠올랐다.

적혈검의 이전 체득자들.

죽은 검객들의 형상이 물 속에서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은 모두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서운을 향해.

그 중 한 인영이 다른 것들과 달랐다. 그 인영의 얼굴이 여해와 닮아 있었다.

"당신은 아직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여해가 서운의 귀에 속삭였다.

"적혈검의 진정한 저주가 무엇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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