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새로운 시작, 그리고 진정한 얼굴

심사위원장의 목소리가 대극장을 가른다.

"최종 합격자... 한지훈."

대기실의 모니터에서 흘러나오는 그 목소리는 10년을 기다린 시간 전부를 압축했다. 지훈의 몸이 경직되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옆에 앉은 박준호가 어깨를 밀었지만 지훈은 움직이지 못했다. 모니터 속 자신의 이름이 떠오르는 것을 보면서, 그 순간이 현실인지 환각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10년이다. 10년 동안 들어본 적 없는 그 목소리.

합격.

합격자 발표 홀의 카메라가 지훈을 향했다. 팬덤 채팅방의 실시간 방송을 통해 3만 명이 넘는 팬들이 그 순간을 목격했다. 채팅창이 폭주했다.

"어???? 지훈이가 합격했다고??????"

"미쳤다 미쳤다 미쳤다 미쳤다"

"눈물이 안 닦여 진짜"

"악역으로 합격한 거 맞나???? 악역으로??????"

"우리 지훈이 최고야!!!!!"

박준호가 일어서며 지훈의 팔을 잡았다. "야, 일어나. 너 합격했어. 무대 올라가야지."

지훈은 천천히 일어났다. 다리가 떨렸다. 무대로 향하는 복도를 걸으면서도 자신의 발이 바닥을 딛고 있는 건지 확신할 수 없었다. 심사위원장이 악수를 청했다. 지훈은 손을 내밀었다. 악수 너머로 보이는 심사위원들의 얼굴—그들은 웃고 있었다. 처음이었다. 심사위원들이 자신을 보며 웃는 것.

"정말 인상적인 연기였습니다. 특히 마지막 장면의 감정 표현이..."

지훈은 그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귀가 울렸다.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서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무대에서 내려온 지훈은 대기실로 돌아갔다. 박준호가 그를 안았다.

"축하한다, 야. 진짜 축하한다."

지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목이 메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른 눈물이었다. 무대 위에서 흘렸던 악역의 눈물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눈물이었다.

박준호의 휴대폰이 울렸다. 어머니였다.

"지훈이가 합격했어. TV에 나왔어. 우리 아들 정말..."

지훈이 휴대폰을 받아들었다.

"엄마."

"어? 지훈아?"

"난 합격했어."

전화 너머로 어머니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지훈도 다시 울음이 터졌다.

집으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지훈은 팬덤 채팅방을 열었다. 3만 2천 명이 넘는 팬들이 축하 메시지로 채팅을 채우고 있었다. 글자들이 흐릿했다. 지훈의 손이 떨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천천히 글을 입력했다.

"고마워. 정말 정말 고마워. 너희 없이는 이 무대에 설 수 없었어. 그건 사실이야."

채팅이 멈췄다. 모두가 그의 메시지를 읽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내가 나를 응원할 거야. 그리고 너희도 너희 자신을 응원해줬으면 좋겠어. 우리는 모두 배우야. 아니, 모두 주인공이야. 각자의 삶에서."

몇 초의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이 오래 느껴졌다.

그 다음, 채팅이 터졌다.

"지훈아 사랑해"

"눈물 난다 진짜"

"우리도 우리 자신을 응원할게"

"고마워 지훈이. 너 만나서 우리도 변했어"

"배우 한지훈 사랑합니다"

"우리는 모두 주인공이야... 이 말 평생 기억할 거야"

이서은도 그 메시지를 읽고 있었다. 펜클럽 대표로서, 수천 개의 메시지를 한 줄씩 읽으며. 자신이 했던 일들을 돌아봤다. 조종이었을까? 아니면 진정한 응원이었을까?

지훈의 메시지를 읽으며 이서은은 깨달았다. 그 모든 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지훈은 이미 결정했고, 자신의 길을 걷고 있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그것을 인정하는 것뿐이었다.

이서은은 채팅창에 글을 남겼다.

[이서은]: 고마워, 지훈. 그리고 미안해. 내가 너를 조종했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넌 옳은 선택을 했어. 정말로.

그 말을 입력하면서 이서은은 처음으로 자신의 손을 놓는 기분을 느꼈다. 10년 동안 꽉 쥐고 있던 손을 펼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이 옳은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지훈은 채팅창을 내렸다. 그리고 웃었다. 처음으로, 팬덤을 위한 웃음이 아닌 자신을 위한 웃음으로.

집에 도착했을 때 어머니는 이미 밥을 차려놨다. 지훈이 가장 좋아하는 미역국과 소시지 계란말이.

"어, 왜 또 울어? 기쁜데?"

"기쁜 눈물이야, 엄마."

어머니는 웃으며 지훈을 안았다. 지훈은 그 품에서 자신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깨달았다. 10년 동안 자신이 얼마나 큰 존재라고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어머니의 품 안에서는 여전히 작은 아이였다.

밥을 먹으면서 어머니는 말했다. 자신이 팬덤 채팅방에 들어갔다는 것, 얼마나 많은 팬들이 자신의 아들을 응원했는지, 그 응원들을 읽으면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그리고 말이야, 지훈아."

어머니가 젓가락을 내려놨다. 지훈은 어머니의 눈가를 봤다. 10년 동안 깊어진 주름들. 자신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엄마에게 빚지고 있는지 한 번에 느껴졌다.

"넌 이제 그 사람들을 위해 연기하지 않아도 돼. 너 자신을 위해 해. 그게 가장 좋은 연기야. 그리고..."

어머니가 지훈의 손을 잡았다.

"넌 배우 한지훈이야. 그게 전부야. 그것만으로 충분해."

지훈은 어머니를 바라봤다. 그 말 속에는 10년의 기다림이 담겨 있었다. 조건 없는 응원이 담겨 있었다.

"알겠어, 엄마."

지훈이 웃었다. 처음으로, 진정한 웃음이었다.

3개월이 지났다.

강남역 근처의 스튜디오. 지훈은 그곳을 10년 동안 드나들었지만, 이번은 완전히 달랐다.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캐스팅 디렉터는 이미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지훈."

"네."

"이번 악역은 주인공만큼 중요한 역할이야. 이 드라마의 핵심을 담은 캐릭터야. 당신이 필요해."

지훈의 호흡이 멈췄다. 10년 동안 들어본 적 없는 말이었다. '당신이 필요해'—악역이 아니라 '당신'을 필요로 한다는 말.

"감사합니다."

캐스팅 디렉터는 의자에 앉으며 계속했다.

"요즘 업계에서 당신 대해서 말이 많아. 팬덤 덕분이라는 평가도 있고, 시스템을 깼다는 평가도 있고... 뭐 여러 가지지."

그 말을 들으며 지훈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직도 그런 이야기가 나돈다는 게 신기했다. 마치 자신의 합격이 자신의 연기가 아닌 다른 것의 결과라고 누군가는 계속 말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근데 내 생각은 달라. 난 당신의 연기를 봤어."

캐스팅 디렉터가 지훈의 눈을 직시했다.

"그리고 난 그 연기가 진짜라는 걸 알아. 팬덤도 없고, 평가도 없고, 그냥 순수한 연기만 남았을 때도 당신은 여전히 위대한 배우일 거야."

목이 메었다. 지훈은 목을 긁으며 답했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가서 당신의 악역을 보여줘. 진정한 악역을. 이 드라마가 당신을 필요로 하고 있어. 팬덤이 아니라, 이 작품이."

캐스팅 디렉터가 나가고, 지훈은 대기실 거울 앞에 남겨졌다. 메이크업팀이 이미 악역 캐릭터를 위해 얼굴을 준비했다. 흉터 같은 스카 메이크업, 어두운 아이섀도우, 창백한 파운데이션. 10년 동안 해온 악역의 모습이었다.

지훈은 자신의 얼굴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거울 속의 눈빛이 달랐다.

두 달 전 촬영장에서 본 자신의 눈빛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때는 업계의 평가를 두려워하는 눈이었고, 팬덤의 기대에 짓눌린 눈이었다. 하지만 지금 거울 속의 눈빛은 무언가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자유로웠다.

휴대폰이 울렸다. 박준호였다.

"어? 촬영장 아니야?"

"대기 중이야. 지금부터 시작."

"좋아. 그런데 말이야." 박준호가 잠시 침묵했다. "너 팬덤 채팅 봤어?"

"아니. 안 봤어."

"그게 맞아. 계속 그렇게 해."

"응?"

"넌 이제 충분해. 충분히 증명했어. 팬덤도, 업계도, 자신에게도. 이제 필요한 건 그들의 목소리가 아니라 너 자신의 목소리야."

지훈은 박준호의 말을 씹었다. 정확한 말이었다. 정확하고 냉철했다.

"그리고 또 하나. 신태호 놈 보이? 요즘 좀 힘들어 보여."

"뭐 했길래?"

"아, 골든 에이지 이후로 그놈 오디션 떨어졌어. 연속으로. 팬들이 '진정성 없다'고 평가하니까 제작사들이 꺼리는 거야. 너 때문에 그 기준이 생겼거든."

지훈은 침묵했다. 신태호를 동정할 수도, 기뻐할 수도 없었다. 그건 신태호의 선택이었고, 신태호의 길이었다. 자신이 만든 결과가 아니었다. 신태호 자신이 만든 결과였다.

"어쨌든 가서 잘해. 그리고 지훈."

"응?"

"넌 배우야. 팬덤의 희망도 아니고, 업계의 반란도 아니고. 그냥 배우야. 기억해."

전화가 끊겼다.

지훈은 다시 거울을 봤다. 작은 손거울이었다. 메이크업팀이 남겨놓은 것이었다. 그 속에 보이는 자신의 얼굴. 악역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이 낙인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손거울을 내려놓고, 지훈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팬덤 채팅방을 열지 않았다. SNS 검색을 하지도 않았다. 단지 몇 글자만 입력했다.

안티팬 펜클럽 공개 채팅방에.

메시지가 올라갔다.

[한지훈]: 고마워. 정말 고마워. 하지만 이제부터는 내가 나를 응원할 거야. 그리고 너희도 너희 자신을 응원해줬으면 좋겠어. 우리는 모두 배우야. 모두 주인공이야.

채팅방이 먹통이 됐다. 몇 초간의 침묵. 그 다음, 폭발.

[사용자 1]: 오빠...? [사용자 2]: 눈물 나... [사용자 3]: 우리도 우리 자신을 응원해 [사용자 4]: 배우 한지훈 사랑해 [사용자 5]: 진짜 진짜 고마워 [사용자 6]: 이 말이 필요했어 [사용자 7]: 우리도 우리의 악역을 잘하자

팬덤이 울음을 터뜨렸다.

세트장에 들어가기 전, 지훈은 한 번 더 거울을 봤다. 이번엔 세트장의 전신 거울이었다. 그 속에 보이는 자신의 전체 모습. 악역의 의상, 악역의 메이크업, 악역의 자세.

하지만 눈빛만큼은 주인공이었다.

감독이 들어왔다.

"한지훈 배우, 준비됐습니까?"

"네, 감독님."

"그럼 시작할게요. 액션!"

카메라가 돌았다.

지훈은 첫 대사를 시작했다. 그 대사는 10년 동안 해온 악역의 대사와 똑같았다. 같은 말, 같은 톤, 같은 감정 선. 하지만 그 뒤에 있는 의도는 완전히 달랐다.

더 이상 업계의 평가를 의식하지 않았다.

더 이상 팬덤의 기대를 짊어지지 않았다.

순수하게, 오직 연기만으로 무대를 채웠다.

감독의 눈이 커졌다.

"한지훈 배우, 좀 더 깊이 들어가 봅시다. 다시."

"네."

두 번째 테이크. 지훈은 악역의 내면을 드러냈다. 왜 이 사람이 악역인지, 어떤 상처 때문에 이런 선택을 했는지, 그 모든 이야기를 단 30초의 대사에 담았다.

감독이 메모를 했다.

"좋아. 정말 좋아. 세 번째."

세 번째 테이크에서 지훈은 눈물을 흘렸다. 악역이 흘리는 눈물이었다. 약한 눈물이 아니라, 절박한 눈물이었다. 이 캐릭터가 흘릴 수밖에 없는 눈물이었다.

감독이 카메라를 멈췄다.

"컷! 완벽합니다. 정말 완벽해요, 한지훈 배우."

세트장이 박수를 쳤다. 스태프들이 웃으며 박수했다. 누군가는 "와, 저게 악역이야?"라고 중얼거렸다.

지훈은 카메라 앞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그 카메라 너머의 수천, 수만의 시청자들을 바라봤다.

팬덤을 바라보지 않았다. 업계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냥 배우로서의 자신을 바라봤다.

카메라가 지훈의 얼굴을 클로즈업했다. 그 얼굴 속의 눈빛. 악역이 흘린 눈물. 하지만 그 뒤에 있는 자유로운 표정.

이것이 배우 한지훈이었다.

촬영이 끝나고, 지훈은 대기실로 돌아왔다. 휴대폰에는 수백 개의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 팬덤의 메시지, 박준호의 메시지, 어머니의 메시지, 심지어 업계 선배들의 메시지도 있었다.

하지만 지훈은 그것들을 읽지 않았다.

그냥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의 자신. 여전히 악역 메이크업을 한 자신. 하지만 이제 그 얼굴은 두렵지 않았다.

지훈이 중얼거렸다.

"이게 나의 진짜 모습이야."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선언이었다.

"배우 한지훈."

그 이름을 입으로 부르며, 지훈은 처음으로 웃음을 지었다. 팬덤을 위한 웃음도 아니고, 업계를 위한 웃음도 아닌, 자신을 위한 웃음이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어머니였다.

"여보세요, 엄마."

"촬영 잘됐니?"

"응. 정말 잘됐어."

"그래? 그럼 이제 집에 와. 밥 해뒀어."

지훈은 웃음을 터뜨렸다. 10년 동안 들어온 그 말. 촬영이 잘 됐든 못 됐든, 어머니는 항상 같은 말을 했다. '밥 해뒀어.'

"응. 지금 가."

전화를 끊고, 지훈은 메이크업을 지웠다. 악역의 얼굴이 벗겨졌다. 그 뒤에 남은 것은 평범한 얼굴이었다. 특별하지 않은, 그저 배우 한지훈의 얼굴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강남역 스튜디오를 나가며, 지훈은 이 거리의 포스터들을 둘러봤다. 유명 배우들의 얼굴이 가득했다. 그 포스터들을 지나가며 10년 전 자신을 떠올렸다. 그때 자신은 이 거리를 걸으며 '언제쯤 저 포스터에 내 얼굴이 나올까'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주연이 되지 못할까봐 두려워했다.

하지만 지금 지훈은 다른 생각을 했다.

'난 악역을 잘한다. 그리고 난 그걸 사랑한다. 그게 내 길이고, 내 길이 가장 옳은 길이야.'

지하철을 타고, 창밖을 바라봤다. 서울의 밤거리. 그 거리 어딘가에서 다른 배우들도 자신의 길을 걷고 있을 것이었다. 누군가는 주연을 꿈꾸며, 누군가는 조연을 꿈꾸며.

하지만 지훈은 더 이상 꿈을 꾸지 않았다.

자신이 이미 그 길 위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집에 도착하자, 어머니가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 메이크업이 안 지워졌네. 악역이구나."

"응."

"밥 먹어."

지훈은 어머니 옆에 앉았다. 밥과 반찬이 식탁에 가득했다. 어머니는 여전히 과하게 많이 차렸다. 10년을 그렇게 해왔으니까.

밥을 먹으며 지훈은 어머니를 봤다. 그 얼굴에 새겨진 주름들, 흰머리들. 자신 때문에 생긴 것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 고마워."

"뭐가?"

"모든 거."

어머니는 밥을 뜨며 웃었다.

"그런 소리 말고 밥만 잘 먹어."

지훈이 웃었다. 그 웃음 속에는 더 이상 불안이 없었다.

**3개월 뒤.**

새로운 드라마 세트장. 이번엔 지훈은 악역이 아니었다. 주연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주연도 조연도 아니었다. 그냥 '배우'였다. 그 역할이 주요한 역할이든, 조연 역할이든, 하나하나가 모두 중요한 역할이었다.

캐스팅 디렉터가 들어왔다.

"한지훈 배우, 이번 역할이 이전과 달라요. 이번엔 선역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근데 말이에요. 당신이 악역 때문에 선역을 못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싶어요. 그래서 당신을 선택했어요."

지훈은 고개를 들었다. 캐스팅 디렉터의 말이 이전과 달랐다. 이제는 '당신이 선역을 해야 한다'가 아니라 '당신이 선역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근데 한 가지 더. 이 역할을 받아들이는 건 당신의 선택이에요. 만약 당신이 악역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면, 거절해도 괜찮아요. 당신의 길을 정하는 건 당신이니까요."

지훈은 잠시 침묵했다. 캐스팅 디렉터의 말이 자신에게 선택권을 준 것이었다. 팬덤도, 업계도 아닌, 자신의 의지를 존중하는 말이었다.

"선역을 하겠습니다."

"이유가 있어요?"

"네. 악역이 좋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라는 걸 알았거든요. 그리고 선역도 해보고 싶습니다. 배우로서 성장하기 위해서."

캐스팅 디렉터가 웃었다.

"좋은 답변입니다. 가서 당신의 선역을 보여줘요. 진정한 배우의."

캐스팅 디렉터가 나가고, 지훈은 거울 앞에 섰다. 이번엔 밝은 메이크업이었다. 착한 역할을 위한 메이크업이었다. 하지만 거울 속의 눈빛은 같았다.

자유로웠다.

세트장으로 들어가기 전, 휴대폰을 꺼냈다. 팬덤 채팅을 열지 않았다. SNS를 확인하지 않았다. 그냥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감독이 외쳤다.

"액션!"

카메라가 돌았다.

지훈은 선역의 대사를 시작했다. 이번엔 악역이 아니었지만, 그 연기의 깊이는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진정했고, 여전히 진실했다.

감독이 지훈의 표정을 따라가며 메모했다. 악역과는 다른 결이 있었다. 더 밝지만, 더 복잡했다. 착한 역할이지만 그 선함 뒤에 숨겨진 고민이 있었다.

"좋아. 정말 좋아. 다시."

두 번째 테이크. 지훈은 선역의 내적 갈등을 드러냈다. 착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진정한 감정을 표현했다.

"컷! 완벽합니다. 한지훈 배우, 당신이 선역도 할 수 있다는 걸 증명했어요."

세트장이 박수를 쳤다. 이번엔 다른 박수였다. 악역 때의 박수와는 다른, 새로운 배우를 발견한 박수였다.

지훈은 카메라 앞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그 카메라 너머를 바라봤다.

팬덤도, 업계도 아닌, 자신을 바라봤다.

카메라가 지훈의 얼굴을 클로즈업했다.

배우 한지훈의 진정한 얼굴로.

이전화목차마지막 화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