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강남역 근처 스튜디오 B홀. 지훈은 거울 앞에서 악역의 얼굴을 벗을 수 없었다. 눈썹을 내리깎고, 입가에 냉소를 머금고, 어깨를 굳혔다. 10년 동안 반복한 움직임이라 손가락 하나 틀리지 않는다.

"한지훈 배우, 들어오세요."

캐스팅 디렉터 서현숙은 메모지를 보고만 있었다. 눈을 들지 않았다.

지훈은 정해진 자리에 섰다. 드라마 <왕의 나라>에서 주인공을 괴롭히는 '악질 친구 준호' 역이었다. 주인공에게 모욕을 주고, 배신하고, 결국 죽는 캐릭터. 지훈이 잘하는 것. 유일하게 잘하는 것.

"포트폴리오를 보니 악역이 많네요."

"네, 그 분야에서 경험을 많이 쌓았습니다."

"경험이 많은 게 아니라 그걸로만 캐스팅되셨다는 얘기 아닙니까?"

서현숙이 비로소 얼굴을 들었다. 그 표정에는 동정도, 호기심도 없었다.

"이번 역할은 단순한 악질이 아니라 내적 갈등이 있어야 합니다. 착한 면도 있고, 주인공과 우정도 나눴던 과거도 있고. 그런데 당신은..."

서현숙이 지훈을 위아래로 훑었다. 지훈은 그 시선 아래서 무언가를 시도했다. 눈썹을 풀고, 입가의 냉소를 거둬 내렸다. 착한 면을 표현하려 했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서현숙의 눈은 이미 판단을 내렸다.

"타입이 맞지 않습니다."

타입이 맞지 않는다.

같은 말이었다. 지난 3년간, 아니 더 길게는 지난 10년간 들어온 같은 말. 지훈이 오디션에 떨어질 때마다 변형되는, 하지만 본질은 같은 그 말.

"감사합니다."

지훈은 절을 했다. 고개를 숙여 나갔다. 스튜디오 복도의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악역의 얼굴—을 본 채로.

집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4시 37분.

거실에는 어머니 한미영이 앉아 있었다. 유튜브에서 드라마를 보고 있었는데, 지훈이 들어서자 화면을 빠르게 껐다.

"어떻게 됐어?"

"떨어졌어."

어머니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밥 한 그릇, 된장국 한 그릇, 계란말이. 지훈이 떨어졌을 때 나오는 메뉴는 정해져 있었다. 가장 빨리 만들 수 있는 것들.

"밥 먹어."

지훈은 밥을 앞에 두고 앉았지만 숟가락을 집지 않았다. 식탁 위에 놓인 휴대폰을 집었다. SNS를 켰다. 자신의 계정이 아니라, 익명 계정으로 로그인했다. 팔로워 12명. 거의 유령 계정이었다.

#한지훈 #악역 #이배우를왜아무도모를까

검색 결과는 거의 없었다. 수십 개 정도. 유명한 배우들의 해시태그 수백만 개에 비하면 먼지 같은 수치.

스크롤을 내렸다. 손가락이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그때였다.

[@anti_jh_fan]

계정이 눈에 들어왔다. 프로필 사진은 회색 바탕에 물음표만 있었다. 그 아래 댓글:

"한지훈의 악역 연기 미쳤다. 왜 아무도 모를까? 이 배우 정말 대박인데. 우리는 본다. 진짜 본다."

좋아요 3,247개.

지훈의 손가락이 멈췄다.

프로필을 클릭했다.

[@anti_jh_fan] - 팔로워 3,201명

비공개 계정이었다. 프로필 설명이 있었다:

"한지훈을 보는 눈. 악역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커뮤니티. 절대 지훈파, 비판적 지지자, 팬덤 견제파. 우리는 그를 본다. 그의 연기를 본다. 그가 버려진 것을 본다."

지훈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버려진 것을 본다?

프로필 하단에 여러 개의 썸네일이 있었다. 모두 자신의 모습이었다. 지훈이 출연한 드라마와 영화의 장면들. 악역으로 죽는 장면, 주인공을 괴롭히는 장면, 눈물을 흘리는 장면. 편집된 영상 클립들이었다.

한 영상의 제목: "한지훈 - 6초 안에 표정으로 절망 전달하기"

또 다른 영상: "악역이 주인공보다 연기 잘하는 경우.mov"

또 다른 영상: "한지훈의 눈빛만 모아봤습니다 - 진짜 배우다"

이 영상들은 누가 만들었을까. 자신을 모르는 누군가가. 자신의 악역 장면들을 일일이 찾아내고, 편집해서 올린 사람들이.

팔로워 3,201명이.

지훈의 가슴이 철렁거렸다. 손이 떨렸다. 공포가 아니었다. 다른 감정이었다.

댓글창을 열었다.

"정말 이 배우 연기 좋은데 왜 주목 안 받지?"

"악역 하나로 이렇게 표현력이 풍부한 배우 드물다"

"매번 죽는 배우 보다가 이 배우 봤는데 진짜 다르네"

"캐스팅 디렉터들이 눈이 없나봐 ㅠ"

"우리는 본다. 이 배우를 본다"

"이 배우 주인공으로 한 번 봤으면 좋겠는데 기획사가 문제인가"

"악역만 해도 이 정도면 주인공하면 대박 아님?"

"근데 이 배우 진짜 주인공 해본 적 없나? 항상 악역이네"

"그래서 우리가 여기 모인 거지. 누군가는 봐줘야 하니까"

"↑ 근데 솔직히 주인공 역할이 어울릴까? 악역의 카리스마가 있어서 좋은 건데"

"↑↑ 그건 편견이지. 연기력 있는 배우면 뭐든 소화하지"

"카리스마 ≠ 연기력은 아니고... 근데 이 배우는 둘 다 있는 것 같긴 한데"

"여기서 싸우지 말자. 우리는 이 배우를 응원하는 팬덤이지, 안티가 아니잖아"

"그래도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면..."

"또 현실이냐. 현실 얘기하면 우리 같은 팬덤이 생기지도 않았겠지"

한 줄 한 줄을 읽으며 지훈의 손가락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번엔 공포가 아니었다. 다른 감정이었다.

10년이었다. 10년을 악역으로만 살아왔다. 캐스팅 디렉터들이 자신을 부르는 건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악당이 필요할 때. 주인공을 괴롭힐 누군가가 필요할 때. 그리고 결국 죽어야 할 누군가가 필요할 때.

그 외에는 아무도 자신을 보지 않았다.

아무도.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국 식어. 먹어."

지훈은 밥을 한 숟가락 입에 넣었지만, 맛을 느끼지 못했다. 손은 여전히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DM 창이 새로 열렸다.

[@anti_jh_fan]

"안녕하세요. 혹시... 정말 당신입니까?"

지훈의 손가락이 입력창에서 멈췄다.

정말 자신인가.

10년을 악역으로만 살아온,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아무도 원하지 않던 배우. 한지훈.

그런 자신이 이제 누군가의 눈에 들어왔다.

팔로워 3,201명의 눈에.

지훈은 손가락을 움직였다.

"네. 저 한지훈입니다."

메시지를 입력했다.

전송하려던 순간, 손가락이 멈췄다. 손끝이 떨렸다. 숨을 쉬는 것도 잊었다.

이 메시지를 보내는 순간부터 뭔가가 시작될 것 같았다. 자신의 인생에서. 자신이 10년간 기다려온 그 무언가가.

하지만 동시에 끝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메시지가 거절될 수도 있고.

이 계정이 사라질 수도 있고.

이 기대가 좌절될 수도 있다.

지훈은 화면을 봤다.

"네. 저 한지훈입니다."

이 문장이 전부였다.

손가락이 전송 버튼 위에서 떨렸다. 심장이 요동쳤다. 가슴이 철렁거렸다. 숨을 참았다.

전송.

메시지가 전송되었다.

몇 초가 지났다. 아니, 몇 분이 지났을 수도 있다. 시간감각이 없었다.

그러다 화면에 새로운 메시지가 떴다.

[@anti_jh_fan]

"정말 감사합니다. 저희는 당신을 봤습니다. 당신의 연기를 봤습니다. 그리고..."

메시지가 거기서 끝났다. 상대방이 아직 입력 중이라는 표시가 떴다.

점 세 개가 깜박거렸다.

지훈은 화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점 세 개.

점 세 개.

그리고 마침내.

새로운 문장이 나타났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무언가를 시작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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