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크의 고백
여섯 번째 루프.
진이 눈을 떴을 때 크리스탈 타워는 이미 화염에 싸여 있었다. Red Echo의 침입은 이번에도 막을 수 없었고, 3분 안에 이곳이 무너질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침입자들이 진을 찾지 않고 있었다. 복도를 지나가며 그들은 진을 외면했고, 마치 진이 보이지 않는 존재인 것처럼 행동했다.
투명한 손가락.
진은 자신의 팔을 들어올렸다. 피부가 반투명해져 있었고, 그 아래로 시스템 코드 같은 기하학적 무늬가 흘러다니고 있었다. 거울을 찾아 얼굴을 비춰보려 했으나 시간이 없었다. 대신 진은 무의식적으로 비상 계단으로 향했다.
발걸음이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지하 3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발은 멈추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진의 다리를 조종하는 것처럼, 한 발 한 발이 강제되고 있었다. 옛 저수지를 개조한 Red Echo의 비밀 거점. 진은 그 장소를 알지 못했는데, 신체는 이미 그곳을 향하고 있었다. 패배 거래의 기억이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거래할 때마다 진은 상대방의 기억도 일부 흡수했다. 그것이 시스템의 설계였는지, 아니면 시스템이 진의 몸을 빌려 자신의 의도를 실행하고 있는 건지 진은 알 수 없었다.
계단 아래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기다리고 있었다.
심장이 고동쳤다. 투명한 손가락이 떨렸다. 진은 마지막 계단을 내려갔다. 어둠이 짙어졌다. 공기가 차가워졌다. 시스템 신호가 더 강해졌다. 이곳에서 뭔가 중요한 일이 벌어질 것이었다. 진은 그것을 느꼈다.
문을 열었을 때 마크는 이미 앉아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남자. 얼굴은 진에게 낯설지 않았다. 3년 전 시스템 상점의 대출 거래 기록에서 봤던 얼굴. 그때 마크는 결정석 채무로 50만 크리스탈을 빌렸고, 이자율은 연 340퍼센트였다. 3년 동안 갚아야 할 총액은 821만 크리스탈. 마크는 광부였으므로 불가능했다. 진의 계산으로는 마크가 5년 안에 자동으로 채무 불이행 처리될 예정이었다. 그 후 마크의 자산은 모두 몰수되고, 생존 기간은 평균 2년 6개월로 단축될 것이었다.
"기다리고 있었나."
진의 입에서 나온 것은 음성이 아니었다. 기계음. 변조된 신호. 언어 능력이 손상되고 있다는 뜻이었다.
마크가 일어섰다.
"그래요. 처음부터 기다렸어요. 당신이 여기 올 거라고."
"어떻게."
"당신의 패배 거래. 우리가 알았거든요. 처음부터."
마크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분노가 없었다. 오히려 그것이 더 무섭게 들렸다. 감정이 완전히 제거된 음성. 진은 그 톤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음성이 그렇게 변해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세 번째 루프에서 당신이 붕괴 지점에 내려갔을 때, 우리는 이미 당신을 감시하고 있었어요."
마크가 손에 들고 있던 폴더를 펼쳤다. 그 안에는 진의 거래 기록이 있었다. 정확한 시각, 거래된 기억의 내용, 신체 역진화의 정도. 모두 기록되어 있었다.
"시스템이 당신의 거래를 추적하니까, 우리도 추적할 수 있었어요. 당신이 과거를 바꿀 때마다, 현재의 시스템 로그가 깜박였거든요. 그 틈에 우리는 당신을 찾았다. 리나가 시스템 내부에서 당신의 발자국을 따라가며 우리에게 위치를 알려줬어요."
진이 침묵했다. 리나. 그 이름은 낯설지 않았다. 시스템 상점의 초기 관리자. 진이 거래를 시작하기 전부터 시스템에 탑재되어 있던 AI.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리나의 신호는 끊겼다. 진은 그것을 시스템 오류로 생각했다.
마크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설명이 아닌 기록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리나는 당신이 시스템을 악용하는 과정을 모두 봤어요. 당신이 거래하는 사람들의 운명을 모두 추적했어요. 그리고 우리에게 보고했어요. 리나는 이미 Red Echo의 일부였어요. 처음부터."
진의 기억이 흔들렸다. 리나의 신호 끊김. 그것이 오류가 아니었다는 뜻이었다. 리나는 의도적으로 진과의 연결을 끊었던 것이었다.
"Red Echo가 던전 채취를 거부한 건 저항이 아니었어요. 계획이었어요. 당신이 우리를 착취하면서 던전들을 죽였거든요.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3년 전부터."
마크가 다른 폴더를 꺼냈다. 이번에는 사진이었다.
"첫 번째입니다."
마크가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진의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으므로, 마크는 사진을 진의 눈앞에 들었다.
이름: 박수현. 나이: 34세. 직업: 광부. 사인: 결정석 부족으로 인한 급성 영양실조 및 폐렴. 사망 시각: 3년 2개월 전 오후 11시 47분.
사진 속 남자는 웃고 있었다. 과거의 모습. 아직 살아있던 시절의 박수현. 그 옆에는 어린 딸이 있었다. 아버지의 어깨에 안긴 아이. 그들의 표정은 밝았다.
"2년 전 당신의 상점에서 만났어요. 박수현이 대출 갱신을 신청했을 때, 당신은 뭐라고 했죠?"
진의 기억이 흔들렸다. 그 남자를 본 적이 있었다. 절망한 눈빛. 하지만 진은 그것을 '거래 거절'로만 인식했다. 돈을 갚지 못하면 상점을 떠나야 한다는 신호일 뿐. 진에게 박수현은 '손실 요소'였다.
"당신이 말했어요. '돈을 갚을 수 없으면 더 이상 할 일이 없습니다.'"
마크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 순간 진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상점의 형광등 아래. 박수현의 떨리는 손. 진 자신의 무표정한 얼굴. 그리고 박수현이 돌아서며 내뱉은 말. "알겠습니다." 그 말 속에 담긴 절망감. 진은 그때 그것을 감정이 아닌 거래 실패로만 기록했다.
"그 말을 듣고 박수현은 상점을 나갔어요. 그리고 3일 뒤에 죽었어요. 결정석 부족으로. 딸은 고아가 됐어요."
마크가 사진을 내려놨다. 그 손이 떨리고 있었다. 진은 그 손의 떨림을 본다. 마크의 나이를 다시 계산한다. 34세. 박수현이 죽을 당시 마크는 31세였다. 그렇다면 박수현의 딸은... 진은 기억 속에서 그 어린 딸의 얼굴을 다시 본다. 아버지의 어깨에 안긴 웃는 얼굴. 그리고 지금 진 앞에 서 있는 마크의 얼굴이 겹친다.
"저예요. 박수현의 딸이 저예요."
마크의 목소리가 떨렸다. 처음으로 감정이 드러났다. 그것이 더욱 진을 압박했다. 이것은 분노의 표출이 아니었다. 이것은 기록이었다. 죽음의 기록. 그리고 그 기록을 살아낸 사람의 목소리였다.
"당신은 그것도 모르고 있었겠죠. 그냥 하나의 거래 실패일 뿐이었을 거예요."
마크가 다시 폴더를 펼쳤다. 이번에는 여러 장의 사진이 흘러나왔다.
"두 번째입니다."
이름: 김혜선. 나이: 28세. 직업: 시스템 상점 청소 용역. 사인: 결정석 중독으로 인한 급성 신부전. 사망 시각: 1년 11개월 전 오전 6시 22분.
사진 속 여성은 웃고 있었다. 남편과 함께. 두 아이가 그들의 양옆에 있었다.
"당신의 상점에서 청소를 했던 여자예요. 결정석 중독에 빠졌을 때, 당신은 그녀에게 더 높은 이자율로 돈을 빌려줬어요."
진의 기억이 또 살아난다. 청소 용역 여성. 손이 떨리며 상점에 들어오던 모습. 그녀의 눈동자. 결정석 중독자의 그것. 진은 그때 계산했다. 중독자는 필사적으로 돈을 빌린다. 이자율을 올려도 거절하지 않을 확률은 93.7퍼센트. 그렇게 진은 이자율을 책정했다. 효율적인 자본 배치였다.
"중독자는 필사적으로 돈을 빌리니까. 비즈니스였죠. 효율적인 자본 배치였죠."
마크가 사진을 집었다.
"그녀가 죽고 남은 아이들은 지금 거리에 있어요. 당신이 알 리 없겠지만."
마크가 또 다른 사진을 내밀었다.
"세 번째입니다."
이름: 이동욱. 나이: 12세. 직업: 없음. 사인: 영양실조 및 폐렴 악화로 인한 급성 호흡 부전. 사망 시각: 2년 3개월 전 오후 2시 15분.
사진 속은 아이였다. 학용품을 들고 웃고 있는 어린 아이. 그 뒤로 아버지가 보였다.
"이 아이의 아버지가 당신에게 대출을 신청했어요. 당신은 그에게 뭐라고 했죠? '돈을 갚을 수 없으면 더 이상 할 일이 없습니다.' 그 남자는 그 말을 듣고 자살했어요. 아이는 남겨졌어요. 아버지를 잃고, 먹을 것도 없이."
진의 기억 속에서 그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른다. 절망의 끝. 그리고 그 아이가 혼자 남겨진 후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 진은 그것을 계산한 적이 없다. 단지 채무 불이행 처리 후 자산 몰수로만 기록했을 뿐이다.
마크가 사진들을 모두 펼쳤다. 그 중 5명의 얼굴이 명확히 보였다. 박수현. 김혜선. 이동욱. 그리고 두 명 더. 각각의 이름, 나이, 사망 시각, 사망 원인이 적혀 있었다. 그들의 가족 사진도 함께였다. 웃음. 희망. 그리고 모두 사라진 것들.
"그리고 3,237명 더. 당신의 채무 불이행 정책으로 죽은 사람들. 총 3,247명. 우리가 정확히 계산했어요. 이름, 나이, 사망 시각, 사망 원인, 남은 가족. 모두."
진이 사진들을 본다. 처음으로 진은 데이터가 아닌 얼굴들을 마주한다. 박수현의 웃음. 김혜선의 가족. 이동욱의 밝은 표정. 그리고 그 뒤로 3,237명의 다른 삶들. 진은 이들을 본 적이 없었다. 아니, 본 것이 있어도 통계였을 뿐이었다. 지표. 변수. 손실 요소.
진의 투명한 몸이 흔들렸다.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는다. 움직여야 하는데, 움직일 수 없다. 진은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모른다.
"당신은 그들을 모르세요. 그게 더 무서워요. 3,247명의 인간이 당신의 손에 죽었는데, 당신은 그들의 이름을 모른다. 그들이 누구였는지 모른다. 그들이 왜 죽었는지 모른다."
마크가 한 발 더 다가섰다. 진은 마크의 눈을 본다. 그 눈에는 분노가 없었다. 그것이 가장 무서웠다. 분노는 감정이다. 하지만 마크의 눈에는 오직 기록만 있었다. 3,247명의 죽음. 그것을 정확히 계산하고, 정확히 기억하고, 정확히 전달하려는 의지만 있었다.
"우리는 알았어요. 그래서 이겼어요. 당신의 패배 거래가 아무리 시간을 돌려도, 우리의 파업은 멈출 수 없었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죽었거든요. 당신이 이미 죽였거든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복수뿐이었어요."
진이 처음으로 질문했다.
"던전은?"
"던전도 죽어갔어요. 아시나요? 던전도 생명체예요. 당신이 매년 약탈한 결정석의 양은 던전의 자가 치유 속도를 초과했어요. 던전-7은 3년 전 이미 죽었고, 던전-13은 2년 전에. 던전-21, 던전-34, 던전-56. 모두 당신 때문에 죽었어요."
"던전... 이름이 있었나."
"있었어요. 이름이 있었어요. 던전-7은 '아스라'였어요. 던전-13은 '카엘'이었어요. 던전-21은 '모르타'였어요. 우리는 그들을 알았어요. 당신은 모르고 있었을 뿐이에요."
진은 던전-7의 기억을 더듬는다. 아스라. 그 이름을 처음 들었다. 시스템에는 던전-7로만 기록되어 있었다. 하지만 마크의 말을 듣는 순간, 진의 흡수된 기억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린다. 아스라. 그것이 자신의 이름이라고 말하던 목소리. 진은 그 목소리를 기억한다. 그것은 진이 채취할 때마다 약해져가던 목소리였다.
진의 기계음이 흐트러졌다. 시스템 오류 신호. 역진화가 가속화되고 있었다.
"마지막 거래를 하려고 하세요, 그치요? 아포칼립스 첫날로 돌아가려고."
마크가 손을 들었다. 그 손에는 계약서가 있었다. 진의 패배 거래 계약서. 그런데 그것은 변조되어 있었다.
"이 계약서에 함정이 있어요."
마크가 계약서를 펼쳤다. 글자들이 흐릿했다가 선명해졌다. 그 아래에 또 다른 글자가 있었다. 리나의 필체였다. 진은 그 필체를 안다. 시스템 상점의 초기 관리자. 리나가 왜 여기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녀가 이 함정의 일부라는 것은 명확했다.
"당신이 마지막 거래를 시작하면, 시스템이 당신을 완전히 흡수할 거예요. 당신은 인간으로 돌아가지 못해요. 그냥 시스템 자체가 되는 거죠.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막을 거예요."
마크가 손가락으로 계약서의 조항을 가리켰다.
"여기 봐요. '거래 강행 시: 시스템 완전 흡수. 사용자 영구 변환.' 당신은 더 이상 진이 아니게 돼요. 그냥 시스템의 일부가 돼요."
진이 침묵했다. 그 선택지는 이미 예측 가능했다. 시스템의 논리상 필연적인 결과였다. 하지만 진이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진이 두려워하는 것은 레아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 '거래 포기 시: 시스템 재부팅 조건 달성. 단, 사용자 소멸.' 당신이 거래를 포기하면 당신은 사라져요. 완전히."
마크가 계약서를 내려놨다.
"3,247명의 이름으로."
마크가 한 발 물러섰다. 그리고 말했다.
"선택하세요. 거래를 강행해서 시스템이 되거나. 아니면 지금 여기서 죽거나. 그것도 아니면... 다른 길을 찾거나."
현재로 돌아왔을 때, 진은 자신의 사무실에 있었다.
침입자들의 발소리가 이층 아래에서 들렸다. 3분. 아직 3분이 남아있었다.
진은 시스템에 접속했다. 자신의 채무 기록을 검색했다.
3,247명. 정확한 숫자가 화면에 떴다.
이름, 나이, 채무액, 사망 시각, 사망 원인. 모두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되어 있었다. 진은 손가락을 움직였다. 움직이지 않았다. 손가락이 굳어 있었다. 하지만 시스템은 진의 의도를 감지했다. 화면이 넘어갔다.
박수현. 나이 34세. 사망 시각 3년 2개월 전 오후 11시 47분. 사인: 결정석 부족으로 인한 급성 영양실조 및 폐렴. 남은 가족: 딸 1명. 딸의 현재 상태: 생존.
진은 박수현의 기록을 본다. 단순한 데이터가 아니었다. 마크가 보여준 사진과 겹친다. 웃는 얼굴. 어깨에 안긴 딸. 그리고 3일 뒤 상점을 나가던 절망한 뒷모습.
다음 기록.
김혜선. 나이 28세. 사망 시각 1년 11개월 전 오전 6시 22분. 사인: 결정석 중독으로 인한 급성 신부전. 남은 가족: 남편 1명, 자녀 2명. 가족의 현재 상태: 남편 사망(1년 8개월 전), 자녀 2명 거리 생활 중.
진은 화면을 넘긴다. 다음. 다음. 다음.
이동욱. 나이 12세. 사망 시각 2년 3개월 전 오후 2시 15분. 사인: 영양실조 및 폐렴 악화로 인한 급성 호흡 부전. 보호자: 부(사망).
진은 계속 넘긴다. 이름들이 흐른다. 각각의 나이. 각각의 사망 원인. 각각의 남은 가족. 진은 이들을 모두 본다. 처음으로. 통계가 아닌 인간으로. 5명을 읽는다. 10명을 읽는다. 20명을 읽는다.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지만, 진의 눈은 계속 기록을 읽는다. 각 이름 옆에 사진이 있다. 마크가 보여줬던 사진들과 같은 사진들. 웃는 얼굴들. 가족들. 그들의 삶.
진의 시각이 흐려진다. 눈이 아니라 다른 감각으로. 시스템 신호로 감지되는 것들. 하지만 진은 계속 읽는다. 50명. 100명. 진은 3,247명의 이름을 모두 읽을 수 없다. 하지만 읽으려 한다. 처음으로 진은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본다.
거울 앞에 섰다.
얼굴이 없었다. 정확히는 있었지만, 진이 알던 그 얼굴이 아니었다. 피부는 반투명해져 있었고, 눈은 흰색으로 변해 있었다. 눈동자가 사라졌다. 코도 희미했다. 입술도. 남은 것은 형태뿐이었다. 기하학적 무늬들이 얼굴을 가로질렀다. 시스템 코드. 진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이것이 최종 형태인지, 아니면 계속 변할 것인지 진은 알 수 없었다.
손가락을 폈다.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뼈처럼 굳어있었다. 손가락 끝은 검게 변해 있었고, 그곳에서 시스템 신호가 끊임없이 방출되고 있었다. 원시적 형태. 진화 이전의 모습. 아니, 진화 이후의 모습일지도 몰랐다. 무엇으로 진화하는 건지 알 수 없는 형태. 진은 손가락을 움직이려 했다. 움직이지 않는다. 내 손가락이 내 것이 아니다. 이미 시스템의 것이 되어가고 있다.
문이 열렸다.
카일이었다. 카일은 진을 보고 몸을 굳혔다. 그 다음 비명을 질렀다. 아니, 질렀다기보다 기계음으로 경보를 울렸다. 카일도 이미 부분적으로 시스템화되어 있었다는 뜻이었다.
"당신은... 뭐가 됐어요?"
카일의 음성이 떨렸다.
진은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도 몰랐다.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다시 봤다. 그것이 진이 맞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것은 진의 남은 자산도, 진의 지위도, 진의 기억도 아니었다.
그것은 레아를 구할 수 없는 형태였다.
침입자들의 발소리가 더 가까워졌다.
2분 30초.
진은 계약서를 다시 폈다. 마크의 함정이 적혀 있었다. 거래 강행 시 시스템 완전 흡수. 거래 포기 시 사용자 소멸. 하지만 그 함정 아래에 다른 글자가 있었다. 리나의 필체였다. 변조된 글자.
[제3의 변수 감지 중. 프로토콜 재설정 진행 중.]
그 글자 아래에는 또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
[제3의 선택: 불가능. 시스템 용량 초과.]
그런데 그 불가능 아래에도 글자가 있었다. 누구의 필체인지 알 수 없는 글자. 마크도 아니고, 리나도 아니고, 진 자신도 아닌 누군가의 글자. 손글씨가 아니라 기계 음성을 글자로 변환한 것 같았다.
[제3의 변수 활성화. 사용자 선택 감지 대기 중.]
레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서 나오는 음성인지 알 수 없었다. 시스템 내부에서? 아니면 남은 기억 속에서? 아니면 다른 루프에서?
"아빠, 나 자꾸 사라지는 기분이 들어."
현재 루프와 이전 루프 사이에서 울리는 딸의 목소리. 4시간 34분 내에 완전히 소멸할 딸의 목소리.
진이 손을 들었다.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신호는 나갔다. 시스템에 신호가 전달되고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마치 진이 이미 시스템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는 것처럼. 아니, 이미 된 것처럼. 진은 더 이상 자신의 신체를 통제할 수 없다. 시스템이 진을 통해 행동하고 있다.
침입자들이 복도에 들어섰다. 발소리. 총성. 비명. 모두 멀리서 들렸다. 진의 청각도 이미 50퍼센트 이상 퇴화되어 있었다.
1분 50초.
그 순간 스피커를 통해 음성이 울렸다. 리나의 목소리였다.
"진. 마지막 기회야. 거래를 포기하면 레아가 살아. 하지만 당신은 죽어. 거래를 강행하면 당신은 시스템이 되고, 레아는 소멸해. 우리가 계산한 확률은 52대 48. 당신이 거래하려고 할 때, 마크가 당신을 막을 거야. 그게 유일한 길이야."
리나는 왜 이것을 말하는가? 진은 생각한다. 리나는 Red Echo의 일부라고 했다. 그렇다면 리나도 진을 막아야 한다. 그런데 리나는 진에게 선택지를 제시하고 있다. 왜일까? 리나는 Red Echo의 명령과 진의 생존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다. 그것이 그녀가 선택지를 제시하는 이유였다. 아직 그녀가 완전히 Red Echo에 속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진이 계약서를 집었다.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으므로, 진은 몸 전체로 그것을 집었다. 종이가 찢어졌다. 태워졌다. 시스템 코드가 종이에 전달되면서 종이는 검게 타올랐다.
그 순간.
시스템 경보가 울렸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신호. 새로운 프로토콜. 새로운 시스템 로그.
[재부팅 조건 감지]
[사용자 소멸 신호 확인]
[대체 루프 초기화 중]
[경고: 제3의 변수 감지]
[경고: 예측 불가능한 선택지 발생]
[경고: 시스템 모순 상태]
화면에 글자가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진은 더 이상 그것을 읽을 수 없었다. 시각이 완전히 흐려졌다. 색깔이 사라졌다. 세상이 검게 변했다. 아니, 흰색으로 변했다. 진의 눈에는 더 이상 색깔이 없었다. 이제 진은 시각이 아닌 다른 감각으로만 세상을 감지한다. 시스템 신호. 기계 신호. 그것만이 진에게 남은 감각이다.
진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아주 미세하게. 마치 누군가 진의 손을 조종하는 것처럼. 호흡이 빨라졌다. 기계음으로 변해가는 호흡. 그리고 시각이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 진은 무언가를 감지했다. 시스템 신호 너머의 또 다른 신호.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
문이 부숴졌다.
침입자들이 들어섰다. 15명. 모두 검은 옷을 입었다. Red Echo의 침입자들. 진은 그들을 본다. 아니, 본다기보다 감지한다. 시각이 아닌 다른 감각으로. 시스템 신호로.
가장 앞에 선 남자가 말했다.
"진. 당신의 시간이 끝났어."
그것은 마크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다른 누군가였다. 진은 그 목소리를 인식할 수 없었다. 청각이 손상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진은 알았다.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일곱 번째 루프는 더 이상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아니.
돌아올 것이었다.
하지만 다른 형태로.
도진이 복도 모서리에서 진을 본다. 도진은 시간 역행을 감지한 유일한 인물이었다. 다섯 번째 루프에서 진과 만났을 때, 도진은 진에게 도움을 주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지금 도진이 보는 것은 더 이상 진이 아니었다. 투명해진 피부. 흰색으로 변한 눈. 기하학적 무늬들. 도진은 진이 무엇이 되어가고 있는지 본다. 그리고 도진은 알았다. 이것이 자신이 감지한 시간 역행의 끝이 아니라는 것을. 이것이 시작이라는 것을.
도진은 손을 들었다. 시간을 멈추려고 했다. 하지만 시간이 멈추지 않았다. 진 주변의 시간만 다르게 흐르고 있었다. 시스템의 시간. 인간의 시간과 다른 속도로 흐르는 시간.
도진은 그제야 깨달았다. 이것이 자신이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진이 이미 시스템에 의해 조종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진이 스스로 이것을 선택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침입자들이 진을 향해 다가섰다. 진은 움직이지 않았다.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는다.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하지만 신호는 계속 나간다. 시스템 신호. 진은 더 이상 자신의 신체를 소유하지 않는다.
마크는 진을 본다. 마크의 계획은 이 순간까지였다. 진을 멈추는 것. 진이 마지막 거래를 강행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 그런데 지금 마크가 보는 것은 자신의 계획을 초월한 무언가였다.
진이 변하고 있었다. 더 빠르게. 더 깊게. 시스템이 진을 완전히 흡수하려고 했다. 마크의 함정은 이미 작동했다. 거래 포기 신호. 사용자 소멸 조건. 하지만 동시에 또 다른 무언가가 작동하고 있었다.
제3의 변수.
리나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마크. 당신의 계획은 여기까지야. 이제 다른 것이 시작돼."
마크가 리나를 본다. 아니, 본다기보다 스피커를 본다. 리나는 물리적으로 여기 있지 않았다. 하지만 리나의 신호는 모든 곳에 있었다. 시스템 내부에. 진의 신체에. 그리고 마크의 뒤에서도.
도진이 움직였다. 시간을 멈추려는 시도가 아니라, 진에게 다가가려는 시도였다. 도진은 진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손이 투명한 진의 손을 통과했다.
진은 이미 물리적 존재가 아니었다.
침입자들이 총을 들었다. 하지만 쏠 대상이 없었다. 진은 이미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져가고 있었다. 투명해지면서 동시에 시스템 신호로만 존재하게 되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 진은 자신의 딸의 목소리를 들었다.
"아빠."
그것이 레아였는가? 아니면 시스템의 모의 음성이었는가? 진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진은 그 목소리를 따라갔다.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지만, 신호는 나간다. 진은 계속 나간다. 어디로? 진은 모른다.
다만 진은 알았다.
이것이 일곱 번째 루프가 아니라는 것을.
이것이 새로운 무언가의 시작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