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경기장의 조명이 한준호의 얼굴을 비추자마자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

스코어보드: 0-0. 1세트 시작.

장민준이 라켓을 들었다. 한준호는 코트 왼쪽 끝에 섰다. 20년의 기억 속에서 이 경기는 200번 이상 진행되었다. 매번 이겼다. 장민준의 약점은 백핸드 코너, 포어핸드 긴 랠리 진입 시 타이밍 저하, 그리고 서브 리시브 후 3구째 공격 시 각도 선택의 보수성. 완벽한 분석이었다.

그런데 손가락이 반응하지 않고 있었다.

장민준의 첫 서브가 날아왔다. 좌측 사이드스핀, 약한 회전. 기억이 명령했다: 포어핸드 드라이브로 대각선 깊숙이. 한준호의 라켓이 들렸다.

손가락은 공의 접촉점을 감지해야 했다. 회전을 읽어야 했다. 임팩트 각도를 조정해야 했다.

손가락이 아무것도 감지하지 못했다.

공이 날아갔다. 네트를 넘지 못했다.

0-1.

한준호의 눈이 자신의 손가락을 바라봤다. 손가락은 여전히 라켓을 쥐고 있었지만, 떨리지 않았다. 마비된 듯 고요했다. 기억은 명확했다. 신체는 완전히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두 번째 랠리.

백핸드 롱. 깊이 있는 공. 기억이 지시했다: 블로킹 후 포어핸드 측면 공략. 한준호가 백핸드로 블로킹을 시도했다. 라켓이 공에 닿았지만 회전을 제어할 수 없었다. 공이 높이 떠올랐다. 장민준이 스매시를 날렸다.

0-2.

경기장의 온도가 내려갔다. 관중석에서 몇몇 선수들이 고개를 돌렸다. 박수진 코치는 노트에 무언가를 기록하고 있었다. 김태호 감독은 표정이 없었다.

한준호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기억을 다시 정렬했다. 다음 서브는 우측 톱스핀이다. 반복에 대비해야 한다. 드라이브로 공략. 손가락이 회전을 감지하면—

공이 또 나갔다.

0-3.

손가락이 신호를 끊고 있었다. 20년의 기억이 뇌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신체는 그 명령을 받지 않고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부상이 아니었다. 이것은 배반이었다.

장민준의 얼굴에 자신감이 피어올랐다. 그는 한준호의 변화를 즉시 감지했다. 모든 선수는 상대의 손가락을 본다. 손끝이 공을 어떻게 맞히는지, 라켓의 각도가 어떻게 변하는지. 장민준은 한준호의 손끝이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0-4.

**'체인지 엔드!'**

1세트가 끝났다. 한준호는 코트 반대편으로 이동했다. 타올을 집어 들고 손가락을 닦았다. 마치 그것이 도움이 될 거라 믿으면서.

박수진 코치가 코트 옆에서 손짓했다. 한준호는 다가갔다.

"손가락의 감도를 다시 확인해야 한다. 지금 신경이 완전히 차단된 상태야."

"네, 알겠습니다."

하지만 한준호는 알고 있었다. 신경이 차단된 게 아니라는 것을. 신경은 존재했다. 다만 손가락이 반응하지 않을 뿐이었다. 이것은 시간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처럼 느껴졌다.

2세트가 시작되었다.

한준호는 더 집중했다. 더 노력했다. 더 강하게 의지했다. 기억이 이겨낼 거라 생각했다.

기억이 졌다.

5-11. 1세트.

8-11. 2세트.

경기가 끝났을 때 관중석에서 박수가 울렸다. 장민준을 향한 박수였다. 한준호는 라켓을 내려놨다. 손가락을 펼쳤다. 손가락이 말을 하려 했지만, 여전히 침묵했다.

중얼거림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손가락... 손가락이 반응하지 않는다."

코트를 나가는 길에 박수진 코치가 한준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라커룸으로 함께 이동했다.

"잘했어, 준호."

"아니요."

"이건 부상이다. 신경 손상은 시간이 필요해. 너무 빨리 돌아오려고 했어."

한준호가 고개를 들었다. 박수진의 눈이 마주쳤다.

"아니요, 코장. 이건 제 실력입니다. 손가락이 문제가 아니라, 제가 문제입니다."

박수진이 입을 열려 했지만, 한준호는 이미 라커룸 깊숙이 들어가 있었다.

기숙사로 돌아가는 복도에서 모든 시선이 한준호에게 쏠렸다. 동정의 시선. 불신의 시선. 거리감의 시선. 한국 탁구 대표팀에서 '세계 챔피언'이라 불리던 선수가 '떨어진 별'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이석우가 한준호의 방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얘, 뭔가 이상해. 넌 과거의 넌 이렇지 않았는데?"

한준호가 멈췄다. 이석우의 눈이 그를 관통했다.

"기억에 없는 기술들을 쓰고, 상대의 약점을 너무 잘 알고 있어. 그런데 손가락이 안 따라온다고? 뭔가... 뭔가 다르다."

한준호의 심장이 멈췄다. 회귀를 아는 사람은 자신뿐이어야 했다. 하지만 이석우의 눈에는 의심이 명확하게 떠 있었다.

'노출되면 안 된다. 절대 노출되면 안 된다. 하지만 거짓말을 할 수도 없다. 이석우는... 이석우는 내가 지금 무엇인지를 이미 감지하고 있다.'

한준호는 입술을 깨물었다. 눈을 마주쳤다.

"그냥... 기억하는 기술들이에요."

"기억?"

이석우가 한 발 더 가까워졌다. 한준호의 거짓을 파고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

"네. 옛날에 배운 것들을 다시 생각해보고 있어요."

"생각해본다고 손가락이 저렇게 정확하게 움직일까?"

한준호가 답할 수 없었다. 이석우는 충분히 똑똑했다. 충분히 관찰력이 있었다. 그리고 충분히 한준호를 알고 있었다. 한 번의 거짓말로는 부족했다.

"이석우, 난 지금..."

"뭐라고 말할 거야?"

이석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눈은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난 넌 뭔가 다르다는 걸 알아. 분명히 다르다는 걸 느껴. 하지만 넌 그걸 말할 수 없을 거야. 그래서 난 묻지 않을 거야."

한준호가 눈을 떴다.

"대신 한 가지만 기억해. 손가락이 회복되면... 넌 정말 무서운 선수가 될 것 같아."

이석우는 그렇게 말했다. 그의 말이 한준호의 가슴에 박혔다. 누군가 자신의 회복을 믿어주는 목소리.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한준호는 여전히 자신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이석우는 그렇게 말하고 방으로 돌아갔다.

한준호는 자신의 방에 들어갔다. 불을 켰다. 손가락을 들었다. 손가락을 바라봤다.

"20년을 다시 살 기회를 얻었는데... 손가락 하나 때문에 모든 게 끝나는 건가?"

손가락이 대답하지 않았다.

밤 11시, 한준호는 몰래 훈련장으로 내려갔다. 누구도 없는 탁구대 앞에 섰다. 라켓을 집어 들었다. 공을 집어 들었다.

첫 번째 드라이브 훈련.

공을 던졌다. 라켓으로 쳤다. 공이 테이블에 떨어졌다. 튕겨 올랐다. 벽에 맞았다. 돌아왔다.

한준호가 공을 받으려 했다.

공이 예상한 각도로 돌아오지 않았다. 기억은 45도라 말했지만, 실제로는 52도였다. 라켓 그립감의 미세한 떨림이 각도를 틀어놨다. 손가락이 제어 신호를 보내지 못했다.

한준호의 라켓이 공을 놓쳤다.

공이 바닥에 떨어졌다.

한준호의 호흡이 빨라졌다.

두 번째 드라이브 훈련.

손가락 끝의 저림이 더 심해졌다. 신경 신호의 단절감이 손목까지 퍼져 내려왔다. 같은 결과. 공이 예상 각도를 벗어났다.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안 돼... 안 돼..."

한준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손가락... 손가락이..."

공과 라켓이 부딪히는 소리가 계속되었다. 기계처럼, 절망처럼, 광기처럼.

그때 조명이 켜졌다.

박수진 코치가 나타났다. 훈련장 입구에서 한준호를 바라봤다. 한준호는 멈춰 섰다. 라켓을 들고 있었다. 손가락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박수진이 천천히 걸어왔다. 한준호 앞에 섰다.

"손가락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박수진이 한준호의 손을 잡았다.

"거짓말을 하지 않기 때문에, 정직하게 회복된다. 지금 너는 70% 손실 상태야. 하지만 30%는 여전히 있다. 그 30%부터 시작하자."

박수진이 한준호의 손가락을 펼쳤다. 엄지부터 새끼손가락까지. 각 손가락의 끝을 손톱 위로 눌렀다. 극도로 미세한 압력이었다.

"느껴?"

한준호가 고개를 저었다.

"거의... 못 느껴요."

"맞아. 지금은 거의 못 느낀다. 하지만 매일 이 훈련을 반복하면, 감각이 돌아올 거야. 신경계는 자극하면 깨어난다."

박수진이 한준호를 탁구대 옆으로 이끌었다. 바닥에 놓인 작은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다양한 텍스처의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 사포, 면직물, 고무, 나무, 금속. 모두 다른 표면을 가지고 있었다.

"매일 밤 10분씩. 각 표면을 손가락으로 반복해서 접촉한다. 뇌가 신경을 다시 깨우는 거야."

박수진이 한준호의 손가락을 사포 위에 올렸다. 천천히 문질렀다.

"뭔가 느껴?"

"따끔... 따끔합니다."

"그거다. 그 따끔함이 신경이 깨어나는 신호야."

박수진은 계속했다. 면직물로. 고무로. 나무로. 금속으로. 각 표면마다 한준호의 손가락은 천천히 반응하기 시작했다.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무언가 돌아오고 있었다. 아주 작은, 아주 미세한 신호들이 손끝에서 뇌로 전달되기 시작했다.

박수진이 한준호를 탁구대 앞에 세웠다.

"이제 공을 쳐. 하지만 속도를 내지 마. 느리게. 아주 천천히. 임팩트 순간에 손가락이 무엇을 느끼는지 집중해."

한준호가 공을 들었다. 던졌다. 라켓으로 천천히 쳤다.

공이 테이블에 떨어졌다. 튕겨 올랐다.

이번에는 한준호가 공을 받으려 했다. 손가락 끝이 공의 회전을 감지했다. 미세하지만 명확한 신호였다.

한준호의 라켓이 공을 받아냈다.

성공했다.

하지만 손가락의 떨림은 여전했다. 공을 받아낸 것은 우연에 가까웠다. 기술이 아니라 운이었다. 한준호의 입술이 굳어졌다. 한 번의 성공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박수진은 한준호의 얼굴을 읽었다.

"다시 해."

"네."

다시 던졌다. 다시 쳤다. 이번엔 놓쳤다.

"다시."

또 놓쳤다.

"다시."

한준호의 호흡이 빨라졌다. 한 번의 성공이 모든 걸 바꾸지 못했다. 대부분은 여전히 실패였다. 손가락은 여전히 신호를 제대로 보내지 못하고 있었다.

"멈춰."

박수진이 말했다.

"충분해. 오늘은 여기까지."

한준호가 고개를 들었다. 박수진의 눈은 차가웠다. 희망으로 가득 찬 눈이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는 눈이었다.

"지금 넌 70% 손실 상태야. 그 상태에서 공을 받아내는 것 자체가 기적이야. 하지만 기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넌 알지?"

"네."

"내일부터 매일 이 훈련을 한다. 아침 6시, 저녁 8시. 총 2시간. 절대로 빼먹지 말아."

"알겠습니다."

박수진이 탁구장의 불을 껐다.

"내일 아침 6시에 봐."

한준호는 혼자 남겨졌다. 검은 탁구장. 고요한 침묵. 그리고 손가락. 손가락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한준호는 손가락을 들었다. 손가락을 바라봤다.

"넌 회복되어야 해. 반드시."

손가락이 대답하지 않았다. 한 번의 성공도, 박수진의 말도, 이석우의 믿음도 손가락의 침묵을 깨뜨리지 못했다.

기숙소로 돌아가는 길, 한준호의 휴대폰이 울렸다. 미지의 번호였다. 한준호가 받았다.

"여보세요?"

"한준호 선수시죠?"

남성의 목소리였다. 중년의, 낮고 차분한 목소리.

"네, 그런데요?"

"저는 대한탁구연맹 국제대회 담당자입니다. 당신에 대한 보고를 받았어요."

한준호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네?"

"선발전 경기 결과를 봤습니다. 장민준 선수한테 2세트 연패. 상당히 부진하셨네요."

"죄송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미안하다는 말보다는, 다음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6개월 후 국제 대회 출전권을 재심사합니다. 그때까지 회복이 되지 않으면, 국가대표 자격은 박탈됩니다. 명확히 알고 있으세요?"

한준호의 입이 말라갔다.

"네... 알겠습니다."

"좋습니다. 화이팅 하세요."

전화가 끊어졌다.

한준호는 휴대폰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6개월. 1년이 아니라 6개월이었다. 그리고 그 6개월 안에 손가락은 회복되어야 했다. 박수진이 말한 희망의 시간이 아니라, 연맹이 부과한 심판의 시간이었다.

절망이 다시 밀려왔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절망과 함께 시간의 압박이 있었다. 6개월이라는 구체적인 기한. 그 기한 안에 손가락은 반드시 회복되어야 했다. 아니면 모든 게 끝났다.

한준호는 손가락을 다시 들었다. 손가락을 바라봤다. 손가락과 대화했다.

"6개월이야. 반드시 회복되어야 해. 아니면 끝이야."

손가락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떨림은 이제 두려움도, 기대도 아니었다. 절망과 시간 압박이 섞인 절박함이었다.

밤 1시, 한준호는 기숙소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눈을 감을 수 없었다. 뇌는 경기장으로 돌아가 있었다. 장민준과의 경기. 기억 속의 200번의 승리. 현실 속의 유일한 패배.

그리고 6개월 후.

침대 옆 책상 위에는 탁구 관련 잡지들이 쌓여 있었다. 한준호는 손을 뻗어 잡지 하나를 집어 들었다.

표지에는 왕리펑의 얼굴이 있었다. 중국의 에이스. 현재 세계 랭킹 2위. 한준호가 미래에서 만난 그 선수.

미래에서 한준호는 왕리펑을 이겼다.

하지만 지금은 손가락이 70% 손실된 상태였다. 왕리펑의 극도의 스피드 톱스핀. 그 회전을 손가락 없이 막아낼 수 있을까?

한준호는 잡지를 덮었다.

6개월. 정확히 6개월 안에 손가락을 회복시키고, 세계 최강자를 이겨야 했다.

손끝의 침묵은 이제 시간의 압박으로 변했다. 그 압박 속에서 손가락은 회복되어야 했다. 아니면 모든 게 끝이었다.

한준호의 눈이 감겼다. 내일 아침 6시. 박수진과의 첫 정식 훈련. 그리고 그 훈련의 끝에 있을 작은 성공들. 그것들이 모여 6개월 후 왕리펑 앞에 선 자신의 모습을 만들 것이었다.

손가락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이제 그 떨림은 기대도 두려움도 아니었다. 오직 절박함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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