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빛이 성벽을 스치고 지나갈 때, 이준호는 눈을 떴다.
통증이 먼저였다. 목이 타들어가는 듯했고, 손가락이 곱았으며, 등 전체가 경직되어 있었다. 침대도 아닌 딱딱한 돌 위에 누워 있었다. 눈을 떴을 때 하늘은 회색이었고, 그 위로 거대한 검은 형태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연기였다.
이준호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손이 떨렸다. 자신의 손이 아니었다. 더 크고, 더 거칠었으며, 손등에는 주름이 깊었다. 팔도 낯설었다. 가슴에 입혀 있는 것은 무거운 천이었고, 그 위로 금실로 수놓인 십자가가 반짝였다.
"폐하!"
목소리가 그를 깨웠다. 이준호는 고개를 돌렸다. 철투구를 쓴 남자가 무릎을 꿇었다. 검은 눈동자, 굳은 턱, 스스로를 억누르려는 듯한 어깨. 용병이었다. 생면부지의 용병.
"폐하, 대포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대포. 그 단어가 이준호의 귀에 닿았을 때, 세상이 돌기 시작했다. 멀리서 울리는 소리—아니, 그것은 천둥이 아니었다. 규칙적이고, 무거우며,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굉음. 폭발음. 그리고 그것이 울릴 때마다 성벽이 조금씩 떨렸다.
"일어나시오, 폐하."
용병이 손을 내밀었다. 이준호는 그것을 받았다. 일어서는 순간, 시야가 확대되었다.
성벽 위였다. 높이가 대략 12미터. 돌로 쌓은 벽체, 그 위에 설치된 목재 보루와 포진지. 그리고 벽 너머로 펼쳐진 것은 인간이 만든 풍경이 아니었다.
진이었다. 거대한 진. 천막이 수도 없이 박혀 있었고, 그 사이사이로 사람들이 움직였다. 말이 있었고, 소와 당나귀도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 것은 검은 총구들이었다. 대포. 수십 개. 아니, 백 개가 넘었다.
"저건 뭔가?"
이준호의 목소리가 낮았다. 그것은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더 깊고, 더 무겁고, 더 낡았다.
"오스만군입니다, 폐하."
용병이 대답했다.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 이준호는 몰랐다. 하지만 그 남자의 얼굴에서 무언가를 읽을 수 있었다. 절망. 그것을 억누르려는 노력. 그리고 그 노력이 실패하고 있다는 자각.
"얼마나?"
"21만입니다, 폐하."
21만.
이준호는 성벽 위에서 천천히 시선을 움직였다. 좌측으로 보니 또 다른 진영이 있었다. 우측으로 보니 그것도 마찬가지였다. 뒤를 돌아보니 바다였다. 금각만이었다. 그 바다도 검은 함선들로 점처럼 떠 있었다. 3면이 포위되어 있었다.
"우리는?"
"7천입니다, 폐하."
7천.
비율을 계산하는 데 1초가 채 걸리지 않았다. 1:30. 이준호는 엔지니어였다. 수치를 본능적으로 이해했다. 이것은 수학이 아니었다. 이것은 죽음의 공식이었다.
"5월 29일이 우리의 마지막입니다, 폐하."
용병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그 이상 버티기 어렵습니다. 보급로는 끊어졌고, 함대는 없습니다. 외부 지원은 절망적입니다. 성벽은 노후했으며, 병사들은 피로합니다."
이준호는 손을 들어 바라봤다. 황제의 손. 그런데 이것은 여전히 이준호의 손이었다. 피부의 질감, 손톱의 모양, 손가락 관절의 움직임.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몸은 무엇인가. 이 옷은 무엇인가. 이 책임은 무엇인가.
"폐하?"
용병이 다시 말했다.
"정신을 차리셔야 합니다.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항복할 것인가, 저항할 것인가?"
이준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그 남자의 얼굴에서 뭔가를 읽으려 했다. 신뢰할 수 있는 표정인가. 아니면 배신의 기미인가. 하지만 읽을 수 없었다. 이 시간, 이 장소, 이 상황에서 이준호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이름이?"
"조반니 유스티니아니 롱고입니다, 폐하."
유스티니아니. 제노바의 용병. 이준호는 뭔가를 기억했다. 아니, 기억한 것이 아니라 알고 있었다. 이 남자는 역사에 기록된 인물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의 마지막 방어전에서 성벽을 지킨 용병 장군. 그리고 그는 함락 직전에 죽었다.
"당신을 믿을 수 있습니까?"
"믿을 수 없다면 누구를 믿겠습니까, 폐하?"
대답이 대답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답이었다.
이준호는 성벽을 따라 걸었다. 유스티니아니가 뒤따랐다. 병사들이 성벽 위에 흩어져 있었다. 그들은 모두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죽음의 표정. 그것을 숨기려는 노력의 표정.
궁전으로 내려가는 길에, 이준호는 한 남자를 만났다. 보라색 예복을 입은 남자. 십자가를 목에 건 남자. 신부였다. 아니, 더 높은 직급이었다. 총대주교였다.
"황제 폐하."
그레고리우스 총대주교였다. 이준호는 알고 있었다.
"기술이 영혼을 구하지는 못합니다, 폐하."
노인의 목소리가 낮았다.
"이 도시는 육체가 아니라 영혼으로 지켜져야 합니다. 신앙 안에서만 우리는 살 수 있습니다. 기술은 우리를 기만할 뿐입니다."
이준호는 그를 보았다. 주름진 얼굴,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 신앙으로만 버티고 있는 몸. 이 남자는 진심이었다. 절대적인 진심.
"기술이 영혼을 구하지 못한다면, 기술은 무엇을 구합니까?"
"시간입니다, 폐하. 기술은 시간을 벌 수 있습니다."
"시간을 번다면 그것은 이미 구하는 것입니다."
총대주교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이준호는 궁전으로 들어갔다. 대리석 기둥, 모자이크 바닥, 천년의 문명이 축적된 공간. 하기아소피아 대성당이 저 너머에 있었다. 그 거대한 돔, 그 안에 모인 신앙. 그리고 그 모든 것이 5월 29일에 무너질 것이라는 확정. 이준호는 창문으로 다시 밖을 봤다.
오스만의 진영. 그 중앙에 하나의 천막이 있었다. 술탄의 천막. 메흐메드 2세. 21살의 청년 술탄. 그 청년이 이 거대한 진영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확신하고 있을 것이다. 5월 29일, 콘스탄티노플은 함락될 것이라고.
이준호는 손을 들었다. 다시 한 번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엔지니어의 손. 황제의 손. 두 개가 합쳐진 이 손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황제 폐하."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이준호는 고개를 돌렸다. 젊은 남자였다. 20대 중반. 철갑옷을 입었지만 그것은 용병의 것이 아니었다. 황족의 것이었다. 다비드 팔라이올로고스였다.
"상황을 보셨습니까, 폐하?"
"21만 대 7천."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벽이 있습니다. 그리고 폐하가 있습니다."
다비드의 눈이 반짝였다. 그것은 절망이 아니었다. 그것은 희망이었다. 기술에 대한 희망. 현대인 황제에 대한 희망.
"우리는 이길 수 있습니다, 폐하. 당신은 우리 황제입니다."
이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언가가 그의 뇌 안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계산. 기술. 설계. 현대의 엔지니어링 지식이 중세의 벽돌과 돌과 목재를 분석하고 있었다.
성벽으로 다시 나갔을 때, 오스만의 대포가 울렸다.
첫 번째 포탄은 성벽의 좌측 상단을 맞췄다. 돌이 부서졌다. 먼지가 피어올랐다. 비명이 들렸다. 병사 하나가 떨어져 나갔다.
"폐하, 우리는 3주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유스티니아니의 목소리가 절박했다.
하지만 이준호는 더 이상 듣지 않았다. 그의 눈이 성벽의 구조를 분석하고 있었다. 돌의 배치, 시멘트의 질감, 보강재의 위치. 그리고 그 모든 것 너머로, 뭔가가 떠올랐다. 화학식이었다. 불. 그리스 화염.
역사가 기록한 것. 천년 전의 비잔틴 제국이 만든 비밀 무기. 그것을 재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손가락이 저렸다. 가슴이 뛰었다.
"아니다."
이준호가 중얼거렸다.
"우리는 이길 수 있다."
그의 눈빛이 변했다. 절망이 사라졌다. 그 자리에 확정이 들어섰다. 현대인의 확정. 기술자의 확정. 황제의 확정.
유스티니아니가 그를 바라봤다. 뭔가가 그 용병의 얼굴을 지나갔다. 두려움인가. 아니면 희망인가. 아니면 그 둘을 구분할 수 없는 상태인가.
그 순간, 성벽이 다시 울렸다. 두 번째 포탄. 세 번째 포탄. 더 많은 먼지. 더 많은 비명. 더 많은 죽음.
하지만 이준호는 이미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유스티니아니가 다시 물었다.
"폐하, 당신이 보신 것이 무엇입니까?"
이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성벽의 석조 구조가 계속 그의 눈에 들어왔다. 테오도시우스가 만든 이중 벽. 외벽의 높이 12미터. 내벽의 높이 8.5미터. 그 사이의 공간. 돌 사이의 회반죽. 기술자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읽혔다.
그리고 떠올랐다. 화학식. 그리스 화염의 화학식.
"황제 폐하."
다비드가 다시 나타났다.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양피지였다. 지도였다. 성벽의 약한 지점들을 표시한 것이었다.
"총대주교께서 이것을 남기셨습니다. 성벽의 보수 기록입니다. 지난 50년간 어디가 손상되었고 어떻게 수리되었는지 적혀 있습니다."
이준호가 지도를 받아 들었다. 손이 떨렸다. 단순한 떨림이 아니었다. 전기 같은 것이 손가락 끝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곡창고는 어디인가?"
"동쪽 항구 근처, 폐하."
"목재 저장소는?"
"궁전 뒤편입니다."
이준호의 눈이 빠르게 움직였다. 마치 프로젝트 설계도를 보는 것처럼. 하지만 이것은 도시의 구조였다. 그리고 그 도시는 3주 안에 무너질 것이다. 그 무너짐을 지연시킬 수 있는 방법들이 그의 뇌 속에서 서로 연결되고 있었다.
"그리스 화염에 관한 기록이 있는가? 어떤 문헌이든 좋다."
다비드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일그러졌다.
"황제 폐하, 그리스 화염은... 천년 전 기술입니다. 지금 누가 그것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누군가는 만들어야 한다. 지금."
이준호의 목소리가 평탄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현대인의 효율성이 담겨 있었다. 문제가 있고, 해결책이 있다. 그 사이에는 시간이 있고, 그 시간을 채워야 한다. 간단했다.
"그리고 화약. 현재 저장된 화약이 얼마나 되는가?"
"200파운드, 폐하. 별로 많지 않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것을 개선할 수 있다면."
이준호가 성벽으로 돌아갔다. 돌 위에 서서 오스만의 진영을 바라봤다. 천막들. 불. 병사들. 그리고 그 중앙에 거대한 포들이 늘어서 있었다. 메흐메드의 새로운 포들. 유럽에서 고용한 대포 제작자들이 만든 것이라는 것을 이준호는 알고 있었다. 역사 기록에 그렇게 적혀 있었다.
그 포들을 막아내야 했다. 아니, 막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폐하."
유스티니아니가 옆에 섰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 상태였다.
"당신은 우리가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준호가 대답하기 전에, 또 다른 포탄이 성벽을 쳤다. 이번에는 좌측 중앙이었다. 더 깊은 손상. 돌이 가루처럼 부서졌다. 한 명의 병사가 신음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다른 병사들이 그를 끌어냈다. 다리가 부러져 있었다.
"3주입니다, 폐하. 최대 3주. 그 후에는..."
"그 후에는 없다."
이준호가 말했다.
"우리는 3주 안에 이겨야 한다."
"어떻게, 폐하?"
유스티니아니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것은 의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절망이었다. 30년을 군인으로 살아온 남자의 절망. 그는 확률을 알고 있었다. 7000 대 210000. 그 확률은 이미 죽음이었다.
"기술로. 그리고 의지로."
이준호가 손을 들었다. 다시 한 번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엔지니어의 손. 황제의 손. 그 손이 떨리고 있었다.
"성벽의 약한 지점들을 보강하게. 목재와 돌을 사용해서. 하지만 구조적 강도를 유지해야 한다. 포탄의 충격을 흡수할 수 있도록. 그리고 내부에는..."
이준호가 말을 멈췄다. 손가락이 저렸다. 가슴 속에서 뭔가가 타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불이었다. 그리스 화염의 불. 천년 전의 비밀 무기. 그것이 다시 타오르려고 하고 있었다.
"폐하?"
"내가 필요한 것을 가져오게. 황산, 석회, 나프타. 모든 것. 그리고 금속 용기들. 큰 것들. 그것을 성벽의 포탄 자국에 설치하겠다."
다비드가 놀라서 입을 벌렸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폐하?"
"과거다. 과거가 미래를 구할 것이다."
이준호의 눈이 반짝였다. 그것은 황제의 눈이 아니었다. 그것은 엔지니어의 눈이었다. 문제를 보는 눈. 해결책을 찾는 눈.
총대주교 그레고리우스가 성벽으로 올라왔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또 다른 포탄이 울렸고, 또 다른 병사가 죽었다.
"황제 폐하,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신의 뜻에 맡겨야 합니다."
이준호가 총대주교를 바라봤다.
"신의 뜻은 우리가 싸우는 것입니다, 총대주교."
"기술만으로는 영혼을 구할 수 없습니다, 폐하."
"하지만 몸은 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총대주교는 십자가를 긋고 돌아섰다.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기도하고 있었다.
이준호가 다시 성벽을 보았다. 포탄이 또 울렸다. 그리고 또 울렸다. 리듬처럼. 시계처럼.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5월 29일까지의 시간. 3주.
그 3주 안에 무엇이 가능한가?
이준호의 손이 떨렸다. 하지만 이제 그 떨림은 두려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가능성이었다. 엔지니어의 가능성. 역사 속의 기술. 과거가 미래를 구하는 방법.
"모든 병사를 소집하게. 즉시."
"폐하, 많은 병사들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상처를 입지 않은 모든 병사를 소집하게. 우리는 일해야 한다."
다비드가 달려갔다. 유스티니아니가 남았다. 그의 얼굴에는 뭔가가 있었다. 불신? 아니면 희망?
"당신은 정말 우리가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폐하?"
이준호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손을 들었다. 그 손이 저렸다.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우리가 싸울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싸움은 이미 이기는 것의 절반이다."
그것은 거짓이었다. 이준호는 알고 있었다. 21만 대 7000의 확률은 싸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죽음이었다. 하지만 죽음 전에 무엇이 가능한가? 그것이 문제였다.
그리고 그 문제에는 답이 있었다.
성벽 위에서 보이는 오스만의 진영이 점점 더 명확해졌다. 포들이 다시 울렸다. 또 다른 부분이 무너졌다. 또 다른 비명. 또 다른 죽음.
하지만 이준호는 이미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
역사. 천년의 역사. 그 안에 기록된 모든 기술들. 그것들이 그의 눈 앞에 떠올랐다. 그리스 화염. 화약. 석조 공학. 해전 전술. 모든 것이 거기에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손가락이 저렸다. 가슴이 뛰었다. 뭔가가 그의 뇌 안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현대인의 기술. 황제의 책임. 그 둘이 만나는 순간.
이준호는 성벽을 내려갔다. 다비드가 병사들을 모으고 있었다. 젊은 얼굴들. 절망한 얼굴들. 하지만 아직 죽지 않은 얼굴들.
"우리는 성벽을 다시 만들 것이다."
이준호가 그들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 성벽은 포탄을 막을 것이다."
한 명의 젊은 병사가 손을 들었다.
"황제 폐하,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우리는 돌과 시멘트만 가지고 있습니다."
이준호가 그 병사를 바라봤다. 그의 눈에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확정이었다.
"돌과 시멘트만으로도 충분하다. 그것과 기술이 있으면 된다."
그 순간, 이준호의 손가락 끝에서 불이 붙어올랐다. 작은 불. 그리스 화염의 불. 천년 전의 불. 그것이 그의 손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모든 병사들이 물러섰다. 총대주교 그레고리우스가 십자가를 긋기 시작했다.
"기적이다."
다비드가 중얼거렸다.
"기적이 아니다."
이준호가 말했다.
"과거다. 과거가 다시 깨어난 것이다."
그의 손에서 불이 꺼졌다. 하지만 그 불의 화학식은 여전히 그의 뇌에 남아 있었다. 완벽하게 남아 있었다. 황산과 석회, 나프타의 배합. 비율. 온도. 점화 방식. 모든 것이 명확했다.
그리고 그 순간, 무언가가 사라졌다.
이준호의 머리가 순간 아팠다. 가볍지 않은 통증. 마치 무언가가 두개골 안에서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것은 기억이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 어머니의 얼굴. 그 얼굴이 희미해졌다.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선명함이 떨어졌다. 마치 옛날 사진처럼. 색깔이 바래진 사진처럼. 이제 그 얼굴은 형태만 남았다. 표정은 사라졌다.
이준호가 손을 들었다. 그 손이 떨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가능성 때문이 아니었다.
두려움이었다.
"폐하, 당신은 괜찮으십니까?"
유스티니아니가 물었다.
"네. 괜찮습니다."
이준호가 대답했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이었다. 뭔가가 잘못되고 있었다. 능력을 사용할 때마다 무언가가 사라지고 있었다. 그것이 기억이라는 것을 그는 알 수 있었다. 기술을 재현할 때마다 그의 과거가 하나씩 사라져 가고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돌아갈 수 없었다. 5월 29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는 일해야 한다."
이준호가 말했다.
"지금 시작하자."
성벽이 다시 울렸다. 또 다른 포탄. 또 다른 부분이 무너졌다.
하지만 이준호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엔지니어의 움직임. 황제의 움직임. 현대와 과거가 만나는 움직임.
그의 손에서 다시 불이 붙어올랐다. 이번에는 더 크게. 더 밝게. 그리스 화염의 불. 손가락 끝에서 시작된 불이 손가락 전체로 퍼졌다. 황산의 냄새가 났다.
그리고 또 다른 기억이 사라졌다. 이번에는 대학 시절의 누군가의 얼굴. 그 얼굴이 희미해졌다. 이름도 함께.
이준호가 눈을 감았다. 하지만 손은 계속 움직였다.
성벽을 보강하기 위한 설계. 돌의 배치. 목재의 위치. 화약을 개선하기 위한 공식. 질산염의 비율. 그리스 화염을 제조하기 위한 방법. 금속 용기에 담긴 불이 어떻게 흐를 것인가.
모든 것이 그의 손에서, 그의 뇌에서 흘러나왔다. 마치 그것이 원래 거기에 있었던 것처럼.
그리고 모든 것이 대가를 요구했다.
기억. 하나씩.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이준호는 그것을 알았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왜냐하면 5월 29일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병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돌을 나르고, 목재를 자르고, 성벽의 약한 부분을 강화했다. 이준호의 지시는 명확했다. 각도, 거리, 강도. 모든 것이 계산되어 있었다.
"여기다. 이 지점에 금속 용기를 설치하게."
이준호가 성벽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포탄이 여러 번 맞은 곳이었다. 구멍이 뚫려 있었다.
"폐하, 저건 어디에 쓰이는 겁니까?"
한 명의 병사가 물었다.
"불을 담을 곳이다. 그리고 그 불은 적을 태울 것이다."
이준호의 목소리는 평탄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확정이 있었다.
유스티니아니가 그를 바라봤다. 그 용병의 얼굴에는 뭔가가 있었다. 경외. 그리고 두려움. 그것들이 섞여 있었다.
"폐하, 당신이 정말 이것을 할 수 있습니까?"
이준호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손을 들었다. 손가락이 저렸다. 가슴 속에서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성벽 위에서 밤이 내려왔다. 별들이 떠올랐다. 콘스탄티노플의 마지막 밤들 중 하나. 그리고 이준호는 여전히 일하고 있었다.
손가락이 저렸다. 가슴이 뛰었다. 뭔가가 자꾸만 사라지고 있었다.
하지만 기술은 남아 있었다. 과거의 기술. 역사 속의 지식. 그것들은 그의 손에 남아 있었다.
"황제 폐하, 당신은 휴식을 취해야 합니다."
다비드가 말했다.
"나중에."
이준호가 대답했다.
"지금은 시간이 없다."
포탄이 또 울렸다. 밤하늘을 가르는 불. 오스만의 대포는 밤낮 없이 울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준호는 계속 일했다.
손가락이 저렸다. 가슴이 뛰었다. 뭔가가 또 사라졌다.
이번에는 무엇인가?
그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중요했던 무언가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5월 29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이준호는 여전히 일해야 했다.
손가락이 저렸다. 가슴이 뛰었다.
"황제 폐하, 당신이 누구신지 기억하십니까?"
유스티니아니가 갑자기 물었다.
이준호는 그를 바라봤다. 그 질문이 왜 나왔는지 알 수 없었다.
"내일 아침, 당신은 자신의 이름을 잊을 수도 있습니다."
유스티니아니가 계속했다.
"그것을 알고 계십니까?"
이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기술을 재현할 때마다 뭔가가 사라지고 있었다. 기억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 성벽은 서 있어야 했다.
손가락이 저렸다. 가슴이 뛰었다.
그리고 이준호는 계속 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