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여덟째 날 아침

여덟째 날 아침, 은은은 눈을 뜨자마자 알았다. 이제 남은 시간이 이틀이라는 것을.

준호가 옆에 있었다. 해변 펜션의 테라스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햇빛이 그의 옆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어제보다 더 선명했다. 모든 것이 선명했다.

"깼어?" 준호가 물었다.

은은은 대답하지 않고 테라스로 나갔다. 발이 차가운 타일을 밟았다. 9월의 아침 공기가 피부에 닿았다. 콧속에 소금기가 들어왔다. 바다.

"오늘 어디 갈 거야?" 은은이 물었다.

준호가 커피잔을 내려놨다. 도자기가 도자기에 부딪치는 소리까지 들렸다. 은은은 깜짝 놀랐다. 감각이 너무 예민해졌다. 아니면 이것이 정상이었던 걸까.

"우리가 있던 곳들." 준호가 말했다. "다시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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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숲은 변하지 않았다.

은은과 준호는 어린 시절처럼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하지만 어릴 때와 다른 점이 있었다. 은은은 이 길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지금 은은은 그것을 채우려고 했다.

"여기서 뭘 했었지?" 은은이 물었다.

"숨바꼭지."

은은은 웃음이 나올 뻔했다. 그걸 기억하고 있다니. 준호는 항상 은은이를 찾지 못했다. 은은이는 같은 자리에 숨곤 했다. 큰 소나무 뿌리 사이에.

은은은 그 자리를 찾아갔다. 발이 자동으로 길을 기억하고 있었다.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소나무 뿌리 사이는 여전히 어두웠다. 흙냄새가 진했다. 은은은 웅크렸다. 준호가 뒤에서 그녀를 따라 웅크렸다.

"넌 여기 항상 있었어." 준호의 목소리가 작았다.

"응."

"왜?"

은은은 어린 시절의 자신을 떠올렸다. 아버지는 일하러 나가고, 어머니는 그 무렵 이미 아팠다. 은은이는 혼자였다. 항상 혼자였다. 그래서 숨었다. 누군가 자신을 찾을 때까지 이 어두운 곳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준호가 자신을 찾으면, 그제야 나왔다.

"혼자였어." 은은이 말했다. "여기에서 아무도 날 보지 못할 것 같아서."

준호의 손이 은은의 어깨에 닿았다. 따뜻했다.

"이제는?"

은은은 준호를 바라봤다. 어두운 소나무숲 속에서 준호의 얼굴이 보였다.

"이제는 여기서 나와도 될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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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은 파도 소리로 가득했다.

은은과 준호는 백사장에 앉았다. 어제 손을 잡았던 그 바위 옆에. 은은은 모래를 집어올렸다. 알갱이들이 손가락 사이로 떨어졌다. 차갑고 거칠었다.

"여기서 뭘 했었지?" 은은이 또 물었다.

"밥을 먹었어. 엄마가 주던 주먹밥."

은은은 기억했다. 준호의 어머니가 준비한 주먹밥. 그런데 은은이는 그걸 먹지 않았다. 그 시절 은은이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맛을 느끼지 못했다.

"난 안 먹었어."

"응. 넌 그냥 옆에 있었어. 내가 먹는 것만 봤어."

은은은 그 장면을 마주했다. 자신의 어린 모습이 보였다. 쭈그리고 앉아 있는 자신. 무표정한 얼굴. 준호가 밥을 먹는 것을 보고만 있는 자신. 그리고 준호는 그것을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은은이 그렇다는 것을. 아무도 묻지 않았다. 왜 먹지 않니, 맛이 없니, 싫니. 아무도 묻지 않았다.

은은의 눈에서 물이 맺혔다.

"뭔데?" 준호가 물었다.

"아무도 날 안 물었어. 왜 안 먹는지."

준호가 은은을 안았다. 은은의 몸이 준호의 가슴에 닿았다. 파도 소리가 더 가까워졌다. 또는 더 멀어졌다. 은은은 알 수 없었다.

"물어봐도 대답 안 했을걸." 준호가 말했다.

"그래도 물었어야 했어."

준호가 은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손길이 은은의 두피를 자극했다. 신경이 살아났다.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은은은 울었다. 9월의 해변에서, 준호의 팔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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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는 오후 3시에 도착했을 때 햇빛으로 반짝였다.

그들은 등대 계단을 올랐다. 나선형 계단이었다. 한 발, 한 발씩. 은은의 손이 난간을 짚었다. 차가운 철. 오래되어 녹슨 냄새가 났다.

등대 위에서 바라본 바다는 시원했다. 수평선이 명확했다. 저쪽에는 일본이 있을 것이다. 은은은 그런 생각을 했다. 어린 시절에는 이 바다가 끝이라고 생각했다.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곳. 그래서 이곳이 좋았다.

"여기서 뭘 했었지?" 은은이 세 번째로 물었다.

준호가 웃음을 흘렸다.

"계속 같은 질문 하네."

"대답해 봐."

"여기서는... 그냥 있었어. 아무것도 안 하고."

은은은 그 말을 되풀이했다. 아무것도 안 하고. 그것도 감정이었을까.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것. 바다를 보는 것. 준호와 함께 있는 것.

은은의 손이 떨렸다.

준호가 그것을 보았다.

"손이 떨려?"

"응."

"추워?"

"아니."

은은은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손가락이 떨렸다. 신경이 과민해졌다. 또는 신경이 깨어났다. 뇌에만 갇혀 있던 감정이 손끝까지 흘러내려오고 있었다. 그 흐름 속에서 은은은 자신의 몸을 다시 만났다.

준호가 은은의 손을 잡았다. 떨리는 손을. 그의 손은 따뜻했다. 떨림이 멈추지는 않았지만,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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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6시, 은은의 아버지가 카페에 있었다.

준호는 없었다. 아버지와 딸이 혼자 마주앉기 위해 준호는 나갔다. 은은은 그것이 고마웠고 두려웠다.

서영준은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찬 커피. 얼음이 떠 있었다. 그의 얼굴은 피곤해 보였다. 은은은 그제야 깨달았다. 아버지도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앉아." 서영준이 말했다.

은은은 앉았다.

"요즘 어때?"

은은은 대답을 생각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괜찮아."

"준호가 잘 챙겨 주나?"

"응."

서영준이 커피잔을 내려놨다. 그 손이 떨렸다. 아버지의 손도 떨렸다. 은은은 그것을 봤다.

"너... 엄마 생각 많이 나니?"

은은의 가슴이 철렁했다. 아버지가 어머니에 대해 말한 것은 처음이었다.

"응."

"미안해. 내가... 너를 잘 봐주지 못해서."

서영준의 목소리가 작았다.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엄마 없이 너를 키우면서... 너도 힘들 거 알았어. 근데 나도 너무 힘들어서. 너한테 손을 내밀지 못했어."

은은의 눈이 맺혔다.

"나도 혼자였어. 아빠. 아빠가 보이지 않았어."

서영준의 얼굴이 흔들렸다. 그는 일어섰다. 은은도 일어났다. 아버지의 팔이 은은을 감쌌다.

옷깃 냄새가 났다. 세제 냄새. 아버지가 매일 입는 옷의 냄새. 은은은 어릴 때 아버지의 옷깃에 얼굴을 묻고 있던 자신의 기억을 되찾았다.

아버지의 손이 은은의 등을 쓸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아버지도 떨리고 있었다. 감정으로.

아버지의 턱이 은은의 머리 위에 닿았다. 거칠었다. 수염이 돋아 있었다. 아버지의 눈물이 은은의 머리에 떨어졌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은은은 아버지를 더 세게 안았다. 이 온기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카페의 시계가 6시 23분을 가리켰다. 은은은 시간을 재고 있었다. 마지막 날까지 남은 시간. 그리고 그 이후.

펜션으로 돌아가는 길에 은은은 준호에게 말했다.

"아빠가 나한테 손을 내밀었어."

준호가 은은의 손을 잡았다.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 손의 힘이 모든 것을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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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0시, 의사 임혜영이 카페에 들어왔다.

은은은 그녀를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준호가 부른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안녕, 은." 임혜영이 앉았다. "넌 잘 있어?"

"응."

"진심으로?"

은은은 잠깐 생각했다.

"응. 진심으로."

임혜영이 웃었다.

"좋아. 그럼 이제 말해 줄 게 있어. 넌 이제 혼자서도 감정을 느낄 수 있어."

"뭔 소리야?"

"준호가 없어도. 혼자여도. 넌 이미 감정의 신경을 깨웠어. 그것들을 다시 끌 수 없어."

은은은 그 말을 곱씹었다. 혼자여도 감정을 느낀다는 것. 그것이 자유라는 뜻일까, 아니면 더 깊은 고독이라는 뜻일까.

"그런데..." 은은이 말했다. "혼자면 이 감정들이 작아질까?"

임혜영이 은은의 손을 잡았다.

"음악을 생각해 봐. 혼자 음악을 들으면 슬픔이 작아져. 하지만 누군가와 함께 들으면 그 슬픔이 공유되고 더 깊어져. 둘 다 정상이야. 넌 어느 쪽을 원해?"

은은은 임혜영의 말을 되씹었다. 슬픔이 작아지는 것과 깊어지는 것. 혼자의 감정과 함께의 감정.

"그게 선택이라고?"

"그래. 감정은 필요한 게 아니라 선택이야. 넌 이제 감정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거야. 혼자일 때 더 작게, 누군가와 함께할 때 더 크게. 그것도 다 너의 선택이야. 넌 이제 자유야."

자유. 그 단어가 은은의 가슴에 무게로 내려앉았다. 자유는 곧 선택이었고, 선택은 책임을 의미했다. 준호를 선택할 수도, 혼자를 선택할 수도 있다는 것. 그 둘 다 가능하다는 것.

"만약..." 은은이 천천히 말했다. "만약 내가 준호를 선택하지 않으면?"

임혜영의 손이 더 세게 은은의 손을 잡았다.

"그것도 너의 선택이야. 하지만 선택한다는 건, 그 결과를 감당한다는 뜻이야."

은은의 목이 메었다. 결과를 감당한다는 것. 준호를 놓친다는 것. 이 온기를 다시 느끼지 못한다는 것. 그런데 혼자여도 감정을 느낄 수 있다면, 그 고통도 혼자 감당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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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1시, 온음 카페.

모두가 나가고 준호와 은은만 남았다. 테이블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어제와 다르게, 오래된 사진들도 없었다.

"내일이 마지막 날이야." 은은이 말했다.

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움직임이 느렸다. 마치 마지막을 세는 것처럼.

"그 다음은?"

"뭐가?"

"우리."

준호가 커피잔을 만지작거렸다. 손가락이 잔의 테두리를 따라 움직였다.

"그건 넌 스스로 정해야 해."

"뭐?"

"너가 어디에 있고 싶은지. 서울로 돌아갈 거야? 여기 있을 거야? 아니면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어. 난 모르겠어. 넌 뭘 원해?"

은은의 숨이 멎었다. 서울. 그곳은 자신이 살던 곳이었다. 준호가 없는 곳. 은은은 그것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여기 있을 거야." 준호가 말했다. "언제든. 하지만 넌 선택해야 해."

"약속이야?"

"그건 넌 스스로 정해야 해."

준호의 말이 은은을 관통했다. 약속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준호는 자신을 무조건 기다려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더 정확히는 자신이 준호를 선택해야 그 약속이 성립한다는 뜻이었다.

테이블 아래로 손을 뻗었다. 준호의 손을 찾았다. 준호의 손가락이 은은의 손가락을 감쌌다. 그 감촉이 현실이었다. 이 순간이 현실이었다.

"절대 손을 놓지 말아 줄래?" 은은이 물었다.

준호가 은은의 눈을 마주했다. 그 눈빛이 흔들렸다.

"그건... 넌 스스로 정해야 해. 내가 손을 놓지 않는다고 해서, 넌 자유를 포기하는 건 아닐까? 나와 함께 있으면서도, 혼자일 때와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걸 잊게 되는 건 아닐까?"

은은의 가슴이 철렁했다. 준호의 말이 맞았다. 자신은 준호의 손을 원했지만, 그것이 자신의 선택인지 준호에 대한 의존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럼... 넌 내 손을 놓을 거야?" 은은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니. 난 여기 있을 거야. 하지만 넌 내 손을 잡을지 말지 스스로 정해야 해. 매일. 내일도, 모레도, 그 다음 날도. 그게 진정한 선택이야."

은은은 준호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손가락이 준호의 손등에 파고들었다. 그 압력이 은은을 현실로 고정시켰다. 하지만 그것이 선택인지 의존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카페의 벽시계가 자정을 향해 움직였다. 밤 11시 52분. 열흘째 날까지 남은 시간은 12시간.

준호가 테이블 위로 손을 올렸다. 은은의 손 위에서 천천히 움직였다. 마치 무언가를 확인하듯이. 손가락이 그려내는 궤적이 마지막이 될 수도, 시작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아침에 뭘 할 거야?" 준호가 물었다.

"모르겠어."

"짐을 챙겨야 하지 않을까?"

은은의 몸이 경직됐다. 짐. 그 단어가 현실을 깨웠다. 열흘의 약속이 끝나면 자신은 떠나야 한다. 서울로. 아니면 여기로 남아야 한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서울행 버스는 내일 오후 2시야." 준호가 계속했다. "표는 내가 끊어 놨어."

은은의 호흡이 빨라졌다. 준호가 이미 표를 끊었다는 뜻이었다. 자신이 선택할 시간을 주되, 선택의 결과는 자신이 감당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왜... 벌써?"

"넌 선택해야 하니까. 타거나 타지 않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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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1시 58분, 펜션의 객실.

은은의 짐은 코너에 놓여 있었다. 도착했을 때의 가방. 아직 완전히 풀리지 않은 채로.

"짐 챙기자." 준호가 말했다.

은은은 움직이지 않았다. 짐을 챙긴다는 것은 떠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같았다. 아직 그럴 준비가 되지 않았다.

준호가 가방을 열었다. 은은의 옷들이 보였다. 서울에서 입던 옷들. 회사 정장, 청바지, 흰 티셔츠. 모두 낯설어 보였다.

"이건 서울에서 샀어?" 준호가 손에 들었던 검은 정장을 집어 들며 물었다. "여기서 샀어?"

"서울에서."

"그럼 이건?" 준호가 또 다른 옷을 집어 들었다. 은은이 여기 와서 입던 하얀 셔츠였다.

"여기서... 내가 샀어."

준호가 두 옷을 나란히 펼쳐 놨다. 검은 정장과 하얀 셔츠. 서울의 은은과 여기의 은은. 두 개의 선택지가 눈앞에 놓여 있었다.

"이 옷들 중에 뭘 가져갈 거야?" 준호가 물었다.

은은은 대답하지 못했다.

준호가 계속했다. "다 가져갈 수도 있고, 검은 정장만 가져갈 수도 있고, 하얀 셔츠만 가져갈 수도 있어. 그것도 선택이야."

준호가 손을 뻗어 은은의 사진 앨범을 꺼냈다. 여행 중에 찍은 사진들이었다. 소나무숲에서, 해변에서, 등대에서. 은은과 준호가 함께 있는 사진들.

"이 사진들은?" 준호가 물었다. "다 가져갈 거야? 일부만? 아니면 하나도?"

은은의 손이 떨렸다. 준호는 물건 하나하나를 집어들며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 추상적인 선택이 아니라 구체적인, 손에 잡히는 선택을.

준호가 작은 상자를 꺼냈다. 은은이 어린 시절 준호와 수집했던 조개껍데기들이 들어 있었다. 조개껍데기, 돌멩이, 그리고 준호가 준 편지 한 장.

"이건?" 준호가 편지를 들었다. "이것도 가져갈 거야?"

은은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 편지는 열 살 때 준호가 준 것이었다. 내용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손글씨는 생생했다.

"난... 모르겠어."

준호가 편지를 은은의 손에 쥐어 줬다. 은은은 그것을 들었다. 얇은 종이. 손에 닿는 감촉이 현실이었다.

"이건 준호를 선택하는 거야, 아니면 과거를 선택하는 거야?" 은은이 중얼거렸다.

"둘 다 아니야." 준호가 말했다. "이건 너 자신을 선택하는 거야. 어떤 은은이 되고 싶은지."

은은은 편지를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손가락이 종이를 만지고 있었다. 그 접촉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 같았다.

준호가 다시 옷을 집어 들었다. 검은 정장과 하얀 셔츠를 번갈아 들었다.

"서울의 은은? 여기의 은은? 아니면 둘 다?"

은은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짐 정리는 계속됐다. 준호가 집어 드는 물건마다, 은은은 선택해야 했다. 가져갈지, 놓을지. 그 하나하나가 자신의 미래를 결정하고 있었다.

밤이 깊어갔다. 자정이 넘었다. 펜션의 객실에서 은은은 밤새 짐을 정리했다. 준호는 옆에서 물건 하나하나를 집어들며 물었다. 이건? 이건? 이건?

은은은 선택했다. 어떤 것은 가져가기로, 어떤 것은 남기기로.

그리고 마지막에, 은은은 조개껍데기 상자를 들었다. 그 안에는 열 살 때의 추억이 들어 있었다. 준호와의 추억이.

은은은 상자를 열었다. 편지를 다시 펼쳤다. 손글씨로 쓰인 글귀가 보였다.

'은은아, 넌 언제나 내 곁에 있어도 돼. 준호가.'

은은의 손이 멈췄다. 그 문장이 모든 것을 말하고 있었다. 준호는 자신이 곁에 있기를 원했다. 그런데 그것이 자신의 선택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은은은 편지를 다시 상자에 넣었다. 그리고 상자를 가방에 넣기로 결정했다.

그 순간, 은은은 알았다.

이건 준호를 선택하는 거야, 아니면 과거를 선택하는 거야?

아니다. 이건 자신을 선택하는 것이었다. 준호와 함께 있기로 선택한 자신을. 그 선택의 무게를 감당하기로 선택한 자신을.

밤은 계속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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