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한계 너머

밤 11시 47분. 응급실 회의실의 모니터는 2번 침대의 환자를 비추고 있었다. 50대 여성, 이미영. 흙빛으로 변한 피부, 부풀어 오른 복부, 손가락 끝의 경미한 경직. 이준호는 휠체어에 앉아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박재민이 옆에 앉았다. "계속 보고만 있을 거야?"

"증상이 맞지 않아." 이준호의 목소리는 모래주머니를 끌어당기는 듯했다. "바이러스성 간염이 아니야. 독성 간염도 아니고. 대사성 질환인데... 개별적으로는 설명이 안 돼."

그가 말을 멈추자 박재민은 기다렸다. 침묵이 3초, 5초, 10초를 넘었다.

"뭐가 생각났니?"

"조선 시대 기억이야." 이준호가 천천히 말했다. "우리 마을에 그런 증상의 환자가 있었어. 쥐나 새를 다룬 사람들이 걸렸는데... 현대 의학에는 없는 병이야."

박재민의 얼굴이 굳었다. "그게 무슨..."

"모르겠어." 이준호가 손을 들어 올렸다. 손이 떨렸다. "진단할 수 있는데 치료할 수 없는 거야. 그게 이번엔 달라. 지금까지는 진단하면 뭔가라도 할 수 있었어. 약이든 수술이든. 그런데 이건..."

휠체어의 손잡이를 쥐는 그의 손이 하얀 자국을 남겼다.

회의실 문이 열렸다. 이화영이 들어왔고, 뒤이어 최준혁이 따라왔다. 김정수 정교사는 응급실에서 환자 상태를 확인 중이었다.

"검사 결과 나왔어." 이화영이 태블릿을 펼쳤다. 화면에는 생화학 검사 수치들이 떠올랐다. 혈청 암모니아 수치 정상의 3배, 락테이트 수치 상승, 피루베이트 수치 비정상. "미토콘드리아 기능 부전 마커들이 전부 양성이야."

"그럼 진단은?" 최준혁이 물었다.

"미토콘드리아 DNA 의존성 신경근육병증." 이준호가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평탄했지만 턱이 경직되어 있었다. "다기관 신경퇴행. 근위축, 망막 퇴화, 청력 손실, 심장 전도 이상. 진행성이고..."

"치료법이 없어." 이화영이 마무리했다.

침묵. 응급실 밖에서 들려오는 심박 모니터의 비프음만이 계속되었다.

최준혁이 천천히 앉았다. "그 환자는 몇 살이지?"

"38세."

"아내와 아이가?"

"아내는 45세. 고등학교 다니는 딸이 있어." 이화영이 차트를 넘겼다. "환자 본인도 최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회사 다녔대. 지난달부터 손이 떨리기 시작했고, 일주일 전부터 시력이 흐릿해졌고..."

"그리고 이제 진단받았어." 이준호가 끝을 맺었다. "치료할 수 없는 진단을."

박재민이 일어섰다. "그렇다고 포기하는 거야?"

"포기가 아니라 현실이야." 이준호가 박재민을 바라봤다. 눈이 말을 하고 있었다. '넌 모르겠지만 나는 이미 이 환자를 떠나보낸 거야. 조선 시대에 한 번, 지금 한 번 더.' "우리는 이 환자를 진단했어. 하지만 치료할 수 없어. 이게 의학의 현실이야."

이화영이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그녀의 논리적 두뇌도 이 벽 앞에서 균형을 잃고 있었다.

최준혁이 천천히 이준호를 바라봤다. 50년 이상 수천 명의 환자를 봐온 그의 눈빛이 변했다. 그건 동정이 아니었다. 인정이었다.

"하지만 넌 이미 다음 단계를 생각하고 있지?"

이준호가 고개를 들었다.

"뭐가?"

"..." 이준호가 입술을 깨물었다. "모르겠어."

최준혁이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내가 10년 전 너 같은 상황에 처한 적이 있어. 그땐 내가 막혔어. 진단하고 나서 할 수 있는 게 없었거든. 그때 나는 뭘 했냐면... 계속 묻는 거야. '그럼 이제 뭘 할 수 있을까?'라고. 그리고 그 질문을 던진 환자들이 나한테 답을 줬어."

"어떤 답요?"

"넌 곧 만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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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시 32분. 응급실 대기실.

이준호는 휠체어에서 내려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다. 뇌척수액 누출로 인한 두통은 여전했지만, 그보다 더 무거운 것이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의료진의 안내에 따라 회의실로 들어간 환자의 아내 정미라는 이준호를 보자마자 고개를 들었다.

"이준호 의사님이죠?" 그녀의 목소리는 쉰 목이었다. 밤새 운 흔적이 목에 남아 있었다.

"네, 안녕하세요."

"우리 남편... 뭔 병이에요?" 그녀의 손이 떨렸다. "한 달 전부터 계속 병원 다녔는데 아무도 못 찾았어요. 이번에야..."

이준호가 의자를 당겼다. 앉으려던 순간, 최준혁이 옆에 자리를 잡았다. 박재민도 따라 들어왔다.

"미토콘드리아 기능 부전에 따른 신경근육 퇴행성 질환입니다." 이준호가 천천히 말했다.

정미라의 얼굴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눈은 이미 눈물로 가득 차 있었다.

"치료법이 없다는 뜻이죠?"

침묵이 흘렀다. 이준호는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의사의 직업 때문이 아니라, 지금 이 여자의 눈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 때문이었다. 그것은 300년 전 조선의 궁 안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왕비의 눈이었다. 진단은 했지만 치료할 수 없는 그 무력함.

"네. 현재 의학으로는..."

"하지만 우리는 계속 시도할 것입니다."

이준호가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듣고 놀랐다. 그건 자신의 목소리였지만 자신이 아닌 누군가의 결정 같았다. 조선 시대 이준이 환자의 아내에게 했던 말이 현대에서 반복되고 있었다.

정미라가 눈을 떴다. "뭐라고요?"

"우리가 당신의 남편을 치료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 시도할 것입니다."

이준호는 모니터 쪽을 향했다. 남편의 심박 수치가 규칙적으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산소포화도 94%. 뇌척수액 압력 정상. 모든 수치가 말하고 있었다. 이 남자는 더 이상 '원인 불명'이 아니라는 것을.

정미라의 입술이 떨렸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해요."

이준호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것은 분노의 눈물도, 절망의 눈물도 아니었다. 그것은 명확한 깨달음의 눈물이었다.

박재민이 이준호의 옆에 앉았다. "넌 이미 많은 환자를 도왔어. 그리고 이제 넌 더 큰 질문을 할 준비가 됐어."

"뭐... 뭐가?"

"어떻게 치료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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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3시 14분. 병원 회의실.

모니터에는 최신 의학 논문들이 떠올랐다. 미토콘드리아 질환에 대한 유전자 치료 임상시험. 스위스 취리히대학 연구팀. 미국 FDA 승인 단계.

이화영이 마우스를 움직였다. "이 프로토콜이라면 우리 환자한테 적용할 수 있을 것 같아. 물론 임상시험 단계지만, 현재 표준 치료가 없다는 점에서..."

"병원 윤리위원회에 제출해야 해." 김정수 정교사가 들어왔다. 시간이 시간이지만 그의 얼굴은 집중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박용석 과장도 설득해야 하고, 행정부도 통과시켜야 해. 하지만 가능해."

이준호가 화면을 바라봤다. 논문의 저자는 스위스인이었다. 그의 이름은 어디서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이 치료법을 한국에 들여오고, 이 환자에게 적용하고, 결과를 기록하고, 다시 세계에 보내는 것.

300년 전 조선의 의관 이준은 혼자였다. 그래서 죽었다.

지금의 의관 이준호는 혼자가 아니었다.

"우리가 할 수 있을까요?" 이준호가 물었다.

"할 수 있어." 김정수가 대답했다. "그리고 넌 이제 의사를 넘어 의학 연구자가 될 차례야. 그 과정에서 넌 또 다른 한계를 마주할 거야. 그때 넌 또 다시 성장할 거고. 그리고 언젠가는 그 한계를 넘어설 거야. 혼자가 아니면서."

이준호는 김정수 정교사를 바라봤다. 그의 눈 속에는 20년 전 자신의 눈빛이 있었다. 젊은 의사의 눈빛. 하지만 그것은 이미 팀의 일부가 된 눈빛이었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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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5시 12분. 병원 지하 1층 표본실.

이준호는 지팡이를 짚고 계단을 내려왔다. 뒤따르는 발자국은 박재민의 것뿐이었다. 표본실의 형광등은 차갑게 울렸고, 유리 케이스 속 장기 모형들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까지 올 거 같았어." 박재민이 옆에 섰다.

이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능력을 사용한 후의 후유증이 아니었다. 이것은 다른 종류의 떨림이었다.

"미토콘드리아 기능 부전에 따른 다기관 신경퇴행." 이준호가 중얼거렸다. "내가 진단했어. 정확하게. 세 시간 안에 스위스 프로토콜까지 찾아냈고, 이화영은 이미 우리 환자에게 적용 가능한지 검토 중이야."

"그래, 넌 잘했어."

"그런데..." 이준호가 돌아섰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내가 진단한 질환은 현재 의학으로 완치 불가능해. 장기 관리와 증상 완화뿐이야. 스위스 프로토콜도 실험 단계야. 성공률이 47%야."

"그래도 0%보다는 낫지 않냐."

"53%의 환자는 죽어." 이준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내가 그 가족에게 뭐라고 말해? '당신의 남편을 치료할 수 없습니다. 대신 어쩌면 죽을 수도 있는 실험에 참여해보세요'라고? 그게 의학이야?"

박재민은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 이준호의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현실적이었다.

"진단이 치료는 아니야. 넌 이미 알잖아. 환자의 아내가 뭐라고 했어?"

이준호는 눈을 감았다. 정미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해요.'*

"그게 진짜 의학의 시작이야." 박재민이 계속했다. "진단에서 멈추는 게 아니라, 진단 이후의 가능성을 찾는 거. 그리고 그 가능성이 비록 47%라도, 그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 그게 희망이고, 그게 의학이야. 넌 혼자가 아니야. 이화영은 스위스 팀과 컨택하고 있고, 최준혁은 윤리위원회 통과 전략을 짜고 있고, 김정수 교수는 이미 병원장과 통화했어."

박재민의 얼굴이 웃음으로 일그러졌다. 그것은 농담이 아니었다. 그것은 증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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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6시 34분. 병원 회의실.

이화영의 노트북 화면에는 화상 통화 창이 떠 있었다. 스위스 취리히대학 유전자 치료 연구실. 화면 너머 Dr. Müller의 얼굴이 보였다. 그의 표정은 집중으로 가득했다.

"환자의 생화학 검사 데이터를 받았습니다." 이화영이 영어로 말했다. 화면에는 환자의 혈청 암모니아 수치, 락테이트 수치, 피루베이트 수치가 표시되었다. "미토콘드리아 기능 부전의 마커들이 전부 양성입니다."

Dr. Müller가 자신의 자료를 확인했다. "이것은 우리 프로토콜의 적용 대상입니다. 하지만 유전자 검사 결과는?"

"현재 진행 중입니다. 24시간 안에 완료될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 데이터를 받으면 우리는 48시간 안에 예비 평가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Dr. Müller가 화면을 통해 이화영을 바라봤다. "이 진단을 한 사람이 의대생이라고 들었는데요?"

"네. 하지만 이 진단은 팀의 확정 진단입니다. 신경영상의학적 검증, 생화학적 검사, 유전자 검사 결과 모두 일치합니다."

Dr. Müller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흥미롭네요. 우리도 그런 인재들이 필요합니다. 이 임상시험이 성공하면, 당신의 팀이 우리와 함께 Phase 2b 연구를 진행할 수 있을까요?"

이화영은 순간 말을 잃었다. 그것은 단순한 협력 제안이 아니었다. 그것은 국제적 의료 연구의 중심에 서울대 대학병원을 초대하는 것이었다.

"네,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을 정리하겠습니다. 당신은 유전자 검사 데이터와 신경영상의학 자료를 보내세요. 우리는 그것을 분석해서 48시간 안에 피드백을 드리겠습니다. 그 사이 당신은 환자와 가족의 동의를 얻고, 윤리위원회 승인을 받으세요. 우리 프로토콜은 2주 안에 시작할 수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Dr. Lee..." Dr. Müller가 화면을 통해 직접 이화영을 바라봤다. "당신의 환자는 운이 좋습니다. 이런 팀을 만났으니까요. 우리는 많은 환자를 봤지만, 이렇게 빠르게 움직이는 팀은 드뭅니다."

통화가 끝났다. 이화영은 화면을 바라봤다. 그 속에는 자신의 얼굴이 비쳐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젊은 의사'의 얼굴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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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7시 58분. 중환자실.

이준호는 정미라를 마주했다. 그녀는 의자에 앉아 있었고, 남편의 침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니터들이 규칙적으로 울렸다. 심박수 68. 혈산소포화도 94%. 뇌척수액 압력 정상. 약물 투여량 안정.

"어제는 고마워요." 정미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준호는 그 옆에 앉았다. 지팡이를 내려놨다. 손가락 끝이 저렸다. 뇌척수액 누출의 신호였다. 월 3회 제한. 남은 횟수는 1회뿐이었다.

"정미라님, 제가 드릴 수 있는 제안이 있어요." 이준호가 천천히 말했다. "당신의 남편은 미토콘드리아 기능 부전으로 인한 다기관 신경퇴행을 앓고 있어요. 현재 한국의 표준 치료는 증상 완화뿐입니다. 하지만 스위스에서 진행 중인 임상시험이 있어요. 유전자 치료 기반의 프로토콜인데, 초기 결과가 긍정적입니다."

"그게... 완치가 되나요?"

이준호는 정직해야 했다. 그것이 의학이었다.

"아니에요. 하지만 질병의 진행을 멈추거나 늦출 수 있어요. 그리고 이 임상시험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의료 발전에 기여하는 것입니다."

정미라는 말없이 남편의 가슴이 천천히 올라갔다 내려가는 것을 바라봤다. 기계가 아닌 그의 폐로 호흡하고 있었다. 심박수는 규칙적이었다. 혈산소포화도는 정상 범위였다. 모든 수치가 안정되어 있었다.

"참여하고 싶어요." 정미라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당신이 우리를 포기하지 않았으니까요. 우리도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그녀가 이준호를 바라봤다. "당신이 우리 남편을 찾아줬어요.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감사해요. 이제 우리도 다른 환자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하고 싶어요."

이준호의 목이 메었다. 그것은 환자의 감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의료의 철학적 전환점이었다. 진단에서 치료로. 개인의 치료에서 인류의 치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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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9시 22분. 병원 행정부.

김정수 정교사는 신미래 과장 앞에 앉아 있었다. 신미래의 책상 위에는 이미 파일들이 쌓여 있었다. 의료 윤리위원회 신청서. 임상시험 프로토콜. 스위스 취리히대학 승인서. 그리고 이준호의 초진단 기록.

"이건 또 뭐예요?" 신미래가 물었다. 그녀의 얼굴은 경직되어 있었다. "의대생의 초진단이 또 다시 법적 문제를 만드는 건 아닐까 걱정되네요."

"그게 아니라 의학 발전의 기회예요." 김정수가 대답했다. "이준호의 진단은 정확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스위스 팀과의 협력이 시작되는 거예요. 이건 서울대 대학병원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일이야."

"하지만 법적 책임은?"

"명확해요." 김정수가 파일을 펼쳤다. "초진단은 이준호의 개인 의견이 아니라 팀의 진단입니다. 기록은 제 이름으로 되고, 법적 책임은 저와 이화영, 그리고 최준혁 교수가 모두 공동으로 지는 거예요. 의대생의 권한 문제는 없습니다."

신미래는 파일을 들었다. 모든 것이 정확했다. 법적 허점이 없었다.

"그리고..." 김정수가 계속했다. "이 임상시험이 성공하면, 서울대 대학병원은 미토콘드리아 질환 분야의 세계적 거점이 될 거예요. 그건 병원의 위상일 뿐만 아니라, 한국 의료의 위상이에요."

신미래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 너머 서울의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수천 개의 병원 침대에서 깨어나는 환자들. 그리고 그들을 기다리는 의료진들.

"윤리위원회 검토를 요청하세요." 신미래가 말했다. "그리고 이번엔 박용석 과장도 참석시켜야 할 것 같네요."

"예상했어요." 김정수가 웃음을 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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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 15분. 윤리위원회 회의실.

이준호는 증인석에 앉아 있었다. 앞의 책상에는 7명의 위원들이 앉아 있었다. 의료 윤리학자. 법률 전문가. 신경학과 교수. 그리고 박용석 과장.

"이 임상시험의 성공률이 47%라고 했는데, 그럼 53%의 환자는 어떻게 되나요?" 법률 전문가가 물었다.

"데이터 분석이 필요합니다." 이준호가 대답했다. "실패한 환자들의 유전 정보, 대사 패널, 신경영상의학 데이터를 수집해서 다음 세대의 치료법을 개발하는 데 사용됩니다."

"즉, 이 환자는 치료 대상이 아니라 연구 대상이라는 말인가요?"

이준호는 정직해야 했다.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현재 표준 치료가 없는 질환에 대해 유일한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환자의 참여가 다음 환자들을 구할 수 있습니다."

박용석 과장이 손을 들었다. "그렇다면 이 의대생의 초진단이 임상시험의 기초가 되는 건가요? 검증되지 않은 진단이 기초가 되는 건 의료 법규상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성공률이 47%라는 것은 곧 실패율이 53%라는 뜻입니다. 환자의 생명이 위험에 처할 수 있는데, 그것을 윤리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습니까?"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최준혁이 뒤에서 일어섰다. "이 진단은 검증되었습니다. 신경영상의학적 데이터, 생화학적 검사 결과, 유전자 검사 결과에 의해 모두 확인되었습니다. 의대생의 초진단이 아니라 팀의 확정 진단입니다. 그리고 박용석 과장, 당신도 알고 있을 겁니다. 현재 이 질환에 대한 표준 치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증상 완화만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53%의 실패율을 감수하고라도 47%의 성공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 환자에게 더 큰 희망을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의료 윤리의 기본입니다."

박용석의 손이 투표 용지 위에 멈춰 있었다. 그의 입술이 움직였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는 최준혁의 논리를 반박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항복도 하지 않았다.

의장이 침묵을 깼다. "투표를 진행하겠습니다. 찬성하시는 분?"

6명의 손이 올라왔다. 박용석의 손은 올라오지 않았다.

"반대하시는 분?"

박용석의 손이 천천히 올라왔다.

6대 1. 찬성이 우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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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4시 42분. 병원 지하 2층 유전자 분석실.

이화영은 기계 앞에 서 있었다. DNA 시퀀서가 작동하고 있었다. 정미라의 남편의 유전 정보가 한 줄씩 화면에 올라오고 있었다. ACGT의 무한 반복. 그 속에는 모든 비밀이 숨어 있었다.

이준호가 옆에 섰다.

"48시간이 남았어?" 이준호가 물었다.

"42시간." 이화영이 대답했다. "이 기계는 24시간 안에 1차 데이터를 완성할 거야. 그 다음엔 신경영상의학 데이터를 취합하고, 대사 패널을 분석하고, 모든 걸 스위스 팀 포맷으로 변환해야 해."

"그럼 못 할 수도 있어."

이화영이 돌아섰다. 그녀의 눈빛이 변했다. "다르게 할 거야." 그녀가 휴대폰을 들었다. "팀원들을 호출해. 야간 작업을 시작할 거야. 24시간 교대제로. 넌 스위스 팀과 연락을 유지해. 우리의 진행 상황을 실시간으로 업데이트하고,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이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율자. 그것은 새로운 역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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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1시 58분. 병원 옥상.

이준호는 다시 난간 앞에 섰다. 이번엔 팀 전체가 함께였다. 박재민, 이화영, 최준혁, 그리고 김정수 정교사.

"좋은 밤이네." 최준혁이 이준호 옆에 섰다.

"네."

"이제 우리의 진짜 일이 시작돼." 김정수가 말했다. "진단할 수 없는 질환들을 찾아내고, 치료법을 만드는 거야. 그리고 이준호, 넌 그 여정의 중심이 될 거야."

이준호는 웃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른 종류의 웃음이었다. 확신의 웃음. 아직 두려움은 있었지만, 그것이 혼자의 두려움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 우리가 함께라면."

서울의 야경이 발아래 펼쳐졌다. 한강의 불빛이 흔들렸다. 강남의 빌딩들이 하나둘 꺼져갔다. 하지만 병원의 불빛은 꺼지지 않았다. 그곳에선 밤을 지새우는 의료진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기다리는 환자들이 있었다.

이준호의 휴대폰이 울렸다. 스위스 취리히대학. Dr. Müller였다.

메시지는 짧았다.

*"We received your complete data package. Preliminary assessment: patient is eligible for Phase 2b trial. Genetic profile matches our inclusion criteria. We can proceed with treatment protocol within 2 weeks. Your patient has a real chance. We look forward to collaboration. —Müller"*

이준호는 팀을 바라봤다. 모두가 화면을 보고 있었다.

"2주 안에 시작할 수 있다고 했어?" 이화영이 물었다.

"네."

"그럼 우리도 2주 안에 모든 준비를 끝내야 해." 김정수가 말했다. "병원장과 다시 만나고, 윤리위원회 최종 승인을 받고, 환자와 가족에게 설명하고, 동의서를 받아야 해."

"할 수 있어?" 박재민이 이준호에게 물었다.

이준호는 밤하늘을 봤다. 별들이 떠 있었다. 조선 시대 명의 이준도 이 밤하늘 아래에서 별을 봤을까. 그리고 자신이 300년 뒤에 같은 이름으로 돌아올 거라는 걸 알았을까.

"할 수 있어." 이준호가 대답했다.

"어떻게?"

"함께라면."

카메라가 하늘로 올라갔다. 서울의 야경이 축소되었다. 한강이 보였다. 그 너머 경기도의 산들. 그리고 다시 올라가면, 별들. 수천, 수만 개의 별들이 밤하늘을 밝히고 있었다.

각각의 별 아래에는 또 다른 밤이 있었다. 또 다른 병원. 또 다른 환자들. 그리고 또 다른 의료진들.

이준호의 여정은 이제 시작이었다.

1부가 닫혔다.

2부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

그 너머에는 더 큰 난제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더 복잡한 질환들. 더 깊은 윤리적 갈등들. 그리고 더 강한 대립들.

하지만 이준호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팀이 있었다.

그리고 그 팀은 계속 커지고 있었다.

이전화목차마지막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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