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해부학 실습실의 형광등은 회백색이었다. 시신 앞에 선 이준호는 포르말린 냄새를 들이마시며 절개된 흉강을 내려다봤다. 의대 3학년 처음 맞는 실제 시신. 교과서와 달리 시간이 지난 조직은 건조하고 변색되어 있었다.
"이 시신은 1823년 역모 누명으로 능지처참당한 죄수입니다."
교수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울렸다. 이준호는 핀셋을 내려놓고 시신의 복부에 더 가까워졌다. 비장의 크기가 비정상적이었다. 간의 경계 부분에는 검게 응고된 자국이 남아 있었다. 패혈증의 흔적인가? 아니다. 그 패턴은 다르다.
손가락이 떨렸다.
이준호의 눈이 변했다. 시신의 조직이 더 이상 교재의 도판으로 보이지 않았다. 맥동하는 감각이 손끝에서 울렸다. 살아있는 혈관을 만지는 착각. 그 순간, 뇌 뒤쪽에서 무언가 터졌다.
—오염된 혈액이다.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자신의 목소리인데 아닌 목소리. 조선 시대 관복을 입은 손이 자신의 손 위에 겹쳤다.
—패혈증이 아니다. 독성 쇼크다. 독약이 섞인 음식을 먹은 후 신체 방어 체계가 과도하게 반응했다. 간이 먼저 괴사하고, 비장이 비대해졌다. 죽기 전 이틀간 극심한 고열과 경련이 있었을 것이다.
시신의 조직이 살아난다. 300년 전 그 사람의 마지막 며칠이 이 고정된 조직에 기록되어 있다. 이준호는 그것을 읽고 있었다. 손가락을 따라 머리 속에서 해석이 흘러나왔다.
"이 시신, 혹시..."
이준호의 입이 움직였다.
"이 시신이 정말 역모로 죽었나요?"
실습실이 고요해졌다. 옆에 서 있던 박재민이 이준호를 바라봤다. 교수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화면을 켰다.
"좋은 질문입니다. 공식 기록으로는 역모죄입니다. 하지만 해부 기록을 보면... 독살의 흔적이 있습니다. 조선 시대 의관들도 이를 기록해뒀죠. 아마도 역모 누명을 쓰고 독약으로 죽임을 당했을 겁니다."
이준호의 손이 떨렸다. 더 이상 떨지 말아야 했다. 실습실의 온도가 급격히 내려간 것처럼 느껴졌다. 그의 눈이 흐려졌다. 시신의 조직이 물결치듯 흔들렸다.
"아, 준호?"
박재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다음은 없었다.
***
응급실 천장이 회전했다. 이준호의 눈이 떠졌다.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옆에는 응급 의료진의 기계음이 울리고 있었다.
"의식 회복. 바이탈 정상입니다."
누군가의 목소리. 이준호는 천천히 일어나려 했다.
"움직이지 마세요. 실습 중 기절했다고 해서 옮겨진 거예요. 뇌 스캔도 정상이고, 혈액 검사도 이상없습니다. 저혈당 때문일 수 있으니 포도당을 드시고 한두 시간 더 쉬세요."
이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포도당 점적이 팔에 흐르고 있었다. 머리는 여전히 무거웠다. 하지만 그것은 깨어난 무거움이 아니었다. 뭔가 남아있는 무거움이었다.
박재민은 실습을 마치고 와서 침대 옆에 앉았다.
"미쳤냐고. 하필 해부 실습에서 기절하다니. 실습실 냄새가 심해서 그런 거겠지?"
이준호는 박재민을 바라봤다. 말을 해야 했다. 방금 전에 일어난 일을 누군가에게 말해야 했다. 그런데 말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준호, 뭔가... 이상한 거 있어? 얼굴이 좀 이상한데."
박재민의 눈이 이준호를 탐색했다. 뭔가 더 물으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 질문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박재민은 입을 다물고 이준호의 손을 잡았다.
"실습이 힘든 거겠지. 첫 시신이니까. 괜찮아.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져. 우린 의사가 되는 거니까."
이준호는 박재민의 손을 느꼈다. 따뜻했다. 현실적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경험한 것은 합리의 범위 밖이었다. 300년 전 손가락의 감촉이 자신의 손끝에 남아 있었다. 독살당한 조선 명의의 기억이 자신의 뇌에서 울렸다.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고마워."
이준호가 말했다. 박재민은 웃었다.
"뭐하는 소리야. 친구지."
밤이 내려앉았다. 응급실의 모니터들이 계속 울렸다. 이준호는 아직도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의료진들이 와서 한두 번 확인했고, 이제는 혼자 있었다.
그때였다. 복도에서 119 구급차의 사이렌 음이 울렸다.
"응급 환자 입실! 71세 남성, 급성 복부 통증, 혈압 저하!"
응급실 입구가 열렸다. 침대가 빠르게 들어왔다. 의료진들이 동시에 움직였다. 이준호는 침대에서 일어나지 말아야 했다. 박재민의 말이 맞다. 혼자 판단하면 안 된다. 절차를 따라야 한다.
그런데 환자의 얼굴을 본 순간, 뭔가가 울렸다.
손끝이 울렸다.
이준호는 침대에서 몸을 반쯤 일으켰다. 환자의 복부를 보고 있었다. 의료진들이 옷을 걷어 올렸다. 복부는 심하게 팽창되어 있었다. 청색증의 흔적이 좌측 옆구리에 있었다. 호흡이 얕고 빠르다. 의료진이 복부를 눌렀을 때 환자가 극도로 고통스러워하며 움찔했다.
—장기 천공이다.
누군가의 목소리. 자신의 목소리. 조선의 말투로 진단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전형적인 천공이 아니다. 혈액이 복강에 고여 있고, 소장의 일부가 괴사하고 있다. 혈류 차단. 혈관 응고. 시간이 없다.
이준호의 눈이 환자의 신체를 읽고 있었다. 의료진은 초음파를 준비하고 있었다. CT를 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준호는 이미 알고 있었다.
말해야 한다.
하지만 말하면 안 된다.
자신은 의대 3학년이다. 관찰만 하기로 했다. 절차를 따라야 한다. 그런데 이 환자는 이대로라면 30분 안에 죽을 것이다.
이준호의 손이 떨렸다. 머리가 아팠다.
"선생님. 잠깐."
이준호가 침대에서 내려왔다. 가장 가까운 의료진이 돌아봤다.
"환자분... 혈관 응고 때문에 소장 괴사가 진행 중입니다. 지금 즉시 수술이 필요합니다."
의료진의 눈이 이준호를 바라봤다. 의대생이었다. 관찰 대상이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확신이 있었다.
"어? 뭐가 근거인데?"
"복부 색깔, 호흡 패턴, 청색증의 위치... 이건 단순 천공이 아닙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이준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은 더 이상 자신의 말이 아니었다. 조선의 명의가 현대 의료진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얼굴은 의대 3학년 학생의 얼굴이었다.
의료진은 망설였다. 하지만 환자의 상태는 악화되고 있었다. 선임 의사에게 전화가 들어갔다.
"네, 의대생이 혈관 응고로 인한 소장 괴사를 의심한다고 합니다. 네... 네, 바로 CT 없이 수술을 준비하겠습니다."
결정이 내려졌다. 환자는 수술실로 옮겨졌다.
그 순간, 극심한 두통이 왔다.
이준호는 침대에 다시 누웠다. 뇌 뒤쪽부터 시작된 통증이 관자놀이를 타고 퍼져나갔다. 시각이 왜곡되기 시작했다. 형광등의 불빛이 일렁거렸고, 응급실의 소리가 멀어졌다가 가까워졌다 반복되었다. 신경 다발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었다.
뇌척수액이 누출되고 있다. 신경세포들이 손상되고 있다. 조선 시대의 감각과 현대의 의학 지식이 뇌 안에서 격렬하게 충돌하고 있었다. 두개강 내 압력이 상승하고, 신경 조직이 압박당하고 있었다.
응급실의 천장이 흔들렸다. 의료진들이 이준호를 다시 검사했다. 바이탈은 여전히 정상이었다. 뇌 스캔 결과도 정상이었다. 하지만 이준호는 죽을 것 같은 고통 속에서 의식을 잃어 가고 있었다.
창밖을 통해 서울의 야경이 보였다. 대학병원 수술실 쪽 건물의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응급 수술이 시작되었다는 신호였다.
이준호의 의식이 희미해졌다. 그 마지막 순간, 자신의 진단이 맞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의 진단이 틀렸기를 바라고 있었다. 왜냐하면 진단이 맞다는 것은 자신이 절차를 위반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
아침 6시. 이준호는 응급실의 침대에서 깼다. 머리는 여전히 아팠지만, 어제의 극심함은 없었다. 포도당 점적은 이미 제거되어 있었다.
의료진이 와서 말했다.
"어제 밤에 수술받은 환자. 소장 괴사가 맞았어요. 당신 진단이 맞았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당신이 의대생이라고 하니까 깜짝 놀랐어요. 잘 살아나갔어요."
이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단이 맞았다. 환자는 살았다. 하지만 그 대가는 무엇인가?
오후 2시. 박용석 과장이 응급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준호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박용석의 얼굴은 복잡했다. 그는 이준호 앞에 서서 말했다.
"이준호 군. 당신의 진단 능력은 뛰어납니다. 하지만 이것을 명심하세요. 절차 없는 진단은 의료 사고입니다. 당신이 틀렸다면? 환자가 죽었다면? 그 책임은 누가 집니까?"
이준호는 침묵했다.
"앞으로는 반드시 상급 의사의 승인을 받고 진단을 하겠다고 약속할 수 있겠습니까?"
이준호의 입이 열렸다가 다시 닫혔다. 약속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감각은 자신의 의지로 통제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 노력하겠습니다."
이준호의 대답은 약속이 아니었다. 박용석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눈이 좁혀졌다.
"그 정도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의료 윤리 위원회에 보고하겠습니다. 절차 위반으로."
박용석의 말에 응급실이 고요해졌다. 주변 의료진들이 눈을 돌렸다. 절차 위반. 그것은 의대생의 경력에 심각한 낙인을 의미했다.
"하지만 환자가 살았습니다."
이준호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위험합니다. 다음에는 틀릴 수도 있다는 뜻이니까요."
박용석이 돌아서려는 순간, 응급실 모니터에서 또 다른 환자의 신호가 울렸다.
이준호의 손끝이 울렸다.
응급실 문이 열렸다. 70대 여성이 담당 간호사와 함께 들어왔다. 호흡이 얕았다. 손가락 끝이 창백했다. 보호자가 외쳤다.
"어제부터 배가 아프다고 했는데 어디 가도 원인을 못 찾았어요!"
담당 의사가 초음파 기계를 꺼냈다. 박용석은 여전히 이준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준호의 손끝이 울렸다. 그것을 자신도 느꼈다.
아니다. 멈춰야 한다. 박용석의 말이 아직 귓가에 맴돌고 있었다. 절차 없는 진단은 의료 사고다. 윤리 위원회. 경력에 낙인.
이준호는 침대 옆으로 다리를 내렸다. 여전히 어지러웠지만 일어났다. 손끝의 울림은 계속되고 있었다. 환자의 신음이 들렸다.
"배가... 너무 아파요..."
이준호는 한 발, 두 발 환자에게 다가갔다. 손끝이 울렸다. 그것은 명령이었다. 진단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입은 닫혀 있었다. 말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성이 목구멍을 죄고 있었다. 환자가 죽는다는 직관이 손끝을 떨게 했다. 초 단위로 충돌하는 신경 신호들. 뇌간의 반사 회로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담당 의사가 초음파를 시작했다. 화면에 간과 담낭이 나타났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원인이 안 보여요. CT를 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30분이 걸릴 겁니다."
박용석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의 눈은 이준호를 향해 있었다. 시험이었다. 기득권을 지키려는 의도와 환자를 살리려는 본능 사이에서 박용석 자신도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절차를 고수해야 했다. 절차가 무너지면 의료 체계 전체가 무너진다. 그것이 박용석의 신념이었다.
환자의 신음이 더 커졌다.
"선생님... 아... 안 돼..."
담당 의사가 환자의 손을 잡았다.
"조금만 참으세요. CT 준비 중입니다."
이준호는 침대 옆에 서 있었다. 움직이지 않았다. 말하지 않았다. 손끝은 계속 울렸다. 그것은 비명이었다. 환자의 복부는 극도로 팽창되어 있었다. 호흡이 더 얕아지고 있었다. 시간이 없다는 신호들이 모든 곳에서 울리고 있었다.
박재민이 응급실로 들어왔다. 의료진들 사이를 헤쳐 나와 이준호를 봤다.
"준호, 너 괜찮아? 어제 밤 수술 환자 있었대. 네 진단이 맞았다고."
이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박재민은 이준호의 얼굴을 자세히 봤다.
"뭐야, 기분 안 좋아?"
박재민의 시선이 환자에게로 옮겨갔다. 그리고 다시 이준호에게로 돌아왔다. 그는 이준호의 떨리는 손을 봤다.
"준호, 이 환자도 넌 뭔가 느껴?"
침묵. 그것이 대답이었다.
"팀의학이라는 게 뭔지 알아? 혼자 판단하는 게 아니라 함께 고민하는 거야. 넌 뭔가 느껴도, 상급의한테 얘기하고, 그들이 판단하게 하는 거지. 그게 절차야. 신뢰 위에서 의료가 작동하는 거야."
박재민의 목소리가 이준호의 신경을 타고 흘렀다. 그 말은 맞았다. 절차와 신뢰. 의료의 기본이었다. 하지만 환자는 지금 이 순간에도 죽어가고 있었다. 진단과 윤리 사이에서 이준호는 찢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환자가..."
"환자가 고통받는 건 맞아. 하지만 30분이면 금방이야. 그 사이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진통제 투여, 수액 관리, 그런 것들을 하는 거고. 너는 관찰하고, 상급의한테 네 의견을 말하는 거야."
박용석이 박재민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박재민의 말은 옳았지만, 동시에 이준호의 직관도 무시할 수 없었다. 기득권 보호와 환자 안전 사이의 갈등. 박용석은 그 갈등을 느끼고 있었지만, 의료 체계의 질서를 먼저 선택해야 했다.
"박재민 학생. 맞습니다."
박용석이 말했다.
"팀의학의 기본은 신뢰입니다. 당신은 상급의를 신뢰하고, 상급의는 당신의 관찰을 신뢰합니다. 그 신뢰 위에서만 의료가 작동합니다."
박용석은 이준호를 바라봤다.
"당신은 신뢰를 건너뛰고 있습니다."
이준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손끝이 계속 울렸다. 환자의 신음이 계속됐다. 그 신음이 이준호의 뇌를 자극했다. 말해야 한다. 지금 말해야 한다. 하지만 말할 수 없다. 말하면 안 된다. 말하면 낙인이다. 말하지 않으면 죽음이다. 의사로서의 책임과 의대생으로서의 현실 사이에서 이준호는 무너지고 있었다.
입을 열려 했다. 목이 조여왔다. 말하고 싶은 것과 말해서는 안 될 것이 목구멍에서 격렬하게 부딪혔다. 손가락이 경련을 일으켰다. 마치 누군가 다른 손이 자신의 손을 움직이려고 하는 것처럼.
"CT 준비됐습니다."
의료진이 환자를 옮기려 했다. 그 순간, 환자의 호흡이 더 얕아졌다.
"혈압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담당 의사가 외쳤다.
"산소 포화도 89%!"
환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입술이 푸르스름해졌다. 죽음의 신호들이 모두 나타났다. 이준호의 눈이 환자의 얼굴로 향했다. 눈 주변의 미세한 부종. 입술의 창백함. 손가락 끝의 청색증. 그리고 복부의 극도의 긴장.
"담낭염입니다."
이준호가 말했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멈췄다.
담당 의사가 이준호를 봤다.
"뭐라고?"
"만성 담낭염에서 급성 천공. 복강 내 담즙 유출. 국소화되지 않은 복막염입니다. 지금 바로 수술하지 않으면 패혈성 쇼크에 빠집니다."
담당 의사의 손이 초음파 화면에 멈췄다. 화면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눈을 크게 떴다.
"담낭벽이... 두꺼워 있네요. 그리고 주변에... 액체가..."
박용석은 이준호를 바라봤다. 그 시선 속에는 여러 감정이 섞여 있었다. 의료진의 신뢰를 지키려는 의도. 환자를 살리려는 본능. 그리고 이준호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 박용석은 그 갈등을 느꼈지만, 이 순간만큼은 의료진의 신뢰보다 환자의 생명이 우선이었다.
"수술 준비하세요. 지금 당장."
박용석이 명령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그 명령 속에는 자신의 원칙을 깨뜨리는 고통이 담겨 있었다.
환자는 수술실로 옮겨졌다. 이준호는 침대에 다시 누웠다.
극심한 두통이 왔다.
이번에는 시각 왜곡이 더 심했다. 형광등이 분해되는 것처럼 보였다. 응급실의 소리가 이상하게 울렸다. 마치 물속에 있는 것처럼. 신경 손상이 누적되고 있다는 신호였다. 뇌척수액의 누출이 가속화되고 있었다. 뇌 뒤쪽의 통증이 점점 심해졌다. 마치 누군가 뇌 조직을 직접 만지는 듯한 감각. 신경세포들이 압박당하고 손상되고 있었다. 조선 시대의 감각과 현대의 의학 지식이 뇌 안에서 격렬하게 충돌하고 있었다.
박재민이 이준호의 옆에 앉았다.
"준호, 힘내. 진단이 맞으면 환자가 산다."
"맞으면..."
이준호는 박재민을 봤다. 시각이 흔들렸다.
"만약 틀렸으면?"
박재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답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었다.
응급실의 모니터에서 수술실의 신호가 울렸다.
"환자 복강 내 담즙 및 괴사 조직 발견. 담낭 천공 확인."
이준호의 눈이 감겼다. 진단이 맞았다.
하지만 극심한 두통은 계속됐다. 이제는 청각도 변했다. 응급실의 모든 소리가 울림으로 변했다. 신경 손상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 손상의 원인이 무엇인지 이준호는 알고 있었다. 두 번의 진단. 두 번의 절차 위반. 그리고 두 번의 성공. 신체는 그 대가를 청구하고 있었다.
밤 9시. 이준호는 여전히 응급실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포도당 점적이 팔에 꽂혀 있었다. 신경과 의사가 와서 검사했다.
"뇌 스캔 정상입니다. 혈액 검사도 정상. 바이탈도 정상. 스트레스성 두통으로 보입니다."
스트레스성 두통. 이준호는 웃음이 나올 뻔했다. 그것은 진단이 아니었다. 그것은 포기였다.
신경과 의사가 나가고, 응급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창밖의 야경이 보였다. 서울의 불빛들이 깜빡이고 있었다. 그 불빛들 중 두 개가 더 환하게 켜져 있었다. 대학병원 수술실 쪽 건물이었다.
그곳에서 71세 남성과 70대 여성은 살고 있었다.
그리고 이준호는 침대 위에서 두통과 싸우고 있었다.
***
아침 8시. 이준호는 응급실을 나왔다. 두통은 여전했지만 견딜 수 있는 수준이 되어 있었다. 의료진이 퇴실을 승인했다.
복도를 걸어가는데, 김정수 정교사가 나타났다. 그의 얼굴은 심각했다.
"이준호, 사무실로 가자."
이준호는 따라갔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김정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이준호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 시선 속에는 무언가 알고 있다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김정수의 사무실은 대학병원 5층 구석에 있었다. 벽에는 희귀질환 관련 논문들이 붙어 있었다. 책장에는 의학 서적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한 권의 낡은 책이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조선 시대의 한의학 문헌 사본이었다.
"이 책을 알아?"
이준호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거짓이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 책을 보는 순간 손끝이 울렸다. 뇌 뒤쪽에서 무언가 인식하려 했다.
김정수가 책을 펼쳤다. 황색으로 변한 페이지들이 나타났다. 그 위에는 한문으로 된 진단 기록들이 적혀 있었다.
"이것은 조선 중기 명의 이준의 임상 기록이야. 300년 전의 의학 기록이지."
이준호의 손이 떨렸다.
"여기 보면, 동궁 치료 기록이 있어. 맥진만으로 '심화로 인한 양혈 역류'를 진단했어. 그리고 약 처방으로 치료했어. 지금 기준으로는 설명 불가능한 진단이야."
김정수는 페이지를 넘겼다. 그 다음 장에는 '능지처참당한 명의 이준의 최후 진단'이라는 제목이 있었다.
"여기 있어. '독약으로 인한 독성 쇼크. 간 괴사. 비장 비대.' 이건 당시 의학 수준으로는 불가능한 진단이야. 왜냐하면 이준은 이 진단을 자신의 시신에 대해 내렸거든. 자신이 독살당할 것을 알고, 자신의 신체 변화를 기록한 거야."
김정수의 눈이 이준호를 바라봤다. 그 눈 속에는 확신이 있었다.
"너는 어제 밤 첫 번째 환자를 어떻게 진단했어?"
"그냥... 보이는 대로..."
"보이는 대로? 초음파에도 안 보인 것을?"
이준호는 침묵했다.
"그리고 오늘 두 번째 환자도 마찬가지지?"
"네."
이준호의 목소리는 작았다.
"이 책을 읽어봐."
김정수는 책장에서 또 다른 책을 꺼냈다. 그 책의 표지에는 '이준 명의의 생애'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책 한 구석에는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다.
이준호는 초상화를 보는 순간 멈췄다. 그것은 자신의 얼굴이었다. 정확히는 자신의 얼굴이 아니라 자신과 닮은 누군가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닮음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것은 필연이었다.
"이 사람을 본 적 있어?"
이준호는 초상화를 바라봤다. 손끝이 울렸다. 그것은 비명이었다. 형광등이 분해되기 시작했다. 응급실의 소리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뇌 뒤쪽이 찢어졌다.
초상화 속의 눈이 자신의 눈과 같았다.
그 눈에는 300년의 시간이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