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기억 없는 아침, 그리고 비극적 해피엔딩

침전의 창문 너머로 새벽 햇빛이 밀려들었다. 창문틀을 따라 고운 먼지가 춤을 추고 있었다. 하린은 눈을 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모든 것이 보였으나 아무것도 인식되지 않았다. 천장의 붉은 비단, 옆에 누운 남자의 얼굴, 자신의 손—모두 낯설었다. 마치 처음 보는 풍경들이었다.

하린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 순간 옆의 남자가 눈을 떴다. 검은 눈동자가 하린을 마주했다. 아무 감정도 없는 듯 보이는 그 눈이, 하린이 깨어난 것을 확인하는 순간 무언가 녹아내렸다.

"당신은... 누구세요?"

하린의 입에서 나온 말이 자신의 것이 아닌 듯했다. 목이 메인 상태였고, 목소리는 깨진 자기그릇 같았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도 모르는 것 같았다. 누가 자신을 여기에 두었는지, 왜 이곳에 있는지—모두 흐릿했다.

라윤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침대 위에서 그가 하린을 바라보는 모습은 마치 깨진 도자기를 보는 수집가의 그것 같았다. 조심스럽고, 절박하고, 무언가 중요한 것을 손으로 만지는 듯한 조심성이 있었다.

"나는 라윤이다."

그 말은 선언이었다.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을 정의하는 황제의 첫 말처럼 들렸다.

"그리고 넌 여기 있는 사람이다."

간단한 문장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는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이름도 없고, 과거도 없고, 정체도 불명확한 하린을 '여기 있는 사람'이라고 정의하는 것—그것이 이제 하린의 존재의 전부였다.

하린은 라윤을 바라봤다. 자신이 왜 이 사람을 보면 가슴이 아픈지 알 수 없었다. 기억은 없었으나 신체는 기억하고 있었다. 이 사람 곁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이 사람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저는... 누구예요?"

"날 조종하려던 여자였고, 날 사랑하게 된 여자였고, 이제는 내 것인 여자다."

라윤의 대답은 정확했다. 그러나 하린에게는 그 말들의 의미가 닿지 않았다. 조종? 사랑? 그런 단어들은 마치 다른 언어처럼 들렸다. 남은 것은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내 것'—그 표현 안에서 하린은 자신의 존재를 느꼈다.

라윤은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의 움직임은 어색했다. 보통 황제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마치 처음 걷는 아이처럼 조심스럽고, 불안정했다. 그는 침전의 작은 부엌으로 향했다.

하린은 그를 따랐다. 다리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오랫동안 누워만 있었던 것처럼. 실제로 그럴 수도 있었다. 시간의 감각이 없었으니까.

부엌에서 라윤은 멈춰 섰다. 냄비를 들었다. 손이 떨렸다. 황제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는 물을 붓고, 재료를 집었다. 서툰 손짓으로. 마치 처음 요리하는 사람처럼.

"뭘 하고 계세요?"

"밥을 만든다."

간단한 대답이었으나, 그 과정은 그렇지 않았다. 라윤의 손가락들이 재료를 자르고, 냄비에 담고, 휘저었다. 모든 움직임이 어색했고, 부정확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지했다. 마치 국가를 통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을 하는 듯한 표정으로.

얼마나 지났을까. 라윤이 그릇에 흰 죽을 담았다. 보기에는 평범한 죽이었다. 하지만 그 죽이 끓어오르는 과정에서 무언가가 스며들어 있었다. 라윤의 불안한 손가락들이, 그의 떨리는 숨결이, 자신이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절망적인 확신이.

"먹어라."

하린은 숟가락을 집었다. 죽을 떠서 입에 넣었다.

그 순간, 세상이 바뀌었다.

기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린은 여전히 자신이 누구인지 몰랐다. 어디서 왔는지도, 무엇을 잃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맛 속에는 모든 것이 있었다. 그리움이 있었다. 누군가를 원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 누군가가 자신을 잡아두고 싶어 하는 절실함이 있었다.

눈물이 흘렀다. 하린 자신도 놀랐다. 자신이 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처럼.

"이 맛은... 그리운 맛이에요."

하린의 목소리는 부서진 종처럼 울렸다. 라윤은 하린의 얼굴을 봤다. 그의 눈 안에는 광기와 절망이 뒤섞여 있었다. 자신이 만든 것이 맞는지, 자신의 손이 그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은 건 아닌지 확인하려는 듯한 필사적인 표정.

"넌 기억하지 못한다."

라윤이 말했다.

"하지만 이 맛은 기억한다. 넌 나를 잊어도, 이 맛은 나를 기억하게 해줄 거다."

그리고 라윤은 하린을 안았다. 마치 그녀를 놓치면 영원히 사라져버릴 것 같은 힘으로.

---

정오가 되었을 때, 송미래는 침전 앞에서 멈춰 섰다. 백의관이 문 앞에 서 있었고, 그는 송미래를 막지 않았다. 대신 그저 슬픈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을 뿐이었다.

침전 안으로 들어간 송미래는 하린을 봤다. 침대 옆에 앉아 있는 여자가, 과연 자신이 알던 하린이 맞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하린?"

송미래의 목소리는 떨렸다. 그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그 얼굴은 하린이었다. 하지만 눈은 다른 사람의 눈이었다. 마치 새로 태어난 아이의 눈처럼.

"넌... 누구니?"

하린의 대답이 송미래의 가슴을 무너뜨렸다. 송미래는 무릎을 꿇었다. 침전의 차가운 돌 위에서.

"내 친구가 없어졌다."

송미래는 중얼거렸다. 그 중얼거림은 슬픔이었고, 분노였고, 무력함이었다. 자신의 친구가 눈 앞에 있는데도 그 친구를 잃어버렸다는 것—그 역설이 송미래를 짓눌렀다.

라윤이 송미래 앞에 섰다. 황제 라윤이, 한 여자 앞에서.

"그녀는 여기 있다."

라윤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마치 자신의 소유물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송미래는 고개를 들고 라윤을 바라봤다. 그 눈 안에서 송미래는 광기를 봤다. 사랑과 구분 불가능한 광기를.

"그녀는 내 식관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녀의 모든 것이다."

---

조정의 대종이 울렸다. 신하들이 모여들었다. 황후 나혜경도 있었고, 황태자도 있었다. 백의관은 자신의 자리에 서 있었다.

누군가가 속삭였다. "식관 이하린이 기억을 완전히 잃었다고 한다. 궁중의 비명이다."

다른 이가 덧붙였다. "황제폐하께서 그를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가?"

라윤이 옥좌에 앉았다.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그 침묵 안에서 모두는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이하린이 아니다."

라윤의 목소리가 울렸다. 모든 신하들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내 식관이다. 오직 내 식관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녀의 정체다."

황후 나혜경의 얼굴이 굳었다. 그 여자를 도구로 삼으려던 계획이 물거품이 되었다. 이제 그 여자는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황제의 소유물이 되어버렸다.

"오직 내 식관이다."

라윤이 다시 말했다. 그 말은 선언이었다. 법이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바꾸는 명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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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의 밖에서 이준호는 하린을 봤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침전 안의 그 여자가, 과연 자신의 누나인지 알 수 없었다. 누나는 누나가 아니었다. 누나의 기억도, 누나의 이름도, 누나의 정체도 사라졌다.

하지만 그 여자는 웃고 있었다.

라윤의 손을 잡고, 라윤의 말을 듣고, 라윤의 곁에 있으면서.

이준호는 중얼거렸다.

"누나는 이제 누나가 아니지만, 누나는 행복하다. 그래서 난 괜찮다."

그의 말은 거짓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유일한 진실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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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되었다.

침전의 침대에서 라윤은 하린을 안고 있었다. 하린은 라윤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이 사람의 얼굴만은 명확했다.

"내일도 여기 있을 거지?"

라윤이 물었다. 그 질문 안에는 절박함이 있었다. 마치 자신이 내일을 보장받지 못할 것 같은 공포가.

하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는 여기 있겠습니다."

그 말은 약속이었다. 기억도 없는 여자의, 그렇기에 더욱 순수한 약속이었다.

라윤은 하린의 손을 잡았다. 손가락이 맞물렸다. 마치 퍼즐이 맞춰지는 것처럼.

"넌 내 것이다."

"네. 저는 당신의 것입니다."

하린의 대답은 즉각적이었다. 기억은 없었지만, 그 말의 무게는 명확하게 느껴졌다. 자신이 이 사람의 것이 되는 것—그것이 자신의 유일한 정체라는 것을.

라윤은 하린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황제의 입술이 식관의 이마에 닿는 순간, 세상은 그 두 사람만 남겨두고 멈춰버린 것 같았다.

조정의 대종이 저 멀리서 울렸다. 또 다른 하루가 끝났다는 신호였다. 하지만 이 침전 안에서는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 과거도 없고, 미래도 불확실한 이곳에서, 오직 지금만이 존재했다.

라윤은 하린을 더욱 가깝게 끌어당겼다. 마치 그녀를 자신의 몸 속으로 녹여버릴 것처럼.

"절대 떠나지 마."

"네. 절대 떠나지 않겠습니다."

하린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확고했다. 기억은 없었지만, 이 약속만큼은 명확했다.

침전의 창문으로 밤하늘의 별들이 보였다. 그 별들도, 어딘가에서 누군가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었다. 마치 라윤이 하린을 기억하는 것처럼. 마치 하린이 라윤을 기억하지 못해도 라윤이 둘의 모든 기억을 품고 있는 것처럼.

기억 없는 여자와, 그 여자의 모든 것을 기억하기로 다짐한 황제.

비극적이고도 완전한 그들의 해피엔딩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 기억 없는 아침, 그리고 비극적 해피엔딩

조정의 대종이 울린 지 몇 시간 뒤였다.

침전의 창문으로 새벽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 희미한 빛 속에서 하린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초점이 맞지 않는 눈동자가 천장을 향했다. 천장의 무늬를 따라가던 시선이 멈췄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

손가락을 구부려봤다. 손가락이 움직였다. 그것뿐이었다. 자신의 손가락이라는 것만 알 수 있었고, 그 손가락이 무엇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옆을 돌아봤다. 누군가가 자신을 안고 있었다. 그 사람의 얼굴을 봤다.

검은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동자 안에는 뭔가 깊은 것이 있었다. 마치 바다처럼. 아니, 자신이 바다가 뭔지 알 리 없었다.

"당신은... 누구세요?"

하린의 목소리가 나왔다. 자신의 목소리인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다만 입술이 움직이고, 소리가 나왔을 뿐이었다.

라윤이 손을 들어 하린의 얼굴을 감쌌다. 그 손은 따뜻했다. 하린은 그 온기를 느꼈다. 처음 느껴보는 온기인 것 같기도 하고, 가장 익숙한 온기인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라윤이다."

라윤의 목소리가 낮았다. 마치 자신의 가슴 깊은 곳에서 나오는 소리처럼.

"그리고 넌... 여기 있는 사람이다."

하린은 그 대답을 이해하려 했다. 자신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여기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의 팔 안에서. 이 사람의 곁에서.

"여기... 있는 사람이요?"

"그래. 넌 여기 있다."

라윤이 하린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 접촉 순간, 하린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왜 우는지는 몰랐다. 무엇이 슬픈지도 몰랐다. 다만 눈물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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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 깊어졌을 때였다.

라윤이 침전을 나갔다. 하린은 침대에 앉아 있었다. 자신의 손을 들어 봤다. 손가락이 열 개였다. 그것만이 명확했다.

라윤이 돌아왔을 때, 그는 소반을 들고 있었다. 손에는 냄비가 들려 있었다. 자신의 손이 아닌, 라윤의 손이.

"먹어라."

라윤이 말했다.

하린은 그의 움직임을 봤다. 라윤이 냄비의 뚜껑을 열었다. 손이 떨렸다. 왜 손이 떨리는지는 라윤도 알 것 같지 않았다. 그저 떨렸다. 마치 수십 년 동안 누군가를 위해 요리한 적이 없는 사람처럼.

숟가락을 들었다. 국을 떴다. 손이 더 떨렸다.

"내가... 만들었다."

라윤의 목소리가 낮았다. 마치 자백하는 것처럼.

하린은 그 숟가락을 받았다. 국이 담겨 있었다. 담백한 국이었다. 마치 누군가의 기억 속에 있던 그런 국.

하린은 입에 넣었다.

그 순간이었다. 눈물이 흘렀다. 이번엔 왜 우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이번엔 몰라도 상관없었다. 다만 이 맛이 그리웠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방식으로.

"이 맛은... 그리운 맛이에요."

하린이 말했다.

라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하린의 눈물을 닦았다. 그 손가락이 하린의 뺨을 따라 내려왔다. 마치 자신의 손가락으로 하린의 기억을 다시 새기려는 것처럼.

---

정오가 넘었을 때였다.

송미래가 침전으로 들어왔다. 소반을 들고. 그녀의 눈은 이미 빨갛게 부어 있었다.

송미래는 침대에 앉은 하린을 봤다. 하린은 창문을 보고 있었다.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린?"

송미래가 불렀다.

하린이 돌아봤다. 그 얼굴은 낯설었다. 자신의 친구의 얼굴인데, 완전히 낯선 얼굴이었다.

"넌... 누구니?"

하린이 물었다.

송미래의 손이 떨렸다. 소반이 바닥에 떨어졌다. 밥 그릇이 깨졌다. 국이 흘렀다. 하지만 송미래는 그것을 치우지 않았다.

"내 친구가... 없어졌다."

송미래가 중얼거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이미 울음이 섞여 있었다.

라윤이 나타났다. 그의 손이 송미래의 팔을 잡았다.

"그녀는 여기 있다."

라윤이 말했다.

"그녀는 내 곁에 있다."

송미래는 라윤을 봤다. 황제의 눈에는 무엇이 있었다. 송미래가 이전에 본 적 없는 감정이. 마치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있는 그런.

"하지만 그녀는 하린이 아니에요."

송미래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이제 하린이 아니에요."

라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송미래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 하린 곁에 앉았다. 하린은 라윤을 봤다. 그것이 자신을 안심시켜주는 사람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 이상은 아무것도 몰랐다.

---

오후였다.

조정에서 신하들의 목소리가 울렸다.

"식관 이하린이 기억을 잃었다고 합니다."

누군가의 말이 황제에게 전해졌다. 모든 신하들의 눈이 황제에게 향했다. 황제가 어떻게 반응할지 기다리고 있었다.

라윤이 옥좌에서 일어났다.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녀는 이하린이 아니다."

침묵이 흘렀다.

"그녀는 내 식관이다. 오직 내 식관일 뿐이다."

라윤이 다시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절대 권력이 담겨 있었다. 그 순간부터, 그 여자는 더 이상 이하린이 아니었다. 그녀는 황제의 식관이었다. 그것이 그녀의 유일한 정체였다. 그 정체만으로 충분했다.

황후 나혜경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가 도구로 삼으려던 여자는 이제 도구가 아니었다. 그녀는 황제의 소유물이었다.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그리고 그것이 그녀의 정체다."

라윤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그 말은 선언이었다. 법이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바꾸는 명령이었다.

---

궁의 밖에서 이준호는 창문을 통해 침전을 봤다.

거기 보이는 그 여자가 자신의 누나인지 알 수 없었다. 누나의 기억이 사라졌으니까. 누나의 이름도 사라졌으니까. 누나의 정체도 사라졌으니까.

하지만 그 여자는 웃고 있었다.

라윤의 손을 잡고. 라윤의 말을 듣고. 라윤의 곁에 있으면서.

이준호는 중얼거렸다.

"누나는 이제 누나가 아니지만, 누나는 행복하다. 그래서 난... 괜찮다."

그의 말은 거짓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유일한 진실이었다. 누나를 놓아주는 것. 누나가 행복하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 가문의 복권도, 누나의 정체성도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누나가 웃고 있다는 것만으로.

이준호는 궁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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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내려앉았다.

침전의 침대에서 라윤은 하린을 안고 있었다. 하린은 라윤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이 사람의 얼굴만은 명확했다. 마치 자신의 영혼에 각인되어 있는 것처럼.

"내일도 여기 있을 거지?"

라윤이 물었다. 그 질문 안에는 절박함이 있었다. 마치 자신이 내일을 보장받지 못할 것 같은 공포가. 마치 이 여자가 내일 아침에 사라질 것 같은 두려움이.

하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은 없었지만, 이 질문에 대한 대답만은 명확했다.

"네. 저는 여기 있겠습니다."

그 말은 약속이었다. 기억도 없는 여자의, 그렇기에 더욱 순수한 약속이었다.

라윤은 하린의 손을 잡았다. 손가락이 맞물렸다. 마치 퍼즐이 맞춰지는 것처럼. 마치 두 개의 조각이 원래부터 같은 그림이었던 것처럼.

"넌 내 것이다."

"네. 저는 당신의 것입니다."

하린의 대답은 즉각적이었다. 기억은 없었지만, 그 말의 무게는 명확하게 느껴졌다. 자신이 이 사람의 것이 되는 것—그것이 자신의 유일한 정체라는 것을. 자신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이 사람의 것이라는 것만큼은 명확하다는 것을.

라윤은 하린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황제의 입술이 식관의 이마에 닿는 순간, 침전 안의 모든 것이 멈춘 것 같았다. 시계의 초침도, 창밖의 바람도, 세상의 모든 움직임도.

"절대 떠나지 마."

"네. 절대 떠나지 않겠습니다."

하린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확고했다. 기억은 없었지만, 이 약속만큼은 명확했다.

조정의 대종이 저 멀리서 또 다시 울렸다. 또 다른 하루가 지나갔다는 신호였다. 하지만 이 침전 안에서는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 과거도 없고, 미래도 불확실한 이곳에서, 오직 지금만이 존재했다. 오직 이 순간, 이 온기, 이 손의 감촉만이.

라윤은 하린을 더욱 가깝게 끌어당겼다. 마치 그녀를 자신의 몸 속으로 녹여버릴 것처럼. 마치 그 여자가 다시 떠나갈까 봐 두려워하는 것처럼.

침전의 창문으로 밤하늘의 별들이 보였다. 그 별들도, 어딘가에서 누군가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었다. 마치 라윤이 하린을 기억하는 것처럼. 마치 하린이 라윤을 기억하지 못해도 라윤이 둘의 모든 기억을 품고 있는 것처럼.

기억 없는 여자와, 그 여자의 모든 것을 기억하기로 다짐한 황제.

비극적이고도 완전한 그들의 해피엔딩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전화목차마지막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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