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시간이 역행했다.

준호는 그것을 느꼈다. 몸 전체를 관통하는 전기 충격 같은 감각. 눈을 떴을 때 천장은 낡은 목재였고, 코를 자극하는 것은 축축한 흙내음과 짚 냄새였다. 노비 막사. 그곳이었다.

손가락을 움직여봤다. 반응이 있다. 다리도. 폐에 공기가 들어온다. 살아있다는 확인이 먼저였다. 그다음은 혼란.

어제는 분명 죽음의 문턱에 있었다. 주인의 채찍이 등을 내려칠 때마다 피가 흐르고, 시력이 흐려지고, 귀에서만 윙윙거리는 음향이 들렸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더 이상 기억나지 않았다.

준호는 일어났다. 몸이 무거웠다. 아니, 다르다. 노비 생활 3년간 경험한 그 무게감이 아니다. 더 강하고, 더 탄력있는 근육이 돌아와 있었다. 손을 펼쳤다. 흠집 없는 피부. 채찍자국이 사라졌다.

'뭐지?'

그 순간, 시야 한구석에 반투명한 창이 떠올랐다.

【이준호】 【레벨: 1】 【신체 능력치: 근력 14, 민첩 12, 체력 13, 지능 16, 감지 15】 【보유 스킬: 상태창(S급), 마법 기초 이해도(A급)】 【신뢰도: 100/100】 【기한: 100일】

준호는 눈을 비볐다. 창은 사라지지 않았다. 손을 흔들어봤다. 창은 따라 움직였다. 말도 안 된다. 그런데 멈추지 않는 심장박동이 자신에게 말한다—이건 현실이다.

"100일?"

중얼거렸다. 그리고 떠올렸다. 노비로 전락하기 전, 마지막으로 본 달력. 정확히 100일 전이었다. 시간이 거슬러 올라갔다. 돌아왔다.

아카데미로.

***

강당의 천장은 여전히 높았다. 하지만 준호를 보는 귀족 학생들의 눈은 낮았다. 아래를 향해 있었다.

"노비 신분의 학생?"

강단에 서 있는 발렌 크로스 원장의 목소리가 의아함으로 기울었다. 그의 뒤로 교사들이 서 있었고, 좌석에는 몇백 명의 귀족 자제들이 앉아 있었다. 모두 준호를 바라봤다.

준호는 자신의 옷을 내려다봤다. 회귀 직후 입던 그대로다. 회색의 헌 천이 몸을 감싸고 있었고, 가슴팍에는 노비 표장이 박혀 있었다. 3년 전, 그가 처음 노비로 전락했을 때 입던 옷이다.

"아카데미 입학이 명문화된 것은 아닙니다. 신분에 관계없이 마법 적성이 있으면 입학을 허락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준호가 말했다. 목소리는 낮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사실은 거짓이 아니었다. 100일 뒤, 이 규정이 실제로 존재했다. 그리고 그것을 등에 업고 입학 신청서를 제출한 것도 자신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노비였고, 입학이 허락되지 않았다.

이제는 다르다. 아직 노비가 아니니까.

아니다. 준호는 자신의 가슴팍을 다시 봤다. 표장이 그대로다. 이미 노비다.

강당에 웅성거림이 일었다. 귀족 학생들이 서로 중얼거렸다. 준호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대신 다른 것을 봤다.

상태창.

강당의 한가운데 서 있는 준호의 시야에 또 다른 창들이 떠올랐다. 각각의 귀족 학생들을 향해 투명한 프레임이 그려졌다.

【칼리아 칼리스】 【레벨: 8】 【신체 능력치: 근력 8, 민첩 10, 체력 9, 지능 18, 감지 12】 【저주: 칼리스 가의 완벽주의 저주 — 모든 행동에 불안감이 수반됨. 마력 제어 불완전. 수면 장애 심각】 【신뢰도: 0/100】

【레온 아르투르】 【레벨: 12】 【신체 능력치: 근력 19, 민첩 17, 체력 16, 지능 13, 감지 14】 【저주: 레온 가의 광기 저주 — 전투 중 이성 상실 위험. 폭력성 억제 중】 【신뢰도: 0/100】

【에스텔 로즈】 【레벨: 6】 【신체 능력치: 근력 6, 민첩 8, 체력 8, 지능 15, 감지 16】 【저주: 로즈 가의 기억 소실 저주 — 진행률 43%. 회복 불가능】 【신뢰도: 0/100】

준호는 숨을 쉬지 않고 강당 전체를 훑었다. 100명이 넘는 귀족 학생들. 그들 모두에게 저주가 붙어있었다. 칼리아의 불안감, 레온의 광기, 에스텔의 기억 소실. 각각 다른 형태의 저주가 그들을 옭아매고 있었다.

이 모든 학생들이 저주에 걸려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저주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심화된다는 것. 100일 뒤에는 어떻게 될까. 에스텔은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를 것이고, 레온은 광기에 완전히 잠길 것이고, 칼리아는 불안감으로 자신을 해칠 것이다.

준호의 입술이 올라갔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니, 웃음이 아니었다. 목이 메어 나오는 음성. 마치 누군가 자신의 가슴을 움켜잡은 것처럼.

"준호 학생은 입학 신청서를 제출했습니다. 마법 적성 검사 결과도 합격입니다."

발렌 크로스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미 결정이 담겨 있었다. 준호는 고개를 들었다.

원장의 상태창도 떠올랐다.

【발렌 크로스】 【레벨: 27】 【신체 능력치: 근력 12, 민첩 14, 체력 15, 지능 22, 감지 20】 【저주: 발렌 가의 책임 저주 — 모든 결정의 무게. 선택 불가능의 감옥】 【신뢰도: 0/100】

강단 옆에 서 있는 교사 중 한 명이 손을 들었다. 준호를 강당 뒤쪽으로 안내하려는 동작이었다.

그 순간, 레온 아르투르가 일어섰다.

"잠깐."

그의 목소리는 밝았다. 웃음까지 섞여 있었다. 하지만 상태창의 수치는 울고 있었다. 저주 진행률이 올라가고 있었다.

【레온 아르투르 — 광기 저주 진행률 상승 중】

"노비 신분으로 입학하려는 건 처음 본다. 이게 정말 가능한 건가?"

레온이 웃으며 물었다. 강당의 분위기가 날카로워졌다.

"규정상 가능합니다."

발렌 크로스가 대답했다.

"그럼 이 학생이 우리 귀족들과 같은 대우를 받는다는 건가? 같은 숙소에서 지내고, 같은 수업을 받고?"

레온의 목소리가 커졌다.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상태창에 붉은 경고가 떴다.

【광기 진행률 67%】

"그렇습니다."

발렌 크로스가 침착한 목소리로 답했다.

레온이 일어나면서 책상을 집어던졌다. 그것은 준호를 향했다. 아니, 준호를 스치면서 강당 벽에 부딪혔다. 나무가 부서지는 소리가 울렸다.

학생들이 비명을 질렀다.

준호는 움직이지 않았다. 상태창을 봤다.

【광기 진행률 89%】

레온의 눈이 붉게 변해가고 있었다. 숨이 거칠어지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갈라져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가 내뱉는 음성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마치 짐승처럼.

"저주군."

준호가 중얼거렸다.

"너희는 모두 저주에 갇혀 있네."

레온이 비명을 질렀다. 다른 학생들이 자리에서 떨어져 나갔다. 발렌 크로스가 손을 들었고, 어떤 마법이 레온을 감싸기 시작했다. 푸른 에너지가 그의 몸을 묶었다.

레온이 무릎을 꿇었다. 손가락이 바닥을 긁으면서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의 입에서 울음이 나왔다. 비명이 아닌, 울음. 광기 속에서도 자신을 억누르려는 절박한 울음.

강당이 조용해졌다.

발렌 크로스가 준호를 봤다. 그의 눈빛이 변했다. 의아함에서 무언가 다른 것으로. 경계와 호기심이 뒤섞인 표정.

"입학을 허락하겠습니다."

그가 말했다.

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강당을 나가는 교사를 따라갔다. 뒤에서 레온의 울음소리가 계속 들렸다.

***

숙소는 지하였다. 당연했다. 노비 신분이니까.

좁은 방에 깔린 건 짚더미였다. 창문은 없었다. 대신 갈라진 벽 사이로 빛이 새어 들었다. 준호는 방 한구석에 앉았다.

상태창을 다시 켰다.

【이준호】 【신뢰도: 98/100】

신뢰도가 2 떨어져 있었다.

"상태창을 사용할 때마다 떨어지는 건가?"

중얼거렸다. 강당에서 귀족들을 스캔했을 때 2번 사용했다. 칼리아와 레온. 그리고 발렌 크로스. 3명이었는데 2만 떨어졌다.

뭔가 있다.

준호는 다시 상태창을 켜서 에스텔 로즈를 스캔해봤다.

【에스텔 로즈】 【기억 소실 진행률: 43%】

신뢰도가 97로 떨어졌다.

"1씩 떨어진다."

준호가 계산했다. 100일. 신뢰도 100. 매일 1명씩 스캔하면 딱 맞는다. 하지만 그럴 리 없다. 귀족이 100명이 넘었다.

그렇다면 선택의 문제다.

준호는 누워있는 자신의 몸을 봤다. 근력 14. 이 정도면 노비 3년간 쌓인 근력보다 훨씬 강하다. 전생의 신체가 돌아왔다. 아니, 더 강해졌다.

100일. 기한이 있다는 건 뭔가를 하기 위한 시간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신뢰도는 그 과정에서 치르는 대가다.

저주를 풀려면 대상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 상태창을 사용할 때마다 신뢰도가 떨어진다. 풀면 풀수록 빨리 끝난다.

풀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

준호는 에스텔 로즈의 상태창을 다시 떠올렸다. 기억 소실 진행률 43%. 100일 뒤면 그녀의 기억은 완전히 사라진다. 그리고 다른 저주들도 진행할 것이다. 레온의 광기는 더 심해질 것이고, 칼리아의 불안감도 심화될 것이다.

또는 둘 다 선택할 수도 있다. 신뢰도를 깎아가며 저주를 풀거나, 아니면 그들을 방치하거나.

준호의 손가락이 떨렸다. 처음이었다. 이 감각은 노비 생활 3년간 경험하지 못한 것이었다. 옳고 그름의 경계에 서 있는 손가락의 떨림. 그 떨림 속에는 절박함이 있었다. 신뢰도를 소진하면 상태창이 영구 봉인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유일한 무기를 잃는 것이라는 것. 하지만 저주를 방치하면 그들은 천천히 자신을 잃어갈 것이라는 것.

두 가지 모두 죽음이었다.

그는 손을 주먹으로 쥐었다. 손가락이 손바닥에 파고들었다.

"저주를 풀어야 한다."

말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그들이 소멸하기 전에."

그 순간, 새로운 창이 떠올랐다.

【경고: 신뢰도 소진 시 상태창이 영구 봉인됩니다】 【경고: 기한 단축으로 인한 시간 역행 중단 가능성 주의】

준호는 창을 닫았다. 가슴이 철렁했다. 시간 역행이 중단된다는 건 뭔가. 다시 죽음으로 돌아간다는 건가. 아니면 이 시점에 영구적으로 갇힌다는 건가.

그는 다시 상태창을 켰다. 그리고 또 다시 닫았다.

신뢰도 97. 98. 99. 100.

숫자가 계속 흔들렸다. 창을 켜고 닫는 행위 자체로는 신뢰도가 떨어지지 않는다. 누군가를 스캔할 때만 떨어진다.

그렇다면 선택은 명확했다.

준호는 눈을 감았다. 강당에서 본 수백 개의 저주. 그 모두를 풀 수는 없다. 신뢰도가 100이니까. 하지만 선택할 수는 있다.

누구를 풀 것인가. 누구의 소멸을 지켜볼 것인가.

그 순간, 벽 너머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지하 복도를 걸어오고 있었다. 천천하고 조심스러운 발걸음. 준호는 눈을 떴다.

문이 열렸다.

에스텔 로즈가 서 있었다. 금발이 어깨까지 내려와 있고, 파란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귀족 소녀답게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까 강당에서 본 노비 학생이시죠?"

그녀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저는 에스텔 로즈예요. 같은 학년이라고 해서 인사하러 왔어요."

준호가 일어났다. 상태창이 떠올랐다.

【에스텔 로즈】 【기억 소실 진행률: 43%】

"저는 이준호입니다."

준호가 말했다.

"아, 준호! 좋은 이름이네요. 저랑 친구가 될래요?"

에스텔이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준호가 그 손을 잡으려 했다. 그 순간, 에스텔의 표정이 변했다. 웃음이 사라졌다. 그녀의 눈이 준호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 눈은 낯선 사람을 보는 눈이었다.

"어... 저는 누구를 찾던 중이었나요?"

에스텔이 중얼거렸다. 목소리에 혼란이 가득했다.

"이 방에... 뭐가 있었더라?"

그녀의 머리가 흔들렸다. 마치 뭔가를 떠올리려고 애쓰는 듯. 하지만 그 애쓰는 과정은 고통스러워 보였다. 눈썹이 찌푸려지고, 입술이 떨렸다. 마치 물 속에서 무언가를 잡으려고 손을 뻗는 것처럼, 하지만 손가락 사이로 모든 것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준호가 상태창을 다시 켰다.

【에스텔 로즈】 【기억 소실 진행률: 44%】 【신뢰도: 96/100】

기억이 1% 더 사라졌다. 방금 몇 초 사이에. 그리고 준호의 신뢰도도 4가 떨어졌다.

에스텔의 눈이 흔들렸다. 초점이 맞지 않는 눈. 마치 어둠 속을 헤매는 것처럼. 그 눈이 준호를 향했을 때, 그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죄송한데... 여긴 누구 방이에요?"

준호는 침묵했다. 에스텔의 눈 속에서 자신을 찾을 수 없었다. 몇 초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웃으며 친구가 되자고 손을 내밀던 사람이었다. 지금 그녀는 낯선 남자가 자신의 방에 있다는 사실에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그 변화는 너무나 빨랐다. 마치 누군가 그녀의 기억을 하나씩 지워내고 있는 것처럼.

"이건... 강당 동쪽 지하 3층 게스트룸입니다."

준호가 대답했다. 목소리를 차분하게 유지했지만, 손가락이 다시 떨렸다.

"아, 게스트룸이군요. 저는... 제가 왜 여기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에스텔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 웃음에는 불안감이 묻어났다. 자신이 무엇을 잃고 있는지 모르면서도, 뭔가 중요한 것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는 듯한.

"자꾸 기억이 끊겨서요. 어제 뭘 했는지도 모르겠고."

준호가 상태창을 닫았다. 숫자를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본 것들은 뇌에 박혀 있었다. 기억 소실 진행률 44%. 100일 뒤에는 그녀가 누구인지도 모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연이었다. 신뢰도를 사용하지 않는 한.

"괜찮으세요. 선후배 인사 차 들어온 거예요. 실수했습니다."

준호가 말했다.

"저도 가야 할 시간입니다."

"아, 그럼 수고하세요!"

에스텔이 인사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이미 다른 사람에게 인사하는 그것이었다. 준호는 방을 나갔다. 문을 닫는 순간, 그녀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누구였더라..."

복도를 걸어가며 준호는 자신의 신뢰도를 다시 확인하고 싶었다. 96/100. 에스텔을 한 번 스캔했을 뿐인데 벌써 4가 떨어졌다. 상태창을 켜고 닫는 행위 자체로는 신뢰도가 깎이지 않지만, 누군가를 직접 스캔하는 순간 비용이 발생한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100명을 저주에서 풀 수는 없다. 100명을 스캔하면 신뢰도가 0이 되니까.

준호는 강당으로 향했다. 아직 아카데미는 활기찬 상태였다. 학생들이 동아리 소개를 받고, 선후배들과 인사를 나누고, 도서관으로 향하고 있었다. 모두가 자유로워 보였다. 하지만 준호의 눈에는 그들의 머리 위에 족쇄가 보였다.

강당의 한 모서리에 앉은 준호는 천천히 학생들을 관찰했다. 귀족들만 저주에 걸려 있는 건 아니었다. 몇몇 평민 학생들도 희미한 저주의 흔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강도는 차원이 달랐다. 귀족들의 저주는 마치 쇠사슬처럼 그들을 옭아매고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강한 저주는 누구인가.

준호가 상태창을 켜고 천천히 학생들을 스캔하기 시작했다.

【칼리아 칼리스 - 불안감 심화 상태: 62%】

신뢰도가 96에서 93으로 떨어졌다. 3의 비용.

【레온 아르투르 - 광기 억제 상태: 71%】

신뢰도가 93에서 88로 떨어졌다. 5의 비용. 저주가 강할수록 비용도 크다는 뜻이었다.

【모르드 페리온 - 권력 갈구 상태: ?????】

모르드 페리온의 정보가 제대로 표시되지 않았다. 상태창이 그의 저주를 완전히 읽을 수 없다는 뜻이었다. 준호는 본능적으로 그 학생에게서 눈을 돌렸다.

신뢰도가 또 떨어졌다. 88에서 81로. 7의 비용.

준호는 더 이상 스캔하지 않았다. 남은 신뢰도는 81. 계산해보니 대략 30명 정도는 스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이상은 무리였다.

준호는 일어섰다. 더 이상 스캔할 필요는 없었다. 이미 그는 필요한 정보를 충분히 얻었다. 귀족 학생들은 모두 저주에 걸려 있고, 그 저주는 시간이 지날수록 심화된다. 에스텔의 경우는 기억이 사라지고, 레온의 경우는 광기가 심해지고, 칼리아의 경우는 불안감이 커질 것이다.

100일 뒤에는 모두 지금보다 훨씬 심각한 상태가 될 것이다.

복도를 걸어가며 준호는 계산했다. 신뢰도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하려면, 가장 심각한 저주부터 풀어야 한다. 에스텔의 기억 소실이 가장 급박했다. 100일 뒤면 그녀는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를 것이다. 그 다음은 레온의 광기였다. 만약 그가 완전히 광기에 잠기면, 아카데미 전체가 위험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칼리아는? 칼리아의 불안감 심화는 상대적으로 덜 급박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방치할 수는 없었다.

준호는 자신의 방에 도착했다. 노비 학생들이 배정받은 숙소는 아카데미의 가장 뒤쪽, 햇빛도 제대로 들지 않는 곳이었다. 좁은 방에 침대와 책상만 있을 뿐이었다. 귀족 학생들의 넓은 숙소와는 비교도 안 됐다.

준호는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바라봤다. 회귀가 아니었다면, 3년 뒤 그는 이 아카데미를 졸업할 것이고, 그 뒤에는 어떤 귀족의 개인 노비가 될 것이었다. 아마도 모르드 페리온의.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천천히 자신의 자유를 잃어갈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상태창이 있다. 저주를 풀 수 있다. 신뢰도를 깎아가며, 기한을 소진하며, 그들을 구할 수 있다.

준호는 손을 들었다. 손가락을 펴고, 다시 쥐었다. 떨림은 이미 사라졌다. 그것은 선택의 순간이었다. 지금부터 그는 이 선택들을 감당해야 한다.

상태창을 켰다.

【신뢰도: 81/100】 【기한: 99일 23시간 47분】

기한도 단축되고 있었다. 아직 1시간도 안 됐는데 벌써 13분이 줄었다. 아마도 상태창을 활성화하는 것 자체로도 시간이 소비되는 것 같았다.

준호는 눈을 감았다. 100일. 그 안에 모든 것을 끝내야 한다. 저주를 풀고, 진실을 파악하고, 그리고...

그 다음은 무엇인가.

준호는 그것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번에는 도망치지 않을 것이라는 것. 지난 3년간 그는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패배였다.

이번에는 전체 체계를 바꿀 것이다. 저주를 푸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이 저주의 근원이 뭔지, 왜 귀족들에게만 저주가 있는지, 그리고 자신에게 이런 능력을 준 것이 뭔지를 알아야 했다.

그 다짐이 가슴을 타고 내려올 때,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준호의 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빠르고 무거운 발걸음. 준호는 벌떡 일어났다.

문이 열렸다.

아카데미의 학생회장, 레온 아르투르가 서 있었다. 금발이 옆으로 휘날리고 있었고, 그의 눈빛은 냉정했다. 하지만 준호는 상태창으로 그의 진정한 상태를 알고 있었다. 광기 억제 상태 71%. 표면 아래에서 뭔가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준호라고 했나?"

레온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는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숨어 있었다.

"맞습니다."

준호가 대답했다.

"오늘 강당에서 뭘 본 거 같은데, 이상하지 않나?"

레온이 한 발 더 가까워졌다. 준호의 침대까지의 거리가 줄어들었다. 레온의 호흡이 들릴 정도로.

"넌 지금 뭔가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어."

그의 말 속에는 압박이 있었다. 준호는 상태창을 켜고 싶었다. 하지만 이건 위험한 상황이었다. 만약 지금 레온을 스캔하면, 신뢰도가 또 떨어질 것이고, 그것은 그의 신경을 건드릴 수도 있었다.

"정말로 아무것도 보지 못했나?"

레온의 눈이 좁혀졌다. 그 안에서 무언가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광기의 흔적이 눈 한구석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준호가 대답했다.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거짓말은 효과적이었다.

레온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마치 뭔가를 결정하는 것 같았다. 그의 손이 내려갔다.

"그럼 괜찮아. 다음에 뭔가 이상한 걸 보면, 내게 알려줄래? 나는 이 아카데미의 학생회장이니까."

레온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제 위협이 아닌 제안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 제안 뒤에는 명령이 숨어 있었다.

"알겠습니다."

준호가 대답했다.

레온이 나갔다. 문을 닫으며 그는 한 마디를 더했다.

"좋은 밤."

문이 닫혔다. 준호는 다시 상태창을 켰다.

【신뢰도: 81/100】 【기한: 99일 23시간 22분】

변하지 않았다. 레온을 스캔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준호는 뭔가를 깨달았다. 레온의 방문은 우연이 아니었다. 아마도 누군가가 자신에 대해 그에게 알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준호가 상태창으로 학생들을 스캔했다는 사실을 감지한 것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더 위험한 가능성도 있었다. 레온이 준호의 상태창 능력을 이미 의심하고 있다는 것. 강당에서 자신이 한 말 때문에.

준호는 일어났다. 창밖을 봤다. 아카데미의 밤은 조용했다. 하지만 그 조용함 속에는 뭔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아직 보이지는 않지만, 확실히 움직이고 있었다.

신뢰도를 소진하며 저주를 풀어야 한다. 그것은 이미 정해진 선택이었다. 하지만 이제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누군가 그것을 방해하려고 한다는 것. 아니, 더 정확히는 자신의 능력을 알아내려고 한다는 것.

준호는 침대로 돌아갔다. 상태창을 켜고 다시 닫았다. 켜고 다시 닫았다. 그 과정에서 신뢰도는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기한은 계속 줄어들고 있었다. 99일 23시간 11분.

100일. 그 안에 모든 것을 끝내야 한다.

준호의 눈이 감겼다. 하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대신 그의 머릿속에는 수백 개의 저주와, 그 저주를 푸는 데 드는 비용, 그리고 그 비용을 치르고도 남은 시간이 떠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 뒤에는 레온의 말이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넌 지금 뭔가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어."

새벽이 올 때까지 그는 그렇게 누워 있었다. 천장을 바라보며. 손가락을 움직이며. 다가올 선택들을 준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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