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한 땀 한 땀, 봄

밤새 재봉틀을 밟던 손가락이 멈췄다. 은혜는 무릎 위의 할머니 청바지를 내려놓고 정수를 바라봤다. 아이의 눈이 자신을 향해 있었다. 어떤 두려움도, 어떤 의심도 없이.

"당신에게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그 질문이 정수의 입에서 나왔을 때, 은혜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지난 며칠간 눈물로 채웠던 모든 시간들—능력의 대가로 감정을 잃었던 시간들, 그리고 다시 돌아온 감정들이 한 점으로 모아지는 느낌이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정수는 이미 자신의 옷이 되어 있었다. 손으로 만질 수 없는, 하지만 가장 따뜻한 옷.

"네. 당신은 저한테 필요한 사람이에요."

말을 마치자 정수가 웃었다. 어린 얼굴이 환해지면서, 아이는 은혜의 손을 잡았다. 그 손의 온기가 팔을 타고 올라왔다. 가슴에 도달했을 때, 은혜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자신도 누군가의 옷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버려진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감싸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수선실의 시계는 새벽 세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정수가 손을 놓자 은혜는 일어섰다. 다리가 살짝 저렸지만, 그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은혜는 옷걸이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어머니의 청바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 며칠간 은혜는 그 청바지를 만졌다. 여러 번. 손상된 부분을 찾고, 색이 바란 곳을 찾고, 어머니의 손길을 더듬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어머니의 감정을 받아내기 위해 손을 대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감정을 담아내기 위해 손을 대고 있었다.

청바지를 무릎 위에 펼쳤다. 안쪽 주머니 부근. 그곳에는 어머니의 글씨로 '은혜'라고 수가 놓여 있었다. 작고 서툰 글씨였다. 은혜는 바늘을 집어 들었다. 손가락에 맞춰 재봉틀에 올렸다. 페달을 밟자 바늘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엄마'

'은혜' 위에, 은혜는 '엄마'라고 다시 수를 놓았다. 한 땀, 한 땀. 어머니의 글씨를 따라가면서도, 동시에 은혜의 글씨를 만들었다. 겹쳐지고, 섞이고, 하나가 되어갔다. 어머니와 은혜가 같은 선 위에서 만났다.

바늘이 멈췄다. 은혜는 실을 자르고 청바지를 들어올렸다. 정수가 옆에서 보고 있었다. 아이의 호흡이 고르고 차분했다.

은혜는 청바지를 입기로 결정했다. 손가락이 떨렸다. 평생 어머니의 옷을 입지 않으려 했던 사람이, 지금 그 옷을 입고 있었다. 청바지가 다리에 감겼다. 낡은 천이 자신의 피부에 닿았을 때, 냉기가 스쳤다. 그리고 그 냉기가 서서히 체온으로 데워졌다. 어머니의 체온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감정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느끼는 어머니. 청바지의 무게가 허리에 걸렸다. 어머니가 매일 지탱했던 무게. 주머니 속 손가락이 닿은 곳에서 어머니의 손길이 전해져 왔다. 은혜는 눈을 감았다. 그 모든 것이 자신 안에 흐르고 있었다.

수선실의 거울 앞으로 걸어갔다. 작은 거울이었다. 반영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은혜는 멈췄다. 거울 속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도 있었다. 같은 얼굴, 같은 눈, 같은 손가락. 그들은 같은 사람이었다. 버려진 것이 아니라, 서로를 기다렸던 사람들.

"예쁘다," 정수가 말했다.

은혜는 거울을 떠나 정수를 바라봤다. 아이의 얼굴이 밝았다. 그리고 그 밝음이 은혜의 얼굴에도 반사되었다. 둘 다 웃고 있었다. 수선실에서 처음으로, 아무런 슬픔 없이 웃고 있었다.

시간이 흘렀다. 아침이 가까워질 무렵, 정수는 돌아갔다. 은혜는 아이를 배웅하며 손을 흔들었다. 정수도 손을 흔들었다. 골목 너머로 사라지기 전까지, 아이는 뒤를 돌아보며 웃었다. 그 웃음이 은혜의 가슴에 남았다. 따뜻한 손의 온기처럼,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무언가로.

수선실로 돌아온 은혜는 창가에 섰다. 어머니의 청바지를 입은 채로. 손가락으로 주머니를 더듬었다. 안쪽에 박혀 있는 바느질—'은혜'와 '엄마'가 겹쳐진 글씨. 한 땀 한 땀이 만들어낸 연결.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벚꽃은 더 많이 피어났다. 밤사이 세상이 분홍색으로 변했다.

휴대폰이 울렸다. 박현숙이었다.

"은혜 언니, 내가 입던 그 블라우스 받아도 될까? 오늘 회사 면접 봐야 해."

"네. 준비되어 있어요."

은혜는 박현숙을 위해 준비해둔 블라우스를 꺼냈다. 옷감을 펼쳤을 때, 손가락이 미세한 떨림을 감지했다. 박현숙의 불안감. 하지만 그 불안감 아래에는 무언가 단단한 것이 있었다.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

"정말? 고마워."

통화를 끝내고 얼마 후, 또 다른 전화가 울렸다. 이준호였다.

"은혜 언니, 그 회색 셔츠 말이야. 다시 한 번 고쳐줄 수 있을까? 아버지 옷도 함께 가져가고 싶어서."

"아버지 옷이요?"

"응. 엄마가 창고에서 꺼내줬어. 아버지가... 아직도 입고 싶어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그 옷 같이 고쳐주면 좋겠는데."

은혜는 천천히 대답했다. "네. 함께 하겠습니다."

통화를 끝내고 은혜는 손가락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박현숙의 목소리에 담긴 용기. 이준호의 목소리에 담긴 결심. 그들이 변했다. 단순한 옷의 수선이 아니라, 무언가가 다시 이어지고 있었다.

오후가 되자 박현숙이 들어왔다. 검은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그 위에 수선된 블라우스를 걸쳤다.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며 "정말 달라 보이는데"라고 중얼거렸다. 은혜가 블라우스를 건네자 박현숙은 그것을 가슴에 안았다.

"은혜 언니, 고마워. 정말."

"당신이 필요해서 했어요."

박현숙이 옷을 입으며 말했다. "이 옷 입으니까 뭔가 달라. 면접장 가는 길에 자꾸 거울을 보게 돼.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은혜는 박현숙의 눈을 봤다. 그 안에는 처음 만났을 때의 흐릿함이 사라져 있었다. 대신 선명한 무언가가 자리 잡고 있었다.

"당신은 할 수 있어요."

박현숙이 문을 나갈 때, 뒤를 돌아보며 웃었다. 그 웃음은 진짜였다. 불안함이 아닌, 순수한 기쁨의 웃음.

저녁이 되자 이준호가 나타났다. 회색 셔츠와 함께 낡은 카디건을 들고 있었다. 은혜가 그것을 받아 들었을 때, 손가락이 천에 닿으면서 느껴졌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시간. 끊어진 줄을 다시 잇고 싶은 마음. 은혜는 옷감을 펼쳤다. 카디건의 소매가 해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해어진 부분에는 아버지의 손길이 남아 있었다. 몇 번이나 스스로 꿰맨 흔적. 미숙하지만 정성스러운 바느질.

"아버지가 이걸 입고 싶어 할 거예요. 그리고 나도... 아버지랑 함께 입고 싶어요."

은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하겠습니다."

그 말에 이준호의 얼굴이 부드러워졌다. 그는 수선실 창가에 서서 한참을 말이 없었다. 그러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엄마가 아버지 옷을 꺼낼 때 울었어요. 그런데 울면서도 웃고 있었어. 뭔가 이상한데, 그 모습이 좋았어. 우리가 아버지를 잊으려고 했던 게 아니라, 그냥 너무 아파서 멀리하고 있었던 거 같아."

은혜는 이준호의 말을 들었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가 사람을 바꾼다. 은혜는 이제 알았다. 그것이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이라는 것을. 누군가를 완전히 받아주는 것. 그 사람이 버려진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이라고 말해주는 것.

"아버지도 당신도 필요한 사람들이에요."

이준호가 돌아간 후, 저녁 내내 손님들이 계속 들어왔다. 할머니 추도식에서 만났던 사람, 골목에서 본 적 있는 사람, 처음 보는 사람들. 모두가 자신의 옷을 가지고 있었다.

그중 한 할머니가 들어왔다. 추도식에서 본 그 할머니였다. 손에는 오래된 검은 치마가 들려 있었다.

"이 치마 말이야, 내가 남편이랑 처음 만났을 때 입던 옷이야. 그때 우리 남편이 '예쁘다'고 말해줬어. 이제 그 말을 다시 들을 수 없지만..." 할머니는 치마를 펼쳤다. 곳곳이 해어져 있었다. "이걸 다시 입고 싶어. 그럼 남편이 옆에 있는 것 같을 것 같아."

은혜는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함께 하겠습니다."

할머니가 나간 후, 은혜는 다시 재봉틀 앞에 앉았다. 손에 들린 것은 할머니의 치마. 누군가 버린 것. 하지만 누군가는 여전히 필요로 하는 것. 페달을 밟자 바늘이 위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땀.

한 땀.

리듬을 타며 움직이는 손. 어머니의 손길과 자신의 손길이 겹쳐지는 느낌. 옷감이 다시 살아나고, 누군가의 기다림이 한 줄의 실로 변환되고 있었다.

창밖의 벚꽃은 밤이 깊어가면서도 여전히 피어나고 있었다. 분홍색이 점점 진해졌다. 마치 누군가의 피가 흐르는 것처럼. 마치 누군가의 심장이 뛰는 것처럼.

밤이 깊어가면서 골목은 조용해졌다. 하지만 수선실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재봉틀의 소리만이 계속해서 울렸다. 그 소리는 마치 누군가를 부르는 신호 같았다. 마치 누군가에게 "당신은 필요한 사람이에요"라고 반복해서 말하는 목소리 같았다.

은혜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밤새도록 계속 움직였다. 한 땀 한 땀. 옷을 만들면서, 동시에 누군가의 마음을 만들면서. 버려진 것도 버린 것도 아닌, 서로를 기다렸던 것들이 다시 만나는 그 순간을 만들면서.

아침이 되자 치마가 완성되었다. 낡은 것이 아니라, 다시 필요해진 것이 되어 있었다. 은혜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접었다.

수선실의 문이 다시 열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새로운 손님들이 올 것이다. 새로운 옷들이 들어올 것이다. 그리고 은혜는 한 땀 한 땀, 그것들을 다시 살려낼 것이다. 누군가를 위해, 누군가로부터 필요해지기 위해.

이제 은혜는 알았다. 자신도 누군가의 옷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어머니에게 그랬듯이, 정수에게 그랬듯이, 모든 손님들에게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을. 버려진 것이 아니라 기다려진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축복이라는 것을.

손님들이 떠난 후, 은혜는 어머니의 청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은혜'와 '엄마'가 겹쳐진 바느질이 손가락 끝에 닿았다. 그 순간,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 자신이 누군가의 옷이 되고, 그 누군가가 자신의 옷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

밤이 다시 내려앉고 있었다. 창밖의 벚꽃은 완전히 피어났다. 분홍색 골목이 밤의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빛났다. 수선실의 불은 그 빛을 받아 더욱 따뜻해 보였다. 은혜는 창밖을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들었다.

누군가 내일 가져올 옷을 위해.

누군가 내일 필요로 할 옷을 위해.

한 땀 한 땀, 그것을 다시 만들어낼 것이다.

그리고 봄은 계속 피어나고 있었다.

이전화목차마지막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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