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남역 루프
강남역 플랫폼을 내려가는 발걸음이 익숙하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사람들, 같은 냄새. 은지는 에스컬레이터를 올라가며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08:47. 또 지각할 시간이다.
지하철 2호선 차량은 거의 만석이었다. 직장인들의 몸이 겹치고, 학생 몇 명이 핸드폰을 들었다. 은지는 문 옆자리에 몸을 끼워 넣었다. 신논현역까지는 3정거장. 충분하다.
그 순간이었다.
차량이 갑자기 멈췄다.
급정거라기보다는 어떤 힘이 외부에서 차량 전체를 움켜쥐는 듯한 감각이었다. 승객들의 몸이 앞으로 쏠렸다.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은지는 손잡이를 놓쳤고, 옆 사람의 어깨에 부딪혔다. "미안해요."
조명이 한 번 깜박였다.
그리고 어둠이 차량을 삼켰다. 완전한 어둠은 아니었다. 비상등이 희미하게 켜져 있었고, 승객들의 휴대폰 불빛이 공중에 떠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 불빛들은 불안정했다. 떨리고 있었다.
"뭐 하는 짓이야? 차가 왜 멈췄어?"
"신호 오류인 듯한데…"
"에어컨도 안 나온다. 뭐가 고장 난 거 아니야?"
목소리들이 겹쳤다. 은지는 휴대폰을 꺼냈다. 신호 없음. 와이파이도 연결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같은 행동을 했다. 수십 개의 휴대폰 화면이 동시에 켜졌고, 모두가 같은 절망을 마주했다.
"뭔가 이상한데?" 옆 사람이 중얼거렸다.
은지가 창밖을 내다봤다. 터널이 보였다. 강남역과 신논현역 사이. 이 구간은 평소에도 신호가 잘 안 잡혔지만, 이렇게까지 끊기진 않았다. 차량 내 조명이 다시 한 번 깜박였다. 이번엔 더 길게. 5초는 족히 어둠이 지배했다.
"승무원이 어디 있어?"
누군가가 외쳤다. 은지는 차량 앞으로 눈을 돌렸다. 차장실이 보였다. 문이 닫혀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 사람이 나왔다.
차장 유진이었다.
그의 얼굴은 차분했다. 비상 상황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평온했다. 유진은 천천히 차량 내를 걸어다니며 승객들을 바라봤다. 마치 뭔가를 세고 있는 것처럼.
"모두 진정하시기 바랍니다."
유진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명확했다. 승객들의 불안한 목소리가 잠깐 멎었다.
"기술 문제인 것 같습니다. 외부 통신을 시도하고 있으니 안정적으로 대기해 주세요."
거짓이었다. 은지는 그걸 알았다. 유진의 눈동자가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비상통신 기계를 만지지도 않았다. 그저 차분히 걸어갈 뿐이었다.
그리고 유진의 눈이 은지와 마주쳤다.
그 순간, 뭔가 차가운 것이 은지의 등을 타고 내려갔다. 유진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아주 작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 미소였다. 하지만 그 미소는 은지를 향하고 있었다.
유진이 입을 열었다. "당신은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무슨 말인가? 은지는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유진은 이미 다른 승객들을 향해 차장실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의 움직임은 여유로웠다. 마치 모든 것이 예정된 것처럼.
은지의 심장이 빨라졌다.
---
09:30경, 차량 뒤쪽에서 비명 같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화장실! 누군가 화장실을 열어줘!"
한 중년 여성이 비상 개방 버튼을 연타했다. 아무것도 반응하지 않았다. 그녀는 다리를 오므렸다. 절박함이 얼굴에 드러났다.
"제발… 누군가…"
박준호라는 이름의 중년 남자가 일어섰다. 그의 목소리는 침착했지만 손가락은 떨리고 있었다.
"모두 진정합시다. 이건 일시적인 문제일 겁니다. 서울 지하철이 이렇게 오래 무응답인 경우는 드물죠. 누군가는 우리를 찾을 겁니다."
승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희망을 필요로 했고, 준호의 목소리에 희망이 있었다.
10:15경, 한 학생이 물을 달라고 외쳤다.
"물 없어? 아무도 물 없어?"
아무도 물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누군가가 자판기를 가리켰고, 그들은 모두 자판기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학생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 차가 언제까지 갇혀 있는 거야?"
준호가 대답하려 했지만, 그 순간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물을 나눠야 한다!"
한 청년이 자신의 물병을 들었다. 그것은 반쯤 찬 물병이었다.
"그거 당신 물이잖아. 왜 남 물을 나눠?"
옆에 있던 직장인이 물었다. 청년의 얼굴이 굳었다.
"사람이 필요하잖아."
"당신도 이 차에 갇혀 있잖아. 당신도 물이 필요할 텐데."
분위기가 급속도로 차가워졌다. 청년은 물병을 내렸다. 학생은 결국 목이 마른 채로 자리에 앉았다.
12:00경, 차량 내 온도가 오르기 시작했다. 에어컨은 여전히 작동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옷을 벗기 시작했다. 공기가 탁해졌다. 누군가가 창문을 열려고 시도했다. 움직이지 않았다.
"이 차를 어떻게 환기시키는 거야?"
"비상문 개방해야 한다!"
이상민이라는 청년이 비상문 개방을 시도했다. 그는 손톱으로 틈을 파고, 몸 전체를 밀어붙였다. 문은 움직이지 않았다.
"뭐 하는 거야?" 준호가 물었다.
"이 차에서 나가야 한다고!"
"그럼 어떻게? 터널 안이야. 밖에 나가면 죽어."
이상민은 문을 한 번 더 밀었다. 역시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한숨을 쉬며 자리로 돌아왔다.
준호가 다시 나섰다. "모두 침착해야 해. 패닉하면 더 위험해."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처음보다 약했다. 그도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13:30경, 물 문제가 심각해졌다.
"나도 물이 필요해!"
한 노인이 외쳤다. 준호는 다시 한 번 침착함을 유지하려 했지만, 이미 균열이 생겨 있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어. 그냥 기다려야 해."
"기다리다가 죽는 거 아니야?"
누군가가 소리쳤다. 준호는 대답하지 못했다.
은지는 벽을 바라봤다. 비상등 불빛에 비친 벽면에 뭔가 있었다. 손톱자국 같은 것들. 가깝게 보니, 숫자였다.
'루프 7회차'
은지의 눈이 커졌다. 다른 곳에도 있었다.
'루프 5회차' '루프 9회차'
그녀는 급하게 눈을 들었다. 주변 승객들은 아무도 그 글자들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본다고 해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그 글씨가 그들의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은지의 불안감은 다시 증폭되었다.
15:00, 16:00, 17:00.
시간이 계속 흘렀다. 차량 내 온도는 점점 올라갔다. 사람들은 지쳐 있었다. 은지는 벽에 새겨진 다른 글씨들을 찾아냈다.
'루프 1회차' '루프 3회차' '루프 6회차'
최소 6번은 이런 일이 반복되었다는 뜻이었다. 6번의 루프. 6번의 24시간. 그럼 지금은 몇 번째인가?
18:00경, 준호의 리더십이 완전히 붕괴되었다.
"우리가 여기서 죽는 거 아니야?"
누군가가 물었다. 준호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의 침착함은 사라졌고, 남겨진 것은 두려움뿐이었다.
최수진이라는 젊은 여자가 울기 시작했다. 그녀는 휴대폰을 들었다가 놨고, 다시 들었다가 놨다. 신호는 여전히 없었다.
"가족들이 뭐라고 생각할까?"
아무도 답하지 않았다.
19:00경, 조명이 또 깜박였다. 이번엔 더 길었다. 10초. 차량 내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러고 나서 다시 불이 켜졌다.
19:30경, 은지는 또 다른 글자들을 발견했다. 그리고 가장 최근인 듯한 글자도 있었다.
'루프 12회차'
은지의 손이 떨렸다.
그 생각을 하는 순간, 시간이 정확히 20:00을 가리켰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비명을 질렀다.
차량 뒷부분에 타고 있던 노숙인 할아버지였다. 그의 비명은 동물적이고 절박했다. 죽음 그 자체를 담은 소리였다.
모든 승객들의 시선이 할아버지에게 집중되었다.
"뭐가… 뭐가 됐어?!"
준호가 할아버지에게 다가갔다. 할아버지의 얼굴은 창백했다. 아니, 반투명했다. 마치 유리창 너머로 보는 것처럼, 그의 피부가 흐릿해지고 있었다.
"뭐… 뭐야… 이게…"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의 손을 보니, 손가락이 하나씩 투명해지고 있었다. 마치 그의 존재가 이 세상에서 지워지고 있는 것 같았다.
은지는 움직일 수 없었다. 다른 승객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그 광경을 바라만 봤다.
할아버지의 몸이 계속 투명해졌다. 가슴, 복부, 다리. 마지막에는 얼굴만 남았다. 그 얼굴은 극도의 공포로 일그러져 있었다.
"제발… 누군가…"
그 말이 할아버지의 마지막 말씀이었다.
그리고 그가 사라졌다.
완전히. 흔적 없이.
남겨진 것은 그의 낡은 짐과, 공중에 흩어진 먼지뿐이었다.
차량 내 침묵이 깨졌다. 비명과 울음이 터져 나왔다. 누군가는 계단을 내려갔고, 누군가는 문을 두드렸다. 준호는 여전히 할아버지가 있던 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은지는 그 모든 것을 보고 있었지만, 마치 투명한 벽 너머에 있는 것처럼 느껐다. 그녀의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할아버지의 짐에 다가갔다.
그 짐 옆에는 작은 일기장이 있었다.
은지가 손을 뻗었을 때, 그 순간이 다시 돌아오고 싶었다. 할아버지가 사라지기 직전으로. 시간을 되돌려서, 그를 구하고 싶었다.
"돌려줘…"
그 말이 입에서 나왔을 때, 세상이 멈췄다.
모든 소리가 끊겼다. 비명도, 울음도, 숨소리도 없었다. 차량 내의 모든 것이 얼어붙었다. 사람들의 몸, 떨어지던 눈물, 흔들리던 손잡이. 모든 것이.
은지만이 움직일 수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거꾸로 흐르기 시작했다.
할아버지의 투명한 몸이 다시 불투명해졌다. 그의 손가락이 다시 돌아왔고, 다리가, 가슴이, 얼굴이 되돌아왔다. 그의 비명이 역으로 흘러갔다. 마치 테이프를 거꾸로 감는 것처럼.
그리고 시간이 멈췄다.
할아버지는 다시 살아 있었다. 여전히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이었지만, 적어도 존재하고 있었다.
은지는 숨을 쉬지 못했다. 그녀의 가슴이 격렬하게 뛰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그녀가 뭘 한 건가?
그 순간, 다른 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차량 중앙에 있던 박민지가 갑자기 몸을 구부렸다. 극도의 고통이 그녀의 얼굴을 장악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이 할아버지처럼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아… 아니… 뭐가…"
민지의 비명이 할아버지의 비명을 대체했다.
은지는 깨달았다.
한 사람을 살리면, 다른 누군가가 죽는다.
그 규칙이 이 루프의 본질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녀가 방금 저지른 일이, 박민지의 죽음을 초래했다는 것을.
민지가 완전히 사라졌다. 은지는 그 자리에 남겨진 것들을 봤다. 지갑. 휴대폰. 반지. 누군가의 온전한 인생이 지우개로 지워지듯 사라졌다.
은지의 몸이 경직되었다. 구토감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손으로 입을 막았지만, 이미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투명해지는 건 아닐까? 아니다. 아직 아니다. 손가락은 여전히 불투명했다. 하지만 그것도 시간 문제인 것 같았다.
차량이 흔들렸다. 아니, 그렇게 느껴졌다. 은지의 시야가 흐릿해졌다. 실신 직전이었다. 그녀는 손잡이를 잡았다. 손잡이는 차갑고 뜨거웠다. 감각이 뒤바뀌고 있었다.
"뭐가… 뭐가 됐어?"
준호가 은지를 바라봤다. 그의 눈에는 의심이 가득 차 있었다. 아니, 두려움이었다. 마치 은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뭔가 다른 것을 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은지는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자신이 누구를 죽였는지 말할 수 없었다.
"당신이 한 거죠?"
차장 유진이 옆에 나타났다. 은지는 자신이 언제부터 그를 봤는지 알 수 없었다. 아까는 그곳에 없었는데.
유진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 있었다. 그것은 축하의 미소가 아니었다. 인정의 미소도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오래된 시나리오가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음을 확인하는 미소였다. 그리고 그 미소 뒤에는 냉담함이 숨어 있었다. 더 깊이, 뭔가 다른 감정이 있었다. 마치 이것을 이미 여러 번 본 사람의 표정이었다.
"뭐예요?"
은지가 겨우 목소리를 냈다. 그것은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것 같았다.
"타임백. 당신이 방금 사용한 능력이에요."
유진이 말했다. 그의 눈빛은 예리했다. 마치 은지의 영혼을 관통하는 것처럼.
"한 사람을 살리면, 다른 누군가가 그 자리에서 소멸한다. 이건 선택이 아니라 규칙이에요."
유진이 박민지의 물건들을 바라봤다. 그 물건들을 보는 그의 표정은 슬픔도, 분노도 아닌 것 같았다. 마치 불가피한 손실을 받아들이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 표정 깊숙한 곳에는 뭔가 다른 것이 있었다. 죄책감인가? 아니면 익숙함인가?
"박민지라는 여자 있죠? 28세, 마케팅 회사 다니고, 약혼자가 있고, 내일이 약혼식인 여자."
유진이 천천히 말했다.
은지의 가슴이 철렁했다. 그 여자의 정보까지 알고 있다니.
"어... 어떻게..."
"당신이 할아버지를 살렸을 때, 그 대가로 박민지가 죽어야 했어요. 시스템이 그렇게 작동하거든요."
유진의 목소리는 담담했고, 그 담담함이 더 무서웠다.
"그럼... 내가 사람을 죽인 거네요?"
은지가 반복했다. 그 말은 질문이자 고백이었다.
"살려달라고 외쳤으니까요."
유진의 대답이 은지를 짓눌렀다. 그녀의 손이 떨렸다. 자신의 손이 아닌 것 같았다. 누군가 다른 사람의 손이 자신의 팔에 붙어 있는 것 같았다.
차량의 조명이 깜박였다. 이번엔 패턴이 달랐다. 짧고 길고 짧고 길고. 마치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았다. 은지는 그것을 봤다. 다른 승객들은 보지 못했다.
"당신은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유진이 다시 말했다.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말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말의 의미가 달라졌다. 이것은 질문이 아니라 확인이었다.
은지는 그를 봤다. 그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마치 이 모든 것을 여러 번 본 사람처럼. 아니, 직접 겪은 사람처럼.
"당신은 누구예요?"
은지가 물었다.
유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박민지의 물건들을 바라봤다.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은지는 그것을 봤다. 그것은 동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식이었다. 마치 자신이 초래한 일을 다시 확인하는 표정이었다.
"이제 뭐가 되는 거예요?"
은지가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아이처럼 떨렸다.
"당신은 계속 선택해야 해요."
유진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천천히 이어졌다.
"24시간마다 누군가가 사라질 거고, 당신은 그들을 살릴 수도, 죽음에 내맡길 수도 있어요. 하지만 한 가지 기억하세요."
그는 은지를 바라봤다.
"당신이 한 명을 살리면, 다른 누군가가 죽는다는 것을."
은지는 차량을 둘러봤다. 승객들은 여전히 혼란스러워했다. 일부는 울고 있었고, 일부는 비상구를 찾고 있었다. 그 중 누구도 박민지가 사라졌다는 것을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마치 그 순간이 이미 과거인 것처럼.
"이건 악몽이에요."
은지가 중얼거렸다.
"네. 악몽이에요."
유진이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동의가 아닌 확인이 담겨 있었다.
"당신은?"
"나는 그냥 차장이에요."
유진이 말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차장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암시했다. 마치 그 직책 뒤에 뭔가 더 큰 것이 숨어 있는 것처럼. 그는 박민지의 물건들에서 시선을 돌렸다. 그 물건들을 외면하는 것처럼.
"당신은 10번의 기회가 있어요."
유진이 말했다.
"10번?"
"타임백을 10번 사용할 수 있어요. 그 이후로는 어떻게 되는지... 나도 모르겠어요."
은지의 가슴이 철렁했다. 10번. 그 숫자가 왜 그렇게 절망적으로 들렸을까? 마치 그것이 자신의 남은 생명처럼.
"내가 왜 이런 능력을..."
"모르겠어요. 그냥 당신이 가지고 있어요."
유진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차량 앞으로 걸어갔다. 은지는 그의 뒷모습을 봤다. 유진의 어깨가 움직였다. 마치 한숨을 쉬는 것처럼. 그리고 그 한숨 속에는 너무나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은지는 박민지의 물건들을 다시 봤다. 지갑을 집어 들었다. 그것은 여전히 따뜻했다. 아니,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었다.
지갑을 열었다. 약혼 사진이 있었다. 젊은 여자와 남자가 웃고 있었다. 그 여자가 박민지였을까?
은지는 사진을 바라봤다. 그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마치 뭔가가 그것을 지워버리는 것처럼. 그녀의 손이 떨렸다. 이것이 자신이 죽인 사람이다. 자신의 선택으로 소멸시킨 누군가다.
구토감이 다시 올라왔다. 은지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하지만 이미 눈물이 흘렀다. 그것은 슬픔이 아니었다. 공포였다.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에 대한 공포였다.
차량의 조명이 또 깜박였다. 이번엔 패턴이 더 복잡했다. 짧고 짧고 길고 길고 짧고. 마치 암호를 보내는 것 같았다. 은지는 그것을 봤다. 그리고 그것이 뭔가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았다.
19:45경, 조명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은지는 이제 알았다. 이것은 정상이 아니다.
그 시간이 경과하면서, 차량 내 공기가 미묘하게 변했다. 온도는 같은데 뭔가 다른 것 같았다. 마치 공기 자체가 다른 물질로 변하는 것 같았다. 은지의 피부가 따끔거렸다.
그리고 벽에 새로운 글씨가 나타났다.
'루프 13회차'
은지는 그것을 봤다. 아직 이 루프가 끝나지 않았는데, 벽에는 이미 다음 루프의 번호가 새겨져 있었다.
유진이 다시 나타났다. 그는 은지를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전과 달랐다. 마치 뭔가를 확인한 것 같았다.
"당신은 10번의 기회가 있어요."
유진이 다시 말했다.
"그리고 지금 당신은 1번을 사용했어요."
은지의 손이 떨렸다.
"9번이 남았어요."
유진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뭔가 다른 것이 있었다. 마치 자신도 이 숫자를 세어본 사람처럼.
"다음 24시간이 올 거예요."
유진이 말했다.
"그리고 또 누군가가 사라질 거고, 당신은 또 선택해야 할 거예요."
은지는 차장실 방향을 바라봤다. 유진이 문을 닫았다. 하지만 그 문 너머에서 뭔가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마치 다음 24시간을 준비하는 것처럼.
차량의 조명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아니, 그런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은지는 이제 알았다.
이것은 정상이 아니다.
이것은 저주다.
그리고 자신은 그 저주의 일부가 되었다.
9번의 선택이 남았다. 9번의 기회. 그리고 그 이후는?
은지는 박민지의 약혼 사진을 다시 봤다. 그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내일 약혼식이었을 그 남자.
그리고 은지는 깨달았다.
자신은 누군가의 미래를 지워버렸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돌릴 수 없다.
9번의 기회로 뭘 할 수 있을까?
차량이 다시 흔들렸다. 아니, 그렇게 느껴졌다. 은지의 시야가 흐릿해졌다. 그리고 그 흐릿함 속에서, 새로운 목소리들이 들렸다.
"저기 누가 또 사라졌어?"
"뭐? 누가?"
"모르겠어. 아까보다 사람이 적은데?"
은지는 눈을 들었다. 승객들이 서로를 세고 있었다. 그들은 아직 박민지가 사라졌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곧 깨달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다음 루프의 시작이 될 것이다.
은지는 손가락을 봤다. 아직 투명하지 않았다. 아직 존재했다.
하지만 얼마나 더 존재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