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 승리, 그리고 음모
판사의 목소리가 법정 전체를 가로질렀다.
"피고들은 연대하여 원고들에게 총 3억 2,400만 원을 배상하고, 앞으로 위법한 공제를 중단할 것을 명합니다."
침묵이 있었다. 그 침묵은 길지 않았다.
박민지가 먼저였다. 손으로 얼굴을 덮고 어깨가 들썩였다. 옆에 앉은 강태진이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고, 그 손이 함께 떨렸다. 뒷줄에서 이혜진이 고개를 숙였다. 처음엔 눈물인지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옆에 앉은 상담사 둘이 그녀를 감싸면서, 법정 전체가 알게 되었다. 을들이 울고 있다는 것을.
37명의 근로자 중 절반이 눈물을 흘렸다. 누군가는 다른 사람의 손을 잡았다. 누군가는 천장을 바라봤다. 법정 기록관이 황급해하며 녹음을 멈추려 했다가 판사의 시선에 멈춰섰다.
이준호는 박민지를 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처음 본 표정이었다. 편의점에서 월급 계산서를 펼쳤을 때의 그 공포와 분노가 아니었다. 이것은 다른 것이었다. 이것은 자신이 법관으로서 30년간 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 판결문에는 절대 실려오지 않는 것.
"항소기한은 14일입니다. 폐정합니다."
판사가 물러났다. 그제야 법정이 움직였다.
서민준이 일어섰다.
그는 이준호에게 다가왔다. 천천히. 마치 시간을 재는 듯이. 자신의 변론인들이 뒤따랐고, 피고 기업들의 담당자들이 휴대폰을 들었다. 긴급 회의 소집. 그들의 표정은 회의적이 아니었다. 분노했다.
서민준이 이준호의 앞에 섰다.
"대법관님."
한 단어였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법정에 남아 있던 을들이 고개를 들었다.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었다. 박민지가 이준호를 봤다.
"정체를 숨기신 이유가 뭡니까?"
서민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오히려 그것이 더 위협적이었다. 이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말이 없었다. 아니, 있었다. 하지만 이 순간이 아니었다.
"당신은 이미 충분히 하셨습니다. 이제 그만 하시죠."
서민준이 명함을 내밀었다. 이준호는 받지 않았다.
"법정 조력인으로서 제 역할을 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왜 법관처럼 법을 읽습니까? 왜 법정 조력인이 법관이 하는 법률 조언을 합니까?"
이준호가 입을 다물었다. 현장에 기자들이 몰려왔다. "조력인이 법관이었다는 게 사실입니까?" "어떤 법관이었습니까?" "왜 신분을 숨겼습니까?"
박민지가 이준호를 잡아당겼다. "어, 어쩌신 거예요? 법관이셨어요?"
이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기자들의 목소리가 겹쳤다. 강태진이 박민지를 데리고 나가려 했다. 이혜진이 서 있었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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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원의 창문은 닫혀 있었다. 이준호가 밖을 보지 않기 위해서였다.
휴대폰은 울리지 않았다. 아무도 전화하지 않았다. 기자들은 신원 확인을 하느라 바빴을 것이다. 박민지는 아마 이준호를 향한 감정을 정리하느라 바빴을 것이다. 강태진은 판결 소식을 가족에게 알리느라 바빴을 것이다. 이혜진은 그냥, 바빴을 것이다.
대신 킹크 킹크 하는 노크음이 있었다.
김소연이었다. 그녀는 고시원의 계단을 올라올 때부터 뭔가 다르게 움직였다. 뒤를 보며 걸었다. 계단에서 멈춰 휴대폰을 확인했다. 그리고 이준호의 방에 들어왔을 때, 문을 꼭 닫았다.
"노동청에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김소연이 의자에 앉지 않았다. 서 있었다. 마치 도망칠 준비를 하는 것처럼.
"어떤 지시입니까?"
"더 이상 이 건에 개입하지 말라는 겁니다. 조사 결과 보고도 제출하지 말라고. 저는 부서장 명령으로 모든 기록을 삭제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이준호가 일어섰다.
"언제?"
"판결이 나온 지 2시간 뒤. 부서장이 직접 불렀습니다."
김소연이 작은 폴더를 내밀었다. USB였다.
"제가 말했던 이상한 일들. 더 깊습니다."
이준호가 USB를 받았다. 손가락이 작은 기기 위에서 멈춰섰다.
"3년을 기다렸습니다."
김소연의 목소리가 낮았다.
"당신이 나타났을 때, 저는 이게 밖으로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판결이 나온 지 2시간 만에 이 모든 게 삭제되라는 지시가 내려왔어요. 그래서..."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당신이 이것을 가져가셔야 합니다. 저는 공식 기록을 지울 겁니다. 하지만 당신은 이것으로 싸워야 합니다."
"이것이 노출되면 당신은..."
"이미 노출되었습니다. 부서장이 저를 의심하고 있습니다. 시간 문제예요."
이준호가 손을 뻗어 김소연의 팔을 잡았다.
"왜 이렇게까지 하십니까?"
김소연이 눈을 감았다.
"제 책임입니다. 3년을 방치했으니까요. 박민지 씨가 편의점에서 계산서를 펼쳤을 때, 저는 이미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도..."
목소리가 떨렸다.
"그런데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신고하면 제 경력이 끝날까봐. 그 생각만 했어요. 당신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이준호는 말하지 않았다. 그럴 말이 없었다.
"이제는 제가 할 수 있는 게 이것뿐입니다. 당신을 믿습니다. 당신이라면 할 수 있을 거라고."
김소연이 나갔다. 이준호는 USB를 들고 노트북을 켰다. 파일을 열었다. 스프레드시트였다. 각 기업별로 정렬되어 있었다. 편의점 체인 5개, 배달 플랫폼 3개, 콜센터 아웃소싱 업체 7개.
이준호의 손이 멈췄다. 한 항목이 눈에 들어왔다. 노동청 과장 이석준의 자녀 학비 송금 기록. 2023년 3월부터 매달 500만 원. 송금처는 바이탈 아웃소싱.
스프레드시트의 기업 목록을 다시 본다. 편의점 3개 체인의 법무담당자를 검색했다. 모두 정음 법무법인의 변호사들이었다. 배달 플랫폼 2개도 동일했다. 콜센터 아웃소싱 업체 5개 중 3개도.
한 법무법인이 15개 기업의 대리인이었다.
이준호는 정음의 홈페이지를 켰다. 변호사 명단이 있었다. 서민준. 그리고 그 위에 '파트너 변호사'라는 표기와 함께 '민준호'.
"민준호?"
이름을 클릭했다. 약력이 떴다.
'민준호 변호사 / 서울대 법대 / 사법시험 1차 합격 / 노동부 정책자문위원 / 국회 입법자문 활동'
이준호의 손이 멈췄다. 노동부 정책자문위원. 국회 입법자문.
스프레드시트로 돌아갔다. "연루 노동청 인사: 23명". 그 목록을 펼쳤다. 이름들 옆에는 직급이 있었다. 과장, 주무관, 심사관... 그리고 맨 위에.
"부국장 이석준 / 노동부 정책자문위원회 위원장"
"노동부 정책자문위원회"라는 문구가 다시 연결됐다. 민준호 변호사의 약력에서. 정음의 파트너 변호사가 노동부의 정책을 자문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정책자문위원회의 위원장이 노동청 부국장이었다. 그리고 그 부국장이 이 카르텔의 중심에 있었다.
이준호는 엑셀에 새로운 시트를 만들었다. 제목: "구조 분석".
맨 위에 적었다.
"정음 법무법인 ← 민준호 파트너 ← 노동부 정책자문 ← 이석준 부국장 ← 카르텔 보호"
그리고 그 옆에 화살표를 그었다.
"? ← 정현우 (바이탈 아웃소싱 CEO)"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정현우'라는 이름이 떴다. 이준호는 전화를 받았다.
"이준호님."
정현우의 목소리에는 웃음이 없었다.
"판결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당신이 이겼습니다. 우리는 졌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받아들일 겁니다."
이준호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당신이 알아야 할 게 하나 있습니다."
정현우가 말을 끊었다. 배경에서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유리잔일까. 아니면 다른 것일까.
"당신의 신분이 노출되는 것은 시작일 뿐입니다. 의뢰인들도 보복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박민지, 강태진, 이혜진. 그들의 이름과 주소는 이미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이준호의 손이 경직됐다.
"이것이 위협입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당신이 앞으로 무엇을 하든, 그들이 안전할 거라는 보장은 없다는 뜻입니다."
전화가 끊겼다.
이준호는 다시 스프레드시트를 봤다. 15개 기업. 23명의 관료. 그리고 그 뒤에 있는 것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있다는 것은 알았다.
창문 밖으로 서울의 밤이 내려앉고 있었다.
고시원의 형광등이 깜빡였다. 이준호는 스프레드시트를 다시 스크롤했다. 15개 기업. 23명의 관료. 그리고 그 아래.
"추정 연루 정치인: 파악 중"
미완성이었다. 김소연이 다 끝내지 못한 부분이었다. 하지만 그 한 줄만으로도 충분했다. 이것이 단순한 노동 착취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이것이 정치권까지 닿아 있다는 것을.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이번엔 박민지였다.
"형... 아니, 그냥 이준호님. 저... 울었어요. 법정에서."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맞습니다."
"판사님이 우리가 이겼대요. 근데 이게 뭐예요? 정말 이기는 거예요? 진짜?"
박민지의 말이 겹쳤다. 뒤에서 누군가 축하한다고 외쳤다. 강태진의 목소리였다.
"형, 있잖아요. 제 엄마가 물었어요. '너 이 사람 누구냐'고. 저도 몰라요. 근데... 뭔가 다르시잖아요. 법관이라고? 진짜?"
이준호는 대답하지 못했다. 정현우의 말이 계속 맴돌고 있었다. '그들의 이름과 주소는 이미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박민지."
"네?"
"당신은 충분히 했습니다. 앞으로 기자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연락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땐 저에게 먼저 말씀하세요."
"... 뭐가 어떻게 되는 건데요?"
"지금은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과 강태진, 이혜진이 안전해야 합니다. 조심하세요. 특히 모르는 사람의 연락이나 접근에 주의하세요."
박민지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 뭔가 이상한데요. 우리가 이겼는데 왜..."
"당신들은 이겼습니다. 그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싸움이 끝난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전화를 끊었다. 이준호는 노트북 옆의 수첩을 집었다. 손글씨로 적어둔 것들이 있었다. 편의점 체인의 본사 주소, 배달 플랫폼의 실명, 콜센터의 CEO 정보. 그리고 그 옆에 메모.
'정음 법무법인 ← 정현우의 상사? 확인 필요'
그 아래에 새로운 메모를 추가했다.
'박민지 주소 - 위험 / 강태진 주소 - 위험 / 이혜진 주소 - 위험'
강태진이 전화했다.
"형! 뉴스 봤어? 우리 이겼어!"
배경음이 시끄러웠다. 누군가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어디 계십니까?"
"식당이에요. 박민지 언니, 이혜진 언니들이 함께 있어요. 다들 울고 웃고... 진짜 신기해요. 우리가 이겼다니."
이준호의 목소리는 낮았다.
"강태진. 지금 바로 박민지와 이혜진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세요. 누구도 만나지 마세요. 기자든 누구든."
"어? 뭐가 어떻게 되는 건데요?"
"조심하세요. 모든 사람이 이 승리를 기뻐하지 않을 것입니다. 앞으로 회사에서, 언론에서, 혹은 다른 곳에서 질문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땐 저에게 먼저 연락하세요. 그리고 집에 있을 때는 문을 열지 마세요."
"이준호님, 뭐가 어떻게 되는 건데요? 우리가 이겼는데..."
"당신들은 이겼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 알겠습니다."
끊었다. 이준호는 다시 스프레드시트를 봤다. 15개 기업. 23명의 관료. 그리고 파악 중인 정치인들.
노트북 화면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배터리가 나갔다. 이준호가 충전기를 찾으려다 멈췄다.
창 밖을 봤다. 고시원 앞 골목의 편의점이 보였다. 밤 11시였지만 형광등은 여전히 켜져 있었다. 그 안에서 알바생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계산대 앞에서, 선반을 정렬하며. 그들도 내일 아침이면 월급 계산서를 받을 것이다. 그 계산서에도 공제 항목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 중 누군가는 박민지처럼 이 싸움에 참여할 것이다. 혹은 이미 참여하고 있을 것이다.
이준호는 노트북을 다시 켰다. 배터리 표시가 빨간색이었지만, 충전기를 찾을 때까지 버틸 것이다.
스프레드시트 맨 아래에 새로운 메모를 추가했다.
"37명. 3억 2,400만 원. 이것이 끝인가?"
그리고 그 아래에.
"15개 기업 → 23명 관료 → ? 정치인 → ?"
휴대폰이 울렸다. 알 수 없는 번호였다. 이준호는 받았다.
"이준호님?"
여성의 목소리였다. 낮고,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그 안에는 무언가 단호한 것이 있었다.
"누구십니까?"
"제 이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는 노동부의 다른 부서에 있습니다. 김소연이 당신에게 준 파일에 대해 말이에요."
이준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파일은 불완전합니다. 더 많은 것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신이 그것을 꺼내면, 당신도 위험하고, 김소연도 위험합니다. 그리고 그 37명도요."
"당신은 누구십니까?"
"저는 김소연처럼 안에서 보고 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당신과 다르게, 저는 아직 내부에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경고하려고 합니다."
여성이 말을 멈췄다.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어디론가로 이동하는 것 같았다.
"증거를 공개하기 전에 먼저 언론 채널을 확보하세요. 신뢰할 수 있는 기자, 언론사. 그리고 당신의 법관 신분을 역으로 활용하세요."
"어떻게 말입니까?"
"지금 당신은 법관이 아닙니다. 그것이 당신의 가장 큰 무기입니다. 법조인의 세계 밖에서만 당신은 자유롭습니다. 시스템 밖에서만 시스템을 바꿀 수 있습니다."
여성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당신이 누구인지는 이미 알려졌습니다. 대법관 이준호. 법조인의 세계에서는 유명한 분이죠. 하지만 지금 당신은 법관이 아닙니다. 당신은 그냥 을입니다. 그것이 당신의 무기입니다. 을이기 때문에 을들과 싸울 수 있고, 을들이 당신을 믿습니다."
"그럼 당신은?"
"저는 아직 을이 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것만 할 수 있어요. 당신에게 경고하는 것. 당신이 나가야 한다는 것을. 시스템 밖으로."
전화가 끊겼다.
이준호는 한동안 휴대폰을 들고만 있었다. 그 여성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녀도 안에서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패배하고 있었다.
노트북 화면의 스프레드시트를 다시 봤다. 15개 기업. 23명의 관료. 그리고.
"? ← 정현우"
정현우가 어디에 연결되어 있는지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시간 문제였다. 이준호는 알고 있었다. 시스템은 항상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겉으로는 분산되어 있지만, 내부에서는 밀실 같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이준호는 새로운 메모를 추가했다.
"시스템 밖으로 나간다 = ?"
그 아래에 몇 가지를 나열했다.
"1. 언론 채널 확보 (신뢰할 수 있는 기자? 언론사?)" "2. 증거 보관 (안전한 장소? 복사본?)" "3. 법관 신분 공개 거부 vs 역이용 (선택?)"
고시원의 형광등이 다시 깜빡였다. 이번엔 꺼졌다. 이준호는 어둠 속에서 노트북의 빛만으로 계속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아래층에서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방세를 낼 수 없는 누군가의. 그것은 박민지의 울음이 아니었다. 박민지는 지금 집으로 돌아가고 있을 것이다. 이것은 다른 을의 울음이었다. 이 고시원에 사는 수백 명 중 한 명의.
이준호는 다시 엑셀을 켜고, 새로운 시트를 만들었다.
제목: "2단계"
그리고 적었다.
"37명 → ? 한 기업 → 15개 기업. 그 뒤에는?"
그리고 그 아래에.
"내가 할 수 있는 것: 1. 언론 접촉 (기자 확보) 2. 증거 안전 보관 (복사본 제작 및 분산) 3. 법관 신분 공개 거부 (을으로 남기) 4. 의뢰인들 보호 (경고 및 안전 조치) 5. 추가 증거 수집 (정현우와 민준호의 연결고리)"
답은 아직 완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질문들이 있는 한, 이준호는 계속 파고들 것이다.
핸드폰이 울렸다. 이번엔 서민준이었다.
"대법관님."
목소리에는 경의심도, 적개심도 없었다. 그저 담담했다.
"저와 한 번 만나시겠습니까?"
"어디서?"
"서울 강남 정음 법무법인. 내일 오후 2시. 혼자 오시면 됩니다."
이준호는 대답했다.
"가겠습니다."
전화가 끊겼다. 이준호는 노트북을 닫았다. 화면이 어두워졌다. 그 속에서 고시원의 형광등이 다시 켜졌다. 이번엔 더 밝게.
내일 오후 2시. 정음 법무법인.
이준호는 알고 있었다. 이것이 함정일 수도 있다는 것을. 하지만 알아야 할 것도 있었다. 서민준이 자신을 무엇으로 보고 있는지. 그리고 그 뒤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을의 나라에서 을이 싸우는 방법은 간단하다. 맞서는 것이다. 어떤 함정이든. 왜냐하면 을은 이미 질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준호는 수첩에 메모를 추가했다.
"내일 2시 - 정음 법무법인 방문 준비물: - USB 사본 (안전한 장소에 보관) - 음성 녹음 준비 - 탈출 경로 확인 - 의뢰인 긴급 연락처"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것은 끝이 아니다. 이것은 시작이다."
고시원의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봤다.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그것도 변하지 않았다. 어제나 오늘이나. 하지만 다른 것들은 변했다. 37명이 이겼다. 그리고 더 많은 것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의뢰인들의 안전이 위협받고 있었다. 그리고 이준호는 선택을 해야 했다.
시스템 밖으로 나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을이 을을 위해 싸운다는 것이 무엇인지.
내일, 정음 법무법인에서 만날 서민준은 무엇을 말할 것인가. 그리고 그 뒤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가.
이준호는 눈을 감았다. 하지만 잠들지 않았다. 을의 나라의 밤은 길었다.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