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학장실의 폭발이 진정되자, 레이의 눈은 여전히 파란 빛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벨라드는 무릎을 꿇었지만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 웃음이 더 무섭다고 느꼈다.
"좋아. 정말 좋아."
벨라드가 천천히 일어섰다. 그의 손에 검은 마법이 소용돌이쳤다.
"그럼 이제 보여줄 시간이군. 진정한 너 자신을."
벨라드의 손이 뻗어졌다. 검신의 기억이 울부짖었다. 레이는 그 목소리를 느꼈다. 무언가를 받으라고.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벨라드의 손을 잡으라고.
그 순간, 레이의 손이 움직였다. 하지만 벨라드의 손을 향해 나아가는 게 아니었다.
거절이었다.
"아니야."
목소리는 낮았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검신의 울음이 뇌를 가득 채웠지만, 그 아래에서 뭔가 다른 게 울렸다. 그건 레이였다.
"넌 날 정해놨어. 처음부터. 검신이 되라고. 아니면 그 반대로 완전히 사라지라고. 하지만 난 그걸 거부한다."
벨라드의 표정이 흐렸다.
"넌 내게 선택을 강요했어. 운명을 강요했어. 하지만 난 다르게 선택할 권리가 있다."
레이의 몸이 떨렸다. 검신의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그 안에는 수백 년의 전투, 수천 번의 검술, 무수한 마법이 있었다. 모두 강력했다. 모두 완벽했다. 모두 검신의 것이었다.
레이는 그걸 거절했다.
"그럼 뭘 선택하는 건데?"
벨라드가 웃으며 물었다. 검은 마법이 더 거세졌다. 학장실의 벽이 갈라졌다.
레이는 눈을 감았다.
검신의 기억을 버리지는 않았다. 다만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 사이에서 무언가가 울렸다. 검신도 아니고 봉인된 강자도 아니고, 단지 '레이'라고 불렸던 낙제생의 기억이.
가장 약한 기억이었다.
도서관 창고에서 처음 검을 집었을 때의 손맛. 옥상에서 혼자 검술을 연습했을 때의 어색함. 토마스가 옆에 있어줬을 때의 따뜻함. 카린의 눈물. 리안 교사의 낡은 책.
그 모든 게 약했다. 하지만 그건 레이의 것이었다.
검신의 기억이 아니라 선택이었다.
벨라드의 검은 마법이 날아왔다. 공간을 갈라내는 힘으로. 레이는 검신의 검술을 사용하지 않았다. 단지 손을 들었다.
흰 빛이 터졌다.
그건 검신의 마법이 아니었다. 그건 레이의 신체였다. 봉인된 신체에서 나오는 본래의 마나였다. 검신의 기억으로 강화되지 않은, 순수한 레이의 마나가.
벨라드의 마법이 부서졌다.
"뭐야—"
벨라드의 말이 끝나기 전에 학장실의 문이 부숴졌다. 토마스가 들어왔다. 그 뒤로 카린이. 그 뒤로 기숙사의 18명이.
그들의 눈도 빛나고 있었다.
"우리도 선택했어."
토마스가 말했다. 그의 손에 초록색 빛이 모였다. 치유의 마법이 아니었다. 봉인된 진정한 힘이었다.
"우리는 더 이상 억압받지 않아."
카린이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 떨림이 없었다. 1반 엘리트가 아니라 자신의 선택을 한 한 명의 학생으로서.
18명의 손이 모였다. 학장실을 채운 빛은 이제 하나였다.
벨라드가 무릎을 꿇었다. 진짜로.
하지만 그는 웃고 있었다.
"좋아. 정말 좋아."
그의 목소리에는 패배감이 없었다. 오히려 만족감이 있었다.
"이건 끝이 아니야. 이건 시작일 뿐이야. 아카데미 안에서 난 졌다. 하지만 밖은 어때? 의회는 여기만 있지 않아."
벨라드가 일어섰다. 그의 몸이 검은 연기로 변했다.
"그리고 넌 여전히 내 안에 있지 않니, 검신?"
벨라드가 사라지기 전에 덧붙였다.
"그 아이도. 계속해서 너를 지배할 거야. 넌 절대 완전할 수 없어. 그게 너의 저주야."
연기가 흩어졌다. 학장실에는 18명의 학생과 레이만 남았다.
침묵이 흘렀다.
레이는 자신의 손을 봤다.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손가락을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왼손도 하나, 둘, 셋, 넷, 다섯.
"뭐 해?"
카린이 물었다.
"내가 누구인지 확인해."
레이가 대답했다.
하지만 손가락을 세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기억이 섞여 있었다. 검신의 기억과 레이의 기억이. 어느 게 진짜인지 알 수 없었다. 손가락을 세어도 그게 레이의 손가락인지 검신의 손가락인지 몰랐다.
그 순간, 카린이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레이의 심장이 뛰었다. 검신의 기억에는 없는 감각이었다. 누군가의 손을 잡고 느끼는 따뜻함. 그건 레이의 것이었다. 확실했다. 검신은 이런 걸 느껴본 적 없으니까.
"넌 여기 있어. 나랑 함께."
카린이 말했다.
"그게 증명이야."
토마스도 손을 잡았다. 그 다음 다른 학생들도. 18명의 손이 하나로 모였다.
레이는 자신이 누구인지 여전히 몰랐다. 하지만 이제는 그게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는 함께 알아가자. 우리가 누구인지."
레이가 말했다.
학장실의 창을 통해 밤하늘이 보였다. 아카데미는 조용해졌다. 의회의 조직원들은 흩어졌다. 경보음은 멈췄다. 하지만 무언가가 변했다. 아카데미가 깨어났다.
18명은 기숙사로 향했다. 파괴된 벽을 빠져나가며 복도를 걸었다. 아무도 그들을 막지 않았다. 아무도 그들을 '낙제생'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이제 그들은 그냥 학생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을 한 존재였다.
기숙사의 창에서 레이는 밤하늘을 봤다. 카린이 옆에 섰다.
"이제 뭘 할 거야?"
카린이 물었다.
"아직 모르겠어."
레이가 대답했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난 더 이상 무능한 척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야. 그리고..."
레이가 시선을 돌렸다. 밤하늘 너머, 아카데미 밖의 도시를 봤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것."
그 순간, 도시의 한쪽 구석에서 빨간 불빛이 떠올랐다. 그 옆에 초록빛이. 그 옆에 노란빛이.
레이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건 뭐야?"
카린이 물었다. 그녀도 그 불빛을 보고 있었다.
"의회의 다른 파벌인가?"
레이가 중얼거렸다. 그 불빛들은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신호를 보내는 것처럼.
"아니면..."
레이는 그 불빛들을 바라봤다. 검신의 기억을 더듬어봤다. 그 안에 이런 빛의 조합을 본 기억이 있었다. 오래된 기억이었다. 검신이 아직 검신이기 전, 뭔가 다른 이름으로 불렸을 때의.
"새로운 세력이 움직이고 있다."
레이가 완성했다.
도시의 빛들이 계속 움직였다. 아카데미 밖에서. 아직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그 빛들이 뭔지, 누가 움직이는 건지, 그들이 뭘 원하는 건지.
레이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알고 싶었다.
"내일 모두 모여. 토마스, 너희도."
레이가 말했다.
"우리가 뭘 하려는지 정하자. 아카데미 안에서 끝낼 게 아니라, 밖까지 나가야 할 것 같아."
카린이 손을 더 꽉 잡았다.
"그럼 넌 이제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상태네."
카린이 웃으며 말했다.
"검신도 아니고, 낙제생도 아니고."
"그래. 그냥 선택한 누군가야."
레이가 대답했다.
밤하늘은 여전히 검었다. 하지만 그 검음 속에 별들이 있었다. 그리고 도시의 빛들이 있었다. 빨강, 초록, 노랑. 그 빛들이 뭘 의미하는지는 아직 몰랐지만, 언젠가는 알 게 될 거라고 레이는 생각했다.
검신의 목소리는 여전히 뇌에 울렸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게 들렸다. 명령이 아니라 속삭임으로. 레이는 그 속삭임을 거절하지 않았다. 다만 한 발 뒤로 물러섰을 뿐이다.
자신의 선택을 위해서.
기숙사의 불이 켜졌다. 18명의 학생들이 자신들의 방으로 돌아갔다. 내일은 아카데미가 뭔가 다르게 움직일 거였다. 학장이 사라졌으니까. 의회의 주축이 무너졌으니까. 하지만 완전히 끝난 건 아니었다.
벨라드가 웃으며 말했다. 이건 시작일 뿐이라고.
레이는 그 말을 믿었다.
손가락을 한 번 더 세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왼손도 하나, 둘, 셋, 넷, 다섯.
10개의 손가락. 10명의 친구. 10반의 학생들.
그 수가 뭔가 의미하는 것 같았다.
밤은 깊었고, 내일은 아직 멀었지만, 레이는 잠을 청할 수 없었다. 카린이 옆에 있었고, 도시의 빛들이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고, 검신의 목소리는 조용해졌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넌 뭘 꿈꿔?"
카린이 물었다.
레이는 생각했다. 진짜 레이가 뭘 꿈꿨는지. 그 기억을 찾으려고 했다. 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검신의 기억이 너무 많아서 그 안에 레이의 꿈이 묻혀 있었다.
"모르겠어. 하지만..."
레이가 카린의 눈을 봤다.
"이제는 그걸 알아갈 시간이 있을 것 같아."
도시의 빛들이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빨강, 초록, 노랑. 그리고 그 사이에 무언가 더 있을 것 같았다. 아직 보이지 않는 빛들이.
1권의 문은 닫혔다.
하지만 2권의 문은 아직 열리지 않았다.
그 사이의 어둠 속에서 레이는 서 있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면서도, 자신의 선택이 뭔지는 아는 채로.
벨라드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파란 빛이 물러섰다. 레이의 눈이 다시 검은색으로 돌아왔다. 아니, 돌아오는 중이었다. 파란색이 점점 줄어들면서 동공 가장자리에만 남아 있었다. 마치 파도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모양으로.
"넌 내게 선택을 강요했어."
레이의 목소리였다. 검신의 중얼거림도, 검신의 명령도 아닌. 레이 자신의 목소리였다. 가늘지도, 떨리지도 않는. 다만 차가웠다. 선택이 만드는 차가움으로.
벨라드가 웃음을 멈췄다. 그의 얼굴에 처음으로 혼란의 색이 스쳤다. 마치 계산기가 갑자기 잘못된 수를 뱉어내는 것처럼.
"넌 검신이야. 선택이 없는 게 정상이야."
벨라드가 말했다. 그의 손이 다시 움직였다. 격리 진이 더 짙어졌다. 기숙사 전체가 파란 빛으로 감싸였다.
"넌 내 계획의 일부일 뿐이야."
레이가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발걸음이 격리 진을 헤쳤다. 파란 벽이 흔들렸다. 마치 물 위에 그려진 그림처럼. 지우기 쉬운 그림처럼.
"그래. 난 내 계획의 일부야. 하지만..."
레이가 손을 펼쳤다. 검신의 기억을 끌어올리지 않았다. 단지 자신의 손을 봤다. 다섯 개의 손가락. 떨리지 않는 손가락들. 그 안에 뭔가 있었다. 파란 빛도 아닌, 검신의 힘도 아닌, 다른 뭔가가.
"난 거기서 빠져나가기로 선택했어."
레이의 손에서 흰 빛이 나왔다.
검신의 파란색도 아니었다. 의회의 금색도 아니었다. 하얀색이었다. 마치 새벽이 밤을 밀어내는 것처럼. 마치 선택이 운명을 깨는 것처럼.
격리 진이 부서졌다.
벨라드가 물러섰다. 처음으로. 그의 얼굴에 진정한 놀람이 떠올랐다. 그의 계획에 없는 것을 본 자의 표정으로.
"불가능해. 넌 아직..."
"검신의 기억에 잠식되고 있다는 거? 알아. 그래서 난 그걸 안 썰 거야."
레이가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갔다. 하얀 빛이 더 밝아졌다.
"난 내 손으로 싸울 거야. 내 선택으로."
옥상에서 토마스가 일어섰다. 먼저 그의 몸이 떨렸다. 작은 진동이었다. 마치 누군가 안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그 다음 카린이 움직였다. 그 다음 시르바가. 그 다음 의회 요원들이.
하나둘 일어섰다.
기숙사 전체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18명의 학생들. 18개의 다른 색깔의 빛들. 빨강, 파랑, 초록, 노랑, 보라. 각자 자신들의 색깔로.
토마스의 손에서 초록 빛이 나왔다. 치유의 빛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게 사용되고 있었다. 기숙사의 봉인을 깨는 데. 각 학생의 마나 채널을 열어주는 데. 그들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데.
카린의 몸이 떨렸다. 1반의 엘리트 마법사의 몸이 떨렸다. 자신이 진짜 누구인지 깨어나는 것처럼. 봉인 아래 숨겨진 힘을 느끼는 것처럼.
"불가능해!"
벨라드가 외쳤다. 그의 손에서 금색이 터져 나왔다. 거대한 금색. 아카데미 전체를 집어삼킬 수 있는 크기의 금색.
하지만 그것도 부서졌다.
레이의 하얀 빛 앞에서.
아니, 18명의 빛 앞에서. 18개의 다른 색깔의 빛들이 하나로 모여서 벨라드의 금색을 밀어냈다. 마치 새벽의 태양이 밤을 밀어내는 것처럼. 마치 선택한 자들이 운명을 바꾸는 것처럼.
벨라드가 무릎을 꿇었다. 처음으로. 그의 계획 속에 없던 장면으로.
"이건..."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패배의 웃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마치 더 큰 뭔가를 본 자의 웃음이었다.
"이건 시작일 뿐이야. 넌 아직도 모르지? 의회는 아카데미 밖에도 있어. 전국에 있어. 세상 곳곳에 있어."
벨라드가 일어섰다. 그의 몸이 빛으로 변했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옮겨지는 것처럼.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없었던 것처럼.
"그리고 넌 여전히 검신에 잠식되고 있어. 언제까지 그걸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의 목소리가 희미해졌다.
"좋은 게임이 될 것 같아. 정말로."
벨라드가 사라졌다.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은 채로. 마치 다음 장을 기약하는 것처럼.
옥상이 조용해졌다. 18개의 빛이 천천히 줄어들었다. 학생들의 호흡이 가빠졌다. 자신들이 뭘 한 건지, 무엇이 깨어났는지 깨닫는 호흡으로.
레이는 자신의 손을 봤다.
하얀 빛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 안에 파란색이 다시 스며들고 있었다. 검신의 색이. 마치 물이 얼음으로 변하는 것처럼 천천히.
하지만 완전히는 아니었다. 손가락 끝에만 하얀색이 남아 있었다. 자신의 선택의 색이.
"너 뭘 한 거야?"
토마스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기쁨인지 두려움인지 알 수 없는 떨림으로.
"모르겠어."
레이가 대답했다. 진짜 몰랐다. 자신 안에서 뭔가 깨어났다는 건 알겠는데, 그게 뭔지는 몰랐다. 검신의 일부인지 자신의 일부인지, 아니면 둘을 합친 새로운 뭔가인지.
카린이 옆에 섰다. 그녀의 손이 레이의 손을 잡았다. 마치 그를 붙잡으려는 것처럼. 마치 그가 떠내려가지 않도록 하려는 것처럼.
"난 알아. 넌 여전히 누구인지 모르고 있어. 검신도 아니고 레이도 아닌."
카린이 말했다.
"하지만 넌 선택했어. 그 자체로 충분해."
레이가 카린의 눈을 봤다. 그녀의 눈에 뭔가 있었다. 두려움도, 기대도, 애정도 아닌. 더 복잡한 뭔가가. 자신도 모르는 감정으로 그를 보는 눈이.
"우리는 함께 알아가자. 우리가 누구인지."
레이가 말했다. 그 말이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자신도 모르고 있었다. 토마스에게? 카린에게? 18명의 각성한 학생들에게? 아니면 자신에게?
아마 모두에게인 것 같았다.
기숙사의 불이 켜졌다. 하나둘 불이 들어오면서 어둠이 물러났다. 학생들이 복도로 나왔다. 자신들이 뭐가 되었는지, 무엇이 깨어났는지 궁금해하는 얼굴로.
옥상은 점점 밝아졌다.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다. 밤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또 다른 시작이 시작되려고 하고 있었다.
그때, 레이가 멀리를 봤다. 아카데미 밖. 도시의 불빛들 사이에서.
빨간색이었다. 아주 작은 빨간 점이. 하지만 분명했다. 마치 신호를 보내는 것처럼. 마치 누군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처럼.
그리고 그 옆에 초록색이 떠올랐다. 그 옆에 노란색이. 그 옆에 파란색이.
색깔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저건 뭐야?"
카린이 물었다. 그녀도 그 불빛들을 보고 있었다.
레이의 눈이 가늘어졌다. 검신의 기억을 더듬어봤다. 그 안에 이런 조합을 본 기억이 있었다. 오래된 기억이었다. 검신이 아직 검신이기 전, 뭔가 다른 이름으로 불렸을 때의.
"의회의 다른 파벌이야."
레이가 중얼거렸다.
"아니면..."
기억이 더 깊어졌다. 더 오래된 시간으로. 검신의 기억도 아닌, 그 더 깊은 곳에 있는 뭔가로.
"새로운 세력이 움직이고 있다."
도시의 불빛들이 계속 움직였다. 아카데미 밖에서. 아직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그 빛들이 뭔지, 누가 움직이는 건지, 그들이 뭘 원하는 건지.
레이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알고 싶었다.
"내일 모두 모여. 토마스, 너희도."
레이가 말했다.
"우리가 뭘 하려는지 정하자. 아카데미 안에서 끝낼 게 아니야. 밖까지 나가야 할 것 같아."
카린이 손을 더 꽉 잡았다.
"그럼 넌 이제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상태네."
카린이 웃으며 말했다.
"검신도 아니고, 낙제생도 아니고."
"그래. 그냥 선택한 누군가야."
레이가 대답했다.
밤하늘은 여전히 검었다. 하지만 그 검음 속에 별들이 있었다. 그리고 도시의 빛들이 있었다. 빨강, 초록, 노랑, 파랑. 그 빛들이 뭘 의미하는지는 아직 몰랐지만, 언젠가는 알 게 될 거라고 레이는 생각했다.
검신의 목소리는 여전히 뇌에 울렸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게 들렸다. 명령이 아니라 속삭임으로. 마치 둘이 함께 길을 걷는 것처럼. 마치 같은 몸 안에서 다른 선택을 하고 있는 것처럼.
레이는 그 속삭임을 거절하지 않았다. 다만 한 발 뒤로 물러섰을 뿐이다.
자신의 선택을 위해서.
기숙사의 불이 모두 켜졌다. 18명의 학생들이 자신들의 방으로 돌아갔다. 내일은 아카데미가 뭔가 다르게 움직일 거였다. 학장이 사라졌으니까. 의회의 주축이 무너졌으니까. 하지만 완전히 끝난 건 아니었다.
벨라드가 웃으며 말했다. 이건 시작일 뿐이라고.
레이는 그 말을 믿었다.
손가락을 한 번 더 세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왼손도 하나, 둘, 셋, 넷, 다섯.
10개의 손가락. 10명의 친구. 10반의 학생들.
그 수가 뭔가 의미하는 것 같았다.
밤은 깊었고,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레이는 잠을 청할 수 없었다. 카린이 옆에 있었고, 도시의 불빛들이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고, 검신의 목소리는 조용해졌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넌 뭘 꿈꿔?"
카린이 물었다.
레이는 생각했다. 진짜 레이가 뭘 꿈꿨는지. 그 기억을 찾으려고 했다. 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검신의 기억이 너무 많아서 그 안에 레이의 꿈이 묻혀 있었다.
"모르겠어. 하지만..."
레이가 카린의 눈을 봤다.
"이제는 그걸 알아갈 시간이 있을 것 같아."
도시의 불빛들이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빨강, 초록, 노랑, 파랑. 그리고 그 사이에 무언가 더 있을 것 같았다. 아직 보이지 않는 빛들이.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카데미의 밤이 끝나고 있었다.
하지만 더 큰 밤이 시작되려고 하고 있었다.
1권의 문은 닫혔다.
하지만 2권의 문은 아직 열리지 않았다.
그 사이의 어둠 속에서 레이는 서 있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면서도, 자신의 선택이 뭔지는 아는 채로. 손에는 여전히 하얀 빛이 남아 있었고, 뇌에는 검신의 속삭임이 울리고 있었고, 옆에는 자신을 잡아주는 손이 있었다.
이것이 충분한지는 모르겠지만, 레이는 앞으로 나아가기로 했다.
선택의 힘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