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퇴고 본문
호텔 회의실의 형광등이 박준호의 얼굴을 냉정하게 비추고 있었다. 의자에 앉은 채 그는 박철수 감독의 말을 듣고 있었지만, 귀에 들어오는 것은 없었다. 결승전 출전 불가. 의료진의 최종 판정이었다.
의료팀장 이혜진이 MRI 영상을 들고 있었다. 박준호의 왼쪽 뇌실 주변이 붉게 표시되어 있었다.
"한 번 더 편안 시야를 발동하면 회복 불가능한 손상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결승전은 불가능합니다."
박철수 감독은 입술을 다물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준호, 들었나?"
박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움직임이 기계적이었다.
"팀이 조별리그 1위로 올라왔다. 필리핀전에서 넌 다시 편안 시야를 썼고, 그것이 우리를 1위로 만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감독의 말이 끝나기 전에 박준호는 일어섰다. 의자가 뒤로 밀렸다.
"감독님, 제가 나가겠습니다."
"어디를?"
"방으로."
박준호는 회의실을 나갔다.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호텔 방에 돌아온 박준호는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바라봤다. 왼쪽 눈을 감았다 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 공간. 스물세 해를 함께해온 어둠이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엄마였다.
"준호, 어때? 의료팀 검사 결과는?"
박준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화면이 꺼졌다 다시 울렸다. 같은 번호였다.
이번엔 받았다.
"엄마."
"응, 준호야. 뉴스에서 본 것 같은데, 혹시 결승전 못 나가는 거야?"
목소리가 떨렸다. 박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준호?"
"네. 못 나갑니다."
침묵이 흘렀다. 엄마의 숨소리만 들렸다.
"그래. 건강이 먼저지. 건강하면 된다."
"엄마, 전 지금 팀을 버렸어요."
"뭐?"
"혼자만 살려고 했어요. 팀을 안 믿었어요. 김민재는 나한테 배우고 싶다고 했는데 저는 자기 몫만 챙겼어요. 이준성이는 우리가 함께하자고 했는데 저는..."
목이 메었다. 박준호는 침을 삼켰다.
"최동욱이도 화해하려고 했어요. 근데 저는..."
"준호, 들어봐. 내가 너한테 '건강하면 된다'고 한 말, 뭔지 알아?"
박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혼자가 아니라는 뜻이야. 엄마도 있고, 병원 선생님도 있고, 팀도 있고. 넌 혼자가 아니야. 그게 건강한 거야."
박준호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엄마가 지금 뭘 하고 싶어?"
"팀을 만나고 싶어요."
"그래. 가. 그리고 말해줘. 미안하다고, 그리고 고맙다고."
통화가 끝났다.
박준호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시간은 밤 10시 47분이었다.
호텔 로비에서 그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있었다.
김민재가 가장 먼저 일어섰다. 그 뒤로 이준성, 최동욱, 그리고 박철수 감독이었다.
박준호는 그들을 마주 보지 못했다. 고개를 숙였다.
"미안합니다."
목소리가 떨렸다.
"난 혼자만 살려고 했습니다. 팀을 믿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나를 믿어주려고 했는데, 난 그것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김민재가 한 발 다가왔다.
"준호, 넌 왜 그렇게 혼자가 되려고 했어?"
박준호가 고개를 들었다. 김민재의 눈이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완벽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완벽함이 뭔데?"
이준성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차갑지 않았다. 단지 묻는 것이었다.
"모든 것을 혼자 짊어지는 것. 팀을 믿지 않고, 내 능력만으로 모든 경기를 이기는 것."
박준호가 계속했다.
"근데 그건 완벽함이 아니었어요. 그건 도망침이었어요. 여러분을 피하는 것이었어요."
최동욱이 입을 열었다.
"우리도 미안해. 처음엔 널 경계했고, 널 의심했고, 너한테 상처를 줬어."
"아니에요. 제가 먼저 여러분을 밀어냈습니다."
박준호는 천천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목이 메었다.
"미안합니다."
김민재가 박준호의 손을 잡았다.
"괜찮아. 이제 우리가 함께 할 수 있잖아."
박준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김민재의 손을 꼭 잡았다.
이준성이 박준호의 다른 손을 잡았다. 최동욱이 그의 등을 토닥였다.
박철수 감독은 한 발 물러서서 이들을 봤다. 그의 얼굴에는 안도감이 흐르고 있었다.
회의실로 옮겨진 그들은 한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의료팀장 이혜진이 다시 MRI 영상을 꺼냈다.
"박준호 선수,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모두가 고개를 들었다.
"편안 시야는 개인 능력이 아니라 팀 역학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혜진이 영상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팀원들과 정보를 실시간으로 공유하고 의사결정 권한을 분산시킨다면, 신경 활동이 분산됩니다."
그녀가 다시 영상을 조작했다. 이번에는 두 개의 뇌 스캔 이미지가 나란히 나타났다.
"편안 시야라는 능력 자체는 같지만, 팀과 함께할 때 뇌 부하는 훨씬 낮아집니다. 당신이 모든 정보를 처리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팀원들이 당신의 신호를 받아 각자 판단하고 움직이는 동안, 당신의 뇌는 다음 상황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이준성이 물었다.
"그럼 결승전은?"
"결승전은 가능할 수 있습니다. 단, 팀과 함께할 때만."
박준호가 목이 메었다.
"어떻게?"
"편안 시야로 감지한 정보를 팀원들과 공유하는 겁니다. 음성 신호든, 몸짓이든, 무엇이든. 당신이 모든 것을 결정하지 말고, 팀이 함께 결정하도록. 당신은 시각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만 하면 됩니다."
김민재가 박준호의 손을 잡았다.
"우리가 할 수 있을까?"
박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습니다."
박철수 감독이 일어섰다.
"이제 우리 팀이 완성된다."
그의 목소리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다음 날 훈련장에서 박준호는 팀동료들과 함께 편안 시야의 원리를 공유했다.
"내가 왼쪽 눈으로 감지하는 건, 상대의 무게중심 이동이에요. 공의 회전 방향. 그리고 그들의 의도입니다."
박준호가 설명했다.
"그걸 어떻게 전달할 거냐고요? 간단합니다."
그가 손가락으로 신호를 보였다.
"한 손가락은 왼쪽. 두 손가락은 오른쪽. 세 손가락은 중원. 손을 펼친 건 슈팅 각도 오픈이라는 뜻입니다."
이준성이 노트에 적었다. 김민재가 묻었다.
"그럼 우리가 어디로 움직이면 돼?"
"내 신호를 따르면서, 동시에 너희 판단도 섞어줘요. 내가 왼쪽을 가리키면, 넌 그 각도에서 어떻게 움직일지 결정해. 난 그걸 본 후 패스를 줄지, 슈팅할지 정해."
최동욱이 물었다.
"그럼 우린?"
"너희가 나를 믿으면, 난 너희를 믿을 수 있어요."
박준호가 눈을 마주쳤다.
훈련은 두 시간 이상 계속됐다. 신호와 움직임이 반복되고, 수정되고, 다시 반복됐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팀의 움직임이 하나로 통일되기 시작했다.
마지막 훈련 플레이에서 박준호는 편안 시야를 발동했다. 왼쪽 눈이 반짝였다.
손가락 신호가 나갔다. 김민재가 그 방향으로 움직였다. 박준호의 패스가 정확히 김민재의 발에 닿았다. 슈팅. 골.
신경 소모가 있었지만, 이전처럼 심하지 않았다. 팀과의 신호 체계가 작동하면서 그의 뇌는 다음 플레이를 미리 준비할 수 있었다.
이혜진이 박준호에게 다가왔다. 손에는 휴대용 뇌파 측정기가 들려 있었다.
"측정해볼게요."
박준호가 뇌파 측정기를 착용했다. 이혜진이 화면을 들었다.
"다시 한 번 편안 시야를 발동해보세요."
박준호가 왼쪽 눈을 집중했다. 편안 시야가 켜졌다.
뇌파 측정기의 수치가 변했다. 팀원들이 신호에 반응하자 신경 활동이 급격히 분산됐다.
"보이시나요? 팀과 함께할 때 뇌 부하가 30% 낮아졌어요."
박준호는 측정기를 벗으며 깨달았다. 혼자 모든 것을 결정했을 때의 무거움과 달리, 팀과 신호를 주고받을 때 그 무게가 나누어지는 것을.
박준호가 숨을 고르며 물었다.
"결승전은?"
"가능합니다. 당신이 팀을 믿는다면."
밤 11시, 박준호는 호텔 방에서 휴대폰을 켰다. 태국 에이스 서준호로부터 메시지가 와 있었다.
*[너의 팀이 변했다. 내일 경기를 준비해라.]*
박준호는 웃음을 흘렸다. 내일은 결승전이었다.
호텔 복도에서 박철수 감독이 걸어가고 있었다. 박준호가 따라나갔다.
"감독님."
감독이 돌아섰다.
"결승전, 할 수 있을까요?"
박철수 감독이 박준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넌 이미 했어. 혼자였을 때는 결코 할 수 없던 것을."
"뭐요?"
"팀을 믿었어."
다음 날, 아시안컵 결승전 경기장.
한국 vs 태국. 수십만 명의 관중이 스탠드를 메웠다.
박준호는 벤치에 앉아 있었다. 후반 15분. 그때가 그의 시간이었다.
전반이 끝났을 때 스코어는 0:0이었다. 양 팀 모두 결정력이 떨어지고 있었다.
후반이 시작됐다. 태국이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서준호가 골키퍼를 위협했다. 한국의 골키퍼 최준혁이 연속으로 슈팅을 막아냈다.
10분이 지났을 때, 박철수 감독이 박준호를 불렀다.
"준호, 들어가."
박준호가 일어섰다. 워밍업 자켓을 벗었다.
경기장에 들어선 순간, 관중의 함성이 터졌다. 한국 팬들의 응원이었다.
박준호는 이준성, 김민재, 최동욱과 눈을 마주쳤다. 그들의 눈빛이 같았다. 신뢰.
하지만 경기장에 들어서는 순간, 박준호의 마음이 철렁했다. 정말 이게 작동할까? 편안 시야를 팀과 공유하는 것. 신호와 움직임이 정말 일치할까? 혹시 또 다른 실패가 있으면?
그는 심호흡을 했다. 팀을 믿어야 했다. 아니, 팀이 자신을 믿고 있었다.
경기가 재개됐다.
태국이 공을 몰고 왔다. 박준호가 왼쪽 눈을 집중했다. 편안 시야가 발동됐다.
상대 선수들의 무게중심이 보였다. 공의 회전이 보였다. 그들의 의도가 보였다.
박준호의 손가락이 올라갔다. 두 개.
오른쪽.
이준성이 즉시 반응했다. 타이밍에 맞춰 볼을 탈취했다.
이준성이 박준호에게 패스를 줬다. 박준호가 공을 받으며 다시 신호를 보냈다. 한 개 손가락.
왼쪽.
김민재가 그 각도로 움직였다. 박준호의 패스가 날아갔다. 김민재의 슈팅.
골.
1:0.
관중이 들썩였다. 하지만 박준호의 신경 소모는 예상과 달랐다. 이전처럼 심하지 않았다. 팀과 함께했기 때문이었다.
태국이 다시 공격해왔다. 서준호가 볼을 몰고 왔다. 박준호는 편안 시야로 그를 감시했다.
손가락 신호가 나갔다. 세 개.
중원.
최동욱이 중원에서 대기했다. 서준호가 슈팅을 시도하려는 순간, 최동욱의 태클이 날아왔다. 공을 탈취했다.
최동욱이 박준호에게 패스를 줬다.
박준호가 공을 받으며 한 번 더 신호를 보냈다. 손을 펼쳤다.
슈팅 각도 오픈.
박준호가 슈팅했다.
골.
2:0.
태국이 필사적으로 반격에 나섰다. 서준호가 다시 공을 몰고 왔다. 박준호의 신호가 나갔다. 세 개 손가락. 중원.
최동욱이 움직였다. 하지만 서준호의 움직임이 박준호의 예상을 벗어났다.
0.3초. 신호를 보낸 후 그 짧은 순간 사이에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
서준호가 중원을 우회해 슈팅 각도를 확보했다. 박준호는 순간 자신의 판단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서준호의 슈팅이 나갔다.
최동욱이 슈팅 라인에 몸을 날렸다. 공이 최동욱의 다리에 맞았다. 골키퍼 쪽으로 튕겨 나갔고, 최준혁이 재빨리 손을 뻗어 공을 잡았다.
경기장이 울렸다. 한국 팬들의 환호성이었다.
박준호는 숨을 고르며 깨달았다. 신호가 늦었다. 판단이 틀렸다. 하지만 팀이 있었다. 최동욱이 슈팅 라인에 몸을 날렸고, 최준혁이 공을 잡았다. 완벽하지 않아도, 팀이 보완했다.
박준호가 최동욱을 바라봤다. 최동욱이 엄지손가락을 세웠다.
경기는 2:0으로 진행됐다. 태국은 더 이상 골을 넣지 못했다. 박준호의 신호와 팀원들의 움직임이 점점 더 정교해졌다. 실패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팀이 보완했다.
마지막 5분, 박준호는 한 번 더 편안 시야를 발동했다. 왼쪽 눈이 반짝였다.
손가락 신호가 나갔다. 이준성이 움직였다. 김민재가 움직였다. 최동욱이 움직였다.
박준호의 패스가 정확히 김민재의 발에 닿았다. 슈팅. 골.
3:0.
휘슬이 울렸다. 경기 종료.
한국 풋살 국가대표팀이 아시안컵 우승을 차지했다. 역사상 첫 번째였다.
팀동료들이 박준호를 안아올렸다. 김민재가 울고 있었다. 이준성이 웃고 있었다. 최동욱이 박준호의 등을 두드리고 있었다.
박준호는 경기장의 바닥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다.
혼자가 아니었다.
시상식에서 박준호는 MVP 트로피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들어 올리지 않았다. 대신 트로피를 들고 팀동료들에게 다가갔다.
먼저 김민재에게 건넸다. 김민재가 받아 들었다.
"우리 것이야."
이준성에게 건넸다. 최동욱에게 건넸다. 박철수 감독에게 건넸다.
마이크가 박준호를 향했다.
"이 상은 우리 팀의 상입니다."
그의 목소리가 경기장에 울렸다.
"저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함께했기 때문입니다."
관중이 박수를 쳤다.
호텔 방으로 돌아온 박준호는 휴대폰을 켰다. 태국 에이스 서준호의 메시지가 또 와 있었다.
*[축하한다. 다음 무대는 더 클 거다.]*
박준호는 휴대폰을 내려놨다. 천장을 바라봤다.
올림픽. 그건 아직 4년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팀과 함께라면, 우리가 함께라면, 모든 것이 가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