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아침 6시. 알람음이 울린 지 1분 후에야 이준호가 눈을 떴다. 천장 전등 불빛이 망막을 지졌다. 침대 옆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26살치곤 너무 지쳐 있었다. 10년을 F급으로 살아온 대가였다.
휴대폰 화면을 켜니 협회 메시지가 떠 있었다.
【오늘의 던전 배정: 쥐굴 던전(F급) / 클리어 시 보상 30,000원 / 예상 난이도 1.2 / 보험 가입 여부: 권장】
30,000원. 어제 버스비와 라면값을 생각하면 남은 건 거의 없을 돈이었다. 이준호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움직임이 느렸다. 어제도 쥐굴 던전을 다녀왔고, 그 전날도, 그 전전날도. 같은 던전을 매일 돌아다니는 F급 헌터. 그것이 자신의 인생이었다.
샤워 시간은 3분. 물 값이 아까웠다. 검은 전신복을 입고 낡은 검을 집어 들었다. 손잡이가 반질반질해서 미끄러웠다. 얼마나 오래된 검일까. 이준호는 세지 않기로 했다.
현관을 나가며 부모님 침실 문을 봤다. 아직 잠들어 있을 거였다. 어제 엄마가 한 말을 다시 생각했다.
"내일 기사 시험 본다고?"
"응. 오전 10시에."
"어차피 떨어질 테니까…"
그 문장 끝에 남겨진 한숨이 이준호의 등에 못을 박았다. 떨어질 거라는 건 엄마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자신의 딸도, 아들도 아닌 F급 헌터라는 신분이 먼저 떠올랐을 거다.
거리는 벌써 붐비고 있었다. 헌터들이 삼삼오오 모여 던전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준호가 탄 버스에서 내릴 때쯤, 광고판 너머로 S급 헌터들의 얼굴이 보였다. 천상회 소속 이혜원. 드래곤팡 소속 김민재. 그들 옆에는 천억 단위의 던전 클리어 기록이 줄줄이 붙어 있었다.
쥐굴 던전 입구는 허름했다. 시멘트 벽에 손가락 크기의 구멍들이 뚫려 있었고, 안에서 쥐 우는 소리가 났다. 이준호가 신분증을 카드 리더에 갖다 대니 시스템이 울렸다.
【F급 헌터 이준호 / 진입 가능 / 클리어 시간 제한 없음】
제한 없음. 즉, 얼마나 오래 걸리든 상관없다는 뜻이었다. S급 던전은 1시간 제한이 있고, 그 안에 못 나오면 강제 퇴장당한다. 하지만 F급은 시간이 없었다. 왜냐하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으니까.
던전 안은 습하고 어두웠다. 손전등을 켜니 쥐들이 재빨리 도망쳤다. 가끔 천정에서 물이 떨어졌다. 이준호는 검을 들고 이동했다. 20분 후, 쥐 몬스터 3마리를 죽였다. 검을 휘둘렀을 때 손목에 통증이 왔다. 오래된 검술 기술 때문이었다. F급이라는 등급 보정이 자신의 근력을 30%로 깎아먹으니까.
쥐굴 던전 클리어에는 1시간 20분이 걸렸다. 협회 단말기에 기록되었다. 나가며 보상 30,000원을 받았다. 손에 들린 건 가벼운 카드 하나뿐이었다.
점심 시간에 편의점에 들어갔다. 라면 2,900원, 계란 1,500원, 우유 2,000원. 합계 6,400원. 남은 건 23,600원이었다. 이준호는 계산대에서 라면을 건넸다. 점원이 스캔하다 말고 올려다봤다.
"F급이세요?"
"네."
"요즘 F급 헌터들 많네요. 거의 반 이상이 F급이던데, 왜 자꾸 S급 헌터들 뉴스만 나와요?"
이준호는 웃지 않고 카드를 건넸다. 점원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편의점 테이블에 앉아 라면을 먹으며 휴대폰을 켰다. 헌터 뉴스 앱이 떠올랐다.
【속보】 S급 헌터 강현철 사망…정황상 던전 사고로 추정
이준호가 기사를 읽기 시작했다.
**'파괴자'로 불린 S급 헌터 강현철이 지난 3일 시신으로 발견됐다. 협회 발표에 따르면 정황상 던전 탐사 중 예상치 못한 사고로 인한 것으로 보인다. 강현철은 생전 등급 시스템의 불합리성을 공개적으로 비판해온 인물로, 약자 헌터들 사이에서 상당한 지지층을 보유하고 있었다. 협회는 "철저한 조사를 통해 사건의 전말을 규명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준호의 눈이 기사에 머물렀다. 강현철. 그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었다. 협회를 비판했던 S급 헌터. 하지만 왜 갑자기? 그리고 '예상치 못한 사고'라니. S급 헌터가 던전에서 죽는 건 얼마나 드물까.
이준호가 스크롤을 내렸다.
**강현철 특집 | 등급 시스템을 거부한 남자**
**"현재의 등급 시스템은 능력이 아닌 태생에 기반한 신분제다. 이것이 유지되는 한, 약자 헌터들의 미래는 없다."**
**— 강현철, 2년 전 협회 공청회 발언**
이준호는 라면을 한 입 떨어뜨렸다. 국물이 흘렀다. 강현철의 말이 자신의 가슴에 박혔다. 태생. 신분제. 미래가 없다.
하지만 이내 다른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쨌아? 자신도 미래가 없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10년 전부터. 이준호는 휴대폰을 내려놨다.
오후 2시. 이준호는 협회 기사 시험장에 도착했다. 건물은 크고 밝았다. 대기실에는 100명쯤 모여 있었다. 대부분 A급 이상이었다. 신분증을 확인하는 감시관이 이준호를 봤을 때의 표정이 바뀌었다.
"F급?"
"네."
"기사 시험은 보통 B급 이상인데…"
감시관은 말을 마치지 않았다. 이미 등록되어 있으니까. 이준호는 시험장으로 들어갔다.
기사 시험은 간단했다. 실제 던전과 유사한 환경에서 몬스터를 처치하고 탈출하는 속도를 재는 것이었다. 제한 시간은 30분. 이준호가 들어간 시험장에는 E급 몬스터 5마리가 있었다. 쉬운 난이도였다.
그는 검을 뽑았다. 첫 번째 몬스터를 향해 달렸다. 움직임이 서툴렀다. 의도적으로.
손목이 떨렸다. 검을 들어 올리는 순간, 팔뚝의 근육이 경직되었다. 마치 자신을 가두는 쇠사슬을 느끼는 것처럼. 가슴이 철렁했다. F급이라는 낙인을 스스로 찍는 기분이었다.
숨을 고르며 검을 휘둘렀다. 느리고 약한 공격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정확한 일격이었다. 몬스터가 쓰러졌다.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이준호가 마지막 몬스터를 처치했을 때, 시간은 12분 25초였다.
대기실의 감시관이 화면을 봤다. 시간이 표시되어 있었다. F급이 E급 몬스터 5마리를 12분 만에? 불가능했다. 일반적인 F급은 30분 가까이 걸린다. 감시관은 기록을 다시 확인했다. 실수일 리 없었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그 시간은 A급이 나와야 하는 시간이었다.
이준호가 나왔다. 감시관은 그를 쳐다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뭘 말해야 할지 몰랐을 거다. 이준호는 신분증을 건네받았다.
【기사 시험 통과 / 등급: F급 유지 / 다음 시험 가능】
F급 유지.
그 결과를 받는 순간 이준호의 세상이 무너져 내렸다. 통과했다. 하지만 등급은 여전했다. 10년을 더 F급으로 살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손이 떨렸다. 신분증을 움켜쥐는 손가락이 창백해졌다. 마치 피가 빠져나가는 것처럼. 그 깨달음이 몸 전체를 짓누르고 있었다.
퇴근길 택시에서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3초 만에 받았다.
"여보, 기사 시험 봤어?"
"응. 통과했어."
침묵이 흘렀다.
"근데 등급은?"
"F급."
다시 침묵. 그 침묵이 5초, 10초, 15초 이상 이어졌다. 이준호는 그 침묵 속에서 자신의 미래가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하윤아. 나 이제 다른 사람 만나기로 했어. 미안해."
전화가 끊겼다. 손가락이 저릿했다. 화면이 검게 변했다.
이준호는 차창 밖을 봤다. 도시 외곽으로 갈수록 건물들이 낡아졌다. 자신처럼. 그리고 자신의 미래도 그렇게 낡아가겠지.
밤 11시. 이준호는 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천장을 봤다. 가는 금이 여러 개 갔다. 언제부터 있었을까.
휴대폰을 들었다. 협회 앱에 들어갔다. 던전 목록을 봤다. 내일도 쥐굴 던전. 그 다음날도 쥐굴 던전. 1년 후도 쥐굴 던전. 죽을 때까지 쥐굴 던전.
분노가 올라왔다. 목구멍을 타고 치솟는 뜨거운 감정. 하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 않았다. 분노도 결국 절망 앞에서는 무력했다.
이준호는 옷을 입고 집을 나갔다.
도시 외곽으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창밖으로 건물들이 희미해지고, 산이 나타났다. 폐허 던전. 20년 전 한 번 클리어된 후 아무도 진입하지 않는 곳. 협회 허가 없이 들어가면 불법이지만, F급이라 들킬 리 없었다.
폐허 던전 입구는 대나무 펜스로 막혀 있었다. 이준호는 펜스를 넘었다. 손전등을 켰다. 던전 내부는 오래되었다. 벽에 이끼가 끼어 있었고, 천정에서 물이 떨어졌다. 몬스터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20년 동안 자연 소멸했을 거다.
이준호는 깊숙이 들어갔다. 30분. 1시간. 1시간 30분.
그때였다. 어두운 공간에서 무언가가 보였다. 시체였다.
이준호의 심장이 멈췄다. 시체에 가까워졌다. 의류는 헌터 복장이었다. 얼굴은 심하게 부패해 있었지만, 손목에 뭔가가 새겨져 있었다. 파란 기호. 협회 추적 표식이었다.
이준호는 손이 떨렸다. 협회 추적 표식. 그건 협회가 특정 헌터를 감시할 때만 사용하는 것이었다. 이 사람도 감시 대상이었단 말인가. 그리고 여기서 죽었단 말인가.
강현철. 이름이 떠올랐다. 그 뉴스 기사. '예상치 못한 사고'. 하지만 이건 사고가 아니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이 사람을 여기 두고 간 것 같았다. 공포가 목을 졸랐다.
이준호가 시체 근처를 살폈다. 보석함이 있었다. 녹슬었지만 열릴 수 있었다. 안에는 낡은 두루마리가 하나 있었다. 이준호가 펼쳤다.
【스킬 변조】
【등급: S급 이상】
【효과: 모든 기술을 원하는 등급으로 위장 가능】
【대가: 위장 지속 시간 = 수명 손실 (1시간 = 1개월)】
【제약: 동시 위장 최대 3개 / 위장 정체 발각 시 능력 영구 소실】
이준호가 두루마리를 들었다. 그 순간 손에 따뜻함이 전해졌다.
【스킬 변조 습득】
화면에 능력 정보가 떠올랐다. 이준호의 눈이 커졌다. S급 이상? 자신이 F급인데? 불가능했다. 하지만 손에 전해지는 그 따뜻함은 거짓말하지 않았다.
이준호는 자신의 F급 검술을 시험해보기로 했다. 손을 들었다. 검을 휘둘렀다. 그 순간 손에서 강렬한 검기가 터져나왔다.
바닥이 갈라졌다. 벽에 금이 갔다. 한 번의 검술로.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손가락이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거울을 꺼내 들었다. 관자놀이에 주름이 생겨 있었다. 아까보다 더 많은.
【위장 시간: 0.05시간 / 수명 손실: 1.5일】
3초에 1.5일.
이준호의 손가락이 얼어붙었다. 손톱이 옅어졌다. 마치 피가 다 빠진 것처럼. 계산이 자동으로 돌았다. 1분이면? 1시간이면? 자신의 남은 수명을 깎아내는 계산. 그 결과는 끔찍했다.
손가락이 떨렸다. 공포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창백한 손을 들었다. 내려놨다. 다시 들었다. 그 순간 손가락이 서서히 색을 되찾았다. 하지만 그 색깔은 죽음의 색이었다.
그때였다. 던전 입구에서 소리가 났다. 무언가 착륙하는 소리였다. 드론. 협회 드론이었다.
이준호는 손에 남은 따뜻함을 느꼈다.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이 이미 감시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협회 드론의 소음이 던전 깊숙한 곳까지 울려 퍼졌다. 이준호는 숨을 죽였다. 폐허 던전의 좁은 통로 속에서 몸을 웅크렸다. 드론의 열감지 카메라가 작동하는 소리. 신호음. 협회가 이미 진입 기록을 감지했다는 뜻이었다.
'지금 나가면 적발된다.'
이준호의 뇌가 재빨리 회전했다. F급이 협회 허가 없이 던전에 진입했다? 벌금 500만 원. 면허 정지 6개월. 그 정도면 약과였다. 문제는 스킬 변조였다. 이 능력이 들키는 순간, 자신은 협회의 최우선 제거 대상이 될 것이었다. 등급 사기꾼. 시스템 교란자. 테러리스트.
드론이 입구 근처를 맴돌고 있었다. 이준호는 손목시계를 봤다. 밤 11시 47분. 협회 드론의 순찰 시간은 대개 30분이었다. 입구 주변을 돌고 나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그 사이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스킬 변조의 위장은 풀렸지만, 협회의 적외선 센서가 자신을 감지할 수도 있었다.
'아, 씨...'
이준호가 중얼거렸다. 손에서 따뜻함이 흔적처럼 남아 있었다. 아직 능력의 잔상이 남아 있었다. 그는 자신의 몸을 살폈다. 얼굴의 주름이 몇 줄 더 생겨 있었다. 거울을 다시 꺼냈다. 관자놀이 부분이 확실히 늙어 보였다. 30초도 채 안 됐는데.
드론의 음성 신호가 울렸다. 협회 시스템으로 진입 기록을 스캔 중이라는 뜻이었다. 이준호는 손전등을 끄고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바닥에 누웠다. 차가운 콘크리트가 등을 파고들었다.
'강현철...'
시체 근처에서 발견한 협회 추적 표식이 떠올랐다. 이 사람도 협회에 추적당했고, 결국 여기서 죽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 사람의 능력을 받았다. 우연이 아니었다. 뭔가 있었다. 뭔가 큰 것이.
20분이 흘렀다. 드론의 소음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입구 쪽으로. 이준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드론이 떠날 때까지 기다렸다. 엔진음이 희미해졌다. 완전히 사라졌다.
이준호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손을 봤다. 따뜻함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대신 손가락이 여전히 창백했다. 손톱이 옅어져 있었다. 마치 피가 다 빠진 것처럼.
던전을 빠져나가기로 결정했다. 입구에서 50미터 거리까지 가다가 멈췄다. 밖을 살폈다. 협회 드론이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펜스 너머로 야산의 어둠만 보였다.
이준호가 펜스를 넘었다. 버스 정류장까지의 거리는 2킬로미터였다. 밤길을 걷기 시작했다.
휴대폰이 울렸다. 협회 앱의 알림이었다.
【비정상 진입 기록 감지】 【위치: 폐허 던전】 【시간: 23:15~23:47】 【조사 예정】
이준호의 손이 떨렸다. 기록이 남았다. 완전히 남았다. 협회는 이미 자신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지금까지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을까? 왜 드론만 보내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까?
'아직 모른다는 뜻이야.'
이준호가 중얼거렸다. 협회가 자신이 누구인지, 뭘 했는지 아직 모르고 있다는 뜻이었다. 단지 비정상 진입만 감지했을 뿐. 스킬 변조는 아직 들키지 않았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을 때는 자정이 넘어가 있었다. 이준호는 벤치에 앉았다. 손을 펴고 봤다. 여전히 창백했다. 하지만 조금씩 색이 돌아오고 있었다. 마치 죽은 세포가 서서히 회생하는 것처럼.
휴대폰을 켰다. 협회 앱을 다시 열었다. 내일의 던전 목록.
쥐굴 던전. 보상 3만 원. 위험도 E급.
그 옆에는 수정된 알림이 떠 있었다.
【폐허 던전 진입자 신원 조사 중】 【협력 제보자에게 보상금 5백만 원】
이준호가 화면을 껐다. 버스가 왔다. 탔다. 창밖으로 도시의 불빛이 흘러갔다.
'스킬 변조...'
손에 남은 따뜻함을 느꼈다. 능력은 진짜였다. 위장은 완벽했다. 하지만 대가도 진짜였다.
1시간에 1개월. 3초에 1.5일.
'계산이 안 맞네.'
이준호가 생각했다. 만약 자신이 이 능력을 자주 쓴다면? 만약 큰 작전을 벌인다면? 수명이 얼마나 빨리 깎일까? 그 계산 결과는 끔찍했다.
버스가 정거장에 섰다. 자신의 동네였다. 이준호가 내렸다. 아파트 건물이 보였다. 6층. 좀 낡은 건물이었다. 자신처럼.
계단을 올랐다. 3층에서 이웃 할머니가 나가고 있었다. 할머니는 이준호를 봤다.
"또 늦게 나왔어요?"
"네, 할머니."
"F급이 밤에 돌아다니면 위험하잖아요. 조심해요."
"알겠습니다."
할머니가 계단을 내려갔다. 이준호는 6층까지 올라갔다. 집 문을 열었다.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누웠다. 천장의 금을 봤다. 여전히 그대로였다. 손을 들어올렸다. 손가락이 이제 거의 정상이 되어 있었다. 색이 돌아왔다. 주름도 조금 옅어졌다. 마치 시간을 되돌린 것처럼.
아니, 시간을 깎았다. 수명을 깎았다.
이준호는 눈을 감았다. 하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대신 계산이 계속 돌았다.
1시간에 1개월. 1일에 24개월. 즉, 2년. 1년을 써버리려면 6일만 능력을 써야 한다.
'6일이면...'
이준호가 눈을 떴다. 천장을 봤다. 금이 있는 천장.
'충분해.'
밤 1시. 휴대폰 알림이 울렸다. 협회 앱이었다.
【폐허 던전 진입 신원 특정 불가】 【감시 대상 해제】
이준호가 화면을 봤다. 들키지 않았다. 완전히 들키지 않았다. 협회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단지 비정상 진입만 기록할 뿐.
이준호는 휴대폰을 내려놨다. 손가락이 완전히 정상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뭔가 다른 것이 생겨 있었다.
희망? 아니면 절망?
그도 자신을 알 수 없었다. 단지 내일 아침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내일 아침, 쥐굴 던전에 들어갔을 때 자신이 뭘 할 수 있을지 보기 위해.
밤 2시. 이준호는 마침내 잠이 들었다. 손에는 여전히 따뜻함의 기억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아침이 왔다.
알람이 울렸다. 오전 5시 30분. 이준호는 눈을 떴다. 천장의 금을 봤다. 어제와 같은 금. 어제와 다른 하루.
핸드폰을 들었다. 협회 앱. 던전 목록.
쥐굴 던전. 오전 7시 진입 예정. 보상 3만 원.
이준호가 일어났다. 세면도구를 들었다. 거울을 봤다. 어제보다 더 많은 주름이 생겨 있었다. 스킬 변조를 쓴 흔적이었다. 마치 하루를 더 늙은 것처럼.
'괜찮아. 충분해.'
이준호가 중얼거렸다. 양치질을 했다. 옷을 입었다. 가방을 들었다.
집을 나갔다. 아파트 계단을 내려갔다.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버스를 탔다. 던전 관리소로 향했다.
오전 6시 50분. 쥐굴 던전 입구.
헌터들이 모여 있었다. 대부분 F급과 E급이었다. 보상이 적어서 경험 많은 헌터는 오지 않았다. 이준호는 줄을 섰다. 관리원이 카드를 확인했다.
"이준호, F급, 오늘도 쥐굴이네."
"네."
이준호가 던전으로 들어갔다. 어둠이 그를 감쌌다. 몬스터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대부분 E급 몬스터들이었다. 보상이 적으니까 위험도도 낮았다.
하지만 이준호는 손을 펴고 봤다. 손가락이 떨렸다. 따뜻함이 그의 손 위를 맴돌고 있었다.
스킬 변조. 진짜였다.
이준호가 검을 뽑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제부터는 다르다.'
던전 깊숙한 곳으로 나아갔다. E급 몬스터 3마리가 나타났다. 보통 F급 헌터라면 이들을 피했다. 위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준호는 달랐다.
손에 검기가 모였다. 따뜻함이 검을 감쌌다.
스킬 변조 활성화. F급으로 위장한 S급 검술.
검을 휘둘렀다.
몬스터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첫 마리가 반으로 갈라졌다. 피가 튀어 올랐다. 두 번째 몬스터는 검기의 궤적을 따라 산산조각 났다. 세 번째 몬스터는 그 위력을 견디지 못하고 공중에서 폭발했다.
순식간이었다. 세 마리 모두 사라졌다.
이준호의 손가락이 다시 창백해졌다. 주름이 또 생겼다. 하지만 얼굴에는 미소가 떠 있었다.
"이제부터는..."
던전 안의 어둠 속에서 이준호가 중얼거렸다.
"진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