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눈을 뜰 수 없었다.

검은 막이 눈썹 위에서 눈을 누르고 있는 듯했다. 손가락부터 움직여야 했다. 손가락이 움직였다. 팔도, 다리도, 머리도 모두 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무겁지?

코로 숨을 들이쉬었다. 산소가 폐를 채웠다. 근육이 이완되고 수축했다. 살아 있다.

눈을 떴다.

천장이 보였다. 아이보리색이었다. 왜 그렇게 정확한가? 왜 그 단어가 떠올랐는가?

지은은 몸을 일으켜 앉았다.

침대가 부드러웠다. 실크 시트였다. 손가락이 흰색 이불을 쓸어 내렸을 때, 그 감촉이 차갑고 비쌌다. 이건 자신의 침대가 아니었다. 지은의 침대는 면 소재였고, 세탁할 때마다 보풀이 일어나는 그런 침대였다.

침실을 둘러봤다. 금색 장식이 달린 화장대. 거대한 거울. 벽에 붙은 샹들리에. 영화 세트처럼 화려했고, 차가웠다.

거울로 걸어가는 것조차 자동으로 일어난 일처럼 느껴졌다. 발이 차가운 대리석 바닥을 밟았다. 거울이 점점 커졌다.

거울 속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검은 머리를 한 여자였다. 지은의 머리도 검었지만, 이 여자의 머리는 다르다. 더 길고, 더 윤기 있고, 더 검다.

얼굴을 봤다.

지은의 얼굴이 아니었다.

오목한 광대뼈. 예각으로 깎인 턱. 보라색에 가까운 눈동자. 이건 둥근 얼굴에 희색 눈동자를 가진 지은의 얼굴이 아니다.

기억이 폭발했다.

어마어마한 양의 정보가 한 번에 쏟아졌다. 이름. 나이. 가족. 직업. 관계도. 기억들.

'카라.'

입에서 나온 음성이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더 낮고, 더 부드럽고, 더 위험했다.

나는 카라다. 라이엘 제국의 귀족 가문 '매튜 백작'의 딸이다. 스물다섯 살. 은총은 없다. 평범한 귀족이다. 아니, 평범하지 않다. 나는 악녀다. 원작 웹소설의 악녀다. 왜 나는 그걸 알고 있지?

지은의 뇌가 기억을 정렬하려 했다. 이건 현실이 아니다. 악몽이다. 하지만 손가락이 차갑고, 대리석이 딱딱하고, 거울 속의 여자가 숨을 쉬고 있었다.

거울 속의 여자—카라—가 입을 벌렸다.

"뭐야..."

음성이 떨렸다. 지은의 음성이 아니라 카라의 음성이 떨렸다. 아니, 지은은 어디에 있나? 지은은 누구인가?

지은은 거울에서 눈을 돌렸다. 침대 옆 테이블에 놓인 물을 집어 들었다. 물을 마셨다. 현실이었다. 너무나 현실이었다.

침실 문이 열렸다.

"아가씨, 아침입니다."

여자의 목소리였다. 금발의 여자가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그 여자의 얼굴을 봤을 때, 또 다른 기억이 떠올랐다.

루시아. 저택의 집사. 나의 유일한 친구이자 종. 아니, 종이 아니라 친구다.

"...루시아?"

루시아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쳤다. 순간적이었다. 그 다음은 부드러운 미소였다.

"네, 아가씨. 어제 밤 잠을 잘 주무셨나요?"

어제 밤? 지은은 기억할 수 없었다. 기억에는 선이 그어져 있었다. 그 선 위로는 '지은'의 삶이고, 아래로는 '카라'의 삶이었다. 한 몸 안에 두 개의 기억이 있었다.

"네... 잘 잤어."

거짓이었다. 루시아는 그것을 눈치 챘을까? 루시아의 눈은 카라를 정밀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마치 균열을 찾으려 하는 듯.

루시아가 쟁반을 탁자 위에 놨다. 커피, 빵, 계란.

"아가씨, 오늘 황실 연회가 있습니다."

황실 연회. 그 말이 또 다른 기억을 떠올렸다. 레한 황자. 남주인공. 그 이름을 생각하는 순간, 카라의 심장이 빨라졌다.

"알았어. 나가."

루시아가 주저했다. 그 주저는 명확했다. 루시아는 카라를 바라봤다. 눈빛이 한 번 흔들렸다가 다시 고정되었다. 그 침묵 속에 무언가 복잡한 감정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불안감도.

루시아가 나갔다.

지은은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봤다. 아이보리색 천장. 이건 악몽이다. 깨어나면 사라질 거다. 자신의 침대로 돌아갈 거다.

하지만 깨어나지 못했다.

시간이 흘렀다. 침실의 빛이 변했다. 창문을 통해 햇빛이 들어왔다. 오전이 되었다. 카라는 옷을 입어야 했다. 옷장에서 드레스를 꺼냈다. 실크와 레이스로 만든 검은 드레스였다. 카라의 몸에 맞았다. 지은의 몸에는 맞지 않았다. 하지만 카라의 몸이 지은의 몸이었다.

거울 앞에서 머리를 빗었다. 거울 속의 여자가 빗었다.

거울을 보고 있을 때, 그것이 일어났다.

두 개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카라의 얼굴과 지은의 얼굴이. 동시에.

"나는... 누구지?"

입에서 나온 음성은 둘의 음성이 섞여 있었다.

그 순간, 세상이 빛났다.

투명한 화면이 눈 앞에 떠올랐다. 파란색 테두리를 한 사각형이었다.

【감정공명 시스템 활성화】

【대상: 레한 황자】

【거리: 50m】

【감정 수치】

【집착: 87/100】

【첫 만남의 공포 - 저주 조각 1/7】

지은은 비명을 질렀다. 손으로 화면을 쳐 내리려 했다. 손가락이 화면을 통과했다. 유령처럼. 화면이 사라지지 않았다.

"뭐야, 이게... 뭐야?"

침실 문이 열렸다.

"아가씨!"

루시아가 복도에서 외쳤다.

"황자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지은의 심장이 미쳤듯이 뛰었다. 시스템창이 반응했다.

【집착: 91/100】

【집착: 93/100】

【집착: 95/100】

거울을 봤다. 거울 속의 여자가 창백했다. 입술이 떨렸다. 그런데 그 창백한 얼굴에서 무언가 다른 표정이 스쳤다. 계산하는 표정이었다.

'이걸 이용할 수 있다.'

누가 생각했는가? 지은인가? 카라인가? 둘 다였다. 같은 생각이었다. 이 숫자. 이 감정 수치. 이건 정보다. 그리고 정보는 무기다.

저 숫자를 조종할 수 있다면, 저주의 조각을 하나씩 깨부술 수 있다. 며칠 뒤 죽음을 피할 수 있다.

【집착: 97/100】

【집착: 99/100】

저택의 현관문이 열렸다. 발자국이 들렸다. 침착하고, 우아하고, 위험한 발자국이었다.

지은은 깊게 숨을 쉬었다. 거울에서 눈을 돌렸다. 침실 문을 열었다.

복도에서 레한이 서 있었다. 검은 머리를 한 남자였다. 은색 눈동자였다. 완벽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 완벽한 얼굴에서 무언가 위험한 감정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오늘따라 다른데?"

레한이 말했다.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예리했다.

"뭔가 변했어?"

지은이 대답했다. 의도적으로. 계산적으로.

"변한 거 없어."

거짓이었다.

시스템창의 숫자가 급락했다.

【집착: 95/100】

【집착: 87/100】

【집착: 80/100】

그리고 다시 올라갔다.

【집착: 92/100】

【집착: 99/100】

지은은 웃음이 나왔다. 절망에서 나온 웃음이 아니었다. 생존의 실마리를 찾은 웃음이었다. 이 숫자. 이 감정. 이걸 이용하면 살 수 있다.

"카라."

레한이 손을 뻗었다.

"가까이 와."

지은이 한 발 더 나아갔다. 거리가 줄어들었다. 시스템창의 숫자가 올라갔다.

【집착: 99/100】

【감정 동기화 심화】

【경고】

새로운 텍스트가 떴다.

【사용자의 감정도 노출 중】

【지속 시간 초과 시 자아 경계 붕괴 위험】

지은의 손이 떨렸다.

레한이 카라의 손을 잡았다.

손이 감싸지는 순간, 손등의 온기가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따뜻한 손이었다. 하지만 그 온기 속에는 무언가 위험한 것이 흐르고 있었다. 호흡이 불규칙해졌다.

손을 빼려고 했다. 하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레한의 팔이 너무 강했다. 아니, 자신의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넌 왜 나를 두려워하니?"

레한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것은 질문이 아니었다. 선언이었다.

시스템창이 깜빡였다.

【집착: 100/100】

【질투: 45/100 → 67/100】

【보호욕: 32/100 → 88/100】

【동기화 강도: 89%】

【카라의 감정 수치】

【두려움: 78/100】

【혼란: 82/100】

【생존욕: 95/100】

지은의 눈이 흔들렸다. 자신의 감정이 화면에 노출되는 것. 레한이 자신의 두려움을 읽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을 빼려고 했다. 하지만 레한의 손이 더욱 강하게 잡아당겼다.

"답해."

레한이 다시 말했다. 손을 놓지 않았다. 손가락이 카라의 손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신체가 반응했다.

지은의 호흡이 불규칙해졌다. 이건 계획이 아니었다. 이건 통제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놔."

카라의 목소리가 나왔다. 지은이 아닌 카라의 목소리였다. 자동으로. 본능적으로. 이 남자에게서 벗어나려는 절박함 속에서.

레한이 웃음을 흘렸다. 그것은 즐거운 웃음이 아니었다. 박탈감에 가득한 웃음이었다.

"안 돼."

그가 카라의 손을 자신의 가슴에 밀어붙였다. 심장 위에. 레한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그 박동이 손가락을 통해 전해졌다. 지은의 심장이 같은 리듬으로 뛰기 시작했다.

지은은 손을 빼려 했다. 하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시스템창을 보지 말아야 했다. 하지만 보고 말았다.

【카라의 감정 수치】

【집착: 12/100 → 34/100】

【사랑: 0/100 → 18/100】

지은은 숨을 멈췄다. 자신의 감정이 변하고 있었다. 저 숫자들은 뭐야? 그건 내가 아니야. 난 이 남자를 이용하려고만 했는데. 살아남기 위해서.

그런데 왜.

"너도 나를 느끼고 있어."

레한이 속삭였다. 자신의 손을 카라의 머리에 옮기며. 길고 검은 머리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넌 나를 원하고 있어."

지은은 몸이 떨렸다. 이건 틀렸다. 이건 계획이 아니었다. 감정 동기화가 너무 강해졌다. 레한이 자신을 읽고 있다. 그리고 자신도 레한을 읽고 있다. 동시에.

【동기화 강도: 92%】

【경고: 자아 경계 붕괴 임박】

"싫어."

카라가 말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거짓이었다. 시스템창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루시아의 목소리가 복도에서 들렸다.

"아가씨! 저녁 준비가 되었습니다!"

레한이 카라를 놓았다. 천천히. 마지못해. 손을 떼면서도 카라의 손가락을 끝까지 따라 쓸었다.

지은은 손을 내렸다. 시스템창을 닫으려고 했다. 하지만 닫히지 않았다.

【집착: 100/100】

【카라의 감정 수치 기록 중...】

【다음 동기화 예정 시간: 12시간 후】

【주의: 월 10회 동기화 기준선 도달. 과도 사용 시 자아 붕괴 위험 증가】

지은은 침실로 돌아갔다. 문을 닫고 등을 기댔다. 심장이 여전히 미쳤듯이 뛰고 있었다.

저주를 깨기 위해 레한의 감정을 이용하려 했다. 그것이 계획이었다. 시스템창으로 그의 집착을 읽고, 그걸 역으로 조종해서 저주의 조각을 하나씩 깨부수는 것. 며칠 뒤 죽음을 피하는 것.

그런데 이제 문제가 생겼다.

시스템창이 자신의 감정도 레한에게 노출시키고 있다는 것. 감정 동기화가 쌍방향이라는 것. 그리고 자신도 이 남자의 감정에 잠식되고 있다는 것.

가장 위험한 것은.

지은은 거울을 보았다. 거울 속의 카라가 웃고 있었다. 아직도 떨리는 입술로. 자신도 몰랐던 표정으로.

'나... 저 남자한테 끌려가고 있다.'

시스템창이 다시 떠올랐다.

【월 10회 동기화 기준선 도달】

【과도 사용 시 자아 경계 붕괴 위험 증가】

지은은 그 경고를 읽으며 한 가지를 깨달았다. 자신이 이 남자를 이용하려고 했던 순간부터, 이미 자신도 이용당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것도 가장 위험한 방식으로.

감정으로.

밤이 깊어갔다. 저택의 정원에서 죽은 나무가 바람에 흔들렸다. 그 나뭇가지들이 만드는 소리는 마치 속삭임 같았다.

멀리 황실 궁전에서도 불빛이 보였다. 거기서 레한이 밤을 새고 있을 것이다. 시스템창으로 읽었던 감정처럼. 집착이 100을 넘어서서 어디론가 흐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흐름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지은은 알았다.

저주를 깨기 위해 레한의 감정을 이용하려 했던 지은. 하지만 이제는 레한의 감정이 자신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동시에 자신의 감정도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시스템창의 경고음이 또 울렸다.

【동기화 준비 중...】

【거리: 45m】

【대상 감정 감지: 집착 100/100. 수면 불가 상태】

저택의 문이 열렸다. 발자국이 복도로 들어왔다. 침착하고, 우아하고, 위험한 발자국이었다.

지은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제 막 시작된 것이다. 저주를 깨는 여정. 감정을 이용한 생존 게임.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것. 카라가 지은이 되고, 지은이 카라가 되는 그 순간까지.

그리고 더 이상 돌아올 수 없는 지점이 있다는 것을.

침실의 거울이 희미하게 빛났다. 거울 속에서 두 개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카라와 지은. 아니, 이제는 그 구분이 의미 없어 보였다. 둘은 이미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다. 감정의 동기화 속에서. 레한의 집착 속에서.

침실 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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