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응급실 복도의 침묵
응급실 입구의 자동문이 열리며 이준호의 발걸음이 멈췄다. 세 달이었다. 수술 금지 처분을 받은 지 정확히 구십일. 손에 든 서류 봉투—면허 복구 심사 결과—의 무게가 갑자기 느껴졌다.
"이준호 선생님."
간호사가 고개를 들었다. 예전의 그 경외감은 사라져 있었다. 대신 조심스러운 목소리, 거리감. 이준호는 그것이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대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응급실 모니터들이 일제히 신호음을 내고 있었다. 오후 5시 20분. 교통사고 환자 2명, 급성 심근경색 1명, 약물 중독 1명. 의료진들이 바쁘게 움직였고, 새로운 외과의—심태훈 과장—이 중증 환자 앞에서 빠른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수술실 1번 준비. 복부 손상 환자, FAST 양성. 5분 내 이송."
심태훈의 목소리는 명확했다. 이준호가 한 번 들었던 그 목소리와 비슷했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었다. 혼자가 아니었다. 레지던트 둘이 이미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고, 마취과 의사는 환자의 생리 수치를 예측하며 준비하고 있었다.
이준호가 서류 봉투를 내려놨다.
"박영미 병원장님 계세요?"
"3층 행정실입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이준호는 자신의 손가락을 펼쳤다 오므렸다를 반복했다. 세 달 동안 그는 이 손가락들과 싸워왔다. 응급실에 들어갈 때마다, 환자의 울음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 손가락들은 습관처럼 움직이려고 했다. 맥박을 잡고 싶었다. 죽음의 시각을 감지하고, 그것을 연장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난 세 달간 이준호는 그 욕망을 견뎌냈다.
정신과 의사 이영준은 세 달에 걸쳐 이준호에게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환자를 살리고 싶지 않습니까?"
"살리고 싶다."
"그럼 왜 손가락을 멈추셨습니까?"
이준호는 한 달 동안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도 모르고 있었으니까.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를 때가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의료 윤리 교과서를 다시 펼쳤을 때 답이 보였다.
**의료의 본질은 개인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박영미의 사무실 문을 두드렸을 때 그녀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서울의 야경을 바라보는 그 표정은 피곤해 보였지만 동시에 단호했다.
"들어오세요."
"서류를 가져왔습니다."
이준호가 봉투를 탁자 위에 놨다. 박영미는 천천히 돌아앉아 그것을 열었다. 면허 복구 심사 결과. 조건부 복구. 조건은 명확했다.
—6개월간 응급실 외래 진료만 담당. 모든 의료 의사결정에 타 의사와의 협의 의무화. 초감각 능력 사용 금지. 정기적 정신과 상담 지속.
"이 조건을 받아들이십니까?"
"받아들입니다."
박영미는 서명란을 보았다. 이준호의 서명은 이전보다 훨씬 작아져 있었다.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뭔가요?"
"강철준 교수가 의료 윤리 개선안을 발표했습니다. 초감각적 진단 능력의 규제 기준이 포함되어 있는데, 거기에 당신의 사례가 사용됩니다. 당신이 동의하면 말이죠."
이준호는 잠시 생각했다. 자신의 사례가 의료계에 공개된다는 것. 신의 손이라 불렸던 자신이 죽음의 중개자였다는 사실이 드러난다는 것.
"동의합니다."
"이유가 뭐죠?"
"다른 사람이 이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박영미의 눈이 잠시 흔들렸다. 그리고 그녀는 서명했다.
응급실로 내려가는 복도에서 이준호는 한석우를 만났다. 마취과 의사는 차트를 들고 있었고, 표정은 여전히 조심스러웠다.
"이준호."
"안녕, 석우."
"면허 복구됐어?"
"조건부로."
한석우가 차트를 내려놨다. 세 달 동안 그들은 말을 거의 나누지 않았다. 한석우는 이준호를 폭로했고, 이준호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 사이에 어떤 감정이 흐를 여지는 없었다.
"미안해. 폭로한 거."
이준호가 웃음을 흘렸다. 그것은 비통한 웃음이었다.
"미안해할 필요 없어. 넌 옳은 일을 했어."
"그래도—"
"내가 너한테 미안해. 너를 자꾸 함께 죄인으로 만들려고 했어. 그것도 오만이었어."
한석우의 눈이 흐려졌다. 이준호는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제 새로 시작하자. 함께."
응급실에 들어서는 순간, 새로운 환자 이송 알림이 울렸다. 오후 3시 47분. 교통사고, 복부 손상, 생존율 12%. 이준호는 휴게실에서 나와 엘리베이터로 향하던 발을 멈췄다. 손가락이 떨렸다. 습관적으로 환자의 맥박을 잡으려는 신체 반응이 나타났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주먹을 쥐었다.
응급실 진료실 앞. 간호사가 환자 정보를 읽어내고 있었다. 이준호는 들어가지 않았다. 대신 복도에서 다른 의사들을 찾았다.
"심 의사."
심태훈이 돌아섰다. 1년 전 이준호의 자리를 채운 외과의였다.
"네, 선생님?"
"저랑 함께 봐줄래?"
심태훈의 표정이 흔들렸다. 여전히 이준호를 '신의 손'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이준호는 진료실로 들어갔다. 환자는 20대 초반의 청년이었다. 복부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모니터의 초록색 파형이 불규칙하게 흔들렸다.
이준호는 환자의 손목 위에서 손가락을 멈췄다. 맥박을 잡지 않았다.
"CT 결과가 나왔나?"
"네, 대동맥 손상이 확인됐습니다."
"수술이 필요해. 심 의사, 이민지 의사, 한석우 마취과 의사를 불러줘."
"팀 수술 말씀이신가요?"
"그래. 혼자 할 수 없는 수술이야. 팀이 필요해."
15분 뒤. 수술실 3번.
이민지가 환자의 복부를 소독하고 있었다. 한석우가 마취를 관리했다. 심태훈이 어시스턴트로 섰다. 그리고 이준호가 메스를 들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심 의사, 너는 뭘 보고 있어?"
"혈관 손상 부위입니다. 약 3센티미터 정도."
"응. 좋아. 이민지, 흡수 거즈 가져와."
"여기 있습니다."
"한석우, 산소 포화도 모니터링 계속해."
"네, 문제없습니다."
메스가 환자의 피부를 가르고 들어갔다. 이준호의 손은 예전처럼 신비로운 흐름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정확했다. 느렸지만 확실했다. 혈관을 찾고, 봉합하고, 다시 확인했다.
손가락이 떨렸다.
맥박을 감지하려는 본능이 자꾸만 일어났다. 하지만 이준호는 그 떨림을 억누르고 메스에만 집중했다. 환자의 심장이 자신의 손 아래에서 뛰고 있었다. 생명이 자신의 결정에 달려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건 이준호 혼자의 책임이 아니었다.
"심 의사, 너는 어떻게 봐?"
"혈관이 잘 봉합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 좋아. 이민지는?"
"복부 내 다른 손상은 보이지 않습니다."
"한석우?"
"산소 포화도 97%, 혈압 안정적입니다."
이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팀이 하나처럼 움직였다. 신의 손이 아닌, 인간의 손들. 여러 개의 손이 함께 환자를 살리고 있었다.
3시간 22분 뒤. 수술실 문이 열렸다.
회복실.
환자는 살았다. 생존율 12%의 환자가 팀 수술로 살아났다.
이준호는 환자의 옆에 앉아 있었다. 환자의 맥박을 재지 않고, 대신 그의 얼굴을 봤다. 눈이 조금씩 떨렸다. 의식이 돌아오고 있었다.
환자의 눈동자가 천천히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입술이 움직였다. 이준호는 환자의 손을 잡았다. 손가락이 약하게 움직였다. 살아 있다는 신호였다.
이준호의 손이 떨렸다. 하지만 이번엔 다른 떨림이었다. 능력을 억제하는 떨림이 아니라, 책임을 받아들이는 떨림이었다. 환자의 손을 잡은 손가락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호흡이 가빠졌다. 눈물이 맺혔다.
"살았어요."
이민지가 옆에 섰다.
"네."
"이전 같았으면 더 빨랐을 텐데."
"그래. 하지만 더 안전했어. 그리고..."
이준호가 환자를 봤다. 환자의 눈이 천천히 뜨이고 있었다.
"팀이 함께였어."
이민지는 이준호의 얼굴을 봤다. 1년 전과는 다른 표정이었다. 신의 손의 오만함이 아니라, 의사의 책임감이 그 얼굴에 있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보는, 진정한 안도감.
"이 의사, 고마워. 네가 없었으면 환자를 못 살렸어."
"저도 감사합니다. 선생님이 저를 믿어줬으니까요."
이민지는 차트를 들고 나갔다. 한석우도 뒤따랐다. 이준호는 혼자 남아 환자를 봤다.
"여기 있어요. 안전해요."
이준호의 목소리가 환자에게 전해졌다. 환자는 천천히 눈을 떴다. 초점이 맞았다. 그리고 입가에 미약한 미소가 떠올랐다.
박영미 병원장의 사무실. 오후 6시.
"앉아."
이준호가 앉았다.
"환자가 살았다고 들었어. 팀 수술이었나?"
"네. 그리고 모두가 제 역할을 해냈습니다."
"좋아. 이제 우리가 얘기할 게 있어. 너의 면허 복구 절차를 진행하려고 해."
이준호의 눈이 떨렸다.
"조건이 있어. 응급실이 아닌 외래 진료부터 시작. 모든 의료 의사결정에 다른 의사들과 협의. 그리고..."
박영미가 이준호의 눈을 봤다.
"너는 절대로 그 능력을 사용하지 않기로 서약해야 해."
이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목소리가 떨렸다.
"네, 병원장님."
"좋아. 그럼 강철준 회장님 만나볼래? 그분이 너와 함께 논문을 쓰고 싶대. 의료 시스템 개혁에 관한 내용이야."
강철준의 사무실. 서울대 의료윤리위원회 회장실.
"들어와."
강철준은 여전히 엄격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 표정 속에는 전과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질책이 아니라, 깨달음.
"자리 앉아."
이준호가 앉았다.
"우리가 쓸 논문의 주제는 이거야. 개인의 초감각적 능력이 의료 시스템에 미치는 윤리적 영향. 그리고 그 능력의 사용을 제어하는 시스템 구축. 더 나아가 의료기관의 규정 개선까지."
강철준이 자신의 책상 위에 놓인 서류 더미를 가리켰다.
"이미 윤리위원회에서 초감각적 진단 능력의 공시 의무화 기준안을 만들었어. 그리고 병원 자체적으로 이런 능력을 가진 의료진에 대한 감시 체계를 도입하기로 결정했어. 넌 이 과정에서 증인이자 협력자가 될 거야."
"네."
"그리고 이게 가장 중요한데."
강철준이 이준호에게 한 권의 책을 건넸다. 의료윤리 입문서였다.
"이걸 읽고 와. 정확히는 3장부터 7장까지. 개인의 능력과 시스템의 관계에 대한 내용이야. 그리고 우리는 함께 이 책의 사례를 현대화할 거야. 너의 사례를 포함해서. 실제 의료 현장에서 초감각적 능력이 어떻게 작동했는지, 그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를 학술적으로 분석할 거야."
이준호는 책을 받았다.
"그리고 이준호."
강철준이 이준호를 봤다.
"다음 번엔 혼자 하지 마. 의료는 시스템이야.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이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이 났다.
한석우와 이민지가 이준호를 찾아온 건 그 일주일 뒤였다.
응급실 휴게실. 밤 11시.
"이 의사!"
이민지가 들어왔고, 한석우가 뒤따랐다.
"뭐해?"
"차트 정리하고 있었어."
"우리가 할 말 있어."
이민지가 앉았다. 한석우도 옆에 앉았다.
"나는 너한테 미안하지 않아. 너를 폭로한 거. 그게 옳은 일이었거든."
이준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너와 함께 하고 싶어. 의료 윤리 개선을 위해서. 그리고 더 나은 팀 의료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서."
한석우가 입을 열었다.
"이준호. 나는 너의 마취를 관리하면서 너의 능력을 봤어. 정말 신비로웠어. 하지만 동시에 무서웠어. 왜냐하면 나는 너의 능력을 사용할 때마다 누군가가 죽는다는 걸 알았거든."
이준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감사해. 너희가 나를 폭로해줘서. 그게 내가 깨달을 수 있게 해줬어."
이민지가 이준호의 손을 잡았다.
"이제 우리 함께 해. 더 나은 의료를 위해서."
이준호는 그들의 손을 잡았다. 처음으로 '감사합니다'라는 말 속에 자신의 오만함을 인정하는 마음이 담겼다.
어머니의 집. 저녁.
이준호는 어머니를 만나러 갔다. 거실에서 어머니는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건강해 보였다.
"엄마."
"우리 준호."
이준호가 어머니 옆에 앉았다. 어머니는 그의 손을 잡았다.
"엄마, 난 뭘 잘못했을까?"
"뭘 잘못했어?"
"모든 환자를 살리려고 했어. 그 대가로 다른 누군가를 죽게 했어. 그게 잘못 아니야?"
어머니는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는 모든 환자를 살리려고 했지. 그건 의사로서 마땅한 마음이야. 하지만 넌 한 가지를 놓쳤어. 너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모든 환자를 다 살릴 수는 없다는 것."
"그럼 내가 누군가를 죽게 한 거 아니야?"
"아니야. 넌 누군가를 죽게 한 게 아니라, 너의 한계를 인정하지 못했어. 그것뿐이야."
이준호는 눈물을 흘렸다. 그것은 자신의 오만함에 대한 깨달음의 눈물이었다.
그 후 6개월이 지났다.
조건부 면허 복구 기간 동안 이준호는 여러 경험을 했다. 응급실에서 팀 수술로 환자를 살렸지만, 때론 팀의 느린 속도로 환자를 잃기도 했다. 뇌출혈 환자가 수술 대기 중 사망했던 날, 이준호는 자신의 능력으로 그 환자를 살릴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에 밤새 깨어 있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곧 다른 생각으로 바뀌었다. 그 환자를 살리는 대신 또 다른 누군가를 죽이는 건 아닐까. 그렇게 6개월을 견뎌냈다.
외래 진료실. 오후 2시 15분. 1년 뒤.
새로운 환자가 들어왔다. 중년의 여성과 그의 딸. 이준호는 차트를 보고 손가락이 멈췄다.
이름: 김영희.
과거 기록을 보자, 이 여성은 이준호가 수술했던 환자 중 한 명이었다. 뇌출혈. 생존율 5%. 그리고 그 수술 2시간 3분 뒤 배우 정해인이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는 뉴스가 언론을 탔다. 당시 이준호는 그 사실을 몰랐다. 나중에 알았을 때 깨달았다. 자신이 김영희의 죽음의 시각을 연장한 대가가 무엇인지를.
"안녕하세요. 앉으세요."
김영희가 앉았다. 그의 딸이 옆에 섰다.
"저는... 당신이 저를 살렸다고 들었어요."
이준호는 침을 삼켰다.
"그래서 감사하다고 꼭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엄마가 살아 있어서 저도 행복해요. 그런데..."
딸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가 돌아가셨다고요?"
이준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차트를 내려놨다.
"네. 배우 정해인이라는 분이 심근경정색으로 사망했습니다. 당신의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제가 사용한 능력의 대가로."
침묵이 흘렀다. 김영희의 딸이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김영희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정해인 씨의 가족은... 어떻게 되셨나요?"
"유족 보상이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생명의 값을 치를 수는 없습니다."
이준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고백해야 할 게 있습니다. 당신의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제가 한 일은 의료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신의 영역을 침범한 행위였습니다. 한 사람의 죽음을 연장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죽음을 초래한 것입니다."
딸이 물었다.
"그럼... 엄마는?"
"당신의 어머니는 정당한 의료 행위로 살아났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오염되었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공개하고, 의료 윤리 위원회에 보고했습니다. 그리고 현재 이 사례는 의료 시스템 개혁을 위한 학술 자료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준호는 그 순간, 자신의 손을 펼쳤다. 손가락을 환자의 손목에 대려고 했던 습관적 동작을 멈추고, 대신 차트에 적힌 기록을 다시 확인했다. 맥박을 감지하려는 능력이 완전히 사라졌음을 느꼈다. 손가락을 맥박에 대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죽음의 시각이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능력을 포기한 대가였고, 동시에 해방이었다.
"그래도 우리 엄마는 살았어요."
딸의 목소리가 천천히 이어졌다.
"그리고 그것이 의료라고 생각해요. 의료는 누군가의 구원이 아니라, 시스템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찾는 거예요. 의료인도, 환자도, 가족도 모두 함께. 그리고 그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다면, 그것을 인정하고 개선하는 거고요."
이준호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하지만 이번엔 고통의 눈물이 아니었다. 이해의 눈물이었다.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우리가 감사해야 할 사람은 당신이에요. 그리고 당신이 이렇게 변했다는 것도."
외래 진료실의 창밖으로 서울의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오후 햇빛이 빌딩 사이로 흘러내렸다.
응급실에 새로운 환자 이송 알림이 울렸다. 오후 4시 32분. 다발성 외상, 내출혈, 쇼크 상태. 생존율 3%. 이준호는 외래 진료실에서 나와 응급실로 향했다.
심태훈이 이미 환자를 검진하고 있었다. 상황은 심각했다.
"이 의사."
심태훈이 이준호를 봤다.
"이 환자 팀 수술로 갈까요?"
심태훈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이준호에게 선택을 묻는 것이었다. 자신의 초감각적 능력을 사용해 환자의 죽음을 연장할 것인가, 아니면 팀 수술로 생존 가능성에 모든 것을 걸 것인가.
이준호는 환자의 얼굴을 봤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팀 수술로 갑시다. 모든 의료진이 필요해."
15분 뒤. 수술실 2번.
이민지가 환자의 복부를 소독하고 있었다. 한석우가 마취를 관리했다. 심태훈이 어시스턴트로 섰다. 그리고 이준호가 메스를 들었다.
"심 의사, 너는 뭘 보고 있어?"
"복부 전반적인 손상 상태입니다. 여러 곳에서 출혈이 확인됩니다."
"응. 이민지는?"
"지혈 준비 완료했습니다."
"한석우?"
"산소 포화도 85%, 혈압 70/40. 위험한 상태입니다."
이준호의 손이 환자의 복부에 들어갔다. 메스가 피부를 가르고 들어갔다. 손가락이 떨렸다. 맥박을 감지하려는 본능이 자꾸만 일어났다. 하지만 이준호는 그 떨림을 억누르고 메스에만 집중했다.
"출혈 부위 찾았다. 소장 천공. 심 의사, 거즈."
"여기 있습니다."
손가락이 또 떨렸다. 이번엔 더 심했다. 환자가 죽어가고 있었다. 생존율 3%. 이준호의 능력이라면 이 환자를 살릴 수 있었다. 죽음의 시각을 감지하고, 그것을 연장하고, 결국 죽음을 회피하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준호는 그 욕망을 견뎠다.
"한석우, 혈압?"
"계속 떨어지고 있습니다."
"이민지, 수혈?"
"O형 음성 2단위 투입 중입니다."
"심 의사, 복강 내 다른 손상?"
"대장도 손상되어 있습니다."
이준호의 손이 다시 움직였다. 느렸지만 정확했다. 천공 부위를 찾고, 봉합하고, 다시 확인했다. 손가락이 계속 떨렸다.
환자의 심박수가 떨어졌다. 모니터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심정지!"
한석우가 외쳤다.
이준호의 손이 멈췄다. 그 순간, 맥박을 감지하려는 욕망이 폭발했다. 환자의 흉부에 손을 대면 된다. 그 손가락들을 환자의 심장에 대면, 죽음의 시각이 보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연장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의사!"
심태훈이 외쳤다.
"이 의사, 지시를 주세요!"
이준호는 눈을 감았다. 손가락이 떨렸다. 호흡이 가빠졌다. 가슴이 철렁했다.
하지만 그 순간, 한석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준호, 난 너를 믿어. 넌 할 수 있어."
이민지도 말했다.
"이 의사, 우리가 함께 있어요."
심태훈이 덧붙였다.
"지시를 주세요. 우리가 따를 거예요."
이준호는 눈을 떴다. 손가락의 떨림이 멈췄다.
"심폐소생술 계속. 에피네프린 1mg 정맥주사. 한석우, 산소 포화도 모니터링."
"네!"
"이민지, 흡수 거즈로 출혈 부위 압박."
"알겠습니다!"
"심 의사, 흉부 손상 확인해."
"확인 중입니다!"
3분이 지났다. 모니터에 초록색 파형이 다시 나타났다.
"돌아왔다!"
한석우가 외쳤다.
이준호는 다시 수술에 집중했다. 손가락이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대신 안정적이고, 따뜻했다. 의료인의 손이 되어 있었다.
2시간 47분 뒤. 수술실 문이 열렸다.
환자는 살았다. 생존율 3%의 환자가 팀 수술로 살아났다.
회복실.
이준호는 환자의 옆에 앉아 있었다. 환자의 맥박을 재지 않고, 대신 그의 얼굴을 봤다. 호흡이 안정적이었다. 의식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지만, 생명의 신호는 명확했다.
이민지가 옆에 섰다.
"살았어요."
"네."
"심정지까지 겪었는데도."
"팀이 있었으니까."
이민지는 이준호의 얼굴을 봤다. 그 얼굴에는 신의 손의 오만함도, 능력을 억제하는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의료인으로서의 책임감과, 팀과 함께한다는 안도감만 있었다.
"이 의사, 고마워."
"저도 감사합니다. 선생님들이 저를 믿어줬으니까요."
이민지는 차트를 들고 나갔다. 한석우도 뒤따랐다. 심태훈도 자신의 역할을 마쳤다. 이준호는 혼자 남아 환자를 봤다.
손가락이 또 떨렸다.
하지만 이번엔 다른 떨림이었다. 능력을 억제하는 떨림이 아니라, 책임을 완수한 떨림이었다.
응급실 복도. 오후 7시.
이준호는 박영미 병원장을 찾았다.
"병원장님."
"이준호. 수술 잘됐다고 들었어."
"네. 그런데 제가 할 말이 있습니다."
이준호는 박영미의 눈을 봤다.
"저는 더 이상 응급실에서 일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박영미의 표정이 바뀌었다.
"왜?"
"제 능력이 자꾸만 깨어나려고 합니다. 환자가 죽어가는 상황에서, 제 손가락들이 움직이려고 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을 견디기 위해 팀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공정하지 않습니다. 제가 팀의 신뢰를 악용할 수도 있으니까요."
박영미는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럼 넌 뭘 하고 싶어?"
"외래 진료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리고 강철준 교수와의 논문 작업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의료 시스템 개혁을 위해서."
박영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렇게 하자. 넌 의료인이 되는 길을 찾았어. 그것으로 충분해."
외래 진료실. 다음날 오후.
이준호는 새로운 환자들을 진료했다. 당뇨병 환자, 고혈압 환자, 퇴행성 관절염 환자. 평범한 진료였다. 특별한 능력이 필요하지 않은, 오직 의료인으로서의 책임감만 필요한 진료였다.
그리고 이준호는 그 평범함 속에서 진정한 의료의 의미를 찾았다.
이제 나는 혼자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한 의료라는 것을.
강철준의 사무실. 저녁.
이준호는 강철준을 만났다. 책상 위에는 의료 윤리 입문서와 함께 이준호가 읽은 흔적이 있었다. 밑줄, 메모, 포스트잇.
"책을 다 읽었나?"
"네. 3장부터 7장까지 정독했습니다."
"그리고?"
"제 사례가 정확히 어디에 해당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개인의 능력이 시스템을 교란하는 과정. 그리고 그것이 초래한 비극."
강철준이 이준호에게 새로운 서류를 건넸다. 의료 시스템 개혁안이었다.
"이게 우리가 함께 쓸 논문의 골격이야. 제목은 '새로운 의료: 초감각적 능력의 규제와 팀 의료 시스템의 구축'이야. 총 5장으로 구성돼 있어."
강철준이 서류를 펼쳤다.
"1장: 초감각적 진단 능력의 정의와 현황 2장: 개인 능력 중심 의료의 문제점 (너의 사례 포함) 3장: 윤리위원회의 규제 기준안 (공시 의무화, 사용 금지 조건 등) 4장: 팀 의료 시스템의 구축 방안 (병원 규정 개정, 협의 의무화 등) 5장: 결론 및 향후 과제"
이준호는 서류를 읽었다.
"이미 윤리위원회에서 규제 기준안을 만들었다고 하셨는데, 이것도 포함되나요?"
"그래. 그리고 병원 규정도 개정될 거야. 너의 조건부 복구 조건들이 모든 의료기관에 적용될 거야. 초감각적 능력을 가진 의료진에 대한 공시 의무화, 사용 금지, 협의 의무화, 정기적 정신과 상담 지속. 이 모든 것이 법제화될 거야."
이준호의 눈이 떨렸다.
"제 사례 때문에?"
"그리고 다른 사례들도 있을 거야. 너만 초감각적 능력을 가진 의료인이 아니니까. 하지만 넌 처음으로 그것을 인정하고, 그것의 대가를 받아들인 의료인이야. 그것이 중요해."
이준호는 침을 삼켰다.
"언제부터 논문 작업을 시작할까요?"
"내일부터. 넌 너의 사례를 최대한 상세하게 증언해야 해. 초감각적 능력이 뭐였는지, 어떻게 사용했는지, 그것이 뭘 초래했는지. 모든 것을."
이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준호."
강철준이 이준호를 봤다.
"넌 이제 의료인이 되는 길을 찾았어. 그것으로 충분해. 신의 손이 아닌, 인간의 손으로 환자를 돌보는 의료인으로."
이준호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하지만 이번엔 고통의 눈물이 아니었다. 깨달음과 책임을 받아들이는 눈물이었다.
그 후 3개월이 지났다.
이준호는 강철준과 함께 논문을 작성했다. 자신의 초감각적 능력을 상세하게 증언하고, 그것이 초래한 비극을 학술적으로 분석했다. 그 과정에서 윤리위원회는 초감각적 진단 능력에 대한 규제 기준안을 최종 확정했다.
병원 규정도 개정되었다. 초감각적 능력을 가진 의료진에 대한 공시 의무화, 사용 금지, 협의 의무화, 정기적 정신과 상담 지속. 모든 것이 법제화되었다.
그리고 이준호는 외래 진료실에서 평범한 의료인으로서 환자들을 돌보고 있었다.
응급실 복도. 오후 5시.
이준호는 응급실을 지나가고 있었다. 심태훈이 새로운 환자를 진료하고 있었다. 한석우가 마취를 관리하고 있었다. 이민지가 기록을 남기고 있었다.
그들은 더 이상 신의 손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대신 팀의 신뢰와 협력으로 환자들을 살리고 있었다.
이준호는 그들을 지나쳐 외래 진료실로 돌아갔다.
새로운 환자가 들어왔다. 그 환자의 이름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돌봐야 할 환자였다.
이준호는 환자의 손을 잡았다. 맥박을 감지하려는 능력은 더 이상 없었다. 대신 의료인으로서의 따뜻한 손길이 있었다.
"어디가 불편하세요?"
환자가 증상을 설명했다. 이준호는 차트를 기록했다. 그리고 천천히 진료를 진행했다.
혼자가 아닌, 함께의 의료.
신의 손이 아닌, 인간의 손.
그것이 이준호가 찾은 진정한 의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