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 항만, 불길 속의 침묵
창고의 화염이 여전히 타오르고 있었다.
박준호는 그 불길 속에서 손가락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연기가 코를 자극했고, 열기가 얼굴을 달궜다. 소방수들의 물줄기가 화염을 향해 쏟아졌지만, 이미 늦었다. 창고 안의 물품들은 모두 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3년간 축적한 재고, 해상 무역로의 증거, 명과의 계약서들. 모든 것이 불타고 있었다. 한명준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박준호의 손가락이 더 심하게 떨렸다. 이것은 단순한 재산 손실이 아니었다. 이것은 신호였다. 자신의 제국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보여주는 신호.
옆에 오서연이 있었고, 뒤에 임재욱이 검을 쥐고 있었다.
"그 자는 어디에 있는가?"
박준호가 물었다.
"왕실 기사단이 체포했습니다."
임재욱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그 자는 죽었다고 봅니다."
"시체를 확인했는가?"
"아직입니다."
그것이 문제였다. 조선에서는 죽음도 확실하지 않았다. 특히 권력이 얽힌 죽음은 더욱 그러했다. 한명준이 정말 죽었는지, 아니면 어딘가에서 새로운 음모를 짜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박준호는 자신의 손을 들었다.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3년 전 저자거리의 작은 쌀 가게에서 시작한 사업이 이제 조선 전역을 장악했다. 한양의 시전, 개경의 장시, 부산의 포구. 모두 박준호의 이름 아래 움직이고 있었다. 명나라와의 무역로도 열렸고, 청나라와의 접촉도 이루어졌으며, 일본 상인들도 박준호의 대동상회에 참여하기를 원했다.
그런데 손이 떨렸다.
"주인님?"
오서연이 그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따뜻했다.
"당신은 정말 신분을 초월했습니다."
오서연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명확했다. 그것은 축하가 아니었다. 확인이었다.
박준호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아니다. 나는 신분제 내에서 살았다. 다만 상업 영역에서 신분의 제약을 우회했을 뿐이다."
그 말을 하면서도 박준호는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혹은 진실이 너무 복잡해서 단순한 문장으로 표현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신분제를 유지했다고 말하면서, 그는 신분제를 무력화했다. 양반의 권위를 인정했으면서, 그 권위 아래에 새로운 질서를 만들었다. 법적으로는 평민이었지만, 현실에서는 그 누구도 그를 평민이라 부르지 않았다.
손가락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박준호는 그것을 주시했다. 공포도, 흥분도 아닌 다른 무언가였다. 마치 절벽 끝에 서 있는 듯한 감각. 한 발 더 나아가면 돌아올 수 없을 그런 느낌.
"수치를 보셨습니까?"
오서연이 물었다.
"어떤 수치?"
"3년 전 저자거리 쌀 가게의 수익과 지금의 수익입니다."
박준호는 그 수치를 이미 알고 있었다. 205배. 3년 만에 자산이 205배 증가했다. 그것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었다. 그것은 조선 상업 전체의 구조 변화를 의미했다.
평민 한 명이 205배의 부를 축적했다는 것은, 신분제가 더 이상 절대적이지 않다는 뜻이었다. 시전 상인들의 독점이 무너지고 있었다. 평민 상인들이 대거 진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박준호가 있었다.
그 숫자를 보면서 박준호는 공허함을 느꼈다. 마치 자신이 어떤 절벽을 넘었는데, 그 절벽 너머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그런 느낌이었다.
"당신은 신분제를 깼습니다."
오서연이 다시 말했다.
"아니다."
박준호가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끊었다.
"신분제는 여전히 서 있다. 양반은 여전히 벼슬을 독점한다. 평민은 여전히 노역과 세금을 낸다. 내가 한 것은 그 벽을 깬 것이 아니라, 그 벽의 틈으로 손을 집어넣은 것일 뿐이다."
그때 발걸음이 들렸다.
부산 항만의 관리 이신걸이 다가왔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박상인. 긴급 소식입니다."
박준호가 돌아섰다.
"무엇인가?"
"조정에서 특사를 보냈습니다. 이재성 판서가 직접 부산으로 내려온다고 합니다."
박준호의 얼굴이 굳었다. 이재성은 조정의 고위 관료였다. 그는 박준호를 보호해준 인물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조정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방문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언제 도착하는가?"
"내일 오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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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성은 다음날 오전 정각에 도착했다.
그는 혼자 오지 않았다. 조정의 기사 열 명이 그를 호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박준호의 대동상회 건물 앞에서 멈추었고, 이재성 혼자만 안으로 들어왔다.
박준호는 그를 회의실로 안내했다. 오서연과 이준구가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재성은 박준호를 보자마자 웃음을 지었다.
"3년 만에 조선 최대의 상인이 되셨군요."
박준호가 인사했다.
"판서님의 도움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습니다."
"아니다. 이것은 당신의 능력입니다."
이재성이 앉았다. 그리고 잠시 박준호를 관찰했다. 마치 상품을 감정하는 상인처럼.
"당신은 신분제를 깨뜨렸습니다."
그 말은 박준호가 이미 오서연에게 부정한 말이었다. 하지만 이재성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은 다른 의미였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 정치적 선언이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박준호가 조용히 말했다.
"신분제는 여전히 서 있습니다. 당신이 그 증거입니다. 당신은 여전히 양반이고, 나는 여전히 평민입니다."
이재성의 미소가 더 깊어졌다.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그가 손을 들었다. 조정 관리가 서류 한 묶음을 들고 들어왔다.
"이것은 명나라 황제가 조선 조정에 보낸 편지입니다."
이재성이 편지를 펼쳤다. 한문으로 적힌 글씨가 보였다. 박준호는 그것을 완전히 읽을 수는 없었지만, 의미는 파악할 수 있었다. 명나라가 자신의 상회와 공식적인 무역을 원한다는 내용이었다.
"명나라는 당신을 '상업의 거인'이라고 부릅니다. 신분제와는 무관하게."
박준호의 호흡이 얕아졌다.
명나라 황제가 자신을 인정했다는 뜻이었다. 조선의 신분제는 조선 내에서만 절대적이었다. 명나라의 눈에는 박준호가 평민인지 양반인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가 얼마나 큰 부를 가지고 있고, 얼마나 큰 상업 네트워크를 구축했으며,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였다.
"그리고 하나 더 있습니다."
이재성이 계속했다.
"조정은 당신의 상회에 투자하고 싶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당신의 경영 시스템을 배우고 싶습니다. 복식부기, 분업화, 계약서 기반의 거래 체계. 이것들은 조선의 관료 체계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재성의 말은 명확했다. 조정이 박준호의 경영 기법에 투자한다는 것은, 곧 조정이 신분제 체계 내에서 새로운 경제 질서를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투자 규모는 얼마입니까?"
이준구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차갑고 계산적이었다.
"5만 냥입니다. 첫 번째 투자로."
이준구와 박준호가 눈을 마주쳤다. 5만 냥은 거대한 자금이었다. 그것으로 새로운 해상 무역로를 완전히 개척할 수 있었다.
"조건은?"
박준호가 물었다.
이재성의 미소가 사라졌다.
"당신이 상업에만 집중하면 됩니다.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을 것. 조정 내 반대 세력이 있습니다. 보수파들은 당신을 '신분제를 깨뜨리는 위험한 존재'라고 봅니다. 만약 당신이 정치에 개입하면, 나도 당신을 보호할 수 없습니다."
박준호는 그 말의 무게를 느꼈다. 그것은 투자 제안이 아니라 거래였다. 조정의 보호를 받는 대신, 정치적 중립을 유지하라는 뜻이었다.
오서연이 이재성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이 좁혀졌다.
"판서님, 질문이 있습니다. 조정이 명과 공식 관계를 맺으면서 동시에 정치 중립을 요구하는 것이 가능한가요?"
이재성이 오서연을 바라봤다. 그의 표정이 잠깐 흔들렸다.
"무슨 뜻입니까?"
"명의 황제가 당신의 경영 시스템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이미 당신이 정치적 인물이라는 뜻입니다. 조정이 그것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정치 중립을 강요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오서연의 지적은 정확했다. 박준호는 그 순간 자신이 얼마나 운이 좋은지 깨달았다. 오서연이 없었다면, 그는 이 함정에 빠져 있었을 것이다.
이재성이 침묵했다. 긴 침묵이었다. 그의 손가락이 탁자 위에서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마치 뭔가를 계산하는 듯이.
"그렇다면 다시 말하겠습니다."
이재성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정은 당신을 경제 자문관으로 임명하고 싶습니다. 명과의 공식 관계도 조정이 중개하겠습니다. 대신 당신은 조정의 정책 결정에 참여해야 합니다. 신분제 개혁, 상업 법령 정비, 해상 무역 정책. 모든 것에."
박준호의 호흡이 가빠졌다. 이것은 단순한 제안이 아니었다. 이것은 박준호를 정치 무대로 끌어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이재성이 계속했다.
"한명준은 죽었습니다. 공식적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박준호는 그 말을 들으면서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한명준의 시체가 정말 확인되었을까? 아니면 이것도 정치적 선언일 뿐일까? 임재욱이 아직 시체를 확인하지 못했다고 했는데.
박준호는 자신의 손을 들었다.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떨림의 의미를 알았다. 그것은 공포가 아니었다. 그것은 선택의 무게였다.
"수락하시겠습니까?"
이재성이 물었다.
박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편지를 다시 들었다. 명나라 황제의 편지. 그 편지에는 무엇이 적혀 있을까? 그것이 정말 공식적인 무역 제안일까, 아니면 다른 의도가 숨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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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성이 떠난 후, 박준호는 혼자 사무실에 있었다.
그의 앞에는 경영서가 놓여 있었다. 3년 전 고서점에서 얻은 그 책이었다. 그는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다. 거기에는 누군가의 낙서가 있었다.
'모든 혁명은 상업에서 시작된다.'
박준호는 그 말을 읽으면서 웃음을 지었다. 고서점 주인이 말했던 '이 책을 읽는 자는 신분을 초월한다'는 말도 떠올랐다. 하지만 박준호는 신분을 초월하지 않았다. 박준호는 신분제 내에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 질서가 조정까지 파급되려 하고 있었다.
그때 발걸음이 들렸다.
임재욱이 들어왔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주인님. 긴급 소식입니다."
박준호가 들었다. 임재욱의 목소리에는 긴장이 담겨 있었다.
"무엇인가?"
"윤지훈이 나타났습니다."
박준호의 호흡이 멈추었다. 윤지훈은 한명준의 오른팔이었다. 그는 지난 3년간 박준호를 추격해온 암살자였다. 그런데 한명준이 죽었다면, 윤지훈은 어떻게 된 것일까?
"어디에?"
"부산 항만입니다. 하지만... 이상합니다."
"뭐가?"
임재욱이 숨을 고르고 말했다.
"그는 혼자가 아닙니다. 명나라 상인들과 함께 있습니다."
박준호는 그 말의 의미를 파악했다. 윤지훈이 명나라 세력과 접촉했다는 뜻이었다. 그것은 모든 것을 바꾸는 정보였다.
"그가 뭐라고 했는가?"
"당신을 만나고 싶다고 했습니다. 혼자서."
박준호는 창밖을 바라봤다. 부산 항만의 밤이 보였다. 불빛이 켜지고 있었다. 마치 전쟁 전야의 진지처럼.
3년 전 고서점에서 얻은 경영서는 신분제를 초월하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상업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방법만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부는 권력을 만들었다.
하지만 권력이 만드는 것은 부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또 다른 적도 만들었다.
박준호는 일어나 서 있었다.
"준비하라. 나가겠다."
임재욱이 눈을 떴다.
"주인님, 위험합니다."
"알고 있다."
박준호는 그 말을 했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신분제를 초월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그것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야 했다.
그리고 윤지훈과의 만남은, 그 방법을 배우는 첫 번째 시험이 될 것이었다.
밤의 부산 항만으로 향하는 길, 박준호는 자신이 정말 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하지만 되돌릴 수는 없었다. 그는 이미 너무 멀리 왔기 때문이었다.
# 10화
부산 항만의 밤은 예상보다 조용했다.
박준호가 항만 창고 앞에 내렸을 때, 바람만 소리 내며 불을 밝혔다. 횃불 빛이 물 위에서 흔들렸다. 화물을 쌓은 더미들이 검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평소 같으면 인부들의 목소리와 짐 나르는 소리가 가득 찼을 시간인데, 지금은 텅 비어 있었다.
임재욱이 박준호의 뒤에서 검의 자루를 잡았다. 그의 눈은 어둠 속의 모든 움직임을 포착하고 있었다.
"저쪽입니다."
임재욱이 가리킨 방향은 가장 큰 창고였다. 그곳의 문이 열려 있었다. 안에서 횃불이 켜져 있었다.
박준호는 한 발 내딛기 전에 멈췄다. 이것이 함정일 가능성은 높았다. 하지만 함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들어가는 것, 그것도 또 다른 경영의 기술이었다. 위험을 계산하고 그 안에서 이득을 취하는 것. 경영서에는 없지만, 조선의 상업에서는 가장 중요한 기술이었다.
"혼자 가겠다."
"주인님."
"그게 약속이다. 혼자서 만나는 것이."
임재욱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하지만 그는 손을 놓았다. 3년간 박준호 곁에 있으면서, 그는 배웠다. 주인의 결정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그 대신 할 수 있는 것은 위험을 최소화하는 것뿐이었다.
"창고 밖에 서 있겠습니다. 문제 생기면 즉시 들어갑니다."
박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창고 안은 생각보다 밝았다. 횃불이 네 곳에 설치되어 있었고, 그 아래 화물 상자들이 정렬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중앙에 윤지훈이 서 있었다.
3년 만의 대면이었다.
윤지훈의 모습은 변했다. 왼쪽 팔이 없었다. 임재욱의 검이 지난 번 산길 추격에서 날린 상처였다. 그 대신 나무로 만든 의수가 부착되어 있었다. 그것도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윤지훈의 눈은 변하지 않았다. 감정이 없는 검은 눈. 3년 전과 똑같았다.
"왔군요."
윤지훈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도 변하지 않았다. 낮고, 차갑고, 아무 감정도 담지 않은 목소리.
박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창고 중앙으로 들어갔다.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은 거리. 경영의 거리였다.
"한명준이 죽었습니다."
윤지훈이 말했다.
박준호는 침묵했다. 그것이 확인이었다.
"조정이 그를 죽였습니다. 당신의 증거로."
"그래서?"
박준호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하지만 그의 손가락은 떨리고 있었다. 그것을 윤지훈이 눈여겨봤다.
"한명준은 저에게 주인이었습니다. 15년을 함께했습니다."
윤지훈이 한 발을 옆으로 옮겼다. 그 움직임만으로도 박준호의 근육이 긴장했다. 하지만 윤지훈은 공격하지 않았다.
"그를 죽인 것은 당신입니다."
"그렇다."
박준호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비록 조정이 한명준을 체포했지만, 그를 몰아세운 것은 박준호였다. 복식부기, 분업화, 계약서. 모든 것이 한명준을 무능하게 만들었고, 결국 조정의 손에 넘겼다.
"그래서 나를 죽이러 온 건가?"
윤지훈의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 그것은 비극적인 웃음이었다.
"3년 전이라면 그랬을 겁니다."
윤지훈이 오른손을 들었다. 그 손에는 편지가 들려 있었다.
"명의 황제가 당신을 찾고 있습니다."
박준호는 그 편지를 건네받지 않았다. 대신 물었다.
"무슨 조건?"
"당신의 경영 시스템을 명에도 적용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윤지훈이 천천히 말했다. 마치 누군가에게서 암기한 것처럼.
"그리고 그를 위해 특사를 보낼 것이라고 했습니다."
"특사?"
"저입니다."
박준호는 그 말의 의미를 파악했다. 윤지훈이 명의 특사라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더 이상 한명준의 암살자가 아니었다. 그는 다른 주인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한명준이 죽으면서, 나는 주인을 잃었습니다."
윤지훈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감정이 없었다. 하지만 그 눈에는 무언가가 떠올랐다. 복수심인지, 아니면 단순한 현실적 선택인지 알 수 없는 무언가.
"그리고 당신은 새로운 권력이 되었습니다. 조선에서도, 명에서도."
박준호는 천천히 그 편지를 받아들었다. 종이는 생각보다 얇았다. 하지만 무게는 엄청났다.
"당신이 이것을 가져온 이유는?"
"명의 황제는 당신을 신뢰합니다."
윤지훈이 한 발을 더 옆으로 옮겼다. 마치 박준호를 피하려는 듯이.
"당신의 경영서를 읽었다고 했습니다."
경영서.
박준호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적힌 낙서. '모든 혁명은 상업에서 시작된다.'
그런데 명의 황제까지 그것을 알고 있다는 뜻인가?
"당신은 내가 거기 가기를 원하나?"
윤지훈이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나는 당신이 선택하기를 원합니다. 가거나, 남거나."
침묵이 흘렀다. 창고 안의 횃불이 타닥거렸다. 그 소리만 들렸다.
"하지만 당신이 간다면, 조선은 당신을 따를 것입니다."
윤지훈의 말이 이어졌다.
"왕도, 조정도, 상인들도. 모두가 당신을 따를 것입니다."
박준호는 편지를 펼쳤다. 한문으로 적힌 글씨가 보였다. 정확한 해석은 이준구가 필요했다. 하지만 의미는 명확했다. 명의 황제가 박준호와의 공식 무역을 원하고 있고, 그를 위해 특사를 보낸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한 가지 더 있었다.
'대동상회의 경영 원리를 명의 상업에 적용하고...'
나머지는 박준호의 불안감으로 채워졌다. 명의 황제가 정확히 무엇을 원하는가. 그것이 진짜 제안인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숨어 있는가.
"당신은 정말 명의 특사인가?"
윤지훈이 웃음을 지었다. 그것은 여전히 감정 없는 웃음이었다.
"한명준이 죽은 순간, 나는 죽었습니다. 지금의 나는 윤지훈이 아닙니다."
그의 의수가 들렸다. 나무가 창고의 바닥에 닿는 소리.
"나는 명의 특사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다음 선택을 지켜보는 사람입니다."
박준호는 그 말을 들으면서도, 이것이 또 다른 함정이 아닌지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윤지훈의 눈을 보면, 그것은 함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현실이었다. 엄연한 현실.
"가면, 조선은 어떻게 되나?"
"이재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준구가 있습니다."
윤지훈이 대답했다.
"그들은 당신이 없어도 당신이 만든 시스템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간다면, 조선은 더 빠르게 변할 것입니다. 경제 강국이 될 것입니다."
박준호는 편지를 다시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생각했다.
3년 전 고서점 주인의 말이 떠올랐다. '이 책을 읽는 자는 신분을 초월한다.'
박준호는 신분을 초월하지 않았다. 그는 신분제 내에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제 그 질서가 신분제 자체를 초월하려 하고 있었다. 조선의 신분제를 넘어, 명의 황제까지 그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당신이 조선에 남는다면?"
윤지훈이 물었다.
"나는 당신의 오른팔이 될 것입니다. 한명준의 오른팔이었던 것처럼."
그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무언가가 섞였다. 감정인지, 아니면 단순한 현실적 선택인지 알 수 없는 무언가.
"하지만 이번에는 다릅니다. 이번에는 내가 당신을 위해 일할 것입니다."
박준호는 윤지훈의 얼굴을 자세히 봤다. 그 얼굴에는 정말로 감정이 없었다. 하지만 그 눈 안에는 무언가가 있었다. 원망? 경외? 아니면 단순한 현실적 계산?
"당신이 그 길을 가면, 당신은 더 이상 평민이 아닐 것입니다. 당신은 권력자가 될 것입니다."
박준호는 그 말을 했지만, 그것은 윤지훈의 말이 아니었다. 그것은 박준호 자신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권력자는 항상 적을 만듭니다."
윤지훈이 한 발을 물러섰다.
"당신이 그 주인이 될 수 있습니까?"
박준호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편지를 들고 창고를 나왔다.
임재욱이 검을 들고 있었다.
"주인님. 괜찮으신가요?"
"괜찮다. 가자."
창고로 돌아가는 길, 박준호는 편지를 계속 들고 있었다. 명의 황제의 편지. 그것은 단순한 종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박준호의 인생을 바꾸는 선택지였다.
가거나, 남거나.
하지만 그것은 진짜 선택이 아니었다. 진짜 선택은 이미 끝나 있었다. 3년 전 고서점에서 경영서를 집어 들었을 때부터.
박준호가 부산 항만을 떠날 때, 윤지훈은 창고 안에서 여전히 서 있었다. 한 팔만 남은 몸으로. 하지만 그의 눈은 박준호를 따라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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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상회 사무실로 돌아갔을 때, 오서연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다.
"남편. 뭔가 일이 있었나요?"
박준호는 편지를 내밀었다.
"명의 황제가 우리를 찾고 있다."
오서연이 편지를 받아 읽기 시작했다. 한문을 읽을 수 있는 그녀의 눈이 점점 커졌다.
"이것은... 정치적 선언입니다."
"알고 있다."
오서연이 편지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박준호를 바라봤다.
"당신에게 명의 특사가 되라는 건가요?"
"아니다. 선택지를 줄 뿐이다. 가거나, 남거나."
오서연이 편지를 다시 들었다. 이번에는 더 꼼꼼히 읽었다.
"경영서가 명에 어떻게 전달되었나요?"
박준호도 그 질문을 가지고 있었다. 누가 경영서를 명의 황제에게 전달했을까?
"윤지훈이 말했다. 명의 황제가 그것을 읽었다고."
"그렇다면 윤지훈이 전달했다는 뜻인가요?"
박준호는 그 가능성을 생각해봤다. 윤지훈이 명의 세력과 접촉했고, 그들에게 경영서를 전달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 일어났을까? 한명준이 죽기 전인가, 후인가?
"모르겠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미 명의 황제가 우리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오서연이 다시 박준호를 바라봤다.
"당신의 성공은 결국 누군가의 몰락을 의미합니다. 당신은 이미 한명준을 죽였습니다."
그 말은 박준호의 가슴을 찔렀다.
"그리고 이제 당신은 조선을 떠나 명을 바꾸려고 합니다. 그것이 정말 당신이 원했던 건가요?"
박준호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경영서를 다시 펼쳤다. 마지막 페이지의 낙서를 읽었다.
'모든 혁명은 상업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한 일은 혁명이 아니다. 우리는 신분제를 폐지하지 않았다. 우리는 단지 상업의 영역에서 신분의 벽을 무너뜨렸을 뿐이다."
"그래서요?"
"그래서 이제 정치의 차례다. 명의 황제가 우리를 필요로 한다면, 그것은 경제가 정치를 바꾸고 있다는 뜻이다."
박준호가 창밖을 바라봤다. 부산 항만의 밤이 보였다. 배들이 정박해 있었다. 명, 청, 일본에서 온 배들. 그들은 모두 박준호의 상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서연이 박준호의 손을 잡았다.
"당신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박준호는 두 가지 선택을 생각했다. 명으로 가는 것, 조선에 남는 것.
"우리는 조선을 떠나지 않는다."
"정말인가요?"
"정말이다. 명은 우리에게 올 것이다. 경제는 정치를 따라간다. 우리가 조선을 강국으로 만들면, 명도, 청도, 일본도 모두 따라올 것이다."
박준호가 일어났다.
"내일 한양으로 간다. 왕을 만나겠다."
그때 이준구가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또 다른 편지가 있었다.
"주인님. 긴급 편지입니다. 한양에서 온 것입니다."
박준호가 그 편지를 받았다.
발신인은 이재성이었다.
'박준호여. 명의 황제가 당신을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조선도 당신을 필요로 합니다. 왕께서 당신을 조정의 경제 자문관으로 임명하고 싶으시다고 했습니다. 당신의 선택이 조선의 미래를 결정합니다. 신중하게 생각해 주십시오.'
박준호의 호흡이 가빠졌다.
이것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니었다. 이것은 소환이었다. 조선의 왕이 직접 내리는 소환.
오서연이 박준호의 손을 잡았다.
"당신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박준호는 두 편지를 들었다. 하나는 명의 황제에게서, 하나는 조선의 왕에게서. 둘 다 박준호를 원하고 있었다.
"우리는 조선을 떠나지 않는다."
박준호가 일어났다.
"내일 한양으로 간다. 왕을 만나겠다. 그리고 조정에 제안하겠다."
"무슨 제안입니까?"
"신분제를 유지하되, 상업의 영역에서는 완전한 자유를 주는 것. 그리고 명과의 공식 무역을 중개하는 것. 하지만 조건이 있다."
"무슨 조건입니까?"
"조정의 정책 결정에 내가 참여해야 한다는 것. 신분제 개혁, 상업 법령 정비, 해상 무역 정책. 모든 것에. 그리고 신분제 옹호파들이 나를 반격할 때, 왕은 나를 보호해야 한다."
오서연의 눈이 커졌다.
"당신은 조정 내 권력 투쟁에 뛰어들려는 건가요?"
"그렇다. 이미 우리는 경제적으로 신분제를 무너뜨렸다. 이제 정치적으로 그것을 완성해야 한다. 명의 황제가 우리를 필요로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경제가 정치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박준호가 편지를 들었다.
"명과의 공식 관계, 조정의 투자, 왕의 임명. 모든 것이 맞아떨어졌다. 이제 우리는 조선을 바꿀 수 있다."
오서연이 박준호를 바라봤다. 그 눈에는 걱정과 함께 무언가 다른 감정이 섞여 있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명의 특사가 되는 건가요?"
박준호는 그 질문을 생각해봤다. 명의 특사가 되는 것. 그것은 조선의 왕에게 반역하는 것이 될 수도 있었다.
"아니다. 나는 조선의 경제 자문관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명과의 공식 무역을 중개할 것이다. 두 가지 모두를 동시에 해야 한다."
"그것은 위험합니다."
"알고 있다. 조정 내 보수파들은 나를 신분제를 깨뜨리는 위험한 존재로 볼 것이다. 신분제 옹호파들은 나를 명과의 밀사로 의심할 것이다. 양쪽 모두에게 적이 될 것이다."
박준호가 창밖을 바라봤다. 부산 항만의 밤이 더 깊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경제가 강하면, 정치는 따라올 것이다. 명과의 무역이 조선에 얼마나 큰 부를 가져오는지 보여주면, 신분제 옹호파들도 침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서연이 박준호의 손을 잡았다.
"당신이 그 길을 가면, 당신은 더 이상 평민이 아닐 것입니다. 당신은 권력자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권력자는 항상 적을 만듭니다."
박준호는 그 말을 들으면서 웃음을 지었다.
"이미 나는 적을 만들었다. 한명준이 그것의 증거다. 이제 그 적들과 싸우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이 경영서에는 없지만, 조선의 권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박준호가 일어났다.
"내일 한양으로 간다. 왕을 만나고, 조정에 우리의 계획을 제시하겠다. 신분제를 유지하되, 상업의 영역에서는 완전한 자유를 주는 것. 그리고 명과의 공식 무역을 중개하는 것. 그 대신 조정의 정책 결정에 내가 참여해야 한다는 조건을 제시할 것이다."
오서연이 박준호를 바라봤다.
"당신이 그 조건을 제시하면, 조정은 당신을 거절할 것입니다. 왕도 그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입니다. 평민이 조정의 정책 결정에 참여한다는 것은, 신분제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박준호는 그 말을 듣고 생각했다. 오서연의 지적은 정확했다. 왕이 그 조건을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이었다.
"그렇다면 다르게 접근하겠다. 명의 황제가 우리를 특사로 원한다고 말하겠다. 그리고 명의 황제는 우리의 경영 시스템을 명에 적용하고 싶어 한다고 말하겠다. 그 대신 조선에 5년간 특별 무역 특권을 부여한다고 말하겠다."
"그렇다면 왕은 당신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명과의 공식 무역, 5년간의 특별 무역 특권. 그것은 조선의 이익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는 조정의 경제 자문관이 될 것이고, 신분제를 유지하면서도 상업의 영역에서는 완전한 자유를 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할 것이다."
박준호가 편지를 다시 들었다.
"명의 황제가 우리를 필요로 하는 이유는, 우리가 신분제를 깼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신분제를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경제 질서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명의 황제가 원하는 것이다. 그것이 동아시아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오서연이 박준호를 바라봤다. 그 눈에는 이제 걱정이 아니라 무언가 다른 감정이 담겨 있었다.
"당신은 정말 신분을 초월했습니다."
박준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나는 신분제를 초월하지 않았다. 나는 신분제 내에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제 그 질서가 신분제 자체를 바꾸려 하고 있다. 그것이 진정한 혁명이다."
박준호가 창밖을 바라봤다. 부산 항만의 밤이 더 깊어지고 있었다. 별들이 떠올랐다. 마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 신호처럼.
"내일 한양으로 간다. 왕을 만나겠다. 그리고 조선의 미래를 바꾸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