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침묵의 거래
발끝이 가장자리를 맞닿는 순간, 강준호는 눈을 감았다.
소주병을 떨어뜨렸다. 아래로 내려가는 병의 궤적도 보였다.
"다시 한 번의 기회를 주겠다."
남자도 여자도 아닌 음성이 들렸다. 건설 현장의 굉음과 겹쳐 있으면서도 오직 강준호의 귀에만 들리는 것.
"대신 그 대가는 네 목소리다."
강준호의 입술이 떨렸다. 목소리를 내려고 했지만, 이미 목구멍은 반응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역행했다.
——
눈이 떠졌을 때, 강준호는 낡은 고시원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10년 동안 자살 시도 전까지 살던 그 방.
주변의 모든 음파가 색깔로 보였다. 도로의 차음은 검은 파동으로, 옆방 텔레비전은 푸른 빛으로, 고음은 은색 가시처럼 공중에 떠 있었다. 동시에 수치도 보였다. 차 엔진음: 2000Hz. 드라마 배우 목소리: 220Hz. 냉장고 모터음: 60Hz.
강준호는 벌떡 일어났다.
목구멍에 바늘이 스치는 듯한 통증이 흘렀다. 성대 근처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소실되는 감각.
거울로 달려갔다.
얼굴은 여전히 자신의 얼굴이었다. 33세의 프로듀서, 강준호. 하지만 눈빛은 달랐다.
입을 열었다.
"안녕."
목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훨씬 희미했다. 마치 라디오 신호가 약해지는 순간처럼.
"안녕."
다시 말해봤다. 이번엔 더 희미해졌다.
강준호는 거울에서 눈을 돌렸다. 공포감이 올라왔다. 하지만 동시에 절망이 아닌 다른 감정도 들렸다. 마지막으로 무언가를 시도할 수 있는 기회.
침대 밑에서 낡은 노트를 꺼냈다. 10년 동안 손도 대지 않던 노트. 펜을 들었다. 손이 떨렸다.
글씨가 나왔다.
'자신의 목소리를 잃는 대신 누군가의 목소리를 살릴 수 있다면.'
문장이 미완성으로 끝났다. 강준호는 펜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세 개의 질문이 동시에 떠올랐다. '그게 거래인가?' '그게 속죄인가?' '그게 기회인가?'
그리고 깨달았다. 대답은 하나도 아니라는 것을. 모두가 동시에 참이라는 것을.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떴다. '이태균'.
10년을 함께한 친구. 자신이 나락으로 떨어진 후에도 음향실에 남아 있던 그 사람.
메시지는 짧았다.
'오늘 오전 11시, 강남역 크레센도 엔터 지하 3층. 들을 게 있어.'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6시 32분.
강준호는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입기 시작했다. 10년 동안 소주병 옆에서만 살던 손이, 이제는 다른 일을 하려고 했다.
샤워를 했다. 거울 앞에서 다시 한 번 입을 열어봤다.
"안녕하세요."
음성이 더 희미해졌다. 강준호는 손가락을 들었다. 절대음감으로 본 음정을 손가락으로 표현해보려고 했다. 오른손 집게손가락과 중지손가락을 펼쳤다. 그 사이의 거리가 음정이 되었다.
손가락으로 천천히 스케일을 그렸다. 도, 레, 미, 파, 솔.
강남역 지하 연습실에 도착한 건 10시 58분이었다.
좁고 습한 공간. 천장에서는 에어컨 실외기의 진동이 들렸다.
"오셨네요."
이태균의 목소리가 들렸다. 180Hz, 기대감과 불안감이 섞여 있었다.
강준호는 손가락을 들었다. 손가락 수신호로 인사했다.
이태균은 그 의미를 즉시 이해했다. 그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음... 말은 안 되나요?"
강준호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노트를 들었다. 펜으로 빠르게 글을 썼다.
'목소리를 잃었다. 대신 얻은 게 있다.'
이태균은 노트를 읽었다. 그의 눈빛이 변했다.
"그게... 뭔가요?"
강준호는 손가락을 들었다. 공중에서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도, 레, 미, 파, 솔. 그리고 높은 도에 도달했을 때, 손가락을 멈췄다.
이태균의 눈이 확장했다. 음향 엔지니어였기에, 강준호가 무엇을 표현하는지 이해했다.
"이건... 불가능해요."
강준호는 다시 노트에 썼다.
'가능하다. 그리고 이제부터 시작이다.'
그 순간, 연습실 문이 열렸다.
다섯 명의 청춘이 들어왔다. 모두 20대 초반. 지쳐 보였지만, 눈빛에는 아직 불이 남아 있었다.
리더의 목소리부터 들렸다. 240Hz, 완벽함을 강박적으로 추구하는 긴장감. 그 안에는 절망도 있었다.
"이분이 새로운 프로듀서세요?"
강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태균이 강준호의 노트를 읽은 후,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게... 정말 가능한 거죠?"
강준호는 손가락으로 대답했다. 도에서 시작한 음정이 한 옥타브를 거쳐 높은 도에 닿았다.
"절대음감이 맞다면... 당신이 들었던 소리를 정확히 재현할 수 있다는 뜻인가요?"
노트에 펜이 빠르게 움직였다.
'모든 음파를 수치로 본다. 음정, 음역대, 감정까지.'
이태균의 손이 떨렸다. 10년 전, 강준호가 '라이즈'를 빌보드 차트 15위까지 끌어올렸던 시절의 기억이 되살아났을 것이다.
"그럼 이들을... 진짜로?"
강준호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동시에 목구멍의 통증이 다시 찾아왔다. 이번엔 더 강했다. 강준호는 손으로 목을 만졌다.
이태균이 강준호의 손을 본 것 같았다. 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통증이 있으신 건가요?"
노트에 적힌 글씨가 조금 떨렸다.
'거래의 대가다.'
"대가?"
강준호는 노트를 다시 집었다. 이번엔 더 많은 글을 썼다.
'절대음감을 쓸 때마다 내 음성대역이 줄어든다. 이미 절반이 사라졌다. 남은 건 몇 년이 아닐 거다.'
이태균이 노트를 읽다가 손을 놨다.
"그럼... 당신은 언제까지...?"
강준호의 손가락이 공중에서 움직였다. 도에서 시작했던 음정이 점차 높아졌다. 그리고 어느 지점에서 갑자기 끝났다.
"이 정도면...?"
노트. 펜. 빠른 글씨.
'1년. 많으면 2년.'
이태균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런데도... 이들을?"
강준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태균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무 말도 없이.
이태균이 강준호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가락이 떨렸다. 눈물이 맺혔다.
"라이즈... 다시 한 번?"
강준호는 손가락을 들었다. 도, 레, 미, 파, 솔.
'라이즈가 아니다. 새로운 것을 만든다.'
"노바?"
노트에 체크 표시가 그려졌다.
다섯 명의 청춘들이 강준호를 보고 일제히 멈췄다.
리더라고 할 수 있는 여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긴 검은 머리, 날카로운 눈빛.
"이태균 형, 이분이...?"
강준호가 손가락을 들었다. 인사였다. 도, 레, 미, 파, 솔.
여자의 눈이 좁혀졌다. "뭐 하는 거예요?"
이태균이 입을 열었다. "강준호 프로듀서야. 너희 새로운 PD."
그 말이 나오자, 다섯 명의 표정이 한 번에 변했다. 기대감과 의심이 뒤섞인 표정.
"말씀은 안 하세요?" 리더가 다시 물었다.
강준호는 노트를 들었다. 펜으로 빠르게 글을 썼다.
'목소리를 잃었다. 대신 너희의 목소리가 들린다.'
노트를 건넸다. 리더가 글을 읽었다. 그녀의 표정이 의심으로 굳어졌다.
"진짜 농담 아니세요? 프로듀서가 말도 못 하면서?"
강준호는 손가락을 들었다. 이번엔 리더의 목소리를 따라 음정을 표현했다. 그녀가 방금 말한 마지막 음절의 높이를 정확히 재현했다. 240.5Hz.
리더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당신... 제 목소리를 지금 재현했어요?"
강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손가락을 들었다. 이번엔 다른 음정이었다. 더 낮고, 더 부드럽고, 더 따뜻한 음정.
'이게 너의 진정한 음역대다.'
리더의 눈이 흔들렸다.
"불가능해요. 제 음역대는 이미..."
강준호는 노트에 또 썼다.
'그건 지금까지 너를 가둔 울타리일 뿐이다.'
그 순간, 강준호의 목구멍에서 다시 한 번 바늘이 스치는 통증이 흘렀다. 이번엔 더 깊었다. 강준호는 얼굴을 찡그렸다.
이태균이 강준호를 재빨리 받쳤다. "괜찮으세요?"
강준호는 손을 들어 괜찮다고 표시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리더가 다른 네 명을 보았다. 그들도 모두 같은 표정이었다. 의심과 호기심. 그리고 아주 약한 희망.
"그럼... 당신이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있다는 건가요?"
강준호는 노트를 들었다. 펜이 빠르게 움직였다.
'너희 목소리를 깨운다. 그것이 내 할 일이다.'
노트를 내려놨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다섯 명의 목소리가 모두 들렸다. 동시에 다섯 가지 색상의 음파가 공중에 떠올랐다. 리더 이지은의 파란색. 옆의 남자 댄서 박준서의 황색. 여자 김나현의 적색. 두 번째 남자 이준호의 자주색. 마지막 여자 최하린의 초록색.
다섯 가지 색상. 다섯 개의 감정. 다섯 가지 억압.
강준호는 눈을 떴다. 그리고 손가락을 들었다.
이태균이 강준호의 의도를 즉시 이해했다.
"강준호가 너희 음정을 손가락으로 알려줄 거야. 그대로 따라 해."
강준호가 손가락을 들었다. 도에서 시작해 음정을 천천히 올렸다. 리더 이지은이 그 음정을 따라 노래했다. 목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의 진정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강준호는 손가락을 멈췄다. 그리고 다시 움직였다. 다른 음정으로.
이지은이 그 음정을 따라했다.
그 순간, 무언가가 변했다. 목소리에 감정이 실렸다. 완벽함의 가면 뒤에 숨어 있던 진정한 감정이 드러났다.
이지은의 눈이 넓어졌다.
"이게... 제 목소리예요?"
강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박준서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무거웠다. 180Hz, 자신감 부족. 그는 손을 모으고 있었다.
"저는... 어떻게 되나요?"
강준호는 손가락으로 박준서의 음정을 표현했다. 그리고 천천히 올렸다. 그가 본 음정은 더 높은 곳에 있었다.
박준서가 그 음정을 따라 노래했다.
순간, 그의 목소리가 완전히 달라졌다. 더 밝았다. 더 따뜻했다. 그리고 훨씬 더 강했다.
박준서의 손이 떨렸다.
"이게... 저예요?"
강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 세 명도 차례대로 자신의 진정한 음역대를 발견했다. 김나현은 자기혐오에서 벗어나 더 낮은 음역대를 찾았다. 이준호는 그룹 내 자신의 위치를 처음으로 느꼈다. 최하린은 침묵에 가까웠던 목소리가 마침내 울려 퍼졌다.
다섯 명의 목소리가 각자의 음역대에서 울려 퍼졌을 때, 그것은 더 이상 개별적인 목소리가 아니었다. 하나의 완벽한 화음이 되어 있었다.
강준호의 목구멍에서 다시 한 번 통증이 흘렀다. 이번엔 정말 강했다. 강준호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이태균이 물었다. "많이 아파요?"
강준호는 노트에 썼다.
'상관없다.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펜이 다시 움직였다. 글씨가 점차 불규칙해지고 있었다.
'이들을 살려내자. 그것이 내 남은 시간의 의미다.'
이태균이 노트를 읽었다. 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동시에 무언가 결연한 표정으로 변했다.
"알겠습니다."
강준호는 다시 다섯 명을 보았다. 그들의 눈빛에 아직 불이 남아 있었다. 아주 약한 불, 하지만 분명한 불. 그리고 지금 그 불은 더 밝아져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강준호는 손가락을 다시 들었다. 도에서 시작했다. 그리고 한 음정씩, 천천히, 정확하게 올렸다.
다섯 명의 목소리가 따라왔다.
강남역 지하 연습실에는 처음으로 진정한 음악이 울려 퍼졌다.
---
시간은 자정을 훨씬 넘어 새벽 2시가 되어 있었다.
다섯 명의 청춘들은 이미 지쳐 있었다. 하지만 눈빛은 더 밝아져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처음으로 들었기 때문이었다.
리더인 이지은이 마지막으로 음정을 따라했다. 강준호가 손가락으로 보여준 음정. 그 음정에서 그녀의 목소리는 완전히 다르게 울렸다.
"이게... 저예요?"
강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노트에 썼다.
'이게 너다.'
이지은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박준서가 이지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도 무언가 느낀 것 같았다. 이 연습실에 처음으로 진정한 음악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강준호는 손으로 모두를 모으는 제스처를 했다. 다섯 명이 모두 앞으로 나왔다.
그는 노트에 빠르게 글을 썼다. 글씨가 많이 떨렸다.
'내일부터 진짜 시작이다. 너희는 다섯 명의 천재들이다. 난 그걸 깨워줄 뿐이다.'
그리고 손가락을 들었다. 도, 레, 미, 파, 솔. 다섯 명의 음정을 동시에 표현했다.
다섯 가지 색상의 음파가 공중에 떠올랐다. 완벽하게 어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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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호는 새벽 4시에 크레센도 엔터의 사원실로 돌아왔다.
작은 방. 침대. 그리고 거울.
그는 거울 앞에 섰다. 여전히 자신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무언가 다르다. 눈빛이. 아니, 목구멍이.
말을 해보려고 했다. "안녕하세요."
목소리가 나왔지만, 그것은 더 이상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너무 희미했다. 곧 완전히 사라질 것만 같은 목소리.
강준호는 침대에 앉았다. 그리고 휴대폰을 들었다.
화면이 밝아졌다. 알림이 몇 개 있었다. 모두 회사 관련 메시지였다. 하지만 마지막 메시지는 달랐다.
'강준호야, 돌아왔어? 확인되면 연락 줘. 함께 시작해보자.'
발신인: 이태균.
강준호는 메시지를 타이핑했다.
'준비됐다. 이제 시작이야.'
메시지를 보냈다.
그 순간, 또 다른 알림이 울렸다.
발신인: 오수진.
제목: '강준호에게'
강준호는 메시지를 열었다.
'오래 못 본 사이에 많이 변했나 봐. 그 침묵이 얼마나 오래갈 수 있을지 봅시다. 당신도 결국 같은 길을 걷게 될 거야. 과거처럼.'
강준호의 손이 떨렸다.
과거처럼. 라이즈. 그룹 붕괴. 자신의 나락.
그것이 반복될 수 있다는 협박이 가슴을 누르고 있었다.
강준호는 노트를 집었다. 펜으로 빠르게 글을 썼다.
'다르다. 이번엔 혼자가 아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 다시 썼다.
'자신의 목소리를 잃는 대신 누군가의 목소리를 살릴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펜을 놨다. 그리고 문장을 다시 읽었다. 손가락이 다시 움직였다. 도에서 시작해 높은 도까지. 음정의 완성. 그리고 그 위로 한 음정 더. 아직 이름 없는 음정. 미래의 음정.
강준호는 펜을 들었다. 미완성이었던 문장을 이어 썼다.
'—그것이 내가 찾던 음악이다.'
침묵 속에서, 손가락으로 그린 오선지 위에서, 강준호는 마침내 자신의 음악을 찾았다.
내일부터 시작이다.
노바와 함께.
침묵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