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는 순간, 세상이 무너졌다.
1905년 고종의 궁궐 지하실. 폐결핵으로 허파가 타들어가는 고통, 각혈로 물드는 침, 일본군의 총검 아래서 마지막 설계도를 감춘 채 쓰러지는 그 순간이 마지막이었다. 그런데.
가슴이 뛴다. 심장이.
두 개의 시간으로.
눈을 떴을 때 천장은 초가였고, 몸은 열두 살 아이의 것이었다. 손가락은 가늘고, 가슴은 고르게 상하고 있었다. 폐에 구멍이 없다. 각혈도 없다. 이준석은 벌떡 일어나려다 현기증에 쓰러졌다. 방이 빙글빙글 돈다. 외벽은 진흙과 짚으로 엮인 것이고, 창문은 종이였다. 창밖으로 들리는 소리는 소의 울음, 닭의 울음, 그리고 수레바퀴 소리였다.
꿈인가.
손을 들었다. 다섯 손가락이 모두 거기 있었다. 만지작거렸다. 손등의 주름도, 손톱도 모두 어린 것이었다. 다시 누웠다. 천장을 봤다. 초가지붕의 서까래가 보였다. 1875년. 경주.
이준석은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다. 소리를 내면 미쳤다고 할 것이다.
30년의 기억이 뇌 속에 갇혀 있었다. 증기기관의 설계도, 관형 보일러의 공식, 철도 궤간의 표준, 군함의 장갑 배치 방식. 모두 생생했다. 손가락 끝에서 발끝까지, 신체의 모든 곳에 새겨진 기술의 기억들이 1875년의 열두 살 아이 몸 속에 갇혀 있었다.
조선이 망했다. 그 시간, 그 고통 속에서.
자신이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본 것은 조선의 궁궐이 불타는 모습이었다. 일본군이 금고실에 불을 질렀고, 자신이 10년에 걸쳐 만든 모든 설계도가 재가 되었다. 그리고 자신도 죽었다. 각혈하며, 외로이.
그런데 지금 여기서 다시 살아 있다.
이준석은 천천히 일어났다. 손을 짚고, 다리로 몸무게를 견디고, 서 있었다. 균형을 잡는 것도 어려웠다. 열두 살 몸은 가볍고 약했다. 하지만 뇌는 30년을 살아온 기술자의 뇌였다. 그 괴리가 현기증을 더했다.
방 밖으로 나갔다. 골목은 흙이었고, 하늘은 옅은 파란색이었고, 사람들은 모두 한복을 입고 있었다. 1875년의 경주가 맞았다. 이준석은 걷기 시작했다. 어디로든. 자신이 뭔지 확인해야 했다.
시장으로 향했다. 손가락이 기억하는 길이 있었다. 이상했다. 1875년 경주는 자신이 살아본 적 없는데, 길이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이끌었다. 뇌의 어딘가에 이 도시의 지도가 새겨져 있었던 것 같았다.
시장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채소 파는 노점, 철물 파는 포장마차, 그리고 장난감을 파는 낡은 수레 하나.
이준석의 발길이 멈춰섰다.
그 수레 위에는 나무로 만든 장난감 자동차가 놓여 있었다. 바퀴가 달린 상자, 그 위에 작은 통이 매달려 있었다. 아이가 수레를 끌자 통 안의 물이 튕기면서 바퀴를 굴렸다. 원시적인 반발식 동력 장치였다.
그 순간, 이준석의 손가락이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손가락 끝에서 시작된 불타는 감각이 손등으로 퍼져 나갔다. 1905년 폐가 타들어가던 그 고통이 그대로 손가락으로 투영되었다. 마치 자신이 죽던 순간의 고통이 현재의 육체를 통해 역류하는 것 같았다. 신경이 끊어지는 듯한 공포감이 밀려왔다.
이준석은 손을 움켜쥐었다 폈다. 다섯 손가락이 모두 움직였지만, 오른쪽 새끼손가락이 뻣뻣했다. 손가락 뼈가 얼음처럼 굳어가는 느낌이었다. 약지도 서서히 저리기 시작했다.
이것이 현실이다.
미래 기억을 현실로 구현하려 할 때마다, 자신의 육체가 원래 시간대로 역행한다는 뜻이었다. 30년 뒤의 죽음으로 돌아가기 위해. 그 시간이 빠르거나 느릴 것이고, 그 속도를 자신이 제어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이준석은 가슴을 치며 숨을 고르려 했다. 가슴은 고르지 않았다. 두 개의 시간으로 뛰고 있었다.
한 번은 1875년 열두 살 아이의 심장으로. 한 번은 1905년 죽음 직전의 심장으로.
두 박자가 겹쳤다가 어긋나갔다가, 다시 겹쳤다.
조선을 살려야 한다.
이 생각이 들자, 손가락의 저림이 더 강해졌다. 이준석은 손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시장 깊숙이 들어갔다. 대장간으로 향했다. 기억이 그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대장간의 문은 낡은 나무였다. 안에는 불이 타오르고 있었고, 한 노인이 무언가를 두드리고 있었다. 60대 중반, 팔뚝에 화상 자국이 많은 사나이였다. 이규완. 이준석의 기억 속에는 이 사나이의 이름이 없었지만, 눈 앞의 인물이 그 사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 너 또 왔냐."
이규완이 고개를 들었다. 이준석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눈빛이 낯설었다. 마치 자신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것 같은 눈빛이었다.
"내가... 여기 왔었나요?"
"몇 번이나 왔지. 자네 아버지가 날 데려갔었는데, 자네가 계속 내 일을 보겠다고 칭얼대서."
이준석은 입을 다물었다. 그 기억은 없었다. 1875년 이전의 기억은 모두 사라져 있었다. 오직 1875년부터 1905년까지의 30년이 뇌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날 좀 봐주실 수 있을까요?"
"뭘?"
"기술을 배우고 싶습니다."
이규완이 웃음을 터뜨렸다. 검게 그을린 얼굴이 더 검어 보였다.
"기술? 넌 신분이 뭔데?"
"하급입니다."
이준석의 대답이 끝나기 전에 이규완이 손을 들어 올렸다. 화상 자국으로 얼룩진 손이었다.
"하급이면 끝이지. 왜 기술을 배우려고 하냐? 이 손이 하는 일이 천하다는 걸 모르냐?"
이준석은 이규완의 손을 봤다. 손등은 화상 자국으로 얼룩져 있었고, 손가락은 굽어 있었고, 손톱은 검은색이었다. 70년을 손으로만 일해온 손이었다.
"그 손으로 만든 것들이 나라를 살릴 수 있습니다."
이규완의 손이 멈춰섰다. 불에서 꺼낸 쇠를 들고 있던 손이 공중에서 멈췄다. 그의 얼굴이 이준석을 향했다.
"나라를 살린다고?"
이준석은 이규완의 옆에 섰다. 대장간 바닥의 모래 위에 손가락으로 그려 내렸다. 증기기관의 구조도였다. 보일러, 실린더, 크랭크축, 연결봉. 기억 속 30년의 설계도가 손가락을 이끌고 있었다.
모래 위에 나타난 도형은 정확했다. 비율도 맞았고, 부품의 배치도 완벽했다. 이규완이 몸을 굽혔다. 검게 그을린 얼굴이 더 가까워졌다.
"이게 뭐지?"
"기계입니다. 물을 끓여서 나오는 수증기로 움직이는 기계입니다. 이걸 만들면 수레도 움직이고, 배도 움직이고, 공장의 모든 기계를 돌릴 수 있습니다."
이규완은 한 발 물러섰다. 그의 눈이 변했다. 의심에서 경악으로. 손을 들었다 내렸다를 반복했다.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어디서... 이런 걸 배웠냐?"
"제가 만들었습니다."
"거짓말이다. 넌 열두 살이잖아."
이규완이 설계도를 지워버리려는 듯 발을 들었다. 이준석이 손을 들었다.
"한 번만 만들어보세요."
"뭘 만든다고?"
"이 도형의 일부입니다. 간단한 부품만이라도."
이규완은 이준석을 바라봤다. 어린 얼굴에서 뭔가 다른 것을 본 듯했다. 그는 불 옆에 남겨둔 쇠를 다시 집어 들었다. 다시 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망치를 들었다.
"이 도형대로?"
"네. 이 부분입니다."
이준석이 모래 위의 도형 일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실린더와 피스톤을 연결하는 간단한 부품이었다.
이규완은 불에서 쇠를 꺼냈다. 망치로 두드리기 시작했다. 손가락의 기억이 이끄는 대로, 이준석은 옆에서 지시했다. 불의 온도, 망치의 각도, 식히는 타이밍. 30년을 손으로만 일해온 이규완의 손과 30년을 기억한 이준석의 지식이 만났다.
한 시간이 지났다.
대장간 바닥에는 검은 철 부품이 놓여 있었다. 도형과 거의 같은 형태였다. 이규완은 그것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손가락으로 그 표면을 더듬었다.
"이게... 정말 움직이나?"
"네. 다른 부품들과 연결하면 움직입니다."
이규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무언가를 직감한 눈빛이었다.
"이 소년이 다른 차원의 기술자구나."
그 말을 하는 순간, 이준석의 손가락이 또다시 저렸다. 이번에는 더 강하게. 새끼손가락과 약지가 함께 저렸다. 손가락 뼈를 천천히 얼리는 것처럼. 신경이 끊기는 느낌이 손 전체로 퍼졌다.
이준석은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떨리는 손을 숨기려고.
이규완은 불을 재우고 있었다. 불 위의 망치를 내려놨다. 그리고 이준석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화상 자국이 많은 손이 어린 어깨를 누르고 있었다.
"서울에 가야 한다."
"어?"
"왕실의 대신들이 기술을 원하고 있다. 자네가 가진 그 기술이면... 나라를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규완의 목소리는 낮았다. 마치 밤의 골목에서 누군가 몰래 귀에 대고 속삭이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알아둬야 할 게 하나 있다."
이규완이 이준석의 눈을 봤다.
"기술만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나는 70년을 손으로 일해왔지만, 이 손이 바꾼 건 아무것도 없다. 왕실과 대신들의 권력 싸움 속에서 기술은 도구일 뿐이다. 그걸 명심해야 한다."
이준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손가락의 저림이 계속되고 있었다. 1905년의 죽음이 자신을 천천히 끌어당기고 있는 것 같았다.
"언제 떠나시나요?"
"내일 밤. 한양의 길은 길고, 고종께서 기술을 원하신다는 소식이 조정을 타고 있다. 빨리 가야 한다. 자네를 먼저 본 자들도 있을 테니까."
이규완은 이준석의 손을 잡았다. 70년을 손으로 일해온 손과 30년을 기억한 손이 맞닿았다.
밤이 내렸다.
두 인물이 경주 시장의 북쪽 길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이규완은 작은 짐을 들고 있었고, 이준석은 손가락의 저림을 참으며 따라가고 있었다. 하늘에는 별이 떠 있었다. 1875년의 별들이.
한양은 멀었다. 그곳에는 왕실과 대신들과 일본 스파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조선의 미래가 있었다.
이준석의 손가락이 계속 저렸다. 1905년의 죽음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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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길은 생각보다 길었다.
경주를 빠져나온 지 세 시간. 달빛만으로 앞을 보며 걸었다. 이규완은 말이 적었다. 다만 길을 재촉할 뿐이었다. 이준석은 손가락의 저림에 집중하느라 주변을 거의 보지 못했다. 약지는 이미 반투명해지기 시작했고, 새끼손가락도 서서히 윤곽이 흐려지고 있었다. 마치 천천히 소멸하고 있는 것처럼.
"멈춰."
이규완이 갑자기 섰다. 이준석도 멈췄다. 어둠 속에서 이규완은 고개를 돌려 뒤를 살폈다. 오는 길 어딘가에서 말 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여러 필이었다.
"시장 관리들이다. 아마 넌 속박 없이 나간 노비나 천민으로 신고됐을 거야. 빨리."
이규완이 길을 벗어나 숲으로 들어갔다. 이준석은 따라갔다. 가지가 얼굴을 긁었다. 손가락의 저림과 얼굴의 통증이 동시에 밀려왔다. 1905년과 1875년이 겹쳐지는 느낌이었다.
마찰음이 점점 가까워졌다. 이규완은 큰 바위 뒤에 숨어 이준석을 끌어당겼다. 둘은 숨을 죽였다.
관리들의 행렬이 지나갔다. 횃불을 들고 길을 더듬는 그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술자라고 했나?"
"그래. 경주 시장의 이규완 장인이 어린 소년을 데리고 도망쳤다고. 신고자는 대장간 주인이야. 기술을 빼앗겼다고 울었어."
"왕실에서 찾는 인재인가?"
"모르지. 하지만 이런 밤중에 도망친다는 건 뭔가 숨길 게 있다는 뜻이야."
행렬이 지나갔다. 불빛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규완은 한참을 더 기다렸다 몸을 일으켰다.
"알았지? 이제 넌 도망자야. 경주에선 넌 살 수 없다."
이준석은 손가락을 내려다봤다. 약지가 이제 반투명을 넘어 거의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마치 천천히 소멸하고 있는 것처럼.
"제가 기술을 설계도로만 남겨두면 안 되나요?"
"그럼 대신들이 설계도를 빼앗아 가고 넌 죽어. 대신들은 기술자를 필요로 하지, 기술을 필요로 하지 않아. 기술자가 산 채로 있어야 기술도 계속 나오니까."
이규완이 다시 길을 나섰다. 이준석은 따라갔다. 손가락의 저림은 멈추지 않았지만, 더 악화되지는 않는 것 같았다. 마치 대장간에서 부품을 만든 행위가 '회귀의 진행'의 첫 번째 소비였던 것처럼.
한양까지는 아직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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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를 떠난 지 사흘째 아침. 이준석과 이규완은 한양 근처 언덕에 도착했다.
서울이 보이는 곳에서 이준석은 처음으로 멈춰 섰다. 1875년의 한양. 아직 성벽이 높았고, 건물들이 낮았다. 일본의 공사관도 보였다. 아직은 조용했지만, 곧 시끄러워질 그곳.
이준석의 눈이 흔들렸다. 30년 뒤의 기억이 갑자기 밀려왔다. 불타는 궁궐. 검게 그을린 돌과 재. 그 속에서 들리던 비명들. 자신이 죽어가던 그 순간의 한양. 그리고 지금 눈 앞의 한양. 평온하고 무고한 그 도시.
두 시간이 겹쳤다. 죽음의 시간과 시작의 시간이.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했다. 한 박자는 1875년의 심장으로, 한 박자는 1905년의 심장으로. 시각이 흔들렸다. 1875년의 한양과 1905년의 한양이 투명하게 겹쳐 보였다. 불타는 건물과 멀쩡한 건물이 동시에 눈에 들어왔다. 죽음의 냄새와 봄날의 공기가 함께 코를 자극했다.
이준석은 손가락을 들여다봤다. 약지가 완전히 사라졌다. 새끼손가락은 60% 이상 투명해졌고, 약지가 있던 자리에는 공허함만 남았다. 중지도 서서히 윤곽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얼마나 더 할 수 있을까. 얼마나 더 만들 수 있을까. 30년이 남아 있지만, 손가락은 이미 사라지기 시작했다. 기술의 대가는 생각보다 가혹했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저 도시를 보는 순간, 멈출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가자."
이준석이 말했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지금 가면 저녁에 대신들의 저택에 도착할 수 있어. 김홍집 대신의 집. 거기가 넘 첫 번째 전쟁터야."
이규완이 길을 나섰다. 이준석도 따라갔다. 발걸음이 불안정했다. 두 시간의 겹침이 육체를 흔들고 있었다.
한양으로 향하는 길 위에서 이준석의 손가락이 계속 저렸다. 1905년의 죽음이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은 아직 살아 있었다.
이준석은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아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