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 문학제 개막식 무대는 무겁고 밝았다. 거대한 스크린에 심사 위원들의 이름과 얼굴이 차례로 떴다. 지은은 객석 중앙에 앉아 프로그램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편집자로서 참석한 것이 실은 핑계였다. 자신의 시가 어디선가 누군가의 눈에 띄길 바라는 마음—그런 수치스러운 소망을 들고 왔다.
"다음은 한국 현대시의 거목, 이준호 시인입니다."
스크린이 밝아졌다.
지은의 손가락이 경직됐다. 그의 얼굴이 크게 확대되어 나타났다. 3년 전과 달라진 것은 눈가의 주름과 입술 라인의 깊이뿐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을까. 그 얼굴은 자신의 시 속에 살아 있었다. 몇 편인지 세어본 적도 없었다.
"안녕하세요. 저 이준호입니다."
현장 음성이 스피커를 통해 울렸다. 목소리까지. 낮고 차분한 그 음성이 3년을 무시하고 현재형으로 침투했다. 지은의 가슴이 철렁했다. 호흡이 얕아졌다.
개막식이 끝나고 네트워킹 라운지로 향했을 때, 누군가가 등 뒤에서 이름을 불렀다.
"지은."
뒤돌아섰다. 준호가 서 있었다. 3년의 거리가 정확히 1.5미터였다. 그는 변했고, 변하지 않았다. 어깨가 더 넓어 보였고, 눈은 더 깊어 보였다. 하지만 그의 입가에서 나오는 미소는 여전히 조심스러웠다. 항상 뭔가를 재다가 풀어놓는 그런 표정.
"준호."
이름을 입으로 낸 것 자체가 위험했다. 목이 조여왔다.
"잘 지냈나."
"네."
한 음절이 전부였다. 그 음절 뒤로 3년이 무너져 내렸다. 그를 피해야 한다는 본능이 깨어났다. 하지만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자석처럼 붙어 있었다.
준호가 한 발 가까워졌다. "당신의 시, 이미 알고 있어."
지은의 눈이 떠졌다. 그 말은 무엇인가. 표면으로는 인사였지만, 그 아래는 다른 무언가가 흐르고 있었다. 알고 있어? 3년 전 그는 뭐라고 했나.
*"네 글 같은 건 관심도 없어. 왜 자꾸 나한테 읽혀야 되는데? 내가 뭐 하는 사람이라고."*
그 말이 떠올랐다. 목구멍에 뭔가가 걸렸다. 준호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3년 전의 거절을 부드럽게 포장하려는 시도였다. 지은의 입술이 움직였다.
"거짓 말씀하지 마세요."
준호의 얼굴이 움직였다. 뭔가를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그 사이에 지은은 몸을 돌렸다. 라운지에서 나갔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뒤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돌아서지 않았다.
복도를 빠져나가 계단을 내려갔다. 손잡이를 잡은 손이 떨렸다. 문학제 건물의 로비에서 나왔다. 바깥은 늦봄이었다. 햇빛이 거리에 떨어져 있었다. 지은은 무작정 걸었다.
10분 후 카페 골목에 있었다. 라테 카페. 자신이 자주 가던 곳이었다. 노현정이 경영하는 가게였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현정은 계산대 뒤에서 지은을 본 듯했다.
"어? 지은아, 오늘 문학제 아니었나?"
"응, 좀 나와서 쉬려고."
지은은 창가 자리에 앉았다. 창 너머로 거리가 보였다. 사람들이 지나갔다. 봄날의 행인들. 그 중 누구도 3년 전 준호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준호는 누구인가.
현정이 아메리카노를 놓았다. 지은은 한 모금 마셨다. 쓴맛이 혀를 적셨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알림이었다.
*[라테 카페 신인 작가 시 전시 공간] 새로운 작품이 게시되었습니다. 작가 '지은'의 시 '그날의 봄은 오지 않았다'가 전시 목록에 추가되었습니다.*
지은의 손가락이 멈췄다. 커피잔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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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실은 문학제 건물 5층에 있었다. 준호는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4시간을 그곳에서 보냈다. 책상 앞에 쌓인 원고는 총 247편이었다. 그 중 12편을 수상작으로 선정해야 했다.
손 위에 있던 원고는 페이지 14였다. 여백이 많았다. 줄 간격이 넓었다. 그런데 그 여백 속에 세계가 있었다. 시인이 무엇을 말하지 않았는지가 명확했다. 그 침묵의 무게가 정확했다.
*내가 그대를 부르지 않는 이유는* *당신이 이미 떠났기 때문이 아니라* *떠나지 않은 당신을 보는 것이* *더 이상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준호의 손가락이 천천히 페이지를 넘겼다. 다음 연이 나왔다.
*봄이 오고 또 오지만* *당신이 돌아오지 않는 봄이 있습니다*
그의 눈이 감겼다. 3년이었다. 정확히 3년이었다. 이 시는 작년 겨울에 쓰인 것 같았다. 타이핑 날짜를 봤다. 작년 11월 27일. 그 날짜 바로 전날, 준호는 카페 벽에 지은의 시를 붙였다. 누군가를 통해. 그 시에 지은이 준호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원고의 첫 페이지로 돌아갔다. 작가명 칸에 '지은'이라고 적혀 있었다. 주소는 빠져 있었다. 전화번호도. 마치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지워낸 것 같았다.
아니다. 지은이 자신의 정보를 숨겼을 것이었다. 출판사에서 거절받은 후였을 테니까. 박기준의 말이 들렸다.
*"지은의 시집 원고요? 글쎄요. 이미 어디론가 넘어갔습니다."*
어디론가. 그곳은 준호였다. 출판사 편집장 최미라가 몰래 준호에게 보낸 것이었다. 미라도 알고 있었다. 준호가 3년 전부터 지은의 시를 찾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지은이 준호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준호의 손가락이 원고의 표지를 다시 부드럽게 넘겼다. 원고 첫 페이지의 제목을 다시 읽었다.
*그날의 봄은 오지 않았다*
그날. 그 말 속에는 하나의 날짜만 있는 게 아니었다. 3년 동안 반복된 날들. 봄이 올 때마다 준호를 기다렸을 지은의 날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준호는 이 원고를 읽고 있었다. 심사 위원으로서가 아니라, 3년 동안 그리움으로 가득했던 한 사람으로서.
그때 문이 열렸다. 조수가 고개를 내밀었다.
"시간 괜찮으신가요? 심사 대상 작품 중에 특별히 관심 가는 게 있으면 따로 표시해주시면..."
"응, 알겠어."
조수가 나갔다. 준호는 다시 원고를 들었다. 손가락이 표지를 넘겼다. 첫 번째 시. 제목은 '그대의 침묵'. 읽기 시작했다. 한 줄 한 줄이 마치 자신을 향해 던져진 돌맹이 같았다. 손가락이 종이 위를 따라 움직였다. 느렸다. 매우 느렸다. 마치 시간을 멈추고 싶은 것처럼.
*당신이 내 시를 읽지 않는 방식으로* *나를 거절했습니다*
그 문장을 읽을 때, 준호의 목이 메였다. 손가락이 떨렸다. 책상 위에 원고를 내려놨다. 손을 주먹으로 쥐었다. 펼쳤다. 다시 주먹으로 쥐었다. 눈물이 맺혔다. 그는 눈을 감았다. 뜨고 또 감았다. 하지만 눈물은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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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실 밖에서 지은은 서 있었다.
준호가 들어간 지 15분쯤 지났을 때, 자신도 모르게 이 층에 올라와 있었다. 5층 복도의 벽에 '심사실' 표지판이 있었다. 그 문 안에는 준호가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자신의 원고도 있었을 것이다.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출판사에서 거절한 원고가 여기 올 리가 없다. 박기준이 분명히 말했다. "신청작 중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그럼 왜 준호는 '당신의 시, 이미 알고 있어'라고 했나.
지은의 손가락이 벽을 짚었다. 심사실 문이 닫혀 있었다. 유리창을 통해 안이 보였다. 준호가 앉아 있었다. 책상 위에 원고가 놓여 있었다. 그는 그 원고를 읽고 있었다. 손가락이 천천히 페이지를 넘겼다.
지은의 호흡이 빨라졌다. 그 손가락의 움직임이 자신을 향한 것 같았다. 마치 자신의 뺨을 어루만지는 것처럼.
준호의 얼굴은 심각했다. 아니, 심각함을 넘어선 뭔가였다. 눈을 감았다가 뜨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눈물이 흘렀다. 그 눈빛이 자신을 향해 있었다. 3년 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준호가 자신의 시를 읽을 때의 표정. 그 표정 앞에서 자신은 항상 숨이 막혔었다.
이건 아니다. 이건 무언가 잘못됐다.
지은은 복도를 빠져나갔다. 계단을 내려갔다. 1층 로비까지. 그곳에서 잠시 섰다. 자신의 심장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느꼈다.
3년 동안 자신은 준호를 미워했다. 아니, 미워했다고 생각했다. 그 미움 속에는 그리움이 썩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썩은 그리움이 깨어났다. 준호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리고 지금 그가 자신의 무언가를 읽고 있다는 것을 아는 순간.
자신의 마음이 여전히 준호에게 기울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을 거부했다. 입술을 깨물었다.
라테 카페로 돌아갔다. 현정은 다른 손님을 응대하고 있었다. 지은은 창가 자리에 다시 앉았다. 아메리카노는 식어 있었다. 한 모금 마셨다. 쓴맛이 입안을 채웠다.
핸드폰을 다시 봤다. 알림은 여전히 화면에 떠 있었다.
*[라테 카페 신인 작가 시 전시 공간] 새로운 작품이 게시되었습니다. 작가 '지은'의 시 '그날의 봄은 오지 않았다'가 전시 목록에 추가되었습니다.*
자신의 시가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전달됐다. 누군가가 자신의 시를 라테 카페의 벽에 붙혔다. 그리고 현정이 그것을 게시했다.
지은의 손가락이 스크린을 눌렀다. 전시 목록을 열었다. 사진이 나타났다. 자신의 시가 카페 벽에 붙어 있는 모습. 흰색 종이에 검은 글씨. 그 옆에는 다른 신인 작가들의 시들이 붙어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시만 따로 보였다.
아니, 그게 아니었다. 자신의 시가 붙어 있는 위치가 가장 눈에 띄는 곳이었다. 카페 벽의 정중앙. 모든 손님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하도록.
현정이 다가왔다. "어? 지은아, 너 시 전시 올라왔네?"
지은이 고개를 들었다. 현정의 얼굴을 봤다. 현정은 미소 짓고 있었다.
"누가 했어?"
"뭐를 말이야?"
"이 시. 누가 붙여달래?"
현정이 잠시 생각하는 듯했다. 그다음 말했다. "누군가가 연락을 줬어. 이 시를 꼭 전시해달라고. 말했어, 이 작가의 시는 신성하다고. 그래서 붙였어."
신성하다.
지은의 손가락이 멈췄다. 화면 위에서. 자신의 시를 바라봤다. 그 시는 3년 전에 쓰인 것이었다. 준호와 헤어지고 나서 쓴 것이었다. 그날 밤을 기억했다. 손가락이 자판을 두드릴 수 없었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래서 손으로 썼다. 펜으로. 노트에.
*그대의 침묵*
*당신이 내 시를 읽지 않는 방식으로* *나를 거절했습니다*
그 시가 누군가의 손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그것을 '신성하다'고 했다.
지은의 눈이 감겼다.
현정의 말이 귓가에서 맴돌았다. 누군가가 연락을 줬다. 이 시를 꼭 전시해달라고. 신성하다고.
누군가.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 지은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알고 싶지도 않았다. 알면 안 됐다. 만약 그것이 준호라면, 자신은 무너질 것 같았다. 확인하고 싶지 않은 마음과 반드시 알아야 한다는 강박이 뒤섞여 있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현정이 카운터로 돌아갔다. 새 손님이 들어왔고, 카페는 다시 일상의 소음으로 채워졌다. 에스프레소 머신의 웅음, 얼음이 떨어지는 소리, 누군가의 웃음. 하지만 지은에게는 모든 것이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핸드폰 화면은 여전히 켜져 있었다. 자신의 시. 카페 벽의 정중앙. 모든 손님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하도록.
그녀는 천천히 손가락을 내렸다. 화면을 껐다. 어두워진 액정에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창백했다.
핸드폰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미라에게 연락할까. 아니, 뭐라고 말할 건가. 누군가가 내 시를 전시해줬는데 그게 정말 불안하다고? 그건 좋은 일 아닌가.
좋은 일이다. 분명히 좋은 일이다.
그런데 왜 가슴이 철렁할까. 왜 손가락이 떨릴까. 왜 준호의 얼굴이 떠나지 않을까. 심사실에서 본 그 표정. 원고를 읽으며 감겼다 뜨던 그 눈. 그리고 흘러내리던 눈물.
'당신의 시를 이미 알고 있다.'
그 말의 의미가 이제 슬금슬금 밝혀지는 것 같았다. 아니다. 밝혀지고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이 그것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손가락이 떨렸다. 호흡이 얕아졌다. 목이 메였다.
지은은 일어섰다. 카페에서 나왔다. 거리의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문학제가 열리는 건물은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있었다. 대형 현수막이 내걸려 있었다. *제47회 서울 문학제*. 그 아래로 심사 위원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준호의 이름도 있었다.
손가락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주머니에 넣었다. 들었다. 다시 넣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편집자로서 할 일이 있었다. 심사 위원 만남에 참석해야 했다. 하지만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로비에 서서 현수막을 바라봤다.
핸드폰이 울렸다. 미라였다.
"지은아, 너 어디야? 심사 위원 만남 시간 5분 전인데."
심사 위원 만남. 지은의 목이 메였다.
"가고 있어."
"빨리. 박 이사가 찾고 있어."
통화를 끊었다. 지은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늘을 봤다. 흐린 날씨였다. 봄이 왔지만, 하늘은 여전히 겨울 같았다.
건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를 탔다. 8층. 심사실이 있는 층이었다. 문이 열렸다. 긴 복도가 펼쳐졌다. 사람들이 오갔다. 신인 작가들, 심사 위원들, 출판사 직원들.
회의실 입구에 도착했다. 미라가 서 있었다.
"어, 왔네. 들어가."
지은이 문을 밀고 들어갔다. 큰 테이블이 있었다. 그 앞에 몇 명의 심사 위원들이 앉아 있었다. 준호도 있었다.
그는 테이블의 끝자리에 앉아 있었다. 손에는 원고들의 묶음을 들고 있었다. 지은을 보지 않았다. 아니, 본척하지 않았다.
박기준 이사가 말했다. "자, 심사 위원님들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이분은 시 부문 심사 위원이신 준호 시인입니다."
박기준이 준호쪽을 가리켰다. 준호가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는 지은을 봤다. 시선이 마주쳤다.
그의 눈 안에는 뭔가가 있었다. 슬픔인가. 아니, 그 이상의 뭔가. 마치 3년을 한 번에 담고 있는 것처럼. 지은의 손가락이 경직됐다. 호흡이 변했다. 시간이 왜곡되는 것 같았다. 그 몇 초가 몇 분처럼 느껴졌다.
지은이 고개를 돌렸다. 더 이상 그를 볼 수 없었다.
"각 부문별로 심사 위원님들께서 정성껏 검토해주신 작품들입니다. 시 부문은 총 237명의 작가가 응모했으며, 그중 30명의 작품을 최종 심사 대상으로 선정했습니다."
박기준이 준호에게 파일을 건넸다. 준호의 손가락이 그것을 받았다.
"심사 위원님들께서는 이 작품들을 이번 주 안에 검토하신 후, 다음 주 화요일 심사 회의에서 수상작을 결정해주시면 됩니다. 물론 심사 과정은 절대 공개되지 않습니다."
절대 공개되지 않는다.
지은은 그 말을 들었다. 문학계의 규칙. 심사 위원들은 자신이 어떤 작품을 보았는지, 누구를 심사했는지를 말할 수 없다. 공정성을 위해. 신분을 숨기기 위해.
하지만 준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지은의 시를. 그것을 어떻게 아는지는 모르지만, 알고 있었다.
회의가 계속됐다. 하지만 지은은 말을 듣지 않았다. 준호의 손가락이 파일을 넘기는 것만 봤다. 천천히. 그리고 다시 천천히.
"자, 그럼 심사 위원님들을 위한 간식 준비가 되어 있으니, 라운지에서 편하게 쉬셨다가..."
박기준이 말을 마쳤다. 사람들이 일어섰다. 준호도 파일을 들고 일어났다.
지은은 남았다. 테이블 앞에 선 채로. 미라가 다가왔다.
"넌 왜 안 나가? 박 이사가 너를 찾을 텐데."
"응. 잠깐만."
지은이 테이블 위를 봤다. 준호가 앉아 있던 자리. 거기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 그의 손가락이 원고를 들고 나갔다.
그 원고들 중에 자신의 시도 있었을 것이다. 237명 중 30명. 그리고 그 30명 중에 자신이 포함됐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출판사는 자신의 시집을 거절했다. 박기준이 명확히 말했다. 시장성이 없다고. 신인의 시집은 위험하다고.
그렇다면 자신의 원고가 어떻게 심사 대상이 됐단 말인가.
지은의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지은아? 괜찮아?"
미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응. 응, 괜찮아."
지은이 일어섰다. 자신의 핸드폰을 들었다. 여전히 알림은 화면에 떠 있었다. 라테 카페의 신인 작가 시 전시. 자신의 시. 정중앙에 붙어 있는 시. 누군가가 자신의 시를 신성하다고 했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자신의 시를 심사 위원에게 전달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지은은 라운지로 나갔다. 심사 위원들이 앉아 있었다. 준호도 있었다. 그는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얼굴은 평온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하지만 지은은 알았다. 그 평온함 아래 무언가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3년의 그리움이. 그리고 자신을 향한 뭔가가.
준호가 커피잔을 내렸다. 그리고 지은을 봤다. 다시. 이번에는 더 길게.
그의 입이 살짝 움직였다. 말을 하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멈췄다.
대신 손가락이 움직였다. 파일을 들고 있던 그 손가락. 원고의 가장자리를 가볍게 쓸었다. 그 손가락의 떨림이 보였다.
지은은 그 손가락을 봤다. 그리고 돌아섰다.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
라운지를 나갔다. 복도로 나섰다. 손가락이 떨렸다. 호흡이 얕아졌다. 목이 메였다.
핸드폰을 들었다. 박기준의 메시지를 다시 봤다. 아직 받지 않은 메시지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화면은 조용했다.
그렇다면 직접 물어야 했다. 직접 확인해야 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지은은 핸드폰을 들었다. 준호의 연락처를 찾았다. 3년 동안 지우지 않았던 이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울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준호가 받았다.
"안녕, 지은."
그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마치 3년을 그 목소리에 담고 있는 것처럼.
"너, 내 시집 원고를 갖고 있지?"
침묵이 흘렀다. 지은의 호흡이 얕아졌다. 그 침묵 속에 뭔가가 있었다. 확인과 부정 사이의 무언가.
"어디서 난 거야?"
"출판사에서 넘겨받았어."
"박기준이?"
"아니. 다른 경로로."
지은의 가슴이 철렁했다. 다른 경로. 그게 무엇인가. 손가락이 떨렸다. 목이 메였다.
"너, 내 시를 추적했어?"
침묵.
"대답해. 추적했어? 안 했어?"
준호의 목소리가 잠시 끊겼다. 그 사이에 지은의 눈에서 뭔가가 흘러내렸다.
"응. 했어."
그 한 마디가 떨어지는 순간, 지은의 몸이 흔들렸다.
"왜?"
"당신이 쓴 시를 읽고 싶었어. 3년 동안. 계속."
"그럼 카페는? 라테 카페 벽의 시는?"
"내가 부탁했어. 현정이한테. 당신의 시를 전시해달라고."
지은은 말을 잃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호흡이 얕아졌다.
"그리고 심사 위원이 됐을 때, 당신의 작품이 심사 대상이었어."
"뭐?"
"당신이 심사 대상이 되도록 했어. 내가. 출판사와 출판협회에 추천했어. 당신의 시가 가치 있다고."
지은의 손이 떨렸다. 목이 메였다. 눈에서 뭔가가 흘러내렸다.
"당신의 시는 신성해. 지은. 그래서 세상이 알아야 해. 내가 아니라 세상이. 당신이 원하던 대로."
준호의 목소리가 굳어졌다.
"그리고 나는... 나는 당신을 포기할 수 없었어. 3년 동안 한 번도."
지은의 입술이 떨렸다. 목이 메였다. 손가락이 떨렸다. 호흡이 얕아졌다. 가슴이 철렁했다. 눈에서 뭔가가 흘러내렸다.
3년.
그 긴 시간 동안 준호는 자신의 시를 추적했다. 그리고 자신은 준호를 미워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미움이 아니었다.
그리움이었다.
지은은 통화를 끊지 못했다. 준호의 숨소리만 들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것이 3년의 증명이었다.
"지은?"
준호가 물었다.
지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울음이 나왔다. 목이 메인 울음. 3년을 참아온 울음. 그리움과 미움과 죄책감과 사랑이 뒤섞인 울음.
"지은, 미안해. 정말 미안해."
준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처음으로.
"내가... 내가 당신의 시를 거절했던 거, 당신 때문이 아니었어. 내 때문이었어. 난 당신을 너무 사랑했고, 그래서 당신을 놓고 싶었어. 당신이 나 없이도 잘 살 수 있도록."
지은의 울음이 더 커졌다.
"하지만 난 못 놨어. 당신의 시를 통해서라도 당신을 지키고 싶었어. 그래서..."
준호가 말을 멈췄다.
"그래서 뭐?"
지은이 물었다. 목이 메인 목소리로.
"그래서 난 당신의 시를 따라갔어. 당신이 쓴 모든 시를. 그리고 당신이 원하던 것을 주고 싶었어. 세상의 인정.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랑이었어."
지은은 울음을 멈출 수 없었다.
"그런데 이제... 이제는 당신이 나를 봐줄 수 있을까?"
준호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마치 아이처럼.
지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통화를 끝냈다. 그리고 돌아섰다. 라운지 쪽으로. 준호를 찾았다. 그는 여전히 테이블 근처에 서 있었다. 복도와 라운지의 경계에서. 마치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지은은 그에게 걸어갔다. 3년의 거리를 좁혀갔다. 사람들이 지나갔다. 하지만 지은은 신경 쓰지 않았다. 준호만 봤다. 그의 눈만 봤다.
그리고 그의 품에 안겼다.
준호의 팔이 감싸 안았다. 3년 동안 그리워하던 팔로. 지은의 몸이 그 팔 안에서 떨렸다. 손가락이 준호의 옷을 움켜쥐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지은이 중얼거렸다.
"미안할 게 뭐 있어. 난... 난 당신이 내 시를 읽어줬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
준호가 지은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그게 아니라, 난... 난 너를 미워했어. 3년 동안. 너를 미워했다고 생각했어."
"알아. 나도 알았어. 너의 시로."
"그런데 그게 미움이 아니었어. 그리움이었어."
"응. 그리움이었어."
둘은 복도와 라운지의 경계에 서 있었다. 누군가 지나갔다. 하지만 그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3년을 무시하고 현재형으로 침투하는 그리움이 너무 컸다. 그것이 세상의 모든 것을 압도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지은이 물었다. 준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로.
"당신이 원하는 대로."
준호가 대답했다.
"나는... 나는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고 싶어."
지은이 준호를 바라봤다. 그의 눈에는 여전히 3년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이 슬프지 않았다. 그것은 증명이었다. 그들의 사랑의 증명. 그리고 그 사랑이 3년을 견뎌낸 증거.
"그럼 함께 있을래?"
준호가 물었다.
"응. 함께 있을게."
지은이 대답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포옹했다. 복도의 형광등 아래에서. 마치 그 장면이 영원할 것처럼. 하지만 영원은 없었다. 다만 현재만 있었다. 그리고 그 현재 속에서 그들은 3년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니,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그 3년을 사랑할 수 있었다.
그것이 사랑이었다. 미움과 그리움이 뒤섞인 사랑. 그리고 그 사랑 속에서만 봄이 올 수 있었다. 진정한 봄. 다시 돌아오는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