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을 뜨는 순간
눈을 뜨는 순간, 세상이 하얀색이었다.
천장의 형광등이 눈에 쏟아졌다. 임준호는 눈을 감았다 떴다를 반복했다. 초점이 맞지 않았다. 손을 들어올리려 했지만 팔이 이상하게 가벼웠다.
"응? 깼네."
간호사가 스마트폰을 들고 뭔가를 기록했다.
"의사 선생님 불러드릴까요?"
준호는 입을 벌렸다. 목이 잠겨 있었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지막 기억을 더듬었다. 차 키를 들고 있었다. 은퇴식 후 집으로 가려던 길.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검은색.
그 이후는 없었다. 아니, 희미했다. 누군가의 손이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느낌. 따뜻한 손. 하지만 누구의 손인지 알 수 없었다. 그 손이 자신을 어딘가로 끌고 가는 것 같았다. 다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준호는 눈을 떴다.
"여기... 어디?"
목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이상했다. 너무 높았다.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마치 20대 초반 목소리 같았다.
간호사가 웃음을 지었다. "서울 삼성 종합병원이에요. 3일 전에 들어오셨어요."
3일?
준호는 자신의 팔을 들어 올렸다. 가늘고 탄력 있는 팔이 보였다. 손가락도 길었다. 10년 전 자신의 손이었다.
"거울 좀."
간호사가 거울을 들고 왔다. 준호는 그것을 들었다.
23세였다.
얼굴도, 피부도, 눈빛도 모두 23세였다. 주름이 없었다. 흰머리도 없었다. 눈가의 피로도 없었다. 10년 전, 자신이 프로 배구를 시작하던 그 해의 얼굴이었다.
준호는 거울을 떨어뜨렸다. 거울이 바닥에 떨어지며 소리를 냈다.
"조용히 해주세요. 심박수가 올라가고 있어요."
모니터가 울렸다. 간호사가 버튼을 눌렀다. 몇 분 후 의사가 들어왔다.
"깨셨네요. 어떤 기분이신가요?"
"여기... 왜 있어요? 사고가... 났나요?"
의사는 차트를 보고 있었다. "네, 사고가 났습니다. 3일 전 교차로에서 차량 충돌이 있었어요. 다행히 큰 부상은 없습니다."
"그런데... 신체 검사 결과는?"
의사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검사 결과는 이상 없습니다. 응급실에서 CT, X-ray, MRI 모두 했는데 골절도, 내출혈도 없어요. 신경학적 검사도 정상입니다."
"그럼 저는... 왜 여기 있어요?"
"보험 절차상 며칠 관찰하기 위함입니다. 당신의 신체 상태가 이상할 정도로 좋아서요. 정말 드물게 볼 수 있는 신체 조건입니다. 혹시 운동선수세요?"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의 몸을 들었다. 팔뚝의 근육이 선명했다. 복근도 살아 있었다. 10년 동안 벤치에 앉아 있으면서 잃어버렸던 모든 것이 돌아와 있었다.
"뇌파도 검사했나요?"
의사가 차트를 뒤적였다. "네, 했습니다. 뇌파가 이상하지만 임상적 의미는 없습니다."
준호는 손가락을 움직였다. 손가락 끝이 저렸다. 마치 전기가 흐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익숙했다. 리시브를 할 때 공과 접촉하는 그 순간의 감각과 비슷했다.
의사가 나갔다. 간호사도 나갔다. 준호는 혼자 남겨졌다.
천장의 형광등이 계속 울렸다.
자신은 죽었다. 차에 치였고, 사고가 났고, 그리고 죽었다. 33세에. 10년을 벤치에서 썩으며.
그런데 지금 자신은 23세였다.
준호는 손가락을 계속 움직였다. 손가락 끝의 저림이 더해졌다. 마치 누군가의 손가락이 자신의 손가락을 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손가락은 따뜻했다. 하지만 누구의 손인지 알 수 없었다.
심장이 빨라졌다. 이것이 현실인가? 아니면 죽음의 환상인가? 자신이 느끼는 모든 것이 거짓은 아닐까? 손가락의 저림도, 이 몸도, 이 목소리도. 모두 죽음 직전의 뇌가 만들어낸 환상이 아닐까?
모니터가 다시 울렸다. 심박수가 올라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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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복도를 거닐 때였다. 준호는 자신의 신체를 움직여보기로 결심했다. 의사들은 '이상 없음'이라고 했지만, 자신의 몸은 말하고 있었다. 뭔가 다르다고.
라운지의 빈 공간에서 준호는 천천히 몸을 굽혔다. 손가락 끝이 저렸다. 그 순간, 10년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경기장의 환호성. 공이 날아오는 순간의 긴장감. 몸이 반응하는 그 느낌.
준호는 손가락을 펼쳤다 모았다를 반복했다. 저림이 더 강해졌다. 마치 공을 받으려던 손이 기억을 되살리는 것 같았다. 근육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10년 전 자신의 손이 현재의 손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 손을 움직일 때마다 과거의 플레이들이 신체에 스며들었다. 왼쪽으로 몸을 날려 리시브하던 감각. 오른쪽으로 몸을 날려 블로킹하던 감각. 모든 것이 되살아났다. 10년의 공백이 순간에 메워지는 것 같았다.
준호는 벽을 잡았다. 숨이 가팠다. 하지만 눈빛은 다르게 빛나고 있었다. 이것은 현실이었다. 환상이 아니었다. 자신의 몸이 증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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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후, 준호는 병원을 나왔다. 의사는 "특별히 주의할 사항은 없지만 1주일 정도 안정을 취하세요"라고 말했다. 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집으로 가지 않았다. 대신 서울 타이탄스 훈련장으로 향했다. 최강팀이었다. 10년 전 자신을 스카우트하려던 팀이었다. 그때는 거절했다. 그때는 자신이 최고의 팀에 가면 곧 선발될 거라고 생각했다.
훈련장 문을 열었다. 감독이 기다리고 있었다.
"준호. 왔네."
이재훈 감독이었다. 10년 전에는 어리던 감독이 지금은 회색머리가 한가득이었다. 하지만 눈빛은 같았다. 욕심 많은 눈빛이었다.
"스카우트를 다시 받아드리겠다고 했나요?"
감독은 웃음을 지었다. "그래. 10년 전 계획을 완성하자는 거야. 당시에 너는 우리 팀의 리베로 1순위였어. 하지만 당시 너는... 다른 선택을 했지."
준호는 알고 있었다. 10년 전 자신은 서울 이글스를 선택했다. 자신을 버린 팀에. 아니, 그때는 '버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때는 그 팀을 믿었다. 그 팀의 감독을 믿었다.
하지만 10년이 지나갔다. 그 믿음은 벤치에서 썩었다.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나?"
감독은 계약서를 펼쳤다. 금액이 크게 적혀 있었다. 연 3억 원. 10년 전 자신이 받던 연봉의 10배였다. 그 아래에는 "국내 최첨단 훈련 시설", "세계 수준의 코칭 스태프", "플레이오프 진출 보장" 같은 문구들이 적혀 있었다.
준호는 계약서를 봤다. 손가락이 저렸다.
"생각해 봤어.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우리 팀은 지난 3년 연속 우승팀이야. 그리고 국제 대회에서도 우승했어. 너는 최고의 팀에서 최고의 선수가 될 수 있어."
준호는 계약서 위의 손을 떨렸다. 손가락 끝이 저렸다. 그 순간, 10년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이 감독의 표정이. 자신이 이글스를 선택했을 때 그 팀의 감독이 한 말이.
"좋은 선택이다. 여기서 우리와 함께 성장하자."
그리고 10년. 10년 동안 자신은 벤치에만 앉았다. 경기장에 나가는 날은 10번도 채 되지 않았다. 후배들의 성장을 봤다. 다른 팀의 선수들이 스타가 되는 것을 봤다. 그리고 자신은 썩었다.
이번엔 다를까? 최고의 팀에 가면 이번엔 정말 달라질까? 아니면 또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할 것인가?
손가락을 움직였다. 저림이 심해졌다. 그 순간 손가락이 공을 받으려던 자세로 굳어졌다. 과거의 자신이 현재의 손을 지배하고 있었다. 10년 전 자신이 선택했던 이글스. 그 팀에서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신체 깊숙이에서 울렸다.
준호는 펜을 내렸다. 서명한 줄은 계약서의 아래쪽이었다.
"미안합니다."
감독의 얼굴이 굳었다. "뭐라고?"
"서울 이글스를 선택하겠습니다."
"뭐?"
준호는 계약서를 밀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서울 이글스에 입단하겠습니다."
감독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넌 미쳤나? 봤잖아. 우리 팀이 얼마나 좋은데. 그리고 그 팀은 최약체 팀이야. 10년을 벤치에서 썩은 팀이야."
"알고 있습니다."
"그럼 왜?"
준호는 감독을 봤다. "10년 전 제 선택이 틀렸다면, 이번엔 제가 그 선택을 바꾸겠습니다. 최고의 팀이 아니라 제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팀에서."
감독의 얼굴이 붉어졌다. "너 진짜 미쳤다.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없을 거야. 너는 33세야. 2-3년밖에 못 해. 그 팀에 가서 뭐 할 건데?"
준호는 일어났다. 손가락이 계속 저렸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것 같았다.
"저는 제 선택에 책임을 지겠습니다."
준호는 훈련장을 나갔다. 뒤에서 감독의 고함이 들렸다. "미쳤어! 진짜 미쳤어!"
하지만 준호는 돌아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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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이글스 훈련장은 타이탄스의 훈련장과 완전히 달랐다. 건물이 낡았다. 벽이 파랗게 칠해져 있었지만 페인트가 벗겨져 있었다. 기자재는 10년 전 것들이 그대로 있었다. 에어컨도 제대로 나지 않았다.
이명호 감독이 준호를 맞이했다. 10년 전의 감독이었다. 그때도 늙어 보였지만 지금은 더 늙어 보였다. 주름이 깊었다. 머리도 완전히 희어져 있었다.
"준호. 왔네."
감독은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에는 희망이 있었다. 10년 전 타이탄스 감독의 웃음과는 달랐다. 그것은 욕심의 웃음이 아니었다. 절실함의 웃음이었다.
"좋은 선택했어. 정말 좋은 선택이야."
준호는 감독을 봤다. "감독님, 저는 이 팀을 선택한 게 아니라 제 자신을 선택한 거예요."
감독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그렇다면 더 좋은 거지. 그럼 우리와 함께 성장해 보자."
준호는 감독을 따라 훈련장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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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커룸이었다. 팀 선수들이 준호를 봤다. 모두 일제히 돌아서 그를 쳐다봤다. 10년 만의 귀환이었다. 벤치의 선수가 갑자기 리베로로 돌아온 것이었다. 그것도 명문팀을 거절하고.
박성준이 일어났다. 에이스였다. 준호의 기억 속에 있는 박성준은 20대 중반의 젊은이였다. 하지만 지금 그는 30대 초반이었다. 얼굴에는 피로가 가득했다. 하지만 눈빛은 밝았다.
"준호! 정말 왔네!"
박성준은 준호에게 달려왔다. 그리고 그를 안았다.
준호는 박성준을 안았다. 박성준의 등이 느껴졌다. 근육이 굳어 있었다. 10년 동안 혼자 팀을 짊어지고 있던 근육이었다.
"최강팀을 거절했다며? 미쳤나?"
박성준이 웃음을 지었다. 그것은 진심의 웃음이었다. 고마움의 웃음이었다.
"우리 팀이 최고인 줄 알아서."
준호가 대답했다.
박성준의 손이 준호의 어깨를 잡았다. 그 손의 온기가 전해졌다. 10년 동안 혼자였던 이 사람이 이제는 자신과 함께한다는 느낌. 그것이 준호의 가슴을 채웠다.
"정말 고마워. 진심이야."
박성준의 목소리가 떨렸다. 10년 동안 기다려온 누군가가 돌아온 것이었다.
다른 선수들도 준호에게 다가왔다. 10년 전의 얼굴들이었다. 하지만 더 늙어 있었다. 모두 준호의 결정에 감사해하는 표정이었다. 그들은 준호가 그들의 구원자라고 생각했다. 명문팀을 거절하고 그들을 선택한 선수라고 생각했다.
라커룸은 따뜻했다. 10년 전과 같은 냄새가 났다. 그리고 그 냄새 속에는 희망이 있었다.
그때 복도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라커룸으로 들어왔다.
최준영이었다.
서울 타이탄스의 리베로였다. 같은 세대의 리베로였다. 하지만 정반대의 인생을 살았다. 최고의 팀에서 스타 선수로 대접받은 리베로였다.
최준영은 준호를 봤다. 그리고 냉소적으로 웃음을 지었다.
"어? 이게 뭐지? 타이탄스를 거절한 선수가 여기 있네?"
라커룸이 조용해졌다.
"미쳤나 봐. 최고의 팀을 거절하고 최약체 팀을 선택하다니. 대단한 결정이네."
최준영은 준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준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하지만 그것은 친근함이 아니었다. 위협이었다.
"타이탄스 감독이 나한테 물었어. '저 선수 뭐 하는 거냐고?' 내가 뭐라고 했는 줄 알아?"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계산 실수겠지'라고 했어. 저 선수는 계산을 잘못한 거야. 그래서 최약체 팀을 선택했고, 그 다음엔 벤치 신세가 될 거야. 또다시."
최준영은 준호의 어깨를 떨어뜨렸다.
"플레이오프에서 만나자. 그때 다시 벤치에 앉혀줄 테니까."
최준영은 나갔다. 복도에서 발걸음 소리가 멀어졌다.
라커룸은 여전히 조용했다. 박성준이 준호의 어깨를 다시 잡았다.
"신경 쓰지 마. 저 놈 항상 그래."
하지만 준호는 박성준을 보지 않았다. 자신의 손을 봤다. 손가락이 저렸다. 계속 저렸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것처럼. 최준영의 말이 자꾸만 떠올랐다. '또다시 벤치 신세가 될 거야.' 이글스를 선택한 게 정말 맞는 건가? 아니면 또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건가?
손가락의 저림이 심해졌다. 불안감이 증폭되었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손을 더 강하게 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손은 따뜻했지만 점점 차가워지고 있었다.
그 순간, 준호의 휴대폰이 울렸다. 알 수 없는 번호였다. 문자였다.
[당신은 왜 회귀했나요?]
준호의 손가락이 더 강하게 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