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서약이 서명되기 직전이었다. 맹주의 붓끝이 낙장 위에 멈춘다. 장내를 가득 채운 침묵이 무겁다. 바로 그때, 대지가 격하게 진동한다. 석벽 틈새로 적색 증기가 폭발하듯 뿜어진다. 백가장의 심장부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당신은 직감적으로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는다. 이것은 제어 장치의 단순한 오작동이 아니다. 맹주 일행이 발산한 강대한 내력이 역류했다. 기도의 충돌이 연단로에 치명적인 교란을 일으켰다.
증기 연단로는 초고압의 수증기를 강철 동체에 가둔 장치다. 단전의 양기(陽氣)를 물리적 열역학에너지로 치환하여 동력을 얻는다. 외부의 강한 기(氣)가 강제로 유입되면 보일러는 통제 불능의 임계 상태에 도달한다.
"경보를 울려라! 가문 밖으로 대피해야 한다!" 당신의 날카로운 비명은 열풍에 묻힌다. 안전 밸브는 이미 제 기능을 상실했다. 지하 삼층의 열교환기가 먼저 파열한다. 초고온의 증기가 무쇠 격벽을 녹여내린다. 강철 지지대들이 엿가락처럼 휘어진다.
맹주가 황급히 신형(身形)을 날린다. 탈출할 수 있는 구멍은 존재하지 않는다. 철옹성 같던 완벽한 방벽이 감옥으로 화했다. 기계 장치는 통제를 잃은 야수와 같다. 압축된 에너지가 마침내 폭발을 일으킨다.
순간, 천지가 암전되는 착각이 인다. 무색의 섬광이 가문 전역을 삼켜버린다. 어떠한 소리도 나지 않는 멸망의 찰나다. 수천 도의 열기가 대기를 완전히 기화시킨다. 철골과 인간의 골격이 동시에 녹아내린다.
하늘 위로 웅장한 버섯구름이 솟구친다. 찬란했던 백가장의 전경은 사라졌다. 사방 수십 리 영지가 흔적 없이 소멸한다. 무림을 재편하려던 야치는 연기로 화했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참혹하고 완벽한 파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