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호지 문틈으로 스며드는 청량한 달빛이 방 안의 해묵은 먼지를 고요히 비춥니다. 당신은 책상 위에 놓인 논어(論語) 책장을 덮으며, 가만히 손바닥을 내려다봅니다. 십여 년 세월 동안 변방의 작은 서당 훈장 백결(白結)로 살아가며 무뎌진 줄만 알았던 손끝에, 미세한 떨림이 일고 있습니다.
낮저녁 우연한 기연으로 복용한 천산 만년삼(天山 萬年蔘)의 약력이 마침내 골수 깊숙이 파고든 탓입니다. 꽉 막혀 있던 전신의 기혈이 일순간에 요동치며, 단전에서부터 메마른 대지를 적시는 봄비 같은 진기가 피어오릅니다. 아니, 그것은 단순한 온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강호의 푸른 밤바다를 가르던, 서늘한 달빛을 닮은 일도(一道)의 날카로운 검기(劍氣)입니다.
쿠르릉, 귓가에 환청처럼 뇌성이 울립니다. 오랫동안 육신 속에 봉인되어 있던 천외천(天外天)의 검패(劍牌)가 마침내 온전한 빛을 되찾으며 해금되는 순간입니다. 억눌려 있던 무신(武神)의 정화(精華)가 기지개를 켜자, 서당 뒤편 대나무 숲이 바람도 없건만 사르락거리며 스스로 몸을 떱니다.
"아아..."
낮은 탄식과 함께 당신은 마른침을 삼킵니다. 귀를 기울이면 담장 너머 좁방에서 쌔근쌔근 잠든 아이들의 숨소리가 들려옵니다. 낮 동안 삐뚤빼뚤한 글씨로 천자문을 외우던, 당신이 스스로를 속여가며 자식처럼 아끼던 제자들입니다. 그 순박한 숨소리는 지독하리만치 평화로워, 오히려 당신의 가슴을 무겁게 저미게 만듭니다.
하지만 기혈이 뚫림과 동시에, 뇌리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붉은 기억들이 둑이 터지듯 밀려옵니다. 가문의 수백 대소가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도륙당하던 밤의 혈향(血香). 무림맹주 일족의 오만한 웃음소리. 무림 역사상 가장 잔혹한 설태 속에서 홀로 살아남아 겪어야 했던 만고(萬古)의 고독과 원한이, 이 고요한 서당의 공기를 무겁게 누릅니다.
검을 잡지 않겠다 맹세했건만, 하늘은 당신에게 기연을 내리어 다시 검을 쥐라 하십니다. 거스를 수 없는 숙명이자, 피할 수 없는 피의 인과(因果)입니다.
새벽안개가 서당 마당으로 자욱하게 내려앉기 시작합니다. 만년삼의 정화된 진기가 전신을 순환하며 당신의 눈동자에 형형한 신광(神光)이 서립니다. 이제 때가 되었습니다. 이곳의 은일(隱逸)은 당신의 옷자락이 머물 곳이 아닙니다. 저 문을 나서는 순간, 온 무림은 무신의 귀환에 피눈물을 흘리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자리를 털고 일어납니다. 남겨질 제자들의 맑은 얼굴이 마음에 걸려, 당신의 발걸음이 무겁게 땅에 내려앉습니다. 이별의 방식을 정해야 할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