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지직, 쿠구구구궁!
무너져 내리는 뇌정전의 대들보 사이로 뇌전의 잔광이 어지럽게 튀었다. 무너진 천장 너머로 소용돌이치는 자색의 먹구름은 당장이라도 세상을 집어삼킬 듯 포효하고 있었다. 천지를 뒤흔드는 천뢰(天雷)의 위압감 속에서도, 사공도의 입꼬리는 기괴할 정도로 비틀려 올라갔다. 피투성이가 된 그의 안광에 광기가 번뜩였다.
"끝이다. 이 빌어먹을 도둑놈아! 내 손으로 영생을 잡지 못할 바에야, 천뢰와 함께 이 전각 통째로 화약의 불길 속에 묻어 버리겠다!"
사공도가 피를 토하듯 소리치며 품속에서 꺼내 든 것은 붉은빛을 띠는 작은 도선이었다. 뇌정전의 사방을 떠받치고 있는 거대한 기둥 열두 개. 그 깊숙한 기단부마다 그가 미리 매설해 둔 환단 화약(丸丹 火藥)의 도화선이 연결되어 있었다. 뇌신검의 기운을 온전히 찬탈하기 위해 준비했던 최후의 동귀어진 책략이었다.
파지직!
그의 손가락 끝에서 피어오른 음독조의 독기가 도선에 닿는 순간, 불꽃이 맹렬하게 타오르며 기둥 속으로 파고들었다. 대전을 지탱하던 주춧돌들이 내부에서부터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콰아아앙! 쿠궁! 연쇄적인 폭음과 함께, 사천 년을 버텨온 신성한 돌기둥들이 붉은 화염을 토해내며 무너져 내렸다. 사공도의 비열한 안수(眼手)가 기어이 격발의 단계를 밟은 것이다.
"안 돼……!"
백소진의 갈라진 목소리가 비명처럼 허공을 찢었다.
머리 위에서는 천 개, 만 개의 낙뢰가 대지를 찢어발기며 내리꽂히고, 발밑에서는 화약의 폭발로 인해 땅줄기가 통째로 꺼져 내리는 아비규환. 그 한가운데 서 있는 혁린의 전신은 이미 만신창이였다. 검을 쓸 때마다 심장을 조여들던 뇌적(雷積)의 저주가 임계점에 달해, 그의 가슴팍은 붉은 혈선으로 덮여 있었다. 들이쉬는 숨결마다 타오르는 불길 같은 피비린내가 섞여 나왔다.
우르릉! 쾅! 쾅! 쾅!
설상가상으로, 뇌정전의 천장이 완전히 뜯겨 나가며 밤하늘을 수놓던 천풍 낙뢰(天風 落雷) 이천 개가 일제히 대전 안으로 쏟아져 내렸다. 백색과 자색의 뇌전 기둥들이 사방에서 폭발했다. 대리석 바닥이 수만 갈래로 조각나며 허공으로 솟구쳤고, 그 무자비한 뇌격의 폭풍은 혁린의 근육과 뼈마디를 사정없이 짓눌렀다.
그 격렬한 고통의 틈새를 비집고, 혁린의 귓가에 익숙하고도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 히히히! 꼴 좋구나, 혁린아. 기어이 네 놈의 그 알량한 동정심이 파멸을 불러왔어.
신검 천뢰에 깃든 뇌령(雷靈)의 비웃음이었다. 차갑고 변덕스러운 뇌령의 음성은 혁린의 뇌리를 헤집으며 어두운 심마(心魔)의 환청을 불러일으켰다.
- 기억하느냐? 북풍이 몰아치던 날, 눈밭에 버려져 발가락이 썩어 들어가던 노예 무사 시절의 너를. 침을 뱉으며 채찍을 휘두르던 주인의 얼굴을. 그리고 삼류 표사랍시고 푼돈 몇 푼에 목숨을 걸다, 대문파의 장기판 위에서 개처럼 버려졌던 그 고독한 밤들을!
"……닥쳐라."
혁린이 이를 악물었으나, 심마의 묵직한 이빨은 그의 영혼을 사정없이 물어뜯었다.
눈앞의 시야가 어지럽게 뒤틀렸다. 무너져 내리는 불타는 전각의 잔해 사이로, 과거 자신을 배신하고 비웃었던 수많은 인간들의 형상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그들은 모두 혁린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속삭이고 있었다.
'강호는 약육강식의 지옥이다. 믿을 놈은 오직 네 손에 쥔 검 하나뿐이거늘, 어찌하여 또다시 누군가를 믿고 등을 내어주려 하느냐?' '저 계집조차 결국 너를 갉아먹는 짐짝일 뿐이다. 버려라. 버리고 너 혼자 벼락의 힘을 취해 도주해라. 그러면 너는 영생을 얻고 절대자가 될 수 있다!'
뇌령의 유혹은 달콤했고, 심마의 속삭임은 지독하리만큼 현실적이었다.
실제로 혁린의 생존 본능은 끊임없이 탈출을 울부짖고 있었다. 밑바닥 표사 시절부터 뼈에 사무치도록 새겨진 불신과 고립주의. 누군가 호의를 베풀면 손을 뒤로 숨겨 단검을 확인하던 그 지독한 방어기제가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백소진을 버리고 저 천뢰의 폭풍 속으로 몸을 던져 홀로 도망친다면, 적어도 이 붕괴하는 지옥에서 목숨을 건질 확률은 배로 늘어날 터였다.
그때였다.
지독한 이명과 심마의 파도 속에서, 혁린의 왼손 끝에 닿는 묵직하고 따스한 감각이 있었다.
품속에서 흘러나와 그의 손바닥 안으로 들어온 반쪽짜리 철판. 그것은 백소진이 그에게 건넸던 용호표국의 가업 징표, '반쪽짜리 용호철전(龍虎鐵錢)'이었다.
바스라질 듯 거친 철전의 표면을 쓸어내리는 순간, 혁린의 뇌리에 다른 기억이 스쳤다.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온 밤마다 말없이 다가와 붕대를 감아주던 백소진의 거친 손길. 잔소리를 퍼부으면서도 뒤돌아서 눈물을 훔치던 그녀의 붉어진 눈시울. 삼류 표국이라는 비참한 진흙탕 속에서도 서로의 체온을 나누며 버티던 동료들의 신뢰가, 그 반쪽짜리 쇠붙이에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내가…… 또다시 홀로 도망칠 것 같은가."
혁린의 입술 사이로 자색의 혈액과 함께 무거운 독백이 흘러나왔다.
손바닥이 찢어지도록 용호철전을 움켜쥐었다. 쇠붙이가 그의 내력과 반응하며 붉게 달아올랐다.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그것은 뇌령이 속삭이는 차가운 살육의 희열이 아니었다. 타인을 향한 지독한 불신과 고립의 성벽을 깨부수고 무림의 가장 밑바닥에서 피어난, 인간으로서의 온전한 의지이자 약속이었다.
- 뭐라? 네놈이 기어이 그 미천한 자들의 손을 잡겠단 말이냐!
뇌령이 경악하여 비명을 질렀다.
"약자가 짓밟히지 않는 질서를 세우겠다 했다. 내 곁의 사람 하나 구하지 못하면서, 어찌 천하를 논하겠는가."
혁린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우득, 우드득!
그의 심장부에서 폭주하던 뇌적의 붉은 기운이, 용호철전이 뿜어내는 백색의 온기와 부딪치며 기이한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것은 억울한 약자를 구원하고 세상의 위선에 맞서 싸우겠다는 단단한 인과의 정화였다. 심경(心境)의 도가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가슴을 찢는 듯한 고통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형언할 수 없는 청량한 내력이 샘솟았다. 제 몸을 갉아먹던 독이자 천벌이었던 뇌적(雷積)이, 뼈와 살을 재구성하는 순수한 뇌력(雷力)으로 백 퍼센트 완전 대치 전이되기 시작한 것이다.
콰과과광!
혁린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던 자색의 불길이 일제히 꺼지고, 눈이 멀 것 같이 찬란한 황금색의 전류가 그의 온몸을 감쌌다. 겉가죽이 타들어 가던 상처들이 순식간에 아물고, 무맥은 천하의 그 어떤 기경팔맥보다 넓고 단단하게 확장되었다. 뼈는 신철(神鐵)보다 견고해졌으며, 가죽은 천뢰의 기운을 담아내는 그릇으로 거듭났다.
천고의 무구인 신검 천뢰의 주인으로, 그리고 번개의 의지를 완전히 굴복시킨 진정한 '절대뇌황(絕對雷皇)'의 신체가 마침내 각성한 것이다.
"이, 이것은…… 대체 무슨 힘이란 말이냐!"
무너지는 돌더미 속에서 겨우 몸을 가누던 사공도가 눈을 부릅떴다. 그가 평생을 갈구해 마지않던 영생의 광휘, 아니, 그 이상의 고결한 신성이 혁린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스아아아아—!
혁린이 천뢰검을 대지 바닥에 깊숙이 꽂아 넣었다.
그 순간, 대전을 가득 채우고 있던 파괴적인 자색의 낙뢰들과 폭발의 화염이 일제히 정지했다. 시간마저 멈춘 듯한 기묘한 정적 속에서, 혁린의 몸을 중심으로 황금빛의 파동이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 나갔다.
화약의 폭발로 무너지던 기둥의 잔해들이 허공에 멈춰 섰고, 사방을 짓누르던 천풍의 뇌격들이 황금빛 전류에 흡수되어 온순한 양 떼처럼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단순한 힘의 폭발이 아니었다. 자연의 재해마저 자신의 의지 아래 굴복시키고 통제하는, 무림 역사상 전무후무한 '금빛 천신경(天神境)'의 경지였다.
"소진아."
혁린의 목소리가 대전 전체에 묵직하게 울려 퍼졌다.
그는 천천히 허공으로 떠올랐다. 대지를 딛고 서 있던 그의 발끝이 허공의 뇌전 서리를 밟으며 한 걸음씩 위로 향했다. 황금빛 전류가 그의 등 뒤에서 거대한 날개처럼 펼쳐졌고, 뇌정전의 붕괴하던 파편들이 그의 발밑에서 하나의 계단이 되어 깔렸다.
우화등선(羽化登仙).
마를 베고, 스스로 신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은 절대자의 비상이었다.
빛의 세례 속에서 혁린은 아래를 굽어보았다. 그의 눈빛은 더 이상 과거의 불신과 분노로 흔들리지 않았다. 오직 세상을 준엄하게 심판할 절대적인 질서의 차가움과, 지켜야 할 이들을 품어 안을 깊은 의지만이 서려 있을 뿐이었다.
"사공도. 네놈의 위선도, 이 추악한 수작도 여기까지다."
혁린이 검을 가볍게 휘돌렸다. 검날이 대기를 가르는 순간, 웅장한 황금빛 뇌풍이 일어 대전의 자욱한 연기와 먼지를 단숨에 쓸어버렸다. 대기를 가득 채우던 화약 냄새도, 사공도가 뿌려둔 비열한 독기도 한 줌의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그러나 벼락의 거품이 일제히 거품처럼 꺼지고 투명한 정적이 찾아온 대전 바닥.
혁린의 안광이 차갑게 굳어졌다.
"흐흐…… 으하하하핫!"
먼지가 걷힌 대전의 중심부에서, 광기 어린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공도였다. 전신이 무너진 잔해에 깔려 피투성이가 된 채로도, 그의 오른손은 무언가를 움켜쥐고 있었다.
"아무리 네놈이 신의 경지에 올랐다 한들, 이 계집의 목숨줄이 끊어지는 것보다 빠를까!"
사공도가 움켜쥐고 있는 것. 그것은 피를 흘리며 의식을 잃어가는 백소진의 머리채였다. 사공도는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그의 손가락 끝에는 여전히 검푸른 음독조의 내력이 서려 있었고, 그 손끝은 백소진의 가냘픈 정수리를 파고들 듯 조여들고 있었다.
"어디 한 걸음이라도 움직여 보아라, 혁린! 이 년의 골통이 부서지는 것이 먼저인지, 네놈의 검이 내 목을 베는 것이 먼저인지 시험해 보자꾸나!"
사공도가 백소진의 정수리를 한 움큼 꽉 쥐어 올리며, 허공의 혁린을 향해 비열하기 짝이 없는 눈빛으로 조롱하듯 쳐다보았다. 백소진의 입술 틈새로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왔고, 그녀의 이마를 타고 흘러내린 붉은 피가 황금빛으로 가득 찬 대전 바닥을 적셨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혁린의 신형이 대지에 내려앉았다.
황금빛 전류가 그의 발끝에서부터 대리석 바닥으로 스며들며 지직거리는 소리를 냈다. 수만 대군의 포위망 앞에서도, 죽음의 뇌적이 심장을 조여올 때도 꺾이지 않았던 그의 척추는 하늘을 찌를 듯 곧게 서 있었다. 비굴함은커녕, 그의 눈빛은 만인을 굽어보는 제왕의 그것처럼 오만하고 준엄했다.
"사공도."
혁린의 목소리는 낮고 묵직했다. 뇌정전의 무너진 잔해 사이로 불어오는 칼바람이 그의 검은 창포를 거칠게 흔들었다.
"네놈의 그 얄팍한 수작은 늘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구나."
"닥쳐라! 입을 놀릴 때마다 이 년의 두개골에 구멍이 하나씩 늘어날 것이다!"
사공도가 이를 갈며 소리쳤다. 그의 손가락 끝이 백소진의 정수리를 파고들자, 붉은 선혈이 그녀의 하얗게 질린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사공도의 전신은 이미 흙먼지와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으나, 눈동자만큼은 굶주린 독사처럼 번들거렸다.
"검을 버려라, 혁린! 네놈의 그 대단한 천뢰검을 저 바닥 깊숙이 던져버리고, 두 무릎을 꿇어라! 그렇지 않으면 이 년은 숨이 붙어 있는 채로 뇌가 으깨어지는 고통을 느끼게 될 테니까!"
강호의 비정함은 언제나 약자의 목숨을 담보로 삼는다. 혁린은 평생을 그 비열한 법칙 속에서 뒹굴며 자라왔다. 그렇기에 사공도의 협박은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혁린은 과거의 삼류 표사가 아니었다. 그의 품속에서 뜨겁게 요동치는 반쪽짜리 용호철전은 그에게 더 이상 고립된 짐승으로 살지 말라 속삭이고 있었다. 지켜야 할 이가 있기에, 그는 강해졌다.
"린아……."
백소진이 간신히 눈을 떴다. 흐려진 안광 속에서도 그녀는 혁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입술 사이로, 그녀가 피침을 뱉어내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망설이지…… 마라. 저 개 같은 놈의 목을…… 베어."
"시끄럽다, 이 년이!"
사공도가 발악하듯 백소진의 머리채를 잡아 흔들었다.
그 순간, 혁린의 주변을 맴돌던 황금빛 전류가 급격히 수축했다. 사방을 채우던 천풍의 우레가 그의 검날로 응집되기 시작했다. 대기 중의 습기가 일시에 증발하며 가공할 만한 정전기가 뇌정전의 사방을 가득 채웠다.
지리릭, 지직!
사공도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마비되는 느낌에 그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혁린이 뿜어내는 금빛 천신경의 위압감이 공간 자체를 짓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든 무거운 중력이 사공도의 어깨를 짓눌렀다.
"네놈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속도."
혁린이 천뢰검을 비스듬히 눕혔다. 검신에 새겨진 뇌신무예의 비기가 황금빛 활자로 타오르며 공명을 시작했다.
웅— 웅—
검의 울림은 마치 대자연의 거대한 진동과도 같았다.
"그리고 내 검이 네놈의 삼혼칠백을 찢어발기는 속도. 어느 쪽이 더 빠를 것 같으냐."
"이, 이 오만한 놈이……!"
사공도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저 괴물은 기어이 자신을 죽일 것이다. 백소진의 목숨을 대가로 치르더라도, 자신을 살려 보내지 않을 준엄한 칼날이었다. 극단적인 공포는 인간을 광기로 몰아넣는 법이다. 사공도는 자신의 단전을 역류시키며 마지막 남은 독문 내력을 쥐어짜 냈다.
"그렇다면 같이 죽는 거다!"
콰아아앙!
사공도의 전신에서 검푸른 독안개가 폭발하듯 피어올랐다. 그의 음독조가 백소진의 머리를 향해 사정없이 내리꽂히는 찰나.
혁린의 신형이 허공에서 사라졌다.
신법(身法)이 아니었다. 그것은 벼락 그 자체가 되어 공간을 도약하는 신의 기예였다.
뇌신일선(雷神一線).
찰나의 순간, 뇌정전의 어둠을 가르는 단 하나의 황금빛 선이 그어졌다. 소리도, 바람도 없는 절대적인 쾌검이었다.
서걱!
허공을 가른 것은 사공도의 비명이 아니었다. 그의 오른쪽 어깨에서부터 사선으로 잘려 나간 팔 한쪽이 핏분수를 뿜으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백소진의 머리채를 쥐고 있던 손가락들이 힘을 잃고 스르륵 풀려났다.
"아아악! 내, 내 팔이!"
사공도가 잘려 나간 어깨를 움켜쥐고 비명을 지르며 뒤로 자빠졌다. 혁린은 벼락처럼 백소진의 허리를 낚아채며 그녀를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 차디찬 그녀의 몸에 자신의 따스한 황금빛 뇌력을 불어넣으며, 그는 대지를 딛고 섰다.
만사휴의(萬事休矣). 사공도의 패배는 명백해 보였다.
그러나 피투성이가 된 채 바닥을 뒹굴던 사공도가 기괴하게 웃기 시작했다. 그의 남은 왼손이 대전 바닥의 해골 문양이 새겨진 석판을 강하게 내리누르고 있었다.
"흐흐…… 흐하하하! 멍청한 놈. 내가 이곳을 무너뜨리려 했던 진짜 이유를 모르는구나!"
쿠구구구궁!
석판이 내려앉음과 동시에, 뇌정전의 중심부가 거대한 공동(空洞)을 그리며 내려앉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붕괴가 아니었다. 지하 깊은 곳, 사천 년간 봉인되어 있던 천뢰의 근원지이자 무한한 전류가 소용돌이치는 '뇌해의 심연(雷海之深淵)'이 입을 벌린 것이다.
"이 천뢰의 무덤 속에서, 모두 함께 가루가 되어 사라지자꾸나!"
사공도가 광소하며 무너지는 심연 속으로 스스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 그가 떨어지며 휘두른 검푸른 독기의 사슬이, 미처 피할 틈도 없이 백소진의 발목을 휘감아 내리눌렀다.
"혁린……!"
백소진의 신형이 사공도의 인력에 이끌려 뇌해의 심연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끝을 알 수 없는 암흑의 구렁텅이 밑바닥에는, 자색과 백색의 파괴적인 천뢰들이 거대한 용오름을 그리며 요동치고 있었다. 그곳에 떨어지는 순간, 그 어떤 고강한 무인이라도 흔적도 없이 소멸할 터였다.
혁린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가 백소진을 잡기 위해 심연을 향해 몸을 던지려던 바로 그 순간.
- 히히히! 선택해라, 혁린아!
그의 손에 쥔 천뢰검이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뇌령의 잔혹한 전음이 머릿속을 강타했다.
- 저 계집을 구하기 위해 네놈의 그 고결한 '절대뇌황'의 신체를 던져 저 뇌해의 폭풍을 온몸으로 막아낼 것이냐? 아니면 저 계집을 버리고 진정한 무림의 천하제일인이 되어 황좌에 오를 것이냐? 계집을 구하는 대가는 네가 간신히 얻은 신의 힘과 수명의 절반이다!
심연의 차가운 바람이 혁린의 뺨을 스쳤다. 백소진의 손끝이 그의 시야에서 멀어져 가고 있었고, 뇌령은 잔인한 독촉을 멈추지 않았다.
과연 혁린은 힘을 위해 동료를 버릴 것인가, 아니면 자신을 파멸시킬지도 모르는 구원의 길을 택할 것인가.
선택의 찰나, 혁린의 손이 백소진의 손을 향해 뻗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