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쇳덩이가 허공을 가르는 소리는 고막을 찢을 듯이 둔탁했다.
머리 위를 덮쳐오는 가시 철퇴. 사람 몸통만 한 크기의 쇠뭉치가 낙하하며 가하는 공기의 압력에 피부가 찌릿하게 수축했다. 피할 수 있는 물리적 공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철퇴가 그리는 타격 범위는 이미 3미터 거구의 도살자가 가진 고유 판정 영역 내에 완벽하게 묶여 있었다.
일반적인 각성자라면 이 순간 뼈가 가루가 되고 뇌수가 터져 즉사했을 터였다.
하지만 강태현의 동공은 흔들리지 않았다. 거대한 죽음의 그림자가 속눈썹 끝에 닿기 직전, 그의 왼손 손가락이 허공을 가볍게 튕겼다.
[시스템 콘솔(Console)을 호출합니다.] [경고: 관리자 권한이 비인증 상태입니다. 레거시 코드의 간섭이 시작됩니다.]
눈앞에 떠오른 반투명한 푸른색 코딩 창.
밀려드는 수백 줄의 에러 로그 너머로 철망형 도살자의 실시간 좌표 데이터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Obj_Boss_IronButcher_001.Target_Lock = Player_01 (강태현)` `Obj_Boss_IronButcher_001.Velocity = Vector3(0.0, -45.2, 12.4)`
태현의 시선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는 도살자의 타겟팅 대상 프로퍼티를 찾아냈다. 그리고 주저 없이 가상 키보드 위에 손가락을 얹었다.
이 세상은 신의 섭리가 아닌, 구멍투성이 구닥다리 코드로 짜인 프로그램에 불과하다. 타겟팅 대상의 주소값 하나만 바꾸면, 저 무지막지한 철퇴도 결국 허상의 쇳덩이에 지나지 않게 된다.
태현은 타겟팅 좌표값을 자신이 아닌, 도살자의 바로 등 뒤에 있는 낡은 콘크리트 내력벽 너머의 빈 공간으로 수정해 넣었다.
`Modify: Obj_Boss_IronButcher_001.Target_Lock = Vector3(145.8, 12.0, -84.2)`
코드가 적용되는 순간, 급격한 과부하가 태현의 머릿속을 강타했다.
"윽……!"
신음이 목구멍을 뚫고 나오기도 전에 차단되었다.
뒷덜미에서 시작된 고열이 척수를 타고 뇌하수체까지 단숨에 뻗어 올라갔다. 수십만 개의 뉴런이 한꺼번에 타들어 가는 감각. 뇌의 연산 영역에 강제적인 메모리 누수가 발생했다는 증거였다.
[경고: 무단 코드 수정으로 인한 메모리 누수(Memory Leak) 감지!] [사용자의 생체 뉴런 소실율: 0.12%] [영구 수명 감소: 48시간]
눈앞이 일시적으로 붉게 멀었지만, 태현은 이빨을 악물며 버텼다.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쿠웅-!
낙하하던 거대한 가시 철퇴가 찰나의 순간에 90도 직각으로 꺾였다. 물리적인 관성 법칙을 완전히 무시한 변형이었다. 철퇴는 태현의 코끝을 스치며 허공을 갈랐고, 그 무지막지한 운동 에너지를 고스란히 품은 채 도살자 자신의 바로 뒤편 벽면에 사정없이 처박혔다.
콰아아앙-!
폭음과 함께 먼지 구름이 해일처럼 사방으로 뿜어져 나왔다.
콘크리트 파편이 태현의 뺨을 스치고 가며 붉은 핏자국을 남겼다. 하지만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도살자는 자신이 내리친 철퇴의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벽면에 상반신이 완전히 파묻혀 버렸다. 30레벨 보스의 압도적인 괴력이, 시스템의 좌표 오류로 인해 고스란히 제 자신을 타격하는 자멸적 자충수가 된 것이다.
-------------------------------------------------- [객체 상태 이상: 시스템 충돌(Crash)에 의한 스턴(Stun)] [남은 지속 시간: 08초] --------------------------------------------------
"확실히 헐거운 구조군."
태현은 입가에 묻은 피를 거칠게 닦아내며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은 이미 도살자에게서 멀어져 있었다. 자멸해 가는 보스 몬스터 따위보다 그에게 더 중요한 '변수'가 먼지 구덩이 저편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복도 구석, 부서진 캐비닛 잔해 사이에 한 여자가 쓰러져 있었다.
은빛에 가까운 백발의 머리칼. 찢어진 가죽 갑옷 사이로 드러난 하얀 살결은 온통 붉은 자포와 상처로 얼룩져 있었다. 그녀가 쥔 가느다란 검 위로 불규칙하게 명멸하는 푸른 검기가 위태롭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 위로 시스템 식별자가 깜빡였다.
-------------------------------------------------- [객체 ID: Player_BaekSeolHa] [클래스: 룬 블레이더 (Lv. 28)] [상태: 시스템 오염 / 스킬 폭주 루프 진입] --------------------------------------------------
백설하.
이후 아포칼립스 세계관에서 최강의 검사 중 하나로 이름을 날리게 될 불세출의 인재였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상태는 처참했다. 그녀는 초점을 잃은 눈으로 허공을 응시한 채, 끊임없이 검을 쥔 손을 바르르 떨고 있었다.
태현은 그녀의 주위에 흩날리는 데이터 입자를 매서운 눈초리로 뜯어보았다. 그리고 곧바로 콘솔창을 다시 두드렸다. 그녀의 스킬 트리 및 구동 소스코드를 추적하기 위해서였다.
"검술 스킬의 주소값이…… 비어 있군."
태현의 두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Foreshadow 1 Active: Player_BaekSeolHa.Skill_Active_Sword_01 -> Null`
정상적인 플레이어라면 스킬을 시전할 때 해당 스킬의 고유 메모리 주소값을 호출해야 한다. 하지만 백설하의 연무 데이터는 최하단에서 심각한 'Null Pointer Exception' 에러를 일으키고 있었다.
쉽게 말해, 그녀가 지닌 검술의 힘을 시스템이 버그로 판단해 강제로 삭제하려 하고 있었고, 그녀의 뇌는 삭제되는 코드를 유지하기 위해 비정상적인 영구 루프 연산을 수행하는 중이었다.
"아, 으으……!"
백설하의 입술 사이로 끊어질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녀의 검이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검 끝이 향한 곳은 적이 아니었다. 그녀 자신의 목덜미였다.
시스템의 오류로 인해 명령 제어권이 완전히 꼬여버린 증상이었다. 스스로를 베어 에러를 정화하려는 자멸 루프. 검 날에 서린 푸른 검기가 그녀의 목 피부를 살짝 자극하자, 붉은 선을 그리며 피가 배어 나왔다.
그녀는 고통에 겨워 눈물을 흘리면서도, 스스로의 손을 멈추지 못하고 있었다.
"살려…… 줘……."
갈라진 목소리가 먼지 섞인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태현은 한 걸음 다가섰다.
그에게 백설하는 구해야 할 가련한 동료가 아니었다. 향후 시스템 메인 프레임을 해킹할 때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는, 고성능의 '오브젝트(Object)'에 불과했다. 이대로 폐기 처분되게 둘 수는 없었다.
"연산 낭비다."
태현은 차갑게 뱉으며 백설하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차갑게 식어가는 그녀의 피부 온도가 손끝을 통해 전해졌다. 백설하의 동공이 태현을 향해 흔들렸다.
"가만히 있어. 움직이면 코드가 더 꼬인다."
태현은 오른손으로 허공을 쓸어내렸다.
다시 한번 개발자 콘솔이 열렸다. 이번 조작은 아까보다 훨씬 더 정밀한 간섭이 필요했다. 타인의 활성화된 스킬 루프 내부에 강제로 인터럽트(Interrupt)를 걸어 스레드를 종료시켜야 했다.
`Modify: Player_BaekSeolHa.Action_State = Idle` `Modify: Player_BaekSeolHa.Target_Vector = Vector3_Zero`
타닥, 탁.
가상 자판을 두드리는 속도가 빨라질수록, 태현의 코끝에서 붉은 선혈이 툭, 투둑 떨어져 내렸다.
머릿속이 뜨겁게 달아오른 납을 부은 것처럼 타들어 갔다. 시야의 가장자리가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뇌세포의 파괴가 실시간으로 수명을 갉아먹고 있었다.
[경고: 상위 정규 사양 코드에 대한 강제 인터럽트 발생!] [메모리 누수 급증! 생체 뉴런 소실율: 0.35%] [영구 수명 감소: 120시간]
수명이 또다시 5일이나 깎여 나갔다.
하지만 태현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 Enter 키를 내리누르듯 허공을 강하게 눌렀다.
`Command: Force_Override(Player_BaekSeolHa)`
징-!
맑은 기계음과 함께 백설하의 검을 감싸고 있던 기괴한 푸른 검기가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그녀의 목줄기를 향해 파고들던 검날이 거짓말처럼 멈추어 섰다. 팽팽하게 당겨졌던 그녀의 신체 근육들이 일시에 이완되었다.
"하윽, 흑……!"
백설하는 검을 바닥에 떨어뜨린 채, 태현의 가슴팍을 붙잡고 무너져 내렸다.
그녀의 호흡이 거칠게 요동쳤다. 오염된 스킬 루프에서 강제로 해방된 육체가 격렬한 거부 반응을 일으키고 있었다.
"……구해, 준 건가요?"
그녀가 젖은 눈으로 태현을 올려다보았다.
태현은 그녀의 어깨를 밀쳐내며 싸늘하게 대꾸했다.
"착각하지 마라. 네 쓰레기 같은 연산 루프가 내 콘솔 시야를 가려서 치웠을 뿐이다."
"하지만……."
"조용히 하고 뒤로 물러서 있어라. 버그 덩어리가 아직 완전히 소거되지 않았다."
태현은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스턴 상태에서 회복한 철망형 도살자가 벽면을 부수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붉은 외눈에 가득 찬 살기가 공간의 온도를 급격히 떨어뜨렸다.
쿠오오오오-!
도살자가 거친 포효를 내지르며 다시금 가시 철퇴를 치켜들었다.
무식한 정면 대결을 고집하는 자들의 전형적인 패턴이었다. 태현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학습 능력이 없는 인공지능이군. 그러니까 레거시 코드라는 거다."
태현은 도살자를 향해 걸어갔다.
그는 무기를 꺼내지도, 방어 자세를 취하지도 않았다. 그저 주머니에 한 손을 찔러 넣은 채, 왼손 손가락으로 콘솔창을 빠르게 조작할 뿐이었다.
공략법은 간단했다.
이 세계의 모든 몬스터는 시스템이 규정한 물리 충돌 영역(`Collision_Box`)을 가진다. 이 영역이 맵의 고정 오브젝트(벽, 바닥)와 겹치게 되면, 시스템은 이를 오류로 인식하고 강제 예외 처리를 실행한다.
태현은 도살자의 충돌 영역 좌표를 아예 내력벽 콘크리트 코어 내부로 50센티미터 가량 겹치게 밀어 넣었다.
`Modify: Obj_Boss_IronButcher_001.Collision_Box.Offset_Z = -50.0`
철컥.
코드가 배포되는 순간, 도살자의 거구 중 하반신 절반이 시멘트 바닥과 내력벽 깊숙이 파묻혀 버렸다.
"엉……?"
도살자의 붉은 눈에 기괴한 당혹감이 서렸다.
괴물은 하반신을 빼내려 허우적거렸지만, 이미 시스템 물리 엔진은 이 상황을 치명적인 '충돌 에러(Stuck)'로 판정하기 시작했다.
[위험: 오브젝트 간 물리 충돌 영역 오버랩 발생!] [시스템 예외 처리(Exception Handling) 프로세스를 시작합니다.] [해당 개체의 메모리 주소를 강제 해제(Free)합니다.]
지지지직-!
도살자의 온몸이 텔레비전 화면의 노이즈처럼 잘게 쪼개지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크, 크르르……!"
괴물은 단 한 번의 유효한 공격도 해보지 못한 채, 자신이 가진 압도적인 무력을 써보지도 못하고 물리 법칙의 모순 속에서 허무하게 바스러져 갔다.
콰아아아-!
마침내 도살자의 거대한 육신이 수억 개의 빛나는 데이터 입자로 변해 사방으로 비산했다.
정면 돌파도, 화려한 스킬 난사도 없었다.
오직 단 몇 줄의 코드 조작만으로 레벨 30의 보스 몬스터가 완전히 '소거'된 것이다. 옆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백설하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크게 확장되었다.
"이게…… 무슨……."
태현은 그녀의 감상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허공에 흩어지는 백색의 데이터 입자들. 그것들이 바로 그가 갈망하던 최적화 리소스였다.
"수집(Collect)."
태현이 손을 뻗자, 흩어지던 광원들이 일제히 그의 가슴속으로 빨려 들기 시작했다.
차가웠던 심장 부근이 일순간 따뜻해지며, 온몸의 혈관을 타고 맑은 에너지가 퍼져 나갔다. 타들어 가던 뉴런들이 빠르게 재생되는 감각이 뒤따랐다.
[시스템: 고위험 관리자 개체 소멸 확인.] [최적화 리소스(Optimize Resource) 획득!] [뇌의 메모리 누수가 일부 복구됩니다.] [영구 수명 증가: +15일]
수명이 늘어났다.
태현의 안색에 비로소 약간의 생기가 돌았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알림: 처치 경험치가 정규 수치를 초과하였습니다.] [레벨이 상승합니다: Lv. 2 -> Lv. 15]
"레벨 15라."
태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포칼립스 초기 단계에서 레벨 15는 지나치게 눈에 띄는 수치였다. 시스템 관리자나 감시 프로그램의 역추적을 받을 위험이 비약적으로 상승한다.
그는 즉시 콘솔을 열어 자신의 프로필 데이터를 해킹했다.
`Modify: Player_01.Display_Level = 5`
외부에 노출되는 레벨 표기값을 강제로 낮추는 '스푸핑(Spoofing)' 작업이었다.
이제 다른 각성자나 시스템 프레임이 그를 스캔하더라도, 그의 레벨은 평범한 5로 보일 터였다. 철저하게 실력을 은폐하고 변수를 통제하는 것. 그것이 천재 개발자 강태현의 생존 방식이었다.
그가 만족스러운 듯 콘솔창을 닫으려던 찰나였다.
탁. 탁. 탁.
등 뒤의 어두운 복도 깊은 곳에서, 기분 나쁠 정도로 규칙적인 구두 굽 소리가 들려왔다.
태현의 신형이 즉각적으로 굳어졌다.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듯, 어둠 속에서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내는 온통 검은색으로 물든 기괴한 예복을 입고 있었다. 예복의 깃과 소매에는 붉은색 실로 정교하게 사슬 문양이 자수가 놓여 있었다.
소스코드 교단(Source Code Cult)의 집행자였다.
"아아, 신성한 복음의 흐름을 무단으로 오염시키는 에러 유발자를 여기서 만나는군요."
사내의 목소리는 지극히 정중했으나, 그 기저에는 억누를 수 없는 가학적인 광기가 서려 있었다.
그는 품속에서 기괴하게 생긴 장치를 꺼내 들었다.
수십 개의 톱니바퀴가 정밀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황동빛 열쇠 모양의 무기였다. 장치가 회전할 때마다 날카로운 금속성 마찰음이 복도에 울려 퍼졌다.
사내의 시선이 바닥에 쓰러진 채 숨을 헐떡이는 백설하에게 고정되었다.
"에러를 품은 불량 객체는 즉시 회수하여 제단의 거름으로 사용하겠습니다."
철컥-!
집행자가 열쇠 모양의 무기를 들어 올렸다.
그 총구와도 같은 끝부분이 정확히 백설하의 미간을 조준했다. 장치의 중심부에서 붉은빛의 마력 충전이 시작되며, 공간의 데이터 압력이 다시 한번 요동치기 시작했다.
"꼼짝 마십시오. 움직이는 순간, 이 객체의 두뇌 포인터를 완전히 파괴하겠습니다."
사내의 비틀린 미소가 어둠 속에서 기괴하게 빛났다.
백설하의 미간에 붉은색 타겟팅 레이저가 선명하게 내려앉았다. 그녀는 이미 마력이 고갈되어 자력으로 피할 수 없는 상태였다.
태현의 주머니 속 손가락이 미세하게 까딱였다.
그의 뇌세포가 새로운 충돌 변수를 계산하기 위해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