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괴수의 포효가 서울 루트 섹터의 하늘을 찢었다.

오스발트의 무너진 잔해를 삼킨 한진우. 그의 육신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피부 아래에서 붉은 픽셀이 암세포처럼 증식했다. 척추가 역방향으로 찢어지며 자라난 네 개의 기계 다리가 지면을 찍었다. 거대한 안구 군집이 태현을 노려보았다.

쿠르릉!

대지가 비명을 지르며 침하했다.

태현은 흔들리는 지면 위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았다. 그의 눈앞에 붉은 시스템 경고등이 점멸했다.

``` +--------------------------------------------------------------+ | [WARNING: SYSTEM UNSTABLE] | | - Object: Han_Jinwoo (Irregular Fusion Detected) | | - Threat Level: ERROR_BEAST (재앙급) | | - 경고: 시스템 메인프레임의 소멸 프로토콜이 폭주합니다. | +--------------------------------------------------------------+ ```

그 아래로 흐르는 붉은 타이머.

[SYSTEM RESET COUNTDOWN: 05:00]

남은 시간은 5분.

그 너머로 비스트의 연산 회로가 메인프레임의 에너지를 무섭게 흡수하는 흐름이 보였다. 푸른색 마나의 줄기가 몬스터의 심장부로 강렬하게 모여들고 있었다.

"태현 씨!"

윤지오가 방패를 치켜들며 외쳤다. 그녀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저 괴물의 연산 출력이 측정 한계를 넘었어요. 이대로 두면 아포칼립스 전체가 리셋돼요!"

백설하 역시 부러진 검을 쥔 채 태현의 앞을 막아섰다.

태현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의 뇌리에서 뉴런이 타들어 가는 찌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개발자 콘솔을 유지하는 대가였다.

그는 건조하게 중얼거렸다.

"데이터 폭주다. 저놈은 지금 메인프레임의 전력을 연산 노출하고 있어. 맵 경계가 붕괴하기 시작한다."

실제로 주변 마천루들이 디지털 연기처럼 허공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영토의 물리적 삭제였다.

태현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허공에 투명한 키보드가 나타났다.

"우선 아군 위치부터 안전 배정한다."

그가 콘솔 창에 명령어를 빠르게 타이핑했다.

``` $ map --allocate --target=Baek_Seolha, Yoon_Ji-oh --zone=SAFE_INDEX_03 ```

지오와 설하의 발밑에 푸른빛의 정방형 격자가 생성되었다.

슈우우웅!

두 사람의 신체가 순간적으로 맵의 가장자리, 공간 붕괴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안전한 인덱스 좌표로 강제 텔레포트되었다.

"어……? 태현 씨!"

윤지오가 당황하며 소리쳤다. 하지만 그녀의 위치는 이미 안전 지대였다.

태현은 혼자 비스트의 정면에 남았다.

괴수가 번뜩이는 안구들을 굴리며 태현을 향해 거대한 앞발을 내리찍었다.

쾅!

지면이 폭발했다. 그러나 태현의 신체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그는 콘솔의 좌표 변환을 통해 가볍게 뒤편으로 회피한 상태였다.

"설하."

태현이 통신 채널을 열었다.

"그동안 네 검술이 무력화되었던 이유를 찾았다. 단순한 저주나 디버프가 아니었어."

설하의 눈동자가 커졌다.

태현은 비스트의 공격을 한 끗 차이로 피하며 화면을 응시했다. 설하의 상태창 깊숙한 곳, 시스템 소스코드의 밑바닥에 오랫동안 방치된 붉은 오류 코드가 보였다.

``` +--------------------------------------------------------------+ | [ERROR LOG: SEGMENTATION FAULT] | | - Target: Baek_Seolha / Active_Skill_Tree | | - Error: Sword_Skill_Address -> 0x00000000 (NULL) | | - 상태: 시스템이 대상을 '존재하지 않는 버그'로 인식 중 | +--------------------------------------------------------------+ ```

"주소값 Null pointer 에러."

태현의 손가락이 잔상을 남기며 움직였다.

"시스템이 네 무기 자체를 버그로 인식해 공격 판정을 삭제했던 거다. 내가 이 주소값을 고유 데이터 세그먼트로 리다이렉팅한다."

``` $ redirect --from=0x00000000 --to=0x7FFF98A2 --permanent ```

탁!

엔터키가 눌리는 순간, 멀리 떨어져 있던 백설하의 부러진 검에서 눈이 멀 것 같은 백색 광휘가 뿜어졌다.

[시스템 오류가 복구되었습니다.] [백설하의 고유 특성: '무결한 검성'의 데이터 세션이 활성화됩니다.]

"……아."

설하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오랫동안 그녀의 영혼을 옥죄던 무겁고 끈적한 사슬이 단번에 끊겨 나간 기분이었다. 검 끝에서 뿜어지는 기세가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날카로웠다.

하지만 비스트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크어어어어!

괴수가 포효하며 사방으로 붉은색 파괴 광선을 발사했다. 조사되는 모든 사물이 데이터 파편으로 분해되는 즉사 판정의 광선이었다.

"아직 이르다."

태현은 공중에 떠돌던 오스발트의 감시용 드론 잔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드론은 시스템 관리자의 눈이었다. 당연히 백도어가 존재할 터였다.

그의 눈에 드론의 내부 포트 정보가 실시간으로 구조화되어 나타났다.

``` +--------------------------------------------------------------+ | [PORT MONITOR] | | - Port 9999: ADMIN_BACKDOOR (Closed) | | - Action: Force Open & Inject 'EMERGENCY_REBOOT_TRIGGER' | +--------------------------------------------------------------+ ```

"열려라."

태현이 포트 9999를 강제로 개방했다. 그리고 그 안에 미리 준비해 둔 '비상 리부트 시스템 강제 트리거' 소스를 주입했다.

위이이이잉-!

공중에 멈춰 있던 오스발트의 드론이 일제히 파란 불빛을 뿜으며 비스트를 향해 전자기파를 방출했다.

[SYSTEM FORCE REBOOT SIGNAL DETECTED]

쿠구구궁!

"크, 크어어억?!"

비스트의 몸이 돌연 딱딱하게 굳어졌다. 전신을 흐르던 붉은 광선이 일시에 꺼졌다.

3초.

강제 리부트로 인해 비스트의 연산 장치가 정지한 시간이었다.

"지오, 설하. 지금이다."

태현이 명령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다. 하지만 그 안에는 이전의 철저한 도구화와는 미묘하게 다른 무게가 실려 있었다.

윤지오가 방패를 앞세우며 돌진했다.

"태현 씨의 분석은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어요. 믿고 갑니다!"

백설하가 그 뒤를 따르며 검을 세웠다.

"당신이 길을 열어준다면, 저는 언제든 그 검이 되겠습니다."

태현은 화면 너머로 두 사람의 움직임을 보았다.

그는 언제나 타인을 '오브젝트'나 '스터브'로만 정의해 왔다. 감정의 개입은 비효율적인 메모리 누수일 뿐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 실시간으로 동기화되어 움직이는 두 사람의 데이터 흐름은 완벽히 일치하고 있었다.

단순한 코드의 정렬이 아니었다. 그것은 서로가 서로를 완전히 신뢰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 극상의 동기화율이었다.

[알림: 아군 개체 간의 동기화율이 100%에 도달했습니다.] [시스템 정의: '우정(Friendship)' 세션이 임시 활성화됩니다.]

태현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

"객체 지향이 아니군. 진짜 동기화다."

그는 더 이상 두 사람을 단순한 도구로 보지 않았다. 그들은 이 불합리한 시스템을 함께 해킹해 나갈 진짜 '동료'였다.

비스트가 비명횡사하기 직전의 상태에서 깨어나며, 몸 주위에 두터운 반투명 장벽을 둘렀다.

오스발트의 데이터가 융합된 절대 물리 면역 배리어였다. 어떠한 물리적 충격도 무효화하는 사기적인 방어 기전이었다.

"소용없다."

태현은 품 안에서 한진우가 소지하고 있던 기밀문서 아이템을 꺼냈다.

'루트 세션 마스터 권한 토큰 분할 데이터'.

그가 이 데이터를 콘솔 창에 업로드했다.

``` $ mount --device=/dev/token_fragment --target=/root $ decrypt --target=Absolute_Physical_Immunity_Barrier ```

[마스터 권한 인증 성공.] [대상 스킬의 세션을 강제 종료합니다.]

파아아앙!

비스트를 감싸고 있던 절대 물리 면역 배리어가 허무하게 깨져 나갔다.

"이, 이 벌레 같은 놈들이……!"

괴물의 입에서 한진우의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광분한 비스트가 전방을 향해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의 초거대 기가 마나 브레스를 준비했다. 하늘 전체가 보라색 마나 이펙트로 뒤덮였다. 서울 하늘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듯한 시각 효과가 연출되었다.

보통의 플레이어라면 절망했을 압도적인 위용이었다.

태현은 그 광경을 보며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화려하기만 하군. 메모리 낭비다."

그는 허공의 화면에서 비스트의 'Manna_Breath.exe' 프로세스를 마우스로 드래그하듯 지정했다.

그리고 그대로 우클릭을 눌렀다.

[Delete] -> [Confirm]

``` $ taskkill /f /im Manna_Breath.exe ```

스우우우욱.

서울 하늘을 가득 메웠던 어마무시한 마나의 폭풍이, 마치 휴지통에 버려진 텍스트 파일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어떠한 폭발음도, 여파도 없었다.

지극히 고요하고 완벽한 무력화였다.

"뭐, 뭐야?! 내 마나가…… 어디로 간 거지?!"

비스트가 경악하며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 틈을 타, 설하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스샤아아아악!

주소값이 복구된 설하의 검 끝에서 수백 개의 백색 검기가 비스트의 거대한 육신을 잘게 조각내기 시작했다.

푸화학!

검은 피와 붉은 픽셀이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서울 전역의 하늘에 거대한 시스템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 +--------------------------------------------------------------+ | [NOTICE: SYSTEM SALVAGE IN PROGRESS] | | - Developer: Kang_Taehyun (강태현) | | - Status: Mainframe Debugging 90% Complete | | - Message: 서울 루트 섹터의 붕괴를 저지하고 구원을 개시합니다. | +--------------------------------------------------------------+ ```

서울의 생존자들, 그리고 저항군들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황폐해진 도심 곳곳에서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시작되었다.

"강태현……? 그 천재 개발자가 메인프레임을 구원하러 간다고?" "소멸 프로토콜이 멈추고 있어!"

공개 승리 중계창이 선명히 점등되며, 태현의 이름이 세상의 중심에 우뚝 섰음을 선포하고 있었다.

비스트는 온몸이 난도질당한 채 바닥에 쓰러졌다.

"크우우으…… 이럴 수는 없다…… 내가 신의 도구이거늘……!"

한진우의 목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하지만 태현은 방심하지 않았다. 그의 눈은 비스트의 심장부를 관통하고 있는 붉은 코어의 수치를 읽고 있었다.

[Core Temperature: 1,200°C -> 4,500°C (Rapid Rise)]

괴수의 심장이 기괴하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투명하던 코어가 검붉은 용암처럼 끓어올랐다.

삐이이이이이-!

고막을 찢는 듯한 경고음이 시스템 전체에 울려 퍼졌다.

``` +--------------------------------------------------------------+ | [CRITICAL WARNING: CORE MELTDOWN] | | - Status: Beast Heart Thermal Runaway | | - Range: Radius 50km (Seoul Root Sector Entirety) | | - Time Left: 00:30 | +--------------------------------------------------------------+ ```

[경고: 대상이 전역 자폭 프로토콜을 활성화했습니다. 30초 후 서울 루트 섹터 반경 50km 이내가 완전 소멸합니다.]

"하하하! 같이 죽자! 이 세계와 함께 포맷되는 거다!"

한진우의 광기 어린 비명이 무너져 내리는 서울의 밤하늘을 가득 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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