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등 뒤의 하늘이 붉게 갈라졌다.

아크델리를 지배하는 수호성, ‘태양의 찬란한 지배자’가 지상의 대정 수호벽을 완전히 해제했다. 차단벽이 사라진 고도 위로 거대한 균열이 벌어졌다. 지구 대기 지층을 단숨에 관통하는 백색의 마도 거소 광선이 수직으로 내리꽂혔다.

쿠르릉, 지면이 울며 가라앉았다. 광선이 닿은 초고층 빌딩의 상층부가 형체도 없이 증발했다. 열풍이 사방으로 비산하며 아스팔트를 액체처럼 녹여 내렸다. 호흡할 때마다 허파가 타들어 가는 감각이 전해졌다.

"……으윽."

연우가 가슴을 움켜쥐었다.

오른팔의 핏줄이 검붉게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피부 표면이 단단한 가죽처럼 변하며 비늘 형상의 각질이 돋아났다. 삼켜버린 성좌들의 격이 영혼의 그릇을 찢고 솟구치려 했다. 정신적 신성 오염의 증상이었다. 이성이 통제력을 잃고 피를 갈구하는 마수의 본능이 뇌수를 지배하려 했다.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한연우."

엘리시아가 다가왔다. 늘 감정이 박제되어 있던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에 얇은 긴장의 기류가 흘렀다. 그녀는 품 안에서 묵직한 물건을 꺼냈다.

수수께끼의 흑색 구체 유물이었다.

구체의 표면에는 수많은 미세한 균열 흔적들이 가득했다. 가느다란 실금 같은 틈새 사이로 기괴한 마력이 불규칙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깨질 듯 위태로운 형태였다. 엘리시아는 망설임 없이 단검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그었다. 적색의 선혈이 갈라진 흑색 구체의 틈새로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피가 스며들자 흑색 구체가 기괴한 공명음을 내며 진동했다.

웅.

구체에서 뿜어져 나온 차가운 냉기가 연우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들끓던 검붉은 마기가 그 냉기에 부딪혀 급격히 수축했다. 비늘처럼 돋아나던 피부가 서서히 가라앉으며 본래의 살결로 돌아왔다. 폭주하던 심장 박동이 평정을 되찾았다.

"버텨요."

엘리시아가 구체를 다시 품에 넣으며 말했다. 그녀의 입술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연우는 아무런 대답 없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감각이 돌아왔다. 아직 사냥을 끝낼 수 있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무너진 지하철 출구 잔해에서 들려왔다.

"살려…… 다오……."

다리가 잘려 나간 백도훈이 진흙과 피로 범벅이 된 채 기어 나오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 끝은 닳아 없어져 뼈가 보였다. 평생 법을 들이대며 타인을 난도질하던 자의 비참한 말로였다.

그의 앞에 군화 한 켤레가 멈춰 섰다.

세무 특별 수사관 서하진이었다. 그녀의 뒤로는 무장한 사법 수사관들이 철저히 대형을 유지하며 포위망을 좁히고 있었다. 서하진의 손에는 피 묻은 가죽 서류철이 들려 있었다.

"백도훈 검사."

서하진의 목소리는 법전망처럼 차가웠다.

"당신이 작성한 수사 기록 기안서를 확보했다."

백도훈이 피 섞인 침을 뱉으며 서하진을 올려다보았다.

"그게…… 무슨 상관이냐. 난 성좌의 화신들을…… 비호하는 대리인이다. 헌법 제12조…… 성좌 가호자 특별 면책 조항에 따라…… 국가 사법 기관은 나를 수색하거나 처벌할 수 없다……!"

"틀렸다."

서하진이 서류 한 장을 꺼내 백도훈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네가 직접 기안하고 합의한 조항이다. ‘성좌 가호자 특별 면책 제12조의 이중 예외 위하 조항’."

백도훈의 동공이 급격히 수축했다.

"성좌와 직접 결탁하여 국가의 주권을 훼손하거나, 국가 전복에 준하는 신성 강림 의식을 공조한 자는 가호 여부와 무관하게 즉결 기각 처벌 대상으로 분류한다. 또한, 모든 사법 면책 권한을 영구히 박탈한다."

서하진이 차가운 눈으로 기안서의 문구를 읽어 내려갔다.

"이 독소 조항은 네가 한연우 씨를 탈세 및 성좌 반역죄로 묶어 즉결 처형하기 위해 억지로 끼워 넣은 법안이지."

백도훈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아, 아니야…… 그건……!"

"네가 만든 법이다, 백도훈."

서하진이 허리춤에서 권총 형태의 법정 마도 총검을 뽑아 들었다. 총구 끝에서 푸른빛의 사법 마력이 실체화되어 날카로운 칼날의 형상을 이루었다.

"법에 의해 살았으니, 네가 만든 법의 올가미에 걸려 죽어라."

"잠깐! 난 검사다! 사법 길드 ‘천상의 정의’ 총책임자야! 나한테 이럴 수는……!"

서하진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겼다.

서걱.

마도 총검의 칼날이 백도훈의 심장 정확히 중앙을 꿰뚫었다. 비명은 없었다. 사법 마력이 그의 체내로 흘러 들어가 영혼의 마력 회로를 안쪽에서부터 완벽하게 파괴했다. 백도훈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빛을 잃고 흐려졌다.

그는 자신이 설계한 차가운 법의 족쇄에 묶인 채, 숨을 거두었다.

연우는 그 광경을 무감각하게 지켜보았다. 사냥개가 사냥감을 처리하는 법을 구경하는 일은 흥미롭지 않았다. 이제 진짜 사냥감의 목을 벨 차례였다.

"최태건은 어디 있지?"

연우의 질문에 서하진이 총검을 거두며 서쪽을 가리켰다.

"시청 세무 조정 위원회 중심지다. 그곳 지하에 태양의 제단을 구축했다. 아크델리 전체의 마력을 끌어모으고 있어."

"가자."

연우가 신형을 튕겼다. 신성 오염을 억제한 육체는 가벼웠다. 엘리시아가 그 뒤를 소리 없이 따랐다.

***

아크델리 시청 세무 조정 위원회 건물은 거대한 요새와 같았다.

황금빛 대리석으로 지어진 외벽은 성좌의 가호 결계로 덮여 있었다. 일반적인 마법이나 물리적 타격으로는 흠집조차 낼 수 없는 방어 등급이었다. 하지만 연우에게는 그저 얇은 종이막에 불과했다.

연우가 허공으로 도약했다.

그의 오른발 끝에 찬탈한 심판의 황금 저울의 격이 염화의 형태로 휘감겼다. 붉고 푸른 불꽃이 나선의 궤적을 그리며 압축되었다.

"열려라."

연우가 지붕을 향해 오른발을 내질렀다.

콰아아앙!

의성어 없는 거대한 충격파가 대지를 뒤흔들었다. 염화의 발길질이 완벽한 반원형의 아크를 그리며 위원회 건물의 돔형 지붕을 가르고 들어갔다. 수 미터 두께의 특수 방어벽이 두부처럼 잘려 나갔다.

연우는 무너져 내리는 콘크리트 잔해와 함께 중심 바닥으로 수직 하강했다.

쿵!

지면에 착지하는 순간, 거대한 먼지 구름이 일었다.

그곳은 세무 조정 위원회의 호화로운 중앙 법정이었다. 금으로 도금된 기둥들과 붉은 비단으로 장식된 연단들이 사치스러움을 뽐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위원회의 고위 행정관들과 성좌를 추종하는 길드 간부들이었다.

그들은 갑작스러운 침입자에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그들의 손에는 인간 제물들의 명단과 자산 압류 서류들이 들려 있었다.

"이단자다!"

"시스템 이단자가 결계를 깨고 들어왔다!"

행정관 하나가 연단 위에서 소리쳤다.

"무례한 가축 놈이 감히 성좌의 신성한 법정에 발을 들이밀다니! 이곳은 수호성께서 비호하시는……!"

연우의 손가락이 가볍게 퉁겨졌다.

서걱.

말을 하던 행정관의 목이 그대로 사선으로 잘려 나갔다. 분수처럼 뿜어지는 선혈이 황금빛 연단을 붉게 물들였다. 머리통이 바닥을 굴렀다.

"말이 많다."

연우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성좌들의 가축 사육장에서 행정을 보던 놈들이니, 도축되어도 할 말은 없겠지."

수백 명의 행정관들이 사색이 되어 무기를 꺼내 들었다. 그들은 성좌에게 받은 하급 권능을 발동하려 했다. 허공에 황금빛 마법진들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연우의 속도가 더 빨랐다.

연우는 신형을 가볍게 기울였다. 그의 손끝이 허공을 갈랐다. 사냥개의 발톱이 보이지 않는 궤적을 그리며 공간을 참수했다.

스걱! 서걱!

단 두 번의 휘두름이었다.

전방에 서 있던 행정관 수십 명의 상체가 비스듬히 미끄러지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단면에서 쏟아지는 장기와 피가 호화 대리석 바닥을 단숨에 늪으로 만들었다. 자비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들은 인간을 등급별로 분류해 성좌의 제물로 바치던 도살자들의 조력자였다. 청소는 철저해야 했다.

"으아악! 살려줘!"

"수호성님! 저희를 구원하소서!"

그들이 뒤늦게 울부짖으며 신을 찾았다. 하지만 하늘의 신은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았다.

연우는 피의 폭풍 속을 걸어갔다. 그의 뒤로 엘리시아와 서하진이 걸어 들어왔다. 엘리시아의 무표정한 눈에 비친 법정은 이미 지옥과 다름없었다. 사치를 자랑하던 세무 조정 위원회의 법정은, 이제 인간의 피로 씻겨 나가는 단죄의 도살장이 되어 있었다.

"길을 열었다."

연우가 전방의 거대한 철문을 가리켰다. 철문 너머에서 수천 도의 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서하진. 남은 쓰레기들을 정리해라."

"세법 위반 및 성좌 공조 혐의로 전원 즉결 처분합니다."

서하진이 차갑게 답하며 총검을 다잡았다. 그녀의 수사관들이 비명을 지르는 행정관들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연우는 엘리시아와 함께 철문을 밀쳤다.

쿠구구구.

철문이 열리며 붉은 광염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곳은 시청 지하에 구축된 태양의 제단이었다. 거대한 원형 공동의 중심에는 끓어오르는 황금빛 용암 가마솥이 자리 잡고 있었다. 가마솥의 내부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는 아크델리의 모든 마력을 빨아들여 응축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마솥의 상공에, 한 남자가 부유하고 있었다.

최태건이었다.

그는 상반신을 완전히 탈의한 반라의 상태였다. 그의 피부 위로 황금빛의 신성 기하학 문양들이 기괴하게 각인되어 빛나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흰자위는 검게 물들었고, 눈동자는 타오르는 태양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한연우……."

최태건의 목소리가 다중의 음성으로 겹쳐 울렸다. 그것은 인간의 성대가 아니라, 성좌 '태양의 찬란한 지배자' 본체의 영혼이 그의 육신과 완벽하게 합치되어 내는 신성한 파동이었다.

그의 전신에서 수천 도의 백색 광염이 뿜어져 나왔다. 주변의 암석들이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흘러내렸다.

최태건이 연우를 내려다보며 잔혹하게 미소 지었다. 그의 손끝에서 태양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백색의 화염이 구를 그리며 응축되었다.

지름 수 미터에 달하는 화염구가 허공을 가르며 날아왔다. 열기로 인해 대기가 굴절되어 시야가 흐려졌다. 연우는 피하지 않았다. 오른팔의 근육을 팽창시키며 왼손으로 오른 손목을 잡았다.

찬탈한 심판의 황금 저울의 격을 끌어올렸다.

오른손 끝에서 반투명한 저울의 형상이 실체화되었다. 날아오던 백색 화염이 저울의 한쪽 접시에 닿는 순간, 역학적 궤적을 잃고 비스듬히 꺾였다. 화염은 연우의 뺨을 스쳐 지나가 뒤편의 대리석 기둥을 증발시켰다.

열풍에 머리칼이 그을렸다. 단백질이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겨우 그 정도인가."

연우가 바닥을 박찼다.

다리에 힘이 실리며 디디고 있던 지면이 함몰되었다. 일직선의 궤적으로 최태건의 턱밑까지 쇄도했다. 오른손 끝에 검붉은 마력을 집중시켰다. 사냥개의 발톱이 허공을 갈랐다.

최태건의 신형이 뒤로 꺾였다.

동시에 그의 양손에서 뿜어져 나온 광염의 채찍이 연우의 어깨를 감쌌다. 가죽이 타들어 가며 붉은 피가 끓어올랐다. 연우는 신음조차 흘리지 않은 채 왼손을 뻗어 최태건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손가락 끝이 황금빛 피부를 뚫고 들어갔다.

최태건의 눈동자가 분노로 물들었다. 그의 체내에서 폭발적인 신성이 솟구쳤다. 연우의 손을 밀쳐내는 충격파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연우는 바닥으로 밀려나며 가볍게 착지했다. 어깨의 상처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벌레 같은 놈이."

최태건의 목소리가 사방의 벽을 흔들었다.

"신성을 다루는 법조차 모르는 사냥개에 불과하군. 내가 이 몸을 바쳐 얻은 격은 네가 훔친 조각들과는 궤를 달리한다."

최태건이 가마솥을 향해 양손을 뻗었다.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황금빛 액체가 허공으로 솟구쳐 그를 감쌌다. 거대한 황금빛 고치가 형성되었다. 고치 표면으로 아크델리 전역에서 수확된 영혼들의 비명이 시각적인 파동이 되어 흘러갔다.

그것은 단순한 강림이 아니었다. 이미 지상에 내려와 있던 '태양의 찬란한 지배자'의 의식 전체를 최태건의 육신에 영구히 고정하는 의식이었다.

"하진."

연우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외쳤다.

"법정의 제단을 파괴해라. 연결 통로를 끊어야 한다."

"이미 늦었다, 이단자."

고치 내부에서 최태건의 조롱 섞인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 제단의 기단은 아크델리 시청의 세무 행정망과 연동되어 있다. 이곳을 파괴하는 순간, 아크델리 전체의 구역 결계가 폭발한다. 십만 명의 가축들이 한 번에 재가 된다는 뜻이지."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연우의 영혼 깊은 곳에서 격렬한 거부 반응이 일어났다.

심장이 터질 듯이 요동쳤다. 찬탈했던 성좌들의 신핵이 최태건이 방출하는 백색 광염과 공명하기 시작했다. 찬탈한 힘들이 연우의 통제를 벗어나 외부로 빠져나가려 요동쳤다. 사냥개의 발톱이 스스로의 영혼을 찢는 감각이었다.

입안 가득 비릿한 혈향이 퍼졌다. 연우가 바닥에 검붉은 피를 토해냈다.

"한연우 씨!"

서하진이 다가오려 했으나, 제단 주변을 감싼 열기로 인해 발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군화 밑창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엘리시아가 흑색 구체를 쥐고 연우의 곁으로 다가섰다. 하지만 구체의 미세한 균열들은 이미 붉은 피로 포화 상태였다. 더 이상 신성 오염을 억제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황금빛 고치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 틈새로 흘러나오는 것은 단순한 열기가 아니었다. 존재 자체만으로 주변의 공간을 왜곡시키는 절대적인 격압이었다. 마침내 고치가 완전히 깨져 나갔다.

그 안에서 드러난 최태건의 모습에 엘리시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사지가 기괴하게 늘어난 황금빛 거인의 형상이었다. 그의 등 뒤로 타오르는 백색의 거대한 불꽃 날개가 돋아나 있었다. 그의 얼굴 중앙에는 눈동자가 아닌, 지옥의 심연처럼 타오르는 검은 태양이 박혀 있었다.

진정한 성좌의 본체가, 지상의 육신을 매개로 완전한 강림을 마친 순간이었다.

"사냥개여."

최태건, 아니 태양의 찬란한 지배자가 거대한 손을 내밀었다.

"네가 삼킨 내 권속들의 힘을 돌려받을 시간이다."

동시에 연우의 오른팔이 기괴한 각도로 꺾였다. 찬탈했던 신성들이 그의 피부를 뚫고 빛의 줄기가 되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권능의 역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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